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엘릭은 아이돌들에게 곡을 줄 때도 직접 만나는 일이 드물었다.
회사로부터 아이돌의 영상을 받아 보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가로 엔터 멤버들이 직접 퍼포먼스를 보이자 생각보다 훨씬 신났다.
‘진짜 아이돌 같다.’
엘릭이 한국 음악계에 몸을 담은 지 거의 10년이다. 하지만 정작 가수들의 무대를 직접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선천적 집돌이인 그는 작업실이 곧 놀이공원이고 집이고 카페고 음식점이었다.
‘내가 만든 곡인데 직접 보고 싶지 않냐고? 인터넷에서 보면 되잖아?’
항상 그런 사고방식을 가졌던 엘릭이다.
요컨대, 엘릭에게 멤버들의 퍼포먼스는 매우 커다란 자극이 됐다.
하지만 중간에 실수가 있었다.
코러스에서 백설하가 한 번 음 이탈이 된 것이다. 그래도 금방 수습해서 그다지 거슬리지는 않았다.
“제가 딱히 춤을 보는 눈이 없긴 한데요. 이거 원래 안무 없는 거 아닌가요?”
멤버들이 엘릭에게 보여준 건 EMC의 ‘Oh my own’이었다.
그녀들이 최초의 월간 평가 때 단체 곡으로 보여준 것이다.
“예. 애들이 직접 안무 짰어요.”
“직접요? 와아, 대단하네요.”
그 말을 들은 조아라의 광대가 승천할 듯 올라갔다.
대부분의 안무는 조아라가 설계했었다.
“저분 좋은 사람 같지 않아?”
“아라쨩은 가드가 너무 낮아.”
엘릭은 안 그래도 멤버들이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가 손혜빈의 주접까지 더해졌다.
“너 설하 씨 노래 얼마나 잘 부르는지 모르지? 솔로로 데뷔해도 차트 막 휩쓸걸? 리얼 고음곡 한 번 들으면 소름 쫘자작 돋는다?”
“네가 칭찬하는 거면 진짜 잘 부르시나 보네.”
“나보다 더 잘 불러.”
“넌 댄스 가수였…….”
“댄스 가수는 노래 못 부른단 거야?!”
“아, 아니.”
손혜빈은 백설하의 얼굴이 홍당무가 될 정도로 띄워주었다.
내친김에 백설하는 노래까지 불렀다.
마이크가 없는데도 연습실을 가득 채울 정도로 성량이 컸고, 그런데도 과한 느낌이 없었다.
엘릭은 거의 구미호에 홀려버린 선비처럼 되어버렸다. 멤버들은 보면 볼수록 매력이 있었다.
“오늘은 직접 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정해진 일정을 끝내고 슬슬 헤어질 준비를 했다.
홍규헌은 그와 악수하고 직접 바깥까지 배웅해주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곡은…….”
엘릭이 곡에 대해 운을 떼자 홍규헌이 긴장했다.
오늘 그가 온 이유는 가로 엔터의 멤버들이 자신의 곡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일부러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곡’이란 말조차 꺼내지 않았는데, 그가 먼저 말한 것이다.
“갑작스럽지만 지금 바로 들려드려도 괜찮을까요?”
“……지금요? 가져오셨나요?”
“밖에 나갈 땐 항상 작업용 노트북 들고 다니거든요. 안에 작업물도 다 있어요. 직접 연습생들 보니까 생각보다 느낌이 훨씬 좋았어요. 마침 딱 맞는 곡도 있고.”
“아, 저희야 고맙죠.”
손혜빈이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엘릭은 빈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으면 정말 마음에 든단 뜻이었다.
이대로라면 가로 엔터가 그의 곡을 받는 것도 꿈이 아니다.
기대감에 부푼 홍규헌, 손혜빈과 달리 성필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러면 지음 씨 곡을 못 쓸 텐데…….’
생각을 닫아두는 건 좋지 않다.
하지만 성필은 요 며칠 동안 정지음의 일번곡을 쓸 생각만 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그 곡에 맞춰 춤추는 멤버들을 수백 번도 더 그려왔다.
미묘한 불안감을 가지고, 성필은 엘릭과 홍규헌의 뒤를 따랐다.
“자, 틀게요.”
‘좋다’라고 생각하는 덴 딱 3초면 충분했다.
첫 멜로디부터 사람의 귀를 사로잡는다.
초반부터 모든 사운드를 쏟으며, 곡 시작 6초 만에 바로 보컬이 튀어나왔다.
‘가이드가 입혀져 있네?’
가이드 보컬의 실력도 출중했다.
보컬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 상태 그대로 출시하더라도 문제없을 수준이다.
‘와, 이건 진짜…….’
성필이 혀를 내둘렀다.
한 번 듣자마자 팬으로 만들어 보이겠단 의지가 가득 담긴 곡이었다.
곡 초반에 후렴구를 배치한 것부터가 그랬다.
엘릭이 얼마만큼 자신의 작곡 실력에 자신이 있는지 알겠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절대 오만이 아니었다.
‘하이라이트도 좋아.’
곡이 끝났다.
회의실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저마다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곡이, 이렇게 좋은 곡을…….
“이걸 저희한테 파신다고요?”
“네.”
엘릭이 즉답했다.
“음.”
홍규헌도 저돌적인 엘릭의 태도에 뭐라 답할지 고민해야 했다.
그의 곡은 좋다. 정말 좋다.
방금 들었는데도 멜로디가 귓가에 맴돈다.
“그리고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요. 제가 투자도 좀 할 수 있는데요.”
“투자를요?”
“예. 아, 저도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요. 정말 확 하고 느낌이 와요. 연습생분들한테서요. 이 곡이랑도 딱 맞아요.”
홍규헌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지? 이거 꿈인가?
유명 작곡가의 곡을 얻은 것도 모자라서 투자까지 받는다고?
“야, 너 혼자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야? 아직 네 곡 어떤지 피드백도 못 들었잖아.”
“뭐, 글킨 한데…….”
꼭 들어야 해? 그리 말하는 듯한 태도다.
정상에 선 인간은 이 정도로 자신감이 있을 수 있구나, 감탄스러울 정도다.
“제가 이 곡도 드리고 투자도 하는데요, 대신 이번 앨범 프로듀싱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세요.”
엘릭은 멈추지 않았다.
적을 발견한 코뿔소처럼 달려가기만 했다.
“느낌 왔어요. 딱 왔어요. 쟤들은…… 아, 죄송. 그분들은 몽환 청순으로 가야 해요.”
홍규헌은 입을 다물고 엘릭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성필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성필은 무릎을 꽉 쥔 채 입술이 터져라 깨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지만 겨우 참고 있단 태도였다.
“주요 타깃은 남자로 하고요. 의상 컨셉은…….”
“야 그만해!”
손혜빈이 엘릭의 옆구리를 강타함으로써 그의 폭주를 멈추었다.
엘릭은 책상에 머리를 박고 고꾸라졌다.
“실례 좀 그만해. 사장님,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끄어, 억…….”
“얘가 뭐 하나 눈에 들어오면 아무거나 막 뱉어내거든요.”
“우, 엑…….”
“그래도 얘가 한 말이 다 거짓말이란 건 아니고요. 저도 얘가 이러는 거 처음 보는데, 우리 애들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그러게. 사장으로서 기분이 좋네요.”
홍규헌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면서 고민하고 있단 뉘앙스를 보였다.
엘릭의 눈이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위아래로 움직였다.
느낌이 왔단 건 거짓이 아닌 듯, 그의 눈동자에서는 프로듀싱에 대한 열망이 보였다.
‘박 이사가 우리 애들은 전부 보석이랬지. 사람들 보는 거 다 똑같구나.’
보석이 한가득 모여 있는데 눈이 안 돌아가고 배길까.
홍규헌은 한구인을 보았다. 그는 맡기겠단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성필을 보았다.
‘안 돼요 사장님. 제발 안 돼요. 안 된다고 해주세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라고 말하는 듯 절박한 눈빛이었다.
홍규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리카. 여기 뭐가 보여?”
“드럼이요!”
“응, 드럼이야.”
정지음은 날을 꼬박 새워서 미디 작곡 레슨 계획표를 만들었다.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처음 가르쳐보는 것 치고는 기초부터 잘 전달할 수 있었다.
“이게 뭐라고?”
“킥 드럼이요! 발로 차는 드럼!”
“이건?”
“스내어요! 중간은 탐! 위에 건 심벌즈!”
“잘했어. 배우는 게 빠르네.”
“에헤헤. 오빠가 잘 가르쳐주셔서 그래요!”
정지음의 호칭은 작곡가가 아니라 오빠로 정착됐다.
사실 리카는 그가 레슨을 하러 왔을 때 다른 호칭으로 불렀었다.
“오니쨩(오빠)!”
“그건 진짜 하지 마라 씹덕아.”
조아라의 제지를 받고 오빠로 변환된 것이다.
정지음은 내심 섭섭했다.
첫날 레슨은 악기의 종류를 알려주는 것으로 끝났다. 리카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방을 나갔고, 정지음은 조금 더 있기로 했다.
툭. 툭. 툭. 툭. 툭.
스내어 드럼이 일정한 박자를 내며 이어졌다.
마치 정지음의 내면을 표현하듯 규칙적이고 감정이 없었다.
‘지금 엘릭이 이 건물에 있는 거지…….’
곡을 주러 왔다고 한다.
‘엘릭. 유명한 작곡가지. 능력도 있고. 엘릭에게서 곡을 받으면 좋을 거야.’
그러면 정지음 자신의 곡은 잊힐 것이다.
비록 성필이 그토록 칭찬해 마지않았지만, 엘릭을 상대로 어떡하겠는가.
아이돌이란 건 일단 떠야 한다.
꿈이나 이상만 가지고 곡을 선택할 수는 없다. 안전하면서도 좋은 곡을 택하는 게 옳다.
그래도 씁쓸하긴 하다.
‘엘릭의 곡을 택하게 되면 박 이사님이 나한테 미안해하실 수도 있겠지. 섭섭한 티 내지 말자.’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정지음은 기분이 안 좋아졌다.
어장관리 당하다가 버려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유령 작가 신세 탈출하자마자 곡을 팔 수 있을 리가 없지. 너무 꽃밭에만 있지 말자. 이렇게 미디 레슨 알바 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충분히 긍정적이잖아.’
정지음은 작곡 프로그램을 열었다.
그날 성필이 찬사를 보냈던 곡에는 보컬 라인이 입혀져 있었다.
가로 엔터의 홈페이지를 본 날, 미친 사람처럼 밤을 새워 만든 것이다.
그날은 밥도 먹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고, 창작의 열정에만 사로잡혔었다. 멤버들을 생각하면 손이 멈추지 않았었다.
‘이건…….’
보여주지 말자.
설령 성필이 이걸 좋다고 판단하더라도, 엘릭의 곡을 받는 게 가로 엔터에겐 더 이득일 것이다.
* * *
성필은 주섬주섬 빈 회의실 테이블에 어질러져 있는 서류들을 정리했다.
그의 얼굴에는 우울감이 가득했다.
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인 하이힐 소리, 홍규헌이다.
문이 열려도 성필은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홍규헌을 보면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박 이사.”
홍규헌이 성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성필이 놀람을 숨기며 그녀를 보았다.
“섭섭했어?”
홍규헌은 앉으라는 듯 성필의 어깨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둘은 서로를 보며 의자에 앉았다.
“아니요.”
“섭섭했잖아.”
아, 이 느낌 안다.
성필은 어릴 적의 기억으로 빠져들었다.
어머니는 성필이 화가 나면 뒤에서 안아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우리 성필이 화났어?’
그럼 성필은 ‘화 안 났어!’라며 날카롭게 답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럴수록 어머니는 더 꼭 안아주면서 ‘화난 거 같은데?’라고 했다.
성필은 반항하다가, 곧 울면서 자신이 섭섭했던 것을 털어놓았다.
딱 그 느낌이다.
“…….”
성필이 눈가를 씰룩이자 홍규헌은 그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그의 입에 물리고, 자신도 담배를 물었다.
성필은 말없이 홍규헌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려 했다.
틱, 틱, 틱.
라이터 기름이 다 떨어졌는지 불이 잘 안 붙었다. 홍규헌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얼마 안 가 불이 붙었다.
성필도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다.
틱, 틱, 틱.
“박 이사.”
홍규헌이 자신의 담배 끝을 성필의 담배 끝과 맞추었다.
성필은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숨을 헙 삼켰다.
“으헤(뭐해). 빠히 빠아(빨리 빨아).”
성필이 담배를 깊이 빨았다.
불이 붙었다.
둘은 말없이 담배를 태웠다.
“여기서 담배 피워도 돼요?”
“안 되지. 환풍구는 있어도. 한 이사가 화낼걸. 사장실에서만 피우기로 했거든.”
“냄새 다 밸 텐데요.”
“그럼 뭐어, 혼나면 되지.”
홍규헌이 준 담배는 독했다.
리카가 회사에 들어온 뒤로 피우는 담배의 수를 점점 줄여나가던 성필이라, 홍규헌의 독한 담배는 목을 긁어내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최대한 기침을 참았다.
알 수 없는 자존심 때문에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내가 엘릭 칭찬해서 화난 거야?”
“…….”
“계속 웃어주고?”
“…….”
“너 무시한 거 같아서?”
“…….”
솔직히 화났다. 삐졌다.
그러나 성필은 이게 비상식적인 분노란 것을 알았다.
가로 엔터는 기획사다.
좋은 작곡가가 곡도 주고 투자도 제안하면 반색하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성필은 그걸 좋게 볼 수 없었다.
석세스 엔터의 윤상열이 생각나서였다.
그가 들어오고 나서, 형제나 다름없던 김태훈 대표는 점점 성필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성필이 회사를 떠난단 말까지 했음에도, 김태훈은 윤상열을 택했다.
같이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성필은 홍규헌과 엘릭에, 김태훈과 윤상열을 덧씌워 본 것이다.
“자, 잠깐, 야. 너 우냐?”
“아니요…….”
“너 왜 이래. 고작 이런 걸로. 아니, 야…….”
홍규헌이 셔츠 소매로 성필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녀는 적잖이 당황했다.
성인 남자가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건 살면서 처음 봤다.
고백했다가 술 먹고 차여서 우는 놈을 보긴 했는데, 그건 맨정신이 아니었잖은가.
성필은 맨정신이다.
“야 이, 너 뭔데. 나 좋아하기라도 해? 내가 딴 남자한테 한눈팔아서 삐친 거야?”
홍규헌이 농담으로 성필을 웃게 만들려 해도, 그는 비 맞은 조각상처럼 물만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제야 홍규헌은 그의 과거를 떠올릴 수 있었다.
형제처럼 지냈던 김태훈 대표에게 버림받듯이 나온 석세스 엔터. 그리고 그 이유는 윤상열이란 유명 프로듀서와의 대립이었다.
“야.”
홍규헌은 간 보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성필의 앞에 카드를 하나 놓았다.
“네가 좋댔단 정지음 곡 있잖아. 그거 완성시켜서 가져와.”
“저 달래주려고 안 그러셔도 돼요……. 당연한 거죠, 좋은 사람이 왔는데 받아들이는 게 당연해요…….”
진짜 실연당한 인간처럼 말하네.
“괜히 돈 버리지 마시고…….”
“내가 돌았다고 너 달래주려고 돈을 버리냐? 우리 점심마다 어떤 거 먹는지 잊었어? 내가 헛된 곳에 돈 쓸 인간이야?”
홍규헌이 준 건 법인 카드였다.
“그 곡 완성 시켜서 가져와. 그럼 엘릭 곡이랑 비교해볼 거야. 필요하면 돈 아끼지 마.”
그 말에 성필도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란 게 느껴졌다.
“네가 그 곡에서 뭘 보고 있는지, 나한테도 보여줘.”
홍규헌이 성필의 손에 카드를 직접 쥐여주었다.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