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2화 (72/760)

#072화

“설하 씨한테 가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건…….”

그러면 장하양이 성필에게 백설하의 고민을 말했단 것이 알려진다.

백설하는 자신의 고민이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게 분명하다. 장하양에게 말한 것도 비밀을 지켜주리라 생각해서다.

“……안 되겠지.”

성필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되새겨보았다.

멤버들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믿는다.’, ‘응원한다.’와 같은 말을 자주 하긴 했다.

하지만 그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리란 생각은 한 적도 없다.

‘로젠탈 효과라고 하지. 교사가 학생의 능력을 믿어주면 학생의 성적이 올라가는 거.’

성필은 그 이론을 믿고 멤버들을 전심전력으로 믿었다.

그게 오히려 부담이었다니…….

문득 성필의 생각이 다른 멤버들에게도 미쳤다.

“하양이 너도 부담스러워?”

“아니요. 저는 이사님이 저 믿어주시는 게 좋아요.”

“고맙다.”

“장기랑 집문서 거셔도 돼요. 꼭 성공할게요.”

신뢰에 너무 무겁게 보답하는 거 아닌가.

“리카랑 아라는?”

“둘 다 저랑 비슷해요.”

“설하 씨는 이미 아이돌 활동하다가 해체돼서 그런가. 다른 애들보다 고민이 많으시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을 두면서 천천히 부담감을 줄여줘야 할까. 아니면 날 잡고 불안이 사라질 때까지 대화해야 할까.

“이사님. 저 생각이 하나 있는데.”

“뭔데?”

“저는 이게 연애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연애?”

“연인이 있어요. 그런데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예전보다 안 좋아하는 것 같고, 이제 사랑이 식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막 불안해하면서 혼자만 끙끙 앓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가 말하는 거예요. ‘너 아직도 나 사랑해?’”

“헤어질 각 잡는 거야?”

“아니요. 남자도 여자랑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거죠. 서로가 서로한테 익숙해져서 표현만 줄었던 거예요. 암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 말을 들은 여자의 마음을 생각해보세요.”

“아.”

여자는 남자도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단 것을 알면 안심이 되겠지.

오히려 남자를 안심시켜주려고 할 것이다.

둘의 사랑은 더욱 끈끈해지지 않을까.

“이런 맥락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 보면 어떨까요.”

요컨대, 성필도 백설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면 된다.

실패했을 때 멤버들이 자신을 싫어하거나 사이가 멀어질 게 걱정된다, 그런 맥락으로 말이다.

“그거면 나도 자연스럽게 얘기 꺼낼 수 있겠네. 하양이 너 천재야?”

“아하하. 머리 좋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네요.”

부자연스럽지 않게 백설하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발한 접근법이지만, 그 예시가 연애란 게 조금 특이했다.

‘연애 경험이 많아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가?’

장하양이야 줄 서 있는 남자들 골라잡아도 될 정도이니, 당연히 연애야 많이 해봤겠지.

“고마워. 며칠 뒤에 시도해볼게.”

“네. 부탁드릴게요.”

“말해줘서 고맙다. 다음에도 설하 씨가 고민 같은 거 하고 있으면 나한테 말해줬음 좋겠어.”

원래 멤버들의 관리는 백설하의 역할이었다. 그녀가 리더가 될 게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문제는 백설하 자체에게 있었고, 그녀가 이런 고민을 자신의 입으로 할 리도 없다.

장하양이 없었으면 백설하의 마음속에서만 곯아갈 고민이었다.

“이사님, 그리고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요.”

“응. 뭔데?”

“리카요.”

설마 리카에게도 뭔가 일이 생긴 건가?

“이사님이랑 너무 친밀한 거 같아요.”

“……친밀하면 좋은 거 아니야?”

“일반적인 수준 이상으로 친밀한 거 같다는 뜻이에요. 이사님한테 달라붙고 그러잖아요.”

달라붙는다?

그야 달라붙긴 하지.

“보통 그러나요?”

보통 안 그러지.

“근데…… 뭐, 리카는 애잖아.”

“네?”

장하양은 신기한 자연적 현상이라도 본 사람처럼 순간적으로 넋을 잃었다.

“리카가 애라고요?”

“야, 네가 그러니까 내가 더 당황스럽네. 뭐 걔도 19살이긴 한데 하는 행동이나 생긴 거 보면 그냥 애잖아.”

“네?”

“내가 걔한테 이상한 마음 품을까 봐 그래?”

“아뇨, 그렇단 게 아니라…… 음.”

“나한테는 뭐랄까. 조카처럼 느껴져. 안 그래도 고향에서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온 애잖아. 의지할 곳도 마땅치 않을 텐데 나라도 그 역할이 돼 줄 수 있으면 다행이지. 리카가 처음 우리 회사 들어왔을 때도 외로워하는 게 보이더라고.”

장하양은 점점 혼돈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아, 아니요. 제가 리카랑 이사님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란 게 아니라…… 막…… 리카가…… 달라붙잖아요? 그거 괜찮나요?”

“네 말도 일리가 있네. 앞으로는 하지 말라고 할게.”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이사님 정말 아무런 느낌도 안 드셨던 거예요?”

성필은 장하양의 감정을 쫓아갈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충격적이란 듯이 반응하는 거지?

“이사님 동성애자는 아니시죠……?”

“어이가 없네.”

장하양은 핸드폰을 뒤적여서 리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리카예요.”

“리카네.”

“리카 생긴 거 보세요.”

“어, 리카네.”

“이런 애가 이사님을 껴안고 그러는데 아무런 마음도 안 드셨어요? 그냥 성인 여자잖아요. 애가 아니에요.”

“어?”

“네?”

“리카가?”

“네.”

이번에는 성필이 혼란에 빠졌다.

“아니, 리카는 원래 이랬고. 무슨. 애잖아.”

성필은 자신의 핸드폰 갤러리를 쭉 훝었다.

그러다가 과거 리카의 사진에 눈길이 닿았다.

1년 전.

“뭐야.”

지금과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

아니, 완전히라고 할 법한 급은 아니지만 느낌이 엄청나게 달라졌다.

귀여운 햄스터 같던 리카는 현재에 이르러선 완연한 성숙함을 뽐내고 있었다.

1년 전과 지금의 사진을 비교하던 성필은 인지 부조화에 빠졌다.

“이거 뭔데…….”

과장 조금 더 보태서, 성필은 1년 넘게 매일 리카를 보았다.

그래서 그녀의 성장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예 긴 시간을 두고 가끔 만나면 변화가 눈에 띄었겠지만, 매일 마주하고 있으니 달라진단 느낌조차 받지 못한 것이다.

1년 전의 인상이 머릿속에 남았기에 성필은 여전히 리카가 애로 보였다.

그래서 리카가 달라붙는 것을 조카의 애교 정도로 받아들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아마 한구인과 홍규헌은 성필과 비슷했을 것이다.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 손혜빈이나 정지음, 장하양 정도였다. 다만 성필과 리카, 홍규헌과 한구인이 너무 자연스럽게 여기니 말을 못 꺼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혜빈 누나랑 프로젝트 포유 작가님도 리카가 제일 예쁘다고 했었지.’

1년 전의 리카로 이미지가 고정된 성필은 공감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알겠다.

지금의 리카는, 전생에 얼굴 하나만으로도 일본 열도를 휩쓸었던 시절에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이른바 소녀에서 숙녀로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단 것이다.

“하양이 네 말이 맞다.”

“그렇죠?”

“근데 내가 달라붙지 말라고 하면, 그, 뭐냐. 내가 리카를 여자로 생각한다고 광고하는 거 같잖아.”

“제가 말할게요.”

“그래 줄래? 잘 좀 말해줘.”

“네. 언젠가 고쳐야 할 버릇이었잖아요.”

“그렇지.”

성필과 장하양은 각자 과제를 하나씩 떠안고 응접실을 나왔다.

* * *

오늘은 마지막 음악사 수업이 있는 날이다.

처음에는 진지하게 수업을 한다기보다는 멤버들이 숨통을 틀 시간을 만들어주자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수업이 계속되며 음악적인 안목이 생겨가는 멤버들을 보니, 음악사를 가르치길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성필은 노트북과 프린트물을 들고 교실로 들어갔다.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 멤버들을 바라보고 있자.

‘리카가 없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성필은 뒤로 돌아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를 향해 돌진하던 리카의 이마를 성필의 손바닥이 막아냈다.

“아앗! 어떻게 아셨어요!”

리카가 포옹해달라는 듯 팔을 버둥거렸다.

“자리로 돌아가.”

“마지막 수업이잖아요! 작별의 포옹!”

“수업 시작도 안 했잖아.”

이전에 장하양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리카가 달라붙는 게 과도하다고 했었는데, 계속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성필은 조심스레 멤버들의 기색을 살폈다.

조아라는 관심 없다는 듯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고, 백설하는 성필과 리카의 장난이 언제 끝날지 기다리고 있었다.

‘저 둘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네.’

두 사람의 눈에도 아직 리카가 어린아이로 보이는 모양이다.

성필은 리카를 자리에 앉히고 수업을 시작했다.

영국 록의 역사.

영미권 대중음악의 역사.

J-POP의 흐름과 아이돌 문화.

EDM의 등장과 현재.

성필의 음악사 수업은 그 모든 것을 거쳐 오늘에 도달했다.

“자, 수업의 마지막으로 들을 노래는 이거야.”

약 3분 30초에 달하는 노래가 끝났다.

“어때?”

“좋아요!”

리카의 대답이 모든 멤버들의 감상을 대변했다.

이 곡은 그냥 좋다.

“팝스타 레샤의 ‘clock’이란 곡이야. 언제 나왔을까? 아라야, 한번 맞춰볼래?”

“몰라요.”

조아라는 질문에 장난으로 답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진지한 답을 내는 건 꺼려했다.

틀리면 창피해서일 것이다.

성필은 그녀에게 집요히 물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단 바람이 있었기에, 여태껏 일부러 그녀를 자주 지목해왔다.

성필의 집요함에 패배한 조아라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한 2, 3년 전?”

“이 곡은 12년 전에 나왔어.”

12년이란 말에 멤버들이 깜짝 놀랐다.

조아라는 자신이 틀렸단 사실에 또 표정이 안 좋아졌다.

“아라 네가 이상한 게 아니야. 내 생각이지만 ‘clock’은 팝의 클래식이야. 지금 들어도 전혀 구식처럼 느껴지지 않아. 곡을 만든 사람도, 부른 아티스트도 거장이란 이름을 붙이기 부끄럽지 않지.”

대중음악의 역사에는 가끔 이런 걸출한 곡이 탄생하곤 한다.

“현재도 최장기간 빌보드 차트 1위 기록을 지키는 곡이기도 하고. 나는…….”

성필은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너희들도 레샤와 같은 아티스트를 목표로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백설하를 보니 그런 말이 쏙 들어갔다.

그녀가 다시금 부담감을 느끼지 않길 바랐다.

“너희들이 이 곡에서 무언가 발견했으면 좋겠어. 어째서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했는지. 무엇이 이 곡을 전설의 반열에 올려뒀는지. 내 생각을 그냥 듣는 것보다 스스로 생각하는 쪽이 나을 거 같아. 그럼…….”

성필이 노트북을 껐다.

“음악사 수업은 이걸로 끝이야.”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끝이라구요? 이렇게 빨리요?”

“응. 끝. 오늘로 끝이야. 다들 잘 따라와 줬어.”

저마다 음악사 수업에 가지는 감정과 의미가 달랐으나, 수업의 끝에 찾아온 기분은 같았다.

섭섭하다.

마치 2학기 끝자락에 있는 수업을 들은 학생들처럼, 그녀들은 가슴이 공허해졌다.

“수고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은 빨리 끝났으니까 좀 쉬어.”

멤버들은 수업이 일찍 끝났단 사실에 순순히 기뻐하지 못했다.

각자 조금씩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며 교실을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설하가 나가려 할 때, 성필이 준비해 온 프린트물을 일부러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

그것을 본 백설하가 곧장 도와주러 왔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사무실까지 같이 옮겨다 드릴까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성필은 오늘 수업에 필요하지도 않은 책이나 기자재들을 많이 가져왔다.

백설하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성필이 먼저 도와달라고 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연스레 둘만 있을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둘은 사무실로 들어왔다.

미리 조사했던 대로 한구인과 손혜빈도 없었다.

“후우.”

성필은 핸드폰을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멤버들 앞에서 한숨 쉬는 경우는 드물었다.

백설하가 곧장 반응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요. 그냥.”

성필이 뭔가 사연 있는 기색을 보이자 백설하는 나가지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고민 있으면 말씀하시라고 할까? 내가 들어준다고? 내가 그래도 괜찮나? 아니면 그냥 자리를 비켜드려야 하나……?’

어색한 침묵이 흐른 끝에 성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옛날 회사 사람들 때문에요.”

“아, 옛날 회사 분들이요. 그분들이 왜요?”

“그냥 옛날에 제가 매니저로서 붙었던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네.”

“얼굴을 안 보면 멀어지는 게 당연하지만, 점점 아예 모르는 사람이 돼 가는 것 같아서요. 가끔 연락하는 건데도 답장이 안 오고, 뭐, 답답해서요.”

백설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성필의 이야기는 그녀의 고민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나이 먹어서 그런가 쓸데없는 생각만 많아지네요. 당시에는 정말 친하고 함께 성장해나가는 그런 관계였는데, 안 좋게 끝나면 그때의 일이 아예 없던 게 되고 그러거든요.”

“아…… 속상하시겠다.”

“뭔가. 아예 관계나 추억 자체가 사라지는 거 같은…….”

성필은 씁쓸한 눈빛으로 백설하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시선을 피하고,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다시 그녀를 바라보는.

그런 고민 깊은 행동들을 연이어서 했다.

백설하는 이토록 조심스런 성필을 처음 보았다.

맞는 건 맞고, 아닌 건 아니라고 당당히 말하는 평소의 성필과 너무도 달랐다.

“가로 엔터도 미래엔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저는 이 시간이 정말 소중하고 좋은데, 미래에는 아예 없었던 일처럼 되지 않을까……. 만약 실패하면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될 거 같아서요. 옛날에 같이 일했던 사람들 보면 자꾸 그런 생각이 드네요.”

“…….”

대답은 없었다.

바로 답하기에는 무거운 주제이기도 했다.

성필은 방금 대화를 없던 것으로 만들려는 듯 쾌활한 목소리를 만들었다.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네. 해보지도 않고 망할 것부터 말하면 안 되는데 말예요. 사귀기도 전에 헤어질 거 생각하는…….”

“절대 안 그럴 거예요.”

“네?”

“저희 잘 안 돼도, 저희 관계까지 없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예. 그러면 좋겠네요.”

성필은 기쁘단 듯 미소 지었으나, 내심 그리 생각하지 않는단 게 느껴졌다.

백설하는 조금 흥분한 기색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사님. 만약에요. 만약 가로 엔터가 망해서 저희들이 전부 뿔뿔이 흩어지면요. 저는 한두 달에 한 번씩 이사님한테 연락해서 약속을 잡을 거예요.”

“약속요?”

“밥을 먹든지 술을 먹든지.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옛날에 이런 일도 있었죠. 지금 하시는 일이 잘 됐으면 좋겠네요. 이런 시답잖은 말을 하다가 헤어지고. 또 한두 달에 한 번씩 만나고 그럴 거예요.”

예시가 너무 구체적이지 않나.

마치 이런 상상을 수백 번도 더 해본 사람 같았다.

“저는 직장에서 가끔 갤러리를 펼쳐서 옛날 사진을 찾겠죠. 그리고 동료들한테 이 순간의 사진을 보여줄 거예요. ‘나는 옛날에 아이돌이었다.’라구요. 추억엔 점점 먼지가 쌓여가겠지만, 그게 없던 일은 아닐 거예요. 가끔은 가로 엔터 사람들이 전부 모여서 추억에서 먼지를 털어낼 거예요. 그, 그러니까요.”

백설하는 손끝을 움찔대다가 결심한 듯 성필의 손을 잡았다.

용기를 주려는 듯 손에 힘을 꽉 쥔 채였다.

“그런 거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실패하더라도 이사님이나 사장님 탓하지 않아요. 없던 기억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아요. 계속 소, 소중한 관계로, 다들 남았으면 좋겠어요.”

“…….”

“이, 이사님은요?”

“저도요.”

백설하는 안심한 듯 손을 놓았다.

“저어, 저는 이제 가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후다닥 사무실을 나갔다. 성필은 그녀의 온기가 남은 손을 보았다.

‘실패해도…….’

백설하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단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생겼다.

그러니 더 열심히 일하자.

백설하가 그딴 고민은 생각도 못 하도록.

* * *

“만약 실패하면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될 거 같아서요. 옛날에 같이 일했던 사람들 보면 자꾸 그런 생각이 드네요.”

성필에게 그 말을 듣는 백설하는 얼굴에 힘을 줘야만 했다.

‘나만 이런 게 아니었어.’

집중하지 않으면 미소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어.’

백설하는 성필의 고민을 들으며 안타까움보다 안도가 더 컸다.

타인의 고뇌로 걱정보다 기쁨이 더 크다니, 절대 밖으로는 내보내지 못할 감정이다.

그래서 웃음이 비집고 나오지 못하게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네. 해보지도 않고 망할 것부터 말하면 안 되는데 말이에요.”

성필이 말을 끝내려 하자, 백설하는 재빠르게 그 틈을 치고 들어갔다.

“절대 안 그럴 거예요.”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생각을 전부 털어놓았다.

성필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며 망상했던 내용을 말한 것이다.

“예. 그러면 좋겠네요.”

여전히 성필이 의심의 기색을 지우지 못하자, 백설하는 용기를 내어 성필의 손을 잡았다.

온기로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계속 소, 소중한 관계로, 다들 남았으면 좋겠어요. 이, 이사님은요?”

“저도요.”

백설하는 자신의 마음이 제대로 전달된 것 같아 기뻤다.

아니, 사실 성필이 위로받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성필도 자신과 같은 고민을 했단 것이다.

그도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한다.

그것을 안 것만으로도 백설하는 행복했다.

“저어, 저는 이제 가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백설하는 후다닥 사무실을 나갔다.

마치 꿈이 이루어진 것 같은 몽롱한 기분으로 복도를 거닐었다.

잠시 후, 가슴 속에서 자그마한 죄책감이 피어났다.

‘더 열심히 하자. 더 믿음을 드리자.’

앞으로, 이사님이 그딴 고민은 생각도 못 하도록.

* * *

곡 아이디어 회의는 쭉 진행됐다.

지지부진한 느낌도 있었으나, 성필이 백설하의 고민을 해결한 뒤로 큰 진전을 보였다.

백설하는 주도적으로 곡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정말 아무 말 대잔치 수준이었다.

“저희의 상황을 수족관에 비유하는 건 어떨까요? 그럼 저희는 물고기니까, 아라는 상어 어때?”

“학교도 좋겠다. 저희한텐 약간 억압의 상징 같지 않아요? 자유라는 컨셉엔 학교가 어울릴 거 같아요.”

“감옥! 죄수복 느낌으로 의상 입어도 좋겠어요!”

백설하가 그리 나오니 멤버들도 자극을 받아 온갖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아라가 제시한 컨셉은…….”

“○스 앤 드러그스 앤 로큰롤.”

“너희들이 밴드 악기 하나씩 다 배우면 하는 걸로 하자.”

“그럼 로큰롤 빼고 ○스 앤 드러그스.”

“그만.”

“드러그는 불법이라서 그래요? 그럼 섹…….”

“너 이거 나한테 성희롱하는 거야! 그만해!”

“우우, 꼰대다 꼰대. 언젠 성해방이니 뭐니 했으면서.”

이상한 의견도 많긴 했으나, 며칠에 걸친 브레인스토밍을 거쳐 그럴듯한 윤곽이 나왔다.

“좋아. 그럼 중심 의견을 다 합쳐보면…….”

[부모, 국가, 학교, 사회에 반항하고 저항하며 자신만의 개성을 찾아가는 청소년의 드라마틱하고 꿈이 담긴 이야기인데 사랑도 조금 있었으면 좋겠다.]

“……난 이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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