#092화
“참견해서 죄송하지만, 이런 괴롭힘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거예요.”
아이돌 그룹 내의 불화나 편 가르기는 흔한 일이다.
개성 강한 이들이 같이 모여 살고 일하고 있으니, 안 좋은 일이 없을 수가 없다.
평범한 사람 몇 명만 사무실 안에 넣어둬도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는데, 항상 붙어 다니는 아이돌들이 오죽할까.
문제는 그 기류를 조정하려는 멤버들의 의지와 기획사의 역량이다.
‘강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
이 아이돌 그룹은 데뷔한 지 2년이 흘렀다.
그동안 눈에 띄는 업적은 없었다.
이제 고작 2년 차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지만, 회사와 멤버들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초조하고 불안할 게 분명하다.
힘든 나날 속에서 위안이 되는 지표도 없으니, 저마다 여러 상처와 고통이 마음에 새겨졌을 것이다.
“불안하고 힘든 건 이해하지만, 그 분노를 사람에게 표출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 멤버들은 마음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렸으리라.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다.
겨우 말 따위로 그 칼날이 무뎌지지는 않겠지만, 성필은 자신의 충고가 그녀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우나 고우나 그룹 멤버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함께 지낼 거잖아요.”
“…….”
빵을 사 왔던 멤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근데 매니저는 어딨고 그룹 멤버가 먹을 걸 사 와요. 빵 싫으면 제가 사 올…….”
“멤버 아닌데요.”
“네?”
차 안에 있던 아이돌이 내던지듯 말했다.
“저분 멤버 아니라고요.”
“……그럼?”
괴롭힘을 당한다고 생각했던 멤버, 아니.
여자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스타일리스트예요…….”
“……아.”
성필은 무릎을 탁 치고 허허 웃었다.
“죄송합니다. 오해했네요. 그, 그래도 스타일리스트도 동료잖아요. 이러는 건…….”
“알겠어요.”
리더로 보이는 아이돌이 ‘왜 남의 집 일에 참견해?’란 어투로 성필의 말을 끊었다.
뻘쭘했던 성필은 슬슬 뒤로 빠졌다.
그러면서 스타일리스트에게 작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 스타일리스트도 크게 보면 매니저지만. 심부름까지 하는 건 정상이 아니에요. 선배나 그룹 담당 매니저한테 말씀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네.”
스타일리스트는 눈가를 닦으면서 겨우 웃어 보였다.
눈물과 화장이 뭉치고 닦여나갔다.
그 모습이 더 처량해 보였다.
* * *
음악 방송 ‘뮤직 스테이션’.
그 스태프인 엄효원 FD(Floor Director)는 마지막으로 무대를 바닥을 꼼꼼히 확인했다. 그 뒤 한숨을 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끝냈냐?”
뮤직 스테이션 메인 PD, 구상준이 엄효원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네. 돌출부 없는 거 다 확인 끝냈어요.”
“에휴, 하필 거기 판이 엇나가 있을 게 뭐냐.”
어제 무대에 섰던 아이돌 멤버 중 한 명이 녹화 중 바닥의 돌출부에 걸려 넘어졌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으나, 무대 관리가 미흡했던 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 아이돌의 기획사 관계자들은 물론, 그때 지켜보고 있던 팬들에게도 거친 항의를 받아야 했다.
물론 메인 PD인 구상준이 아니라 엄효원이 받았단 것이다.
“담배나 피우러 가자.”
둘은 흡연 구역으로 가서 담배를 물었다.
구상준이 불을 붙이려는 순간.
“안녕하십니까 PD님!”
갑자기 성필이 튀어나와 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곁에 있던 엄효원은 깜짝 놀라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정말 ‘갑자기’란 단어가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흡연 구역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유령처럼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어, 박 팀장. 오랜만이야.”
“하하, 그동안 잘 지내셨죠?”
“나야 뭐 매번 똑같지.”
하지만 구상준 PD는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성필이 불을 가져다 대자마자 담배를 빨았다.
“엄 FD님 안녕하십니까. 박 이사입니다.”
“아, 예.”
엄효준은 떨떠름하게 성필이 붙여주는 불을 받았다.
“맞다. 너 이사 됐댔지. 들어도 자꾸 까먹네. 회사 이름이…….”
“가로 엔터입니다 PD님.”
“어, 그래. 가로 엔터. 기억난다. 서프레스 있던 곳이지?”
“이야, 역시 기억력이 뛰어나시네요. 맞습니다. 지금 거기서 일하고 있어요.”
“음.”
“저, PD님 제가 드린 곡 들어보셨는지…….”
“어? 아. 그랬었지. 아직 안 들어봤어.”
“하하하, 정말 곡 좋습니다. PD님 귀에도 맞으실 거라고 자신합니다.”
“그래? 박 팀장이…… 이젠 이사랬지.”
“예예.”
“박 이사가 그렇다니 그렇겠지. 시간 나면 들어볼게.”
“감사합니다!”
성필이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구상준과 엄효원이 담배를 다 피우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안녕히 가십쇼!”
뒤에선 성필이 크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고, 엄효원이 이상한 것을 봤다는 듯 물었다.
“저 사람 저번에도 오지 않았어요? 몇 번이나 왔었는데 오늘도…….”
“어, 그치. 자주 오잖아.”
성필은 정말 자주 방송국으로 왔다. 그리고 PD에게 들러붙어 몇 번이고 곡 이야기를 했다.
그게 지겨워진 구상준 PD가 조금 무미건조한 태도를 취하자, 성필은 얼굴만 보여주고 곡 이야기는 하지 않는 전략을 취했다.
그러다가 곡 이야기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질 즈음, 즉 방금 또 곡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몇 번 하면 됐지 수십 번이나 와선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배알도 없나?”
“그러게.”
구상준 PD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또 며칠 뒤.
음방 스태프들의 테이블에 커피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성필이 가져다 둔 것이었다.
엄효준은 커피에 포스트잇으로 붙여진 ‘가로 엔터’란 이름을 보자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이런 하꼬 기획사 이름을 외우게 되네…….’
그래도 커피가 고맙긴 했다.
또 며칠 뒤, 점심 후 팀원들 커피를 사러 밖으로 나갔던 엄효준 FD는 성필과 마주쳤다.
“커피 사러 나오셨어요?”
“예…….”
“제가 방금 사서 가져다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또 마주치네요.”
“아…… 괜찮아요. 저희 팀끼리 마시는…….”
“그럼 디저트라도 제가…….”
“왜요?”
“구 PD님한테는 도움을 많이 받아서요.”
정말, 정말로 속이 뻔히 보이는 답이다.
어차피 성필의 속셈은 소속사 아이돌의 음방 출연일 것이다.
엄효준은 성필의 행동이 마냥 귀찮고 기분이 나빴다.
한두 번이면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잊을 새도 없이 자꾸 찾아오니 불쾌감마저 느껴졌다.
‘아무런 실적도, 팬층도 없는 애들이 들이댈 만한 곳이 아니라고. 케이블이나 노려볼 것이지.’
그리고 또 며칠 뒤.
엄효준은 새벽의 편집실 근처에서 편집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의 업무는 스테이지 현장의 조율이지만, 사실 FD라는 자리도 여러 업무를 겪어보기 위해 자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엄효준의 꿈은 음방의 메인 PD로 올라가는 것이기에, 편집 현장에서도 계속 붙어 있었다.
“슬슬 배고프네.”
편집실에서 나온 구상준 PD가 말했다.
“야식시킬까요?”
“아니. 곧 올 거야.”
“네? 막내 시키셨…….”
“PD님!”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엄효준이 움찔했다.
아니겠지.
지금은 새벽이다.
새벽의 방송국이다.
외부인이 올 수 있을 리가, 심지어 성필이 있을 리가 없…….
“사 왔습니다!”
맞았다.
성필이었다.
엄효준은 이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성필은 양손 가득 야식을 들고 있었다. 구상준은 자연스레 그것을 받으며 말했다.
“박 이사도 먹고 가.”
“앗, 그럴까요?”
스태프들과 성필의 합동 식사가 끝나고, 담배까지 같이 피운 후, 드디어 성필이 돌아갔다.
아침이 가까워질 시각이었다.
“미친 사람이에요?”
구상준과 엄효준은 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누가?”
“그 사람이요. 가로 엔터에 박성필 이사라는 사람요. 대체 뭔 깡이랑 생각으로 수십, 수백 번 계속 여길 오는 거예요?”
“아, 걔.”
구상준 PD가 아무렇지 않단 듯 담뱃재를 털었다.
“너 엡실론 아냐?”
“당연히 알죠. 석세스 엔터 애들이잖아요.”
“걔네 신인일 때 6개 방송사 음방 6주 동안 풀로 활동한 거 알지?”
“그것도 알죠. 뭐, 쌩 신인이 그랬던 게 이상하긴 했는데 곡이 좋기도 했고…….”
“그 그림 걔가 만든 거야.”
“……걔?”
“박성필 이사. 네가 말한 미친 사람.”
엄효원의 머리가 정지했다.
너무 오랫동안 깨어 있어서인지 생각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석세스 엔터는 그때 크지도 않은, 그래. 네가 지금 말하는 가로 엔터랑 비슷한…… 비슷은 아니지. 그래도 그때 석세스 엔터가 더 나았으니까. 어쨌든 하꼬였는데, 박성필이 그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하꼬 기획사 쌩신인 아이돌을…… 6개 음방 풀로 돌린 거요? 어, 어떻게요?”
“어떻게겠냐.”
엄효원은 소름이 돋았다.
설마, 성필은 그 미친 짓거리를 여섯 개 방송국 모두에서 하고 있는 건가?
옛날에도, 또 지금도?
“그래, 미친 짓이지. 그런데 그게 며칠, 몇 주, 몇 달 동안 이어지면 말야. 웬만한 냉혈한이 아니고서야 뭐든 해주고 싶지 않겠냐? 아무리 욕하고 쫓아내도 계속 오면 말야. 무릎까지 꿇고 눈물 펑펑 흘렸는…… 아. 그건 말하면 안 되지.”
구상준 PD의 눈동자 속에 과거가 그려졌다.
수십, 수백 번 거절당하고도 포기하지 않던, 젊었던 성필의 모습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제발 우리 애들 출연시켜주십시오, 부탁입니다…….’라고 했다. 한 번도 아닌 수십 번을.
“민폐잖아요?”
“민폐지. 민폐인데, 그래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잖아.”
“…….”
“물론 지금은 걔도 인맥이랑 커리어가 있으니, 옛날처럼 민폐 짓은 안 해도 되지. 말만 해도 들어주는 음방도 꽤 있을 거야.”
“저희한테는 하잖…….”
“그냥 오는 거야. 내가 톡으로 그만 좀 오라고 하는데도 말을 안 들어.”
“개인적으로 연락까지 하세요?”
“어. 가끔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마셔. 형 동생이야.”
어쩐지 성필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자연스럽다고 했다.
“내가 너보다 더 낮은 직급에 있을 때, 그때 친해졌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어린 마음에 다른 회사 매니저한테 술 먹고 한탄이나 해댔으니. 난 그땐 정말 뭣도 없는 쫄따구였긴 한데.”
구상준이 그렇게 낮은 직급이었을 때라면, 대체 얼마나 오래전이기에?
그리고 그렇게 오래된 인연이라면…….
“죄, 죄송합니다.”
엄효준이 사과했다.
이야기를 전부 들어보니, 구상준과 성필은 그냥 친구였다.
상사의 친구에게 ‘미친 사람’이라고 했으니, 엄청난 실례가 아닐 수 없었다.
“뭘 그래. 객관적으로 봐도 미친 사람이 맞긴 한데.”
구상준은 자꾸 킥킥거리며 ‘미친 사람’이란 말을 반복했다.
“네가 어디까지 험담하나 궁금해서 계속 둬봤어.”
엄효원의 피가 빠르게 식었다. 그런 엄효원을 보며 구상준은 더 신나게 웃었다.
“너 박 이사가 준 곡 들어봤냐?”
“아, 아니요.”
“들어봐. 좋더라.”
그 말은 곧, 가로 엔터의 아이돌이 음방에 출연하는 게 확정이란 뜻이었다.
“다음, 다다음 분기까지 음방 스케줄 잡힌 표 좀 뽑아와.”
“네, 네!”
* * *
“HBS 음방은 스케줄 픽스 됐습니다.”
성필의 무덤덤한 보고에 홍규헌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빨리?”
“네. 곡이 좋으니까 답도 빠르네요.”
“이, 뭔…… 진짜야?”
“네. 문제는 저희 애들 방송이 잡힌 시기에 다른 대형 그룹이 컴백하거나 데뷔하는 겁니다.”
음방 출연이 결정되더라도 나중에 말이 바뀌는 경우는 허다하다.
인기가 많은 그룹이나 가수가 컴백하게 되면, 가장 인지도가 낮은 이들을 쳐내는 것이다.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많다.
출연 일정이 밀리면 그나마 다행이지, 아예 없던 일이 돼버리면 눈물이 아니라 피눈물을 흘려야만 한다.
“하지만 제가 여러 기획사를 통해 알아본 바로는, 저희 애들 데뷔 일정에 영향을 줄 만한 건 없습니다. PD한테도 그렇게 들었고요.”
성필이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토록 확신할 수 있는 건 미래의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필의 머릿속에는 미래에 나타날 온갖 그룹과 뮤지션들의 목록이 들어있다.
비록 정확한 날짜는 몰라도, 무슨 달에 데뷔하는진 알 수 있다.
‘우리 애들의 데뷔를 방해하는 요소는 없다.’
그게 성필이 도출한 결론이었다.
음방 출연은 확정이다!
“……박 이사.”
“네.”
“좀 부끄러운 말인데, 우리 회사 와줘서 고마워.”
“하하, 드디어 제 가치를 아셨네요. 더 감사하셔도 돼요! 이왕이면 월급도 더 올려주고요!”
홍규헌은 생각했다.
‘얘 점점 말투가 리카 닮아가네.’
뭐, 어쨌거나.
“그래. 박 이사가 내 보물이야. 앞으로도 우리 잘해보자.”
“그런 말 들으니까 진짜 부끄럽잖아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자.”
“근데 끝까지 월급 더 주겠단 말은 안 하시네.”
“손 PD, 보고할 거 있댔지?”
진짜 월급 얘기는 안 꺼내네…….
“네. 스타일리스트 팀 선정이 끝났어요. 그리고 뮤비 감독도 성필이가 섭외 끝냈대요.”
“드디어…….”
곡, 안무.
그리고 다음 스테이지.
“스타일링과 뮤비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