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5화 (75/760)

#075화

“먼저 퇴근할게요.”

“두 분 다 수고하셨습니다.”

“한 이사님두용.”

오늘의 멤버 귀가 담당은 한구인이었다.

성필과 손혜빈은 나란히 회사를 나왔다.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말은 없었다.

“누나.”

“왜?”

“술 먹을래?”

“그래.”

둘은 자연스레 가까운 술집으로 향했다.

안주가 나오고 술이 몇 잔 돌 때까지도 말은 없었다.

“누나.”

“왜.”

“더블 타이틀은 어때?”

“안 되지. 타이틀 이름 붙일 거면 그냥 음원만 내자는 뜻이 아니잖아. 뮤비에다가 안무도 붙여야 해. 돈 얼마나 드는지는 알지?”

“억 소리 나게 들지……. 그럼 수록곡으로는 어떤 거 같아?”

“엘릭 앞에서 그 소리 해봐. ‘팅글’ 메인 말고 수록으로 넣는단 소리 듣자마자 뒷목 잡고 쓰러질걸.”

“그러겠지…….”

“그런 말 할 거면 입 열지 마.”

“응.”

성필이 잘못한 건 없다.

‘있다면 내 말솜씨가 너무 좋단 거겠지.’

그건 아닌가?

임직원 투표 때는 동점이 나왔으니.

‘아니가 이길 수 있던 건 애들의 투표 덕분이야. 솔직히 꼼수 쓴 느낌인데.’

‘아니’는 백설하가 가이드를 불렀다.

당연히 백설하는 ‘아니’에 애착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내가 한 표는 먹고 시작하는 거고. 애들도 가사 정할 때 도움을 줬으니까.’

다른 멤버들도 ‘아니’에 애착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사실상 멤버들을 부른 순간부터 손혜빈의 패배는 정해져 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성필은 손혜빈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멤버들을 부른 건 홍규헌이긴 하지만, 여태까지 쌓은 멤버들과의 친밀도로 이긴 듯한 느낌이다.

사실은 멤버들의 의견도 2:2 동점이 나왔으나, 성필이 그것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 심하게 했었지?”

“뭐가?”

“그 곡. 지음 씨가 만들고 너도 열심히 도와줘서 가이드까지 만든 거잖아.”

“아, 그거. 괜찮아. 자기 생각 말하는 게 뭐가 나빠.”

“나도 ‘아니’는 좋다고 생각해. 일부러 좀 심하게 말했어. 네 생각이 너무 굳은 거 아닌가 해서, 좀 객관적으로 봐줬으면 좋겠어서.”

“누나는 다 계획이 있구나.”

“아직도 굳은 거 같긴 하지만.”

“그렇지 뭐. 완전히 꽂혔으니까.”

천천히 마신 것 같은데도 벌써 술의 양이 많이 줄었다.

“엘릭 님한테는 뭐라고 말해?”

“뭘 어째. 안 뽑혔다고 말해야지.”

“화낼까?”

“화내겠지 아마.”

“앞으론 우리한테 곡 안 주려고 하면?”

“못 받는 거지. 작곡가들 자존심 세거든. 예술가잖아. 예민한 사람들이야. 가수나 작사가, 나나 뭐 다 그렇지.”

“잘 좀 말해줘.”

“그래야지.”

둘은 적당히 술을 먹고 가게를 나왔다.

“으응!”

갑자기 손혜빈이 큰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우울한 거 끝! 이제 신나게 놀자!”

“놀자고? 내일 출근이잖아.”

“그럼 뭐 어때. 노래방 가자 노래방!”

성필은 손혜빈에게 끌려 노래방으로 갔다. 그녀는 정말로 오늘의 일을 다 잊었다는 듯 노래를 많이 부르고, 많이도 웃고, 또 많이도 먹었다.

밤 11시가 넘어 노래방에서 나온 둘은 대리운전을 불렀다.

기다리는 동안, 손혜빈이 배시시 웃었다.

“우리 성필이. 언제 이렇게 컸지?”

“누나는 언제까지 나 놀릴 건데. 또 뭔 말 하려고.”

“아니 정말 많이 컸잖아. 처음 봤을 땐 자그맣고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내가 수박 보고 호박이라고 하면 의심도 안 하고.”

“그 정도는 아니었어. 나도 소신 있는 놈이야.”

“응. 그랬었지. 지금도 그러네. 잘 컸다, 우리 성필이.”

손혜빈이 성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였으면 거칠게 손을 쳐냈겠지만, 오늘은 가만히 당해주었다.

* * *

성필은 일과에 따라 사장실에 들어가려다가 흠칫했다.

[나한테 만우절 장난치면 해고함]

살벌한 예고가 아닐 수 없다.

성필은 집에서 가져온 껌 상자 장난감을 주머니 깊숙이 쑤셔 넣었다.

껌을 뽑으면 바퀴벌레 모형이 나와 손가락을 무는 장난감이었는데, 자칫하면 해고당할 뻔했다.

“‘아니’ 녹음은 멤버들 역량이 갖춰지고 하자. 안무는…… 안무는 곡 완성본 나오면 해. 가이드로 진행하려니까 불안해. 앨범 디자인 관련해선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아침 회의가 끝났다.

성필은 멤버들을 학원에 태워주기 위해 연습실로 향했다.

그런데 중간에 리카를 만났다.

한눈에 봐도 꾀를 가득 담은 눈빛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분명 만우절 장난을 치려는 것이다.

성필이 선수를 쳤다.

“리카 너 어깨에 벌레 붙었어.”

“끼에에에에에엑!”

“만우절!”

“…….”

“으하하하핰!”

성필은 리카가 반격할 시간을 주지 않고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리카가 잔뜩 뿔이 나서 성필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가로 엔터의 만우절이 시작됐다.

“한 이사님.”

“네.”

“저 이직(移職) 고민 중이에요.”

“녜?! 바, 바바, 박 이사님이 나, 나가시면 저는 어 으어 어떡 어떡합니까? 아, 아니 갑자기 왜?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연봉 문제입니까?”

“만우절!”

“…….”

“낄낄.”

악의는 점점 전염되어갔다.

학교를 마치고 회사로 출근한 조아라는 희생양이 되기 딱 좋았다.

“아라 씨. 오늘 점심은 메뚜기튀김입니다. 시골 일손 돕기 갔다가 몇 마리 잡았습니다.”

“맛있겠네. 나 어릴 때 할아버지 집 가서 몇 개 먹고 그랬었는데.”

“어, 그, 그러십니까? 그, 죄송하지만 만우절…….”

“나한테 거짓말한 거예요?!”

“죄송합니다…….”

다만 조아라가 처음 마주한 악의는 너무도 순수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만우절의 바람은 저녁이 될 때까지 가로 엔터를 휩쓸었다.

주로 성필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는 작정이라도 한 듯 온갖 장난감을 가져왔다. 단순히 말로 하는 거짓말과는 격이 다른 정성이었다.

“아라쨩은 뭐 당했어?”

“바지 자크 열려 있다고.”

“그걸 속아?”

“아저씨 표정이 진짜 같았다고. 고개 숙이니까 인사 잘한다더라. 죽빵 먹였어야 했는데.”

“쌤은요?”

“과자 뚜껑 여니까 뱀 튀어나왔어…….”

“진짜 뱀이요?!”

“솜이랑 천으로 만든 거. 스프링으로 작동하는 건가 봐.”

“무서웠겠다.”

“그거 빌려서 혜빈 언니한테 써봤는데 혜빈 언니는 안 놀라더라.”

“유명인은 뭐가 다르네요.”

“옛날에 이미 박 이사님한테 당하셨대.”

“아……. 하양 언니는 어떤 거 당했어요?”

“……없어.”

“하이(네)?”

“없다고.”

장하양은 화가 난 듯한 표정이라, 리카는 차마 그녀에게 더 말을 걸지 못했다.

네 사람은 성필이 어떤 장난을 치고 다녔는지 계속 이야기했다.

전부 심한 건 아니었지만, 넷의 이야기가 모이니 성필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재간둥이가 되어 있었다.

“저 화나요! 박 이사님이 그렇게 설치고 다니는 건 못 봐요!”

“리카. 어른한테 ‘설친다’고 하면 안 돼.”

“그럼 뭐라고 하나요?”

“‘종횡무진 휘젓는다’?”

“박 이사님이 그렇게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건 못 봐요!”

“어른 놀리면 안 돼.”

“허락받으면 돼요!”

리카는 홍규헌에게 달려가서 팔을 허우적거리며 자신이 당한 부당한 처사를 설명했다.

“아타시(저)는 이사님이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는 걸 보고 싶어요!”

“재밌게 노는구만 왜 그래.”

“사장실 문에 붙은 종이 떼고 말하세요.”

“그래서, 나한테 허락받으러 왔다고?”

“네!”

“뭐 어떻게 길길이 날뛰게 할 건데?”

홍규헌도 성필의 분노에 대해선 관심이 있었다. 그가 화낼 만한 거짓말이 뭐가 있을까?

“고백해서 혼내줄 거예요!”

“어?”

“막, 엄청 당황하게 만들고! 고민도 하게 만들고! 제가 만우절이라고 말하면서 놀림거리로 만들 거예요! 진지하게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 순간 마구잡이로 놀려줄 거예요!”

“야, 리카. 그건 선 넘는 거야. 사람 마음 가지고…….”

“해도 됩니다.”

잠자코 있던 한구인이 미지근한 분노를 담아 말했다.

“리카 씨, 해도 됩니다. 꼭 해주십시오.”

한구인은 아침에 성필에게 당한 거짓말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다.

어떻게 ‘회사에서 나간다’는 거짓말을 하는가?

그건 지금까지 쌓은 신뢰에 대한 배반이다.

한구인은 아침부터 지금까지도 성필을 속일 수 있는 거짓말에 대해 연구했는데, 때마침 리카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준 것이다.

“……그래, 뭐어, 재밌겠네.”

홍규헌은 리카의 장난을 승인해주었다.

“혜빈 언니도 불러와요!”

“손 PD는 오늘 일 있어서 나갔어.”

손혜빈과 성필을 제외한 사람들은 사장실에 모여 장난을 준비했다.

“아타시(제)가 통화 켠 상태로 이사님한테 갈게요! 다들 제 활약을 들어주세요!”

리카가 의지를 다지며 사장실을 나섰다.

“박 이사님이 진짜 받아주면 어떡해요?”

백설하가 당연히 꺼냈어야 할 질문을 꺼냈다.

이런 장난이 무서운 이유가, 상대가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수습하기 매우 어렵단 것이다.

“받아주겠냐, 박 이사가.”

홍규헌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사님!]

홍규헌의 전화기로부터 힘찬 리카의 목소리가 울렸다.

리카가 사무실에 있는 성필에게 접근한 모양이었다.

모든 이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리카. 네가 어떤 장난을 쳐도 난 안 놀라. 단념하고 연습이나 하러 가.]

[그런 거 아니에요. 물어볼 거 있어서 왔어요.]

[고민 상담이야?]

성필이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뭔데.]

[저 가슴이 답답해요.]

[또 어디 아픈 거야? 맹장염 걸린 지 얼마나 됐다고. 많이 아파? 응급실 가볼까?]

[그게, 요즘 들어 이사님을 보면 심장이 빨리 뛰고 숨도 잘 안 쉬어지고, 눈도 마주치기 힘들어요. 왜 이럴까요?]

“얘 만화를 얼마나 본 거야.”

조아라가 학을 뗐다. 그녀의 손가락은 이미 오그라들어 점으로 모인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도 리카의 고백에 헛웃음을 지었다. 저런 식으로 말하면 누구든지 장난이라고 알아차릴 것이다.

[이건 무슨 감정이에요?]

[존경이야.]

[네?]

[네가 날 존경해서 그런 거야.]

“박 이사 장난인 거 알았다.”

이렇게 될 줄은 알았다.

[에, 그런가요……?]

[앞으로도 존경해줘.]

[네에, 아니 아니! 사람을 존경한다고 이러면 저는 역사책 볼 때마다 심장이 뛰겠죠!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요!]

[리카. 장난 그만해. 재미없어.]

[아…… 하이(네)…….]

리카의 목소리가 푹 수그러들었다.

회심의 거짓말이 먹히지 않은 게 영 마음에 안 든 것 같았다.

[박 이사님 나빠. 혼자만 재미 보고……. 한 번쯤은 속아달라구요…….]

[장난으로라도 그런 장난은 치면 안 돼. 특히 한 이사님한테는.]

한구인이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다들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가봐.]

[우으, 내년을 기대하세요!]

리카의 힘없는 발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리카. 잠깐 이리 와봐.]

[하이(네)?]

[너한테만 하는 말이거든. 비밀 지켜줄 수 있어?]

[저는 입이 무겁다구요!]

“누가 봐도 장난치려는 거잖아.”

“리카 얘는 또 의심 없이 속아 넘어가고 있네.”

성필은 말하겠다 해놓고서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전화기 꺼졌나? 아닌데.”

“혹시 필담 나누는 거 아닙니까?”

“하아, 박 이사 이거 진짜 만우절 대차게 이용해 먹네. 우리한테 돌아와서 장난치려고?”

“통화를 알아챈 게 더 무섭네요.”

“스피커 켜둔 걸 어떻게 알아요. 리카가 폰 뒷주머니에 넣고 있는데.”

장난이 정말 끝났음을 알고 모두의 흥미가 식어갈 즘.

리카가 평소와 달리 진중한 투로 물었다.

[하기 힘드신 이야기인가요?]

[리카. 나 곧 회사 나갈 거야.]

[에에에엑?!]

[이번에 곡 수급하면서 느꼈는데, 나랑 사장님이랑 안 맞아.]

[나, 아, 아아, 안 맞으면 대, 대화로 풀어야죠!]

“리카 얘 설마 저 말 믿는 거냐?”

“그런 거 같은데요…….”

허둥대는 리카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진다.

[그래 봐야지. 근데 안 될 거 같아. 이미 몇 번 이야기 나눴는데, 내 생각이랑 사장님 생각이랑 전혀 달라.]

[손나(그런)…….]

[너한테는 미리 말해야 할 거 같아서.]

[…….]

[미안.]

[우으, 우라기리모노(배신자)! 계속 여기 있는다면서요! 저 꼬셔놓을 때는 언제고 갑자기 나가면……!]

[그래서 말인데. 너도 같이 나가자.]

[에.]

“둘이 짜고 말하는 거야? 아님 리카가 진짜로 믿는 거야?”

“리카가 바보 같은데요.”

[나가면, 나가면 위약금 내야 해요……. 나가면 안 돼요. 그, 이사님도 노력, 노력해주세요! 제가 사장님 설득하는 거 도와드릴게요!]

[내가 위약금 내줄게.]

[에.]

[어떡할래?]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 끝에 포기한 듯한 성필의 말이 이어졌다.

[……알겠어. 이 얘기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어이가 없네.”

홍규헌이 피식 웃었다.

몰래카메라 같은 건 나쁜 취향을 가진 사람이나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까 흥미로움의 격이 다르다.

‘이 정도면 리카도 눈치채겠네.’

같이 나가자고 해놓고 무엇을 할 건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다짜고짜 나가자고 하는데 의심 한 번 안 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성필의 포기가 말도 안 되게 빠르기도 하고.

아무리 리카라도 이 시점에선 장난이란 사실을 알 것이다.

‘박 이사도 이제 장난 끝내려는 거겠지.’

[우으, 가, 갈게요. 이사님 따라갈게요오……. 저 놔두고 가지 마세요오…….]

“……?!”

홍규헌이 뒤집힐 듯 몸을 크게 떨었다.

“쟤, 쟤 방금 뭐라고 했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리카의 충격적인 대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리카가, 회사를 버리고, 성필을 따라간다고 했다.

[뚜둑]

통화가 끊겼다.

이제 사장실 안에는 침묵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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