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81화 (81/760)

#081화

“그게 정확하진 않은데 아마 대충…….”

“아까는 투자금을 마련해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10억의 현금을 만드는 거야. 빨리 될 리가 없지. 마련해뒀단 건 확정적으로 돈이 들어온다는 뜻이고…….”

“정확한 날짜를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쯤에서 홍지헌도 이상한 기류를 눈치챘다.

한구인이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한다, 그것을 안 홍지헌은 눈매를 가늘게 만들었다.

“구인아. 너 말투가 좀 공격적인 거 같거든?”

“제가 말입니까?”

“어.”

사람의 말투를 지적한다.

높은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럼 아랫사람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숨겨진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상하관계에서 전해지는 대화란 얼마나 공허한지 보여주는 예시와 같아서, 한구인의 용기가 살짝 꺾였다.

‘즉답은 해주지 않겠단 건가.’

그럼 다른 쪽으로 물어봐야…….

“그리고 그게 중요해? 어떻게든 돈이 규헌이 손에 들어온다는 게 중요하…….”

“중요합니다.”

바통을 받은 건 성필이었다.

“지금은 앨범 계획의 초기입니다. 가장 자금을 많이, 정확히, 빠르게 써야 할 때입니다. 돈이 언제 들어오고, 언제 쓸 수 있을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한구인은 성필의 참전에 한숨 돌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성필에게 질문했다.

“추가로 자금이 필요한 곳이 있지 않았습니까.”

“예. 이번에 곡과 가사, 안무를 뽑으면서 돈을 많이 썼습니다. 예상 이상으로요.”

“그렇습니다. 가로 엔터의 투자자이신 홍지헌 사장님께 미리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가로 엔터는 ‘서프레스’ 해체 이후 PPBS(Planing Programming Budgeting System) 대신 PBS(Performance Budgeting system)를 채택했습니다. 아직 분기가 끝나지 않아 정확한 계산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에 따라 정확한 산정은 힘들지만, 당초의 여러 계획에 배정된 예산을 초과했습니다.”

한구인이 홍지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회사의 재정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사태를 이렇게 만든 것, 투자자이신 홍지헌 사장님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홍지헌은 어처구니가 없단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입장에서 가로 엔터는 구멍가게나 다름없었기에, 한구인의 사과 자체가 우습게 보였다.

“방만한 운영이라 말씀하셔도 제 입에선 나올 말이 없겠습니다. 예산을 제대로 짜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그런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뮤직비디오 제작도 있고요.”

둘 사람의 영혼의 티키타카에 홍지헌도 할 말을 잃었다.

이제 회의실은 홍규헌과 홍지헌, 그 가족 간 대화의 장이 아니었다.

“일단 뮤직비디오 제작에 편성된 예산은…… 한 이사님 어림잡아 1억이 넘었죠?”

“예. 아직 세부 사업 분류가 끝나지 않아…….”

“1억이 넘는다고?!

홍지헌이 경악했다.

“뮤, 뮤직비디오 따위에 무슨 돈이 1억이 넘게 들어?”

“최소가 1억이란 것도 아닙니다. 2억 가깝게 들 수도 있습니다. 투자금이, 운용할 수 있는 돈이 정해져야 가로 엔터도 사업을 진행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투자 집행일을 알려주셔야…….”

“아니 아니 아니 이상하잖아! 규헌아 안 이상하냐?! 뮤직비디오에 무슨 돈이 1, 2억이 든다고……!”

“이게 기본입니다.”

성필이 단호히 답했다.

“뮤직비디오에서 보는 방 안이나 배경, 전부 직접 만드는 겁니다. 세트장이란 겁니다. 그리고 CG가 들어가더라도, 그게 전부 사람 한 명 한 명이 하는 노가다입니다. 돈이 적게 들어갈 수가 없죠. 의상이나 메이크업, 출연하는 엑스트라 등등. 뮤직비디오에 보이는 모든 게 돈입니다.”

“아니, 그래도, 대체 어디에 억이나 되는 돈을…….”

“뮤직비디오 제작에 참여하는 스태프들만 해도 수십 명입니다. 그들 하나하나가 전문직 기술자들이고요. 인건비도 상당하죠. 게다가 하루 만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요. 예, 그렇게 돼서…….”

성필이 한구인에게 눈짓했다.

한구인이 말했다.

“정확히 언제 돈이 들어오는지, 꼭 알아야만 합니다. 그곳에 성패가 있습니다.”

“…….”

홍지헌은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BG인베스트먼트가 가로 엔터에 투자하는 걸 기다리고 계실 거야. BG인베스트먼트가 지분 40%를 가져가는 순간, 형님은 가로 엔터에 투자해서 지분을 얻어낼 거다.’

만약 가로 엔터가 홍지헌의 투자만 받고 BG인베스트먼트의 투자를 거절한다면, 홍지헌은 가로 엔터를 삼킬 수 없을 테니까.

‘알려주지 않는다면 형님의 속내가 밝혀지는 거다.’

과연 홍지헌은 쉽게 밝혀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네 말은 최대한 빨리 돈이 들어왔으면 한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앨범 계획을 조금 늦춰도 되잖아. 내가 기업체 사장이긴 해도 돈을 마음대로 굴릴 수 있는 건 아니야. 난 굉장히 검소한 사람이라서, 연봉도 아주 적게 받거든. 이익은 대부분 회사에 재투자해. 그래서 자산은 있어도 현금이 별로 없는데, 그건 너희가 고려해줘야지.”

앨범 제작을 늦추면 되지 않느냐.

홍지헌의 카운터가 들어왔다.

한구인은 그에 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성필에게 눈짓했다.

성필이 답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음악 방송은 아시겠지요? 지상파, 케이블 합쳐서 7개 정도의 음방이 있습니다. 음방 스케줄은 몇 개월 단위로 꽉 차 있습니다. 지금부터 영업을 다녀야 해요. 그리고 반드시 음방에 우리 애들이 나오기 전에 곡과 뮤직비디오가 나와야 합니다.”

앨범 제작은 늦출 수 없다.

성필이 속 시원히 홍지헌의 카운터를 쳐냈다.

“……그래서 뭐.”

홍지헌은 가면을 벗듯 목소리를 깔았다.

“내 투자 받기 싫다는 거야 뭐야. 뭐 그렇게 따지는 게 많아? 돈 준다면 그냥 ‘알겠습니다.’ 하고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저희가 바라는 건 단지, 돈이 들어오는 날짜일 뿐입니다.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도 몰라.”

“그렇습니까.”

이걸로 끝났다.

한구인은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홍지헌의 투자 계획이 ‘불분명하다.’는 것만 밝히면 됐다.

이토록 끈질기게 대답하길 거부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을 터다.

“뭐어, 그렇다는데. 어쩔까 오빠?”

“…….”

홍지헌은 버릇인 듯 책상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곤 품위 있는 몸짓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도 알아봐야겠어. 돈이 정확히 언제 마련되는지.”

“어, 알겠어.”

홍규헌은 밝게 대답했으나, 아마 홍지헌이 투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구인은 집요하게 BG인베스트먼트의 추가 투자를 거절할 것이었으니까.

그러면서 그쪽이 홍지헌에게 모종의 사주를 받았는지도 밝힐 것이다.

가로 엔터를 지켜냈다.

하지만…….

‘수십억을 놓쳤어.’

한구인은 성취감과 죄책감이 뒤범벅된 얼굴로 홍규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빠를 배웅하며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다행이네. 오빠가 도와줘서.”

오빠를 배웅하고 온 홍규헌이 밝게 웃으면서 한구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한 이사도 한시름 놨겠네. 지금까지 고생했다.”

한구인은 소규모의 투자를 몇 개 받아왔으나, 홍규헌이 만족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실패한 회사인 가로 엔터의 이름을 걸고 투자를 받은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한 이사, 며칠간 푹 쉬어. 투자는 이제 안 알아봐도 되겠어.”

“……예.”

한구인이 옅은 미소를 품었다.

입꼬리 끝이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 * *

“박 이사님!”

회의실을 나선 한구인이 성필을 따라잡았다.

“잠시 대화 가능하시겠습니까?”

“예.”

둘은 응접실로 들어왔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한구인은 계속 의아했다.

어째서 성필이 자신을 도와줬는가, 어째서 홍지헌의 투자를 막으려고 했던 것인가.

도저히 한구인의 머리로는 알 수 없었다.

“저는 지분 투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예? 그냥, 그거?”

“몇 년 전부터 중국 자본이 기획사로 유입됐잖아요. 엄청난 규모로요. 대형 기획사들도 예외는 아니고요.”

지분의 20, 30%는 예사다.

대형 기획사조차 지분 40% 이상이 중국계 자본에 침식된 예시가 존재한다.

“경영자로 중국 쪽 사람이 들어오고, 갑자기 중국인이 그룹 멤버로 내정되고, 원래 있던 멤버들이 쫓겨나고, 아티스트 컬러에도 간섭하고 뭐……. 안 좋은 일을 많이 봐서요. 그냥 돈만 주면 알아서 성공하고 불려줄 텐데.”

기획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마 중국계 투자사의 간섭도 잘 조율할 수 있을 거라 믿었겠으나, 현실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자본을 무기로 기획사들을 휘둘렀다.

“제가 한 이사님이 방문한 투자사들을 쭉 봤는데, 중국계 쪽이 없더라고요. 그쪽으로 갔으면 투자에 더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을 텐데도요. 한 이사님도 그런 상황을 경계하셨던 거죠?”

정답이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홍지헌 사장님은 중국인이 아니잖습니까.”

“그건 저도 알죠! 그냥, 전문적인 투자사도 아니고 아이돌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 지분을 갖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한 이사님한테 도움을 요청한 거고요. 어떻게 저희 생각이 맞았네요.”

이심전심(以心傳心).

한구인은 그 사자성어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느껴보긴 오늘이 처음이다.

마치 자신과 성필의 심장에 실이 이어져 있고, 그게 울린 듯한 기분이다.

같은 회사의 이사라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 습니까.”

“네. 그래요.”

실은, 성필은 미래를 보았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미래였다.

‘멤버 구성을 아예 바꿨었지. 하양이를 쫓아내고, 다른 멤버들이 들어오고, 그러다가 못 참은 아라가 나가고…….’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었다.

가로 엔터의 인간미가 사라진 미래를 보고, 성필은 토할 것만 같았었다.

그래서 한구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공교롭게도 한구인은 그 요청에 응해주었다.

응한 것처럼 보였다.

실은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인데도, 둘이 알 리가 없었다.

“왜 그러세요?”

본인의 목적을 달성한 것 치곤 한구인의 표정은 안 좋았다.

그가 고개를 점점 숙이자, 성필은 걱정스레 물었다.

한구인은 왜 그가 홍지헌의 투자를 말리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라, 성필은 새삼스레 화내지 않았다.

“제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홍지헌 형님의 계획도 사장님께 들려드릴 겁니다. 하지만…… 투자금을 놓쳐버린 건…….”

한구인은 근래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연습생을 찾으러 다닐 때보다 더 압박감이 컸다.

투자금 유치는 그의 주요 업무였고, 그 주요 업무에서 눈에 띄는 성과가 없었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든 실패한 회사에 투자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한구인은 그것에서 안도를 느끼지 못했다.

“제가 너무 쓸모없는 사람 같습니다…….”

성필은 한구인의 고해에 무어라 답할 수 없었다. 그의 절망은 깊고도 넓었다.

회사에 보탬이 되겠다는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자기 자신을 갉아 먹고 있었다.

성필은 고민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한 뒤.

옛날부터 쭉 품어왔던 생각을 밝혔다.

“한 이사님 이거 보세요.”

한구인이 성필의 핸드폰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한구인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이건…….”

“제가 1년 전에 산 주식인데 이만큼 올랐어요.”

15억.

회귀하자마자 은행 빚까지 내서 산 것이다.

“이걸로 가로 엔터에 투자할까 하거든요. 제 이름 말고 다른 사람 이름으로 가능할까요?”

“왜, 어째서…….”

“저는 지금의 관계가 좋아요. 제가 가로 엔터에 제 이름으로 투자하면, 저는 박 이사가 아니라 투자자가 되잖아요. 사장님도, 한 이사님도, 전부 제 눈치를 보게 되겠죠.”

부하들을 조율하려던 홍규헌도.

할 말은 하는 한구인도.

자기주장이 강한 손혜빈도.

저마다의 목소리를 가진 멤버들도.

성필이 투자한 15억이란 무게 앞에 본인을 억누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건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까 저 말고 베일에 싸인 투자자, 그런 느낌으로 투자할 수는 없을까요? 아니면 한 이사님이 아시는 분한테 연기를 맡기신다거나.”

“……박 이사님.”

“네.”

한구인은 진심을 다해 말했다.

“가로 엔터에 투자하지 마십시오.”

“……네?”

“이건 도박입니다. 그것도 확률이 굉장히 낮은 도박입니다. 전 세계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1에서 2%입니다. 그에 비해 평균 자본수익률은 5%입니다. 노동 소득은 자본 소득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노동 소득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15억이란 돈이 있다면, 박 이사님은 평범하게만 자본을 운용해도 연 소득 6000만 원은 얻으실 수 있습니다. 일도 취미처럼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뿐인가.

서울에 집을 사서 월세를 주거나, 전세를 줘서 그 돈으로 또 자본을 불릴 수도 있다.

15억이란 돈을 얻은 순간부터, 성필은 부자가 되는 길 위에 오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는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된다.

돈 때문에 행복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15억은 그런 돈이다.

그렇기에, 한구인은 진심으로 말했다.

“동정심 때문에 투자하지 말아 주십시오. 박 이사님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곳에 이 돈을 써주시길 바랍니다.”

그 배려 넘치는 충고에, 성필은 간단히도 답했다.

“저에게는 이게 가장 행복하게 돈을 쓰는 방법이에요.”

“박 이사님…….”

“동정심 때문이 아니에요. 저는 가로 엔터가 성공할 거라고 믿어요. 제가 있잖아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자기 자랑에 한구인의 진지함이 조금 옅어졌다.

“제 15억은 미래에 수백억, 수천억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도박이 아니라 투자예요.”

성필이 주식을 현재가 판매로 매도 계약에 올렸다.

곧 있으면 성필이 지닌 모든 주식이 바람처럼 날아가고, 돈이 손에 쥐어질 것이다.

그것은 성필의 의지를 나타내는 무엇보다 강렬한 행동이었다.

한구인은 그것을 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심전심,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께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 * *

“응? 둘이 웬일이야?”

성필과 한구인은 홍지헌의 계획을 말해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홍규헌의 얼굴이 시시각각 암울해졌다.

“그래, 그렇구나…….”

홍규헌은 이야기를 전부 듣자마자 두 사람에게 나가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본 홍규헌의 얼굴은 침울하다 못해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가족에게, 심지어 유일하게 자신의 꿈을 지지해주던 홍지헌에게 그런 취급을 받았단 게 믿기지 않는 것이다.

며칠의 고민 끝에 홍규헌이 결정을 내렸다.

“내 오빠랑 BG인베스트먼트의 투자는 받지 말자. 미안해.”

홍규헌은 한구인과 성필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홍규헌이 자신을 모자란 사장이라고 생각하는 듯해서, 둘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무엇보다 홍규헌이 이토록 의기소침한 게 보고 있기 어려웠다.

하지만 또 얼마 뒤.

“어? 뭐, 뭐라고?”

“13억, 투자해주신다고 하십니다.”

한구인은 며칠 밤을 새워서 만들어낸 거짓말을 청산유수로 쏟아냈다.

가상의 인물과 가상의 스토리, 그리고 가상이 아닌 13억이란 돈.

“박 이사님의 전 기획사에 ‘엡실론’이란 그룹이 있잖습니까. 그분의 따님이 엡실론의 팬이라 집에 포스터와 CD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아, 그거. 박 이사가 제작에 상당 부분 관여했다면서.”

“예. 이번에 제작사 프로필에도 그런 내용을 추가했었습니다. 저와 박 이사님이 여러 번 설득한 끝에 OK 사인을 주셨습니다.”

홍규헌은 기뻐했다.

그냥 기뻐한 것도 아니고, 함박웃음을 지은 채 성필과 한구인을 꼭 껴안았다.

두 사람은 홍규헌의 칭찬과 격려를 파도처럼 받아내며 사장실을 나왔다.

사장실을 나온 둘은 하이파이브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박 이사님.”

“저도요. 고생 많으셨어요. 거짓말 싫어하시잖아요.”

“박 이사님도 얼굴에서 ‘나 죄짓고 있어요.’란 분위기가 풀풀 풍겼습니다.”

“그래도 한 이사님만큼은 아니죠. 근데 안 들키는 거 맞죠?”

“예. 아는 분에게 부탁드려놨습니다. 필요할 때엔 연기도 해주실 겁니다.”

둘은 사장에게 거짓말을 했다.

신의성실의 원칙을 어겨버렸다.

하지만 단 한 문장으로 거짓말을 합리화했다.

“사장님을 위해서, 앞으로도 열심히 해요.”

“예. 꼭 가로 엔터를 성공시킵시다.”

“애들도요.”

“그럴 거면 그냥 전부라고 하시지 그러십니까.”

“예. 저희 전부 꼭 성공해요.”

두 명의 이사(理事)가 복도를 걸었다.

* * *

성필은 회사 1층 테라스 테이블에 앉았다.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캔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

‘보자, 내가 13억을 회사에 투자했고.’

남은 돈은 2억.

‘그룹이 실패했을 때 하양이한테 줄 1억은 저금해두고.’

남은 돈은 1억.

‘5,000만 원은 은행 빚 갚는 데 쓰고.’

남은 돈은 5,000만 원.

성필은 허탈하게 웃었다.

‘회귀했을 때랑 똑같아졌네.’

손에 있던 15억이 사라졌단 게 새삼스레 현실로 다가왔다.

아까우냐…… 그리 묻는다면.

“아앗! 이사님 회사에서 술 드시면 어떡해요!”

“나 퇴근했어. 여긴 회사 밖이고.”

“에, 에에, 으, 음, 음주운전 하시면 안 돼요!”

“택시 타고 갈 거야.”

“왜 술 드세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저한테 말하세요!”

“아냐. 없어.”

“그런 사람이 회사 앞에서 술을 마시나요! 저한테 말하고 후련해지세요!”

리카는 성필의 고민을 들으려고 수십 분이나 노력했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30분이 흘러도 연습실로 돌아오지 않는 리카를 찾으러 조아라가 나타났고.

“이럴 때는 그냥 두는 거야.”

“상담하고 싶어지면 언제라도 아타시(저)를 찾아오세요오……!”

조아라가 리카를 끌고 사라졌다.

성필은 그 모습을 웃으면서 바라보다가, 한입에 맥주캔을 전부 비웠다.

‘15억이 아깝냐고?’

전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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