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화
리카의 놀람과 동시에, 성필은 조아라의 손목을 잡고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벌을 받듯 벽을 보고 서게 됐다.
뒷모습만으로도 삐친 게 느껴졌다.
“왜 6점이야?”
“여기 매 파트마다 한 사람이 중앙에서고, 다른 사람들은 거리를 살짝 벌리잖아요. 개인 기량을 너무 보여주려는 거 같아서요…….”
리카는 말하면서도 뒤돌아 서 있는 조아라를 흘끔거렸다.
“주, 중앙에 설 때는 군무가 아니라 개인 코레오그래피(안무) 찍는 거 같아요. 안무도 중앙에 선 사람만 약간씩 더 어렵게 변하고요.”
백민정의 곡은 다섯 명의 멤버가 따닥따닥 합을 맞추기보다는, 여러 개로 쪼갠 파트마다 주인공을 두는 스타일이었다.
인원이 적은 그룹의 단점은 퍼포먼스가 제한적이란 것이다.
숫자가 적으니 무대가 비어 보이고, 규모가 있는 퍼포먼스를 할 수 없다.
보조 댄서가 없는 상황에서 백민정이 낸 해답은 ‘시선을 중앙으로 모으는 것’이었다.
한 사람에게만 눈이 모이도록 하여, 5인조의 단점인 무대의 공백을 보이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리카는 그게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군무란 느낌이 아니에요.”
“와…….”
“에헤헤, 감탄할 만큼 제가 똑똑한가요!”
“너 한국어 너무 잘 쓰는 거 아니냐? 거의 한국인이야.”
“우리나라 말!”
일본인이 ‘우리나라‘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니 기묘함이 장난 아니다.
“한국은 우리나라! 일본은 내 나라예요! 그래서 제 안무 평가는 어땠나요!”
“타당한 지적이야.”
폼으로 KS엔터 데뷔조에 근접했던 게 아니다.
“저는 9점이요.”
의견을 낸 건 백설하였다. 그녀가 말하자마자 조아라의 어깨가 기쁜 듯 떨려왔다.
“개성이 드러나요. 가사에 안무를 맞춘 게 느껴져요. 매 순간이 포인트 안무, 하이라이트 같아요. 예뻐요.”
리카의 의견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백설하는 말하면서도 리카에게 미안해하는 듯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이제 아예 백설하의 버릇이 된 행동이다.
고통스러운 연습생 생활 속, 멤버들을 자주 위로해주다 보니 손에 익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멋져요.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르겠지만, 첫인상으로는 가장 좋았어요.”
“타당한 의견이야.”
다음은 장하양이었다.
그녀는 성필의 시선을 받더니 아하하, 낮게 웃었다.
“으음, 7점? 8점? 잘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시안을 여러 개 받았다.
시안을 평가하라고 할 때마다 장하양은 항상 애매한 점수를 매겼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장하양은 멤버들의 평가에 평균값을 주고 있다. 본인의 줏대가 없다기보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했다.
“하양아. 솔직하게 말해도 돼. 설마 아라가 숙소 가서 너 때리기라도 하겠어?”
“아라는 저밖에 안 때려요!”
“조아라 너 리카 때렸어?!”
“아, 아니에요! 자, 장난으로…….”
학교 폭력 가해자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리카. 자세하게 묘사해봐. 아라가 어떻게 했는데?”
“에잇!”
리카가 성필의 정수리에 턱을 올리고 아래로 힘을 주었다.
두피 마사지 받는 기분이다.
“이러케요!”
“시원하구만.”
“어깨도 주물러드릴까요?”
“아니. 하양아, 그냥 네 첫인상을 말하면 돼. 점수가 어색하면 괜찮다, 좋다, 그럭저럭, 이런 말이어도 돼.”
“으음…… 그럼 적당하다?”
그냥 줏대가 없는 건가?
그러고 보니 장하양을 아이돌의 길로 설득하려고 했을 때,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아이돌에 대해서 잘 몰라요. 제가 연습생 되면 이사님도 답답하실걸요?’
확실히 장하양은 원래 아이돌을 꿈꾸었던 것도 아니니, 아이돌에 관한 지식이 모자랄 것이다.
리카나 신아름처럼 아이돌에 꿈을 두지도.
백설하처럼 보컬에 관한 지식이 뛰어나지도.
조아라처럼 댄스에 열정이 있지도 않다.
‘혹시 하양이는 자기가 의견을 낸다는 게 부담스러운 건가?’
다른 아이들처럼 거창한 꿈이나 실력이 없음에도 감히 시안을 평가한다는 게, 장하양에게는 부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성필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장하양이 아이돌에 애착을 쌓아가야만 했다.
“알겠어. 시안은 많이 보고 최대한 고민해 봐. 난 네가 노래는 당연하고 춤에도 애착을 가졌으면 좋겠어. 이건 네 곡이고 네 노래고 네 춤이야.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의미가 줄어들잖아.”
“넵.”
“좋아. 하양이의 평가는 ‘적당하다’고. 마지막으로 아름이.”
“왜 제가 마지막이에요?”
“어?”
“왜 제가 마지막이냐구요.”
“나는 제일 맛있는 건 가장 나중에 먹는 성격이거든.”
“그럼 아타시(저)는 가장 맛없는 반찬인가요?!”
“난 맛있는 걸 5등분해서 가장 처음에 먹고 중간중간 먹으면서 마지막에 한입으로 먹어.”
“뭐라는 거예요.”
신아름이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이상한 태클을 걸어오기에 순발력을 발휘해서 비유를 들었건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다지 좋은 비유가 아니었다.
“물어보는 순서에 의미가 있나 뭐. 그냥 우연히 네가 마지막이었던 거지. 그래서 넌 어때?”
“저는 10점.”
벽을 보고 서 있던 조아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네요.”
“어떤 점이?”
“개인 기량이 명확히 드러난다는 점이요.”
백설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유였다. 백설하는 개성이 드러나기에 좋다고 했지만, 신아름은 기량이 드러나서 좋다고 했다.
다르게 말하면 본인이 눈에 띌 수 있으니 좋다, 그런 뜻이다.
합을 완벽히 맞춘 군무라면, 개인은 묻히는 감이 있으니까.
“이기적인 의견이네.”
“누구든 눈에 띄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요.”
“아타시(나)는, 아, 으, 나는…….”
“리카 요즘 왜 한국어 쓰려고 해?”
“그으, 그냥요.”
신아름이 ‘왜 한국어 안 쓰냐’고 핀잔을 주어서 그렇다. 하지만 그런 말을 성필에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모두가 합을 맞추는 군무가 더 좋은데…….”
“뭐?”
“이, 이것도 좋아! 나는 그렇다구…….”
리카는 개인 기량이 돋보이기보다 칼군무를 선호하는 듯했다.
그녀는 모두가 만들어가는 곡을 원했다.
하지만 이미 결판이 나버렸다.
신아름은 백민정의 시안에 10점을, 백설하는 9점을, 그리고 조아라는 볼 것도 없이 10점을 줄 것이다.
역대 시안들 중에서 최고점이다.
“일단 다들 의견 알겠어. 이 시안이 지금까지 것들 중에선 점수가 가장 높네.”
성필은 수첩에 메모를 마친 뒤 일어났다.
“너희들 의견은 시안 회의 때 다 반영될 거야. 나중에 날짜 알려줄 테니까, 오고 싶으면 와도 괜찮아. 그때 너희들 의견 말해줘.”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벽을 보고 있는 조아라만 빼고.
“아저씨 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요.”
“미안. 깜빡했다.”
“…….”
“너는 10점이지?”
“네!”
역시.
* * *
시안 중간 평가에서도, 역시나 멤버들은 백민정의 시안을 1순위로 찍었다.
마침내 모든 시안이 도착한 최종 평가에서도 그 시안이 최고점을 얻었다.
리카도 계속된 신아름과 조아라의 설득에 의견을 바꾸었는지, 최종 평가 때는 8점을 주었다.
첫인상 점수보다 무려 2점이나 오른 것이다.
“자, 시작해보자.”
최종 시안 결정 회의.
가로 엔터의 전원이 모였다.
특별히 정지음까지 참석했다.
안무란 곡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작곡가의 생각과 맞아야 표현력이 극대화될 수 있다.
“먼저 이거.”
시안이 차례로 프로젝트에 띄워졌다.
저마다 시안의 장단점을 비교해가며 감상했다.
마침내 모든 시안의 감상이 끝난 뒤, 각자 의견을 교환하고 투표를 진행했다.
가로 엔터의 중대한 결정은 투표를 거치긴 해도 다수결이 아니었다.
홍규헌이 판단할 때의 참고 자료에 불과했다.
“어디 보자.”
홍규헌은 결과를 보고 선언했다.
“시안 3번. 백민정 안무가의 시안이 최다 득표야. 나도 이게 가장 좋은 거 같아. 2일 동안 시간 더 줄 테니까, 각자 더 생각해봐. 다음에는 정말 최종 결정이야.”
이틀 뒤에도 변화는 없었다.
아니, 만장일치가 나온 게 변화라면 변화일까.
홍규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모두를 보았다.
“의견을 바꾼 사람들. 혹시 내 눈치 본 거 아니지?”
한구인과 정지음이 고개를 저었다.
비밀 투표의 원칙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저번 회의를 끝낸 뒤 다 같이 의견을 주고받으니, 이미 결과가 밝혀진 것이나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알겠어. 내 결정은 내일 알려줄게.”
“네? 바로 결정하는 거 아니었나요?”
민경섭은 몸이 단 듯 물었다.
데뷔곡 ‘아니’는 완성 직전이다.
시안도 빨리 결정해야 춤의 디테일을 손보고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곡과 안무가 나오면, 그다음 작업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루라도 빨리 스타일링이랑 뮤비 작업으로 옮겨야 할 거 같은데요.”
민경섭은 조급했다.
데뷔까지는 몇 달이나 남았음에도 말이다.
그건 다른 이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신중히 생각해야지.”
“……알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다들 나가려 할 때, 홍규헌이 한구인과 성필만을 남겼다.
“한 이사. BG인베스트먼트에 담당자 보낼 생각 있냐고 연락해봐.”
“알겠습니다.”
BG인베스트먼트는 가로 엔터의 지분 30%를 가지고 있다.
충분히 경영이나 프로듀싱에 참여할 자격이 됐다. 하지만 그들은 가로 엔터에 간섭하지 않았다.
가끔 보고를 받는 게 전부였긴 했지만, 홍규헌은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마다 BG인베스트먼트의 담당자에게 꼭 연락했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그 투자자 있잖아.”
가로 엔터에 13억이란 거금을 투자한 사람.
“신용필 씨.”
그의 이름은 신용필로 알려져 있었다.
성필이 투자했단 것을 밝히지 않으려고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한 가상의 인물은 아니고, 한구인의 대학 선배였다. 그는 사정을 듣고 기꺼이 연극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분한테도 연락해서 의견을 들어보자.”
“그거 때문에 하루 미룬 거였어요?”
“응. 그분도 지분이 있잖아.”
성필은 신용필의 이름을 빌려 지분 투자 형태로 돈을 넣었다.
그렇다고 불법으로 이름을 사용한 건 아니었다. 모든 게 성필의 이름이지만, 중간에 한구인의 조작이 가해져서 홍규헌에게 보고되는 것이다.
“이런 건 알려드려야지. 의견도 듣고.”
“알겠습니다.”
“직접 찾아와도 좋다고 말씀드려. 저번에는 대접을 그다지 못 해드렸네.”
신용필은 직접 가로 엔터에 오기도 했다.
푸근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아이돌에는 하등 관심도 없었으나, 한구인의 부탁을 듣고 최대한 연기해주었다.
성필과 한구인은 홍규헌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 회의실에서 나왔다.
“죄책감 장난 아니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사장님께 거짓말을 한다는 게 이토록 어려울 줄은 몰랐습니다.”
두 남자는 죄책감을 나누며 터덜터덜 복도를 걸었다.
* * *
“경섭아, 시작이다.”
“예, 형.”
성필과 민경섭은 연습실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평소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차분하고 세련된 스타일이었다.
“잘해보자.”
“꼭이요.”
데뷔곡 ‘아니’가 완벽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두 사람은 흰색 CD에 곡을 담아 투명 케이스에 잔뜩 넣었다.
검은 가방에 들어간 개수는 얼핏 보아도 수십 개가 넘었다.
둘은 가방을 메고 또 거울 앞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후우. 갈까?”
“네.”
두 사람은 영업을 나갔다.
어떤 영업이냐면, 바로 방송사로 찾아가서 PD에게 애걸복걸하는 것이었다.
“잘 가라.”
“형도 잘하세요.”
둘은 다른 방향으로 갔다.
민경섭은 케이블 채널로, 성필은 공중파 방송국으로 가는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음방에 나가고 말고가 그룹의 데뷔 성패를 결정한다.
시청률은 1%도 안 되지만, 기획사는 음방을 포기할 수가 없다.
음방에 나오고 안 나오고는 그룹의 페이를 결정한다. 게다가 음방에 나와야 사람들이 ‘이런 애들이 데뷔했구나’라고 알아준다.
‘오죽하면 이런 말도 있을까.’
시청률 10~20% 황금시간대 예능 나가는 것.
VS
음악 방송 1위.
만약 기획사 사람에게 둘 중 어느 것을 고를 거냐고 묻는다면, 100이면 100 이걸 고른다.
‘당연히 음악 방송 1위죠.’
그것만으로도 행사에서 받는 돈이 수십 배는 상승한다.
CF도 몇 개나 들어온다.
기획사 매출 또한 몇 배나 올라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러 기획사들은 시청률 1~2%의 음방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내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거야!’
성필이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액셀을 밟으려던 순간, 그의 전화기가 울렸다.
유하음이었다.
“어, 하음아 왜.”
[성필아, 미안한데 오늘 대타 좀 뛰어줄 수 있냐? 오후 3시부터 저녁까지인데.]
“지랄 그만. 절대 안 해줌. 나 오늘 일 있어. 너도 오늘 하루 잘 보내라.”
[야 이 매정한 새끼야! 진짜 오늘 하루 딱 하루만 해줘!]
“나 오늘 영업 돌아야 한다고! 영업 첫날이라고! 첫날부터 재수 없게 무슨 대타야!”
예전에도 유하음의 부탁으로 매니저 대타를 뛰어준 적이 있었다.
그때 현생에서는 처음으로 조아라와 만났었다.
[제발 부탁할게 제발! 로드가 도망갔어!]
“또? 너네 회사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무슨 로드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도망가. 사람 없으면 네가 가든가.”
[아니, 나도 정말 가고 싶은데. 오늘 웨이퍼센트 애들도 스케줄이 있어서. 나 지금 강원도란 말야, 제발 부탁 좀 할……. 지운이 너 몸에서 왜 핫도그 냄새나?! 너 휴게소에서 화장실만 다녀오랬지 먹을 거 사 먹으랬어?!]
한동안 유하음의 분노가 이어졌다.
그는 ‘아이고’ 골을 짚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금 저자세로 나왔다.
[제발…… 내가 연락 다 돌려봤는데 사람이 없어…….]
유하음은 거의 구걸하다시피 말했다. 성필은 점점 마음이 약해졌다.
“너 음방 스태프 중에 친한 사람 있어?”
[아, 너 영업 돈댔지? 야, 내가 마주치는 사람마다 붙잡고 CD 돌릴게. 제발 너네 회사 그룹 출연시켜달라고 무릎 꿇고 부탁할게. 그니까 어떻게 부탁 좀…….]
“무슨 프로인데. 아이돌이야? 배우야?”
이야기나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물었다.
유하음이 반색하며 말했다.
[배우. ‘여가 시간’이라는 예능인데…….]
“갈게!”
[어?]
“간다고!”
예능, 여가 시간.
등산이나 낚시, 피시방이나 맛집 탐방 등.
바쁜 연예인들이 일반인들의 여가 활동을 체험한다는 컨셉의 예능이었다.
시청률은 그럭저럭 선방하는 중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석문 PD 프로그램이잖아?’
지금은 막 입봉한 PD지만, 후일에는 예능계에서 마이더스의 손이라고까지 불리는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해당 방송사 음방 PD와도 친한 사이다.
‘얼굴도장 찍을 기회니까 꼭 가야지!’
성필의 그런 생각까진 알 수 없는 유하음이기에, 그는 마냥 기뻐하기만 했다.
[진짜 고맙다. 네 덕에 살았어. 너 없었으면 매니저도 안 붙여주는 악덕 기획사란 오명 쓸 뻔했다…….]
“로드들 도망가는 거 보니까 악덕 맞는 거 같은데?”
[팩트 폭력 그만해. 남들 보기엔 쓰레기장이라도 나한테는 집이니까.]
“미안……. 그 배우님은 누구신데?”
[유지성. 알지?]
알다마다.
유하음의 기획사에서 엄청난 계약금을 주고 회사로 데려온 인기 배우다.
“하음아.”
[응?]
“나 그분한테 사인받아도 돼? 한 열 장 정도.”
[맘껏 받아라.]
성필도 유지성이 나오는 작품을 좋아했다.
* * *
“반갑습니다. 대타로 온 박성필입니다.”
“안녕하세요. 배우 유지성입니다.”
훤칠한 키에 시원한 인상의 남자 배우, 유지성이다.
방송국을 돌아다니며 먼발치에서 보긴 했으나, 이렇게 가까이서 인사하는 건 처음이다.
대하기 힘들 줄 알았는데 친절한 그의 미소를 직접 보니, 왠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 촬영은 뭘 하나요?”
“등산이요.”
“네?”
“산에 오른대요.”
그렇게 말하며, 유지성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등산이라…….
뭐, 별일 있겠어?
“흐엑, 허억…….”
성필은 제작진을 따라 험난한 산을 올랐다.
어쩐지 출연자와 제작진들이 등산복을 풀 세트로 가져왔더라.
성필은 캐주얼 정장 스타일로 입고 있던 터라, 덥기도 덥고 굉장히 힘들었다.
오죽하면 휴식 시간에 배우인 유지성이 성필을 챙겨줬을까.
“저, 저는 괜찮으니까 배우님 휴식 취하세요. 곧 또 방송 들어가잖아요.”
“저야 등산 자주 해서 괜찮아요. 기력 없으시면 여기 초콜릿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이러니 누가 매니저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유지성은 자기 관리를 꾸준히 하는지, 펑퍼짐한 등산복을 입고도 몸의 굴곡이 숨겨지지 않았다.
그의 몸을 보니 장하양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하양이는 어떻게 됐을까.’
처음 짐에 보냈을 때, 트레이너는 장하양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예시를 보여주었다.
군살이라곤 없는 탄탄한 몸이었다.
장하양은 그렇게 변했을까?
체격은 변화가 없는 것 같던데.
몸을 드러내지도 않으니 알 길이 없었다.
“촬영 다시 시작합니다!”
나석문 PD도 더운지 연신 땀을 흘렸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산의 정상에서 세 갈래로 나뉘었던 출연자들이 전부 모여 도시락을 먹었다.
이후 다 함께 산을 내려오고 개인 인터뷰를 딴 뒤 촬영이 끝났다.
성필은 재빨리 스태프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들의 노고에 대한 감사를 표한 뒤 CD를 돌렸다.
허리를 굽히면서 시간 있으면 한 번 들어달라고 부탁을 이어갔다.
나석문 PD는 CD를 받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음악과 관련된 사람도 아닌데 왜 이런 걸 주냐는 눈빛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성필은 그의 앞을 떠나는 동안 계속해서 미소를 지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배우님.”
“아닙니다. 갑자기 오셔서 이사님이 더 힘드셨겠죠.”
“하하, 이런 데서 이사라고 불리니까 기분이 이상하네요…….”
유지성 배우도 성필의 이사라는 직함이 영 입에 안 붙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렇게 로드처럼 고생하는 이사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까.
“바로 집으로 가면 되실까요?”
“아니요. 차에서 저녁 먹은 뒤에 헬스장 갑니다. 메뉴는 이걸로…….”
대충 편의점 샐러드 도시락과 우유였다.
성필은 그를 차에 남겨두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도시락을 사서 돌아오는 중, 검은색 밴이 눈에 띄었다.
‘오늘 같이 촬영했던 아이돌들 거네.’
열린 차 문 앞에는 멤버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인사라도 할까 하고 다가가려던 순간, 문 안에서 빵 봉지들이 여럿 튀어나왔다.
빵들은 문 앞에 서 있던 여자의 몸에 맞고 땅바닥을 굴렀다.
“이딴 거 먹고 살찌면 어떡하라고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여자는 눈물 그득한 목소리를 억지로 눌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빵을 주우려 허리를 굽혔다.
“어?”
그보다 빨리, 성필이 손을 뻗어 빵들을 주웠다. 그리고 차 안에 앉아 있는 아이돌들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유지성 배우 매니저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대답은 없었다.
당황한 듯 성필을 바라보는 눈길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러분, 그룹 멤버들 사이가 항상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요. 이런 모습 밖에 보여봤자 좋은 거 없어요. 오늘 이걸 본 사람이 제가 아니라 방송 스태프라고 생각해보세요. 후일 분명히 문제가 될 겁니다.”
남의 일이다.
남의 기획사 일이다.
쓸데없는 오지랖이라 불러도 할 말은 없으나, 성필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