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한구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정제된 걸음걸이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니, 한눈에 담기지 않는 으리으리한 빌딩이 보였다.
‘이번에도 실패로군.’
곡이 나왔다.
한구인은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투자자와 투자사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미 실패한 전력이 있는 중소기업에 투자할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이전의 그룹 ‘서프레스’에 투자했던 자들도 돈을 회수하지 못해 끙끙대고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홍규헌의 배경 덕분에 투자사와 대화할 여지라도 있는 것이다.
‘다음은 보자…….’
한구인은 지도를 확인하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으음, 내부적으로 검토를 해봤는데.”
다음에 나올 말은 한구인도 알았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일정만이 남았다.
한구인이 BG인베스트먼트 사옥 앞에 섰다.
하늘로 높게 뻗은 투자회사의 위용은 그들이 가진 힘 자체를 상징하는 듯했다.
‘들어가자.’
한구인이 긴장하는 건 단순히 BG인베스트먼트의 이름값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로 엔터의 최초 투자사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차장님.”
“안녕하십니까. 2년 만인가요.”
한구인과 가로 엔터 담당자, 문재형 차장이 악수를 나눈 뒤 서로를 보고 앉았다.
한구인을 그를 보고 있기 거북했다.
가로 엔터는 BG인베스트먼트에 빚을 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투자금을 상환하고 있지 못하다.
‘서프레스’로 수익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 말씀해주신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문재형 차장은 한구인이 준 자료를 조심스레 읽었다.
제작사 소개서. 투자 아티스트와 음원 소개. 프로모션 계획. 판매 계획. 투자 유향 제안서. 재무 자료. 보유 음원. 마케팅 채널 등등.
한구인이 정성스레 쓴 자료들은 전부 빛을 발하지 못했다.
문재형은 개요만 읽은 뒤 자료를 공손히 테이블 위로 정리해두었다.
“3차 집행은…….”
문재형이 운을 뗐다.
한구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BG인베스트먼트의 1차 투자금은 20억이었다. 그 20억이 ‘서프레스’를 만들고 1년 만에 모두 소진됐다.
2차 투자금은 그보다 줄어든 5억이었다.
그것도 빠르게 사라졌다.
결국 아무런 이득도 보지 못하고 ‘서프레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혹시나 해서 왔지만, 투자를 해줄 리가 없지.’
BG인베스트먼트가 당장 돈을 내놓으라며 멱살을 잡아도 모자랄 지경이다.
만약 홍규헌의 배경이 없었다면, 가로 엔터는 진작에 문을 닫았을 것이다.
“추가 조건이 있습니다.”
“……3차 투자를 하시겠단 뜻입니까?”
“예. 저희가 제시하는 조건은 지분의 10%를 추가로 받는 겁니다.”
BG인베스트먼트는 가로 엔터의 지분을 30% 보유하고 있다.
이후 가로 엔터가 수익을 내고 가치가 상승하면 그것을 팔아 이익을 볼 수 있다.
혹은…….
‘가로 엔터의 성장 가능성을 보는 건가?’
지분이란 곧 결정권이다.
BG인베스트먼트는 가로 엔터에 대한 결정권 10표 중 3표를 보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10%가 추가되면 4표가 된다.
‘BG인베스트먼트는 근래 들어 기획사에 대한 지분 투자를 지속하고 있어. 시장점유율을 높이려는 건가.’
뭐가 어찌 됐든, 그 계획에 가로 엔터도 껴 있단 건 희소식이다.
홍규헌은 모든 앨범에 총력을 기울이길 바란다. 적당하게 사정을 보고 돈을 쓰는 건 원치 않는다.
만약 그녀의 결정과 계획을 그대로 따른다면, 가로 엔터는 2년 후 붕괴할 것이다.
그러니 지분을 더 주건 말건 가로 엔터에는 돈이 필요했다.
“10%요…….”
그렇다면 BG인베스트먼트가 갖는 지분은 총 40%.
관대하다.
휴짓조각이 될지도 모르는 지분에 이토록 투자해주다니, 솔직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게 전부입니다.”
한구인은 의례적인 대화를 몇 번 나눈 뒤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투자를…… 받는 건가?’
몇 달 동안 목구멍에 돌이라도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모두 자신의 길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데, 본인만 회사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아니다.
한구인은 투자금을 얻어냈다. 물론 홍규헌의 허락이 필요했다.
‘당장 가서 말씀드리자.’
1층의 홀을 빠져나가기 직전, 한구인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홀의 전경으로 눈을 돌렸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고 있다.
한구인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더 구경하고 싶어서, 적당한 의자에 앉았다.
‘나도 옛날엔…….’
한구인도 미국에서 투자회사에 몸을 담았었다.
고도로 훈련된 경영인을 육성하기 위한 미국의 경영학 석사 과정을 끝내고, 애널리스트로서 입사했다.
주 120시간 근무라는 철저한 악조건 속에서 살았다.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일만 하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한구인은 뛰어났다.
선배들의 따까리에 불과한 햇병아리 애널리스트 주제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안목과 능력을 증명해낸 것이었다.
2년의 인턴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 매니저가 직접 한구인을 잡을 정도였다.
황금 피라미드의 정상으로 가는 길이 보장되어 있던 한구인은, ‘기업의 개국공신이 되겠다’는 꿈 하나로 성공 가도에서 내려왔다.
‘……가자.’
추억 때문인지 너무 오랫동안 넋 놓고 있었다.
한구인은 건물을 나오며 핸드폰 앨범을 펼쳤다. 그곳에는 가로 엔터 사람들의 사진이 가득했다.
황금 피라미드로 올라가는 길?
이 앨범의 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이미 놓쳐버린 그딴 기회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 * *
홍규헌에게 형제자매가 있단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명을 직접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성필은 멤버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 홍규헌의 작은 오빠, 홍지헌과 대화를 나누었다.
“사장님 오빠분도 사장님인가요!”
“어, 나도 사장이지.”
“기획사요?”
“나는 말이지, 영혼을 팔아.”
중2병 걸린 듯한 그의 발언에 누구도 대답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홍지헌은 그런 반응에 기분이 상한 듯, 자켓의 품 안에서 문고본 책을 하나 꺼냈다.
깔끔한 붉은색 표지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고 적혀 있었다.
“아, 책 파시는구나.”
홍규헌은 제지 공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형제자매 중 한 명이 종이가 많이 필요한 사업을 한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 사람이 홍지헌인 듯했다.
“멋지지? 개인적으론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멋져요!”
“맞지? 책은 감정을 전달하는 모든 매체 중 가장 뛰어나. 노래든, 춤이든, 그림이든, 영상이든 뭐든, 전부 책보다는 힘이 없지.”
그러면서 홍지헌은 깔보는 듯한 기색으로 성필에게 시선을 주었다.
‘……뭐 어쩌란 거지?’
아까부터 홍지헌은 은근슬쩍 아이돌이나 가수, 댄서 등을 깎아내렸다.
직접적이진 않아서 뭐라고 하지 못했을 뿐, 다들 느끼고 있었다.
만약 리카가 없었다면 진작 이 자리엔 침묵만이 남았을 것이다.
“형님?”
그때 한구인이 일을 마치고 회사로 들어왔다.
“어, 구인이. 오랜만이다.”
“여긴 왜…….”
“말 섭섭하게 하네. 나도 여기 투자자잖아. 투자자가 상품 보러 오는 게 이상해?”
상품.
그 단어에 담긴 뜻을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눈치챘다.
홍지헌은 멤버들이 차례로 나타날 때마다 그녀들을 눈으로 훑었다.
마치 물건을 감평하려는 듯이.
“너 왔으니 이제 올라가자. 아, 얘들아 대화 나눠서 즐거웠다. 이걸로 맛있는 거라도 사 먹어.”
홍지헌은 지갑에서 20만 원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두었다.
“가자. 아, 그리고 박 이사?”
“예.”
“박 이사는 그러니까, 진짜 이사는 아니고 직함만 이사인 거지?”
“박 이사님은 가로 엔터의 임원이십니다.”
한구인이 재빨리 홍지헌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가 성필을 무시하려는 기색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 그래. 임원이면 같이 와야 하겠네.”
세 사람은 사장실로 올라갔다.
과연, 홍규헌도 홍지헌이 온 건 뜻밖인 듯 눈을 크게 떴다.
“오빠야? 뭐야. 왜 왔어?”
“네가 투자 생각해보라며. 그래서 회사 사정이나 상품들 보러 왔지.”
또 홍지헌이 멤버들을 상품이라고 불렀다.
“나 어디 앉으면 돼? 회의실이 따로 있던…….”
“홍 사장님.”
“응?”
“나?”
“홍규헌 사장님 말고요. 홍지헌 사장님.”
“왜?”
성필은 배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끓는 듯했다.
아까부터 계속 그랬다.
멤버들을 물건처럼 말하는 홍지헌의 태도가 참기 힘들었다.
멤버들이 앞에 없었다면, 지금도 홍규헌이 없다면, 당장이라도 소리 질렀을 것이다.
“우리 애들은 상품이 아닙니다. 말을 조금만 신경 써서 해주세요.”
홍규헌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필을 가만히 두면 설전이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회의실로 가자. 다 같이…….”
“아니 뭔. 상품이 아니면 뭔데?”
“오빠.”
“아니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야 잠시만 기다려 봐. 박 이사? 걔네 상품 맞잖아.”
“사람입니다.”
“어, 그래. 돈 버는 사람. 너희 사람 팔아서 돈 버는 일 하잖아.”
성필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토록 사람을 모욕하고 화내는 방법이 존재하는 줄, 어머니 배에서 나오고 처음 알았다.
상품? 상품이라고? 사람을 보고?
“회계 처리할 때 트레이닝비랑 앨범 준비 비용 장기 개발비로 처리하는 거 아니야? 영업 이익 차감 안 시켜야지. 무형 자산으로 처리해서 매출 원가로 만드는 거 아니야? 쟤네.”
홍지헌은 멤버들이 보이기라도 한 듯, 1층의 멤버들이 모여 있는 방향을 검지로 가리켰다.
“자산. 무형 자산 먹은 거잖아. 아니야? 경상 개발비로 처리해? 이익 깎여서 투자자들한테 보여주게?”
실제로 한구인은 홍지헌의 말대로 회계 처리를 하고 있었다.
경제의 언어로 보자면, 멤버들은 자산이다.
상품이다. 물건이다.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세상에 상품 아닌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이건 그냥 사람이 안 된 거다.’
성필은 홍규헌의 앞이란 것도 잊고 목소리를 키우려 했다.
도저히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아이고 이 오빠야!”
홍규헌이 홍지헌의 등을 짝 때렸다.
“아악!”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남 앞에서 뽐내는 것 좀 그만해! 뻔히 싫은 티 내는데도 왜 자꾸 상품이니 뭐니 하면서 지랄하는데!”
“아, 미안. 미안하다고, 그만 때려!”
홍지헌은 잔뜩 얻어맞은 뒤 회의실로 향했다.
성필이 얼이 빠져 있으니 한구인이 말했다.
“원래 저런 식으로 우월감을 느끼길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나랑 같은 배에서 나왔다곤 안 믿기는 성격이지?”
홍규헌이 잘 참았다는 듯 성필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회의실로 들어가니 뚱한 얼굴의 홍지헌이 앉아 있었다.
동생에게 얻어맞아서 삐친 모양이었다.
한구인은 투자 관련 자료를 홍지헌에게 주었다.
그는 가로 엔터의 초창기에도 투자를 했었다.
10억의 돈을 ‘잘 해봐라.’라며 용돈 뿌리듯이 홍규헌에게 넘겼다.
투자 형태는 MG 투자로,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면 투자원금 변제의 의무가 없었다.
투자자에게는 큰 리스크를 가지는 투자유형인 것이다.
홍지헌은 놀랄 만한 속도로 수십 페이지의 서류를 훑어보았다.
“애들이랑은 만나 봤어?”
“어. 예쁘더라.”
“그리고?”
“……? 예쁘다고.”
“뭐 안 느껴져? 아이돌로서.”
“몰라. 그 정도 얼굴 널리지 않았나?”
볼펜을 부러뜨릴 듯 쥐는 성필을 한구인이 말렸다.
“딱히 바뀐 건 없네.”
홍지헌은 가로 엔터 회사 자료를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하나만 빼면.”
“어떤 거?”
“초기 자본 40억을 하나도 남김없이 까먹어버린 거.”
홍규헌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가로 엔터의 전 그룹, ‘서프레스’의 실패는 홍규헌의 역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서프레스’란 말을 꺼내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규헌아. 투자는 진지한 거야. 그래서 전화로 거절 안 하고 직접 여기로 왔어.”
“……어.”
“직접 와서 거절하려고. 양심적으로 생각해. 이런 회사에 누가 투자할까? 넌 돈 쓰는 것만 좋아하지 벌 방법은 조금도 생각 안 하는구나.”
홍지헌의 오만한 낯짝이 누그러졌다.
마치 실수를 저지른 여동생을 격려하는 오빠 같았다.
전혀 격려가 안 된다는 게 문제지만.
“40억이 동네 애 이름이야? 아버지 이름 빌려서 여기저기 돈 꿔왔으면 조금이라도 성과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뭐야. 넌 40전 40패의 권투 선수한테 돈 걸고 그래? 난 아닌데.”
“알겠어……. 이제 꺼져.”
“으이구, 규헌이 또 삐졌어?”
“등뼈 접어버리기 전에 나가라고…….”
“하지만, 나는 우리 동생 믿으니까 이번에도 속아주려고. 10억.”
“……아까는 거절할 거라면서?”
“너 놀린 거지. 내 등 때린 대가로.”
홍지헌이 실실 웃자 홍규헌도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오빠의 웃음 따위는 어찌 되든 좋았다.
10억이란 말이 홍규헌을 웃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돈은 곧 마음이다.’란 말을 듣고 자랐다.
가족끼리 100만 원을 빌려주는 것도 쉽지 않다는데, 10억이면 홍지헌이 얼마나 홍규헌을 사랑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 오빠야가 진짜……. 동생 놀리니까 좋아?”
“어. 좋은데? 근데 이번에는 나도 MG로는 못 해주겠다. 지분 15%는 받고 싶은데.”
“지분 투자? 굳이? 돈 받고 싶은 거면 선급 대여로 해도 되잖아.”
“혹시 아냐. 더 성공할지. 그다지 성공확률이 높아 보이진 않는다만……. 솔직히 이건 도박도 뭣도 아니거든. 그냥 돈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수준인데, 1%라도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잖아?”
홍규헌은 가로 엔터를 본인의 몸과 같이 여겼다.
그런 가로 엔터에 대해 가감 없는 모욕을 듣고 있으나, 홍규헌은 참기로 했다.
10억이나 주겠다는 사람 아닌가.
이런 모욕은 몇 번이든 참을 수 있다.
“그래, 10억……. 지분은 15%?”
“어.”
대화가 잘 풀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구인은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왜 15%지? 10%도 아니고 20%도 아니고, 왜 하필 15%?’
그때 한구인은 뇌리에 번개가 꽂힌 듯한 감각을 경험했다.
오늘 만났던 문재형 차장, 그는 지분 10%를 추가로 받는 대신 3차 투자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로써 BG인베스트먼트가 가로 엔터에 대해 가지는 지분은 40%가 된다.
거기에 홍지헌이 가질 15%를 더하면.
‘55%가 된다.’
한구인은 화들짝 놀라 홍지헌을 보았다.
홍지헌은 아직도 가로 엔터가 가망이 없니, 그래도 동생이니까 투자해주는 거니, 나한테 고마워하라니 뭐니.
그딴 말을 하며 홍규헌의 신경을 긁는 중이었다.
‘BG인베스트먼트가 3차 투자까지 해준다고?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데?’
아무리 홍규헌의 아버지가 후광으로 작용한다 해도, 투자회사가 돈을 버릴 리가 없다.
두 번 기회를 줬으면 충분하다.
그들은 가로 엔터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한구인의 눈이 뜨였다. 지금까지 너무 머릿속을 꽃밭으로 꾸며놓았다.
‘가로 엔터에 또 투자해줄 리가 없어. 설마. 홍지헌 형님이 BG인베스트먼트에서 지분을 살 생각인가?’
애초에 BG인베스트먼트도 홍지헌이 소개해준 투자사였다.
만약 홍지헌이 55%의 지분을 가지면, 사실상 가로 엔터를 가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 왜 가로 엔터를?’
한구인의 비상한 두뇌가 생각을 거듭했다.
홍지헌은 유일한 홍규헌의 지지자였다.
형제자매, 심지어 아버지조차 홍규헌이 기획사를 만드는 데 반대했다.
하지만 홍지헌은 ‘애가 하려는 데 그냥 하게 둬요.’라며, 유일한 여동생을 옹호해주었다.
그러나 홍규헌은 실패했다.
40억이란 투자금을 까먹으면서.
얼마나 가족에게 눈총을 받고 기가 억눌려 지냈던가.
곁에서 보는 한구인조차 안쓰러워할 지경이었다.
‘홍지헌 형님도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그러니, 바보 같은 여동생에게서 경영권을 빼앗아오겠다.
이상에 물든 철부지를 구석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가로 엔터의 경영을 책임지겠다.
그리고 어떤 수단을 써서든 성공시켜 동생의 명예를 되찾게 해주겠다.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 15%란 지분은 그걸 위한 교두보고.’
홍지헌은 여러 개의 출판사와 국내 최대의 도서 유통 업체를 가지고 있다.
그가 문화계에서 쌓은 힘이면 가로 엔터 하나 띄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BG인베스트먼트는 지분을 홍지헌 형님에게 팔 거야.’
가지고 있어봤자 돈도 되지 않는 지분 따위, 살 사람이 나타나면 파는 게 당연하다.
BG인베스트먼트는 기꺼이 홍지헌에게 지분을 팔 것이다.
그럼으로써, 홍지헌은 가로 엔터의 지배자가 된다.
홍규헌과 성필, 한구인의 꿈이 담긴 계획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게 분명하다.
홍지헌은 전문가를 잔뜩 불러와 회사를 경영하겠지. 그룹 멤버를 더 늘리거나, 혹은 현재 멤버를 쳐낼 수도 있다.
‘오직 시장의 생리에 따라 철저히 만들어진 그룹이 나올 거야.’
거기에는 성필이나 홍규헌의 꿈도, 멤버들의 의지도, 아무것도 없다.
홍지헌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자연스레 가로 엔터의 향방도 예측할 수 있었다.
“…….”
고작 ‘15%’란 숫자만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본 한구인은, 생각을 마치고 홍지헌을 응시했다.
‘막아야 한다.’
“그럼 바로 할까?”
“바로? 오빠야 운용할 수 있는 돈이…….”
“있어. 너 주려고 미리 만들어놨지.”
홍규헌이 감동을 숨기려고 입술을 짓씹었다. 한구인은 말을 꺼내기 거북했다.
‘그런데 내가 이걸 말하게 되면, 이 추측을 밝히게 되면, 투자금을 받을 수 있을까?’
만약 홍지헌이 순수한 호의로 다가온 것이라면? 그런데 한구인 자신이 억측한 것이라면?
홍규헌은 경계심이 강하다. 그리고 한구인을 믿고 있다. 그의 추측을 사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내 생각을 말하게 되면, 홍지헌 형님이 아무리 순수한 선의로 다가왔더라도 사장님이 거절하실 거야.’
만약 그러면 어떡하지?
그냥 돈을 놓치게 되는 건데…….
설령 홍지헌에게 의결권의 절반 이상이 넘어간다 해도, 가로 엔터가 많이 바뀌게 될까?
그도 기획사에 대해선 문외한이니 전문가를 섭외할 텐데, 홍규헌이 그들과 잘 조화될 수 있지는 않을까?
‘내가 걱정이 너무 많은 건가?’
한구인은 수많은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머리를 너무 굴린 나머지 땀까지 서서히 흐르던 중, 한구인은 묘하게 자신의 옆이 조용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옆을 보니.
“박 이사님?”
창백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성필이 보였다.
그는 마치 끔찍한 미래라도 본 듯이 손마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아, 아, 아니요. 아, 그으.”
성필은 떨림을 가다듬으려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떴을 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사장님. 한 이사님의 의견을 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가로 엔터의 재정을 책임지시는 분이잖습니까.”
가족 간의 살가움을 섞어가며 대화하고 있던 홍규헌과 홍지헌이 성필을 보았다.
홍지헌의 투자는 성필이나 한구인이 뭐라고 하기 힘들었다.
투자사와 제작사의 관계가 아닌, 가족의 관계에서 나온 투자였으니까.
그에 대해 리스크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게 이상한 분위기였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서류가 오갈 때 들어도 충분할 텐데 말이다.
그래서 성필이 그 말을 꺼냈을 때, 홍규헌의 반응은 살짝 어이가 없단 투였다.
“아, 뭐, 그래.”
한구인은 놀란 눈으로 성필을 보았다.
성필은 급체라도 한 듯 일그러진 얼굴로, 홍규헌과 홍지헌에겐 들리지 않도록 말했다.
“말씀해주세요, 그, 지분이라거나.”
거기서 한구인은 확신했다.
‘박 이사님도 뭔가 깨달으셨구나.’
그렇다면 이제 한구인의 걱정은 혼자만의 추측으로 끝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생각이 겹쳐진, 어엿한 의견이 된다.
자, 그럼 파헤쳐보자.
“형님…… 아니, 홍지헌 사장님. 투자집행은 정확히 언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