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화
“뭘 순진무구한 척 눈만 껌뻑여. 너 죽을래? 한 달 동안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불러내서 술 먹자고? 또 내가 도와줄 거 있니? 그래서 불렀어? 하여튼 이 이해타산적인 새끼…….”
“아, 아니. 연락 잘했잖아.”
“‘누나 요즘 잘 지내? ㅋㅋ’만 보내면 연락한 거냐? 내가 뭐라고 답해줘야 하는데? ‘응 잘 지냄 ㅋㅋ’? 아오 팍 씨!”
손혜빈이 주먹을 들자 성필이 몸을 움츠렸다.
“미, 미안. 요즘 바빠서.”
“…….”
“기분 많이 나빴어?”
“…….”
“미안. 내가 부탁할 거 있는 게 아니고. 정말 누나 얼굴 보려고 한 건데…… 그렇게 생각했으면 미안해.”
갑자기 손혜빈은 표정을 풀더니 배를 잡고 웃었다.
“아하핰! 야, 뭘 쫄고 그래. 나도 너 바쁜 거 알아!”
“……?”
“장난 좀 쳤어. 내가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겠냐? 너가 그러니까 내가 다 미안해지잖아.”
이게 가스라이팅이구나.
진짜 얼굴에 물 부어버리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근데 오랜만이긴 하다. 오랜만이니까 오늘은 내가 살게.”
물을 붓긴 뭘 부어.
이렇게 좋은 누나한테 어떻게 그런 짓을?
“누나. 사실 내가 누나한테 부탁할 게 있긴 하거든.”
“이해타산적인 새끼. 진짜 자기 일 있을 때만 부르는 거였네…….”
“우리 회사 올래?”
* * *
“슬슬 혜빈 누나 데려오는 게 어떨까요.”
“아, 그렇네. 깜빡하고 있었구나.”
옛날에 손혜빈이 가로 엔터 최초의 월간 평가를 도와주었다.
그때 이미 홍규헌은 손혜빈을 데리러 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손혜빈이 오고 싶어 한다면 말이다.
“음, 근데 꼭 필요할까?”
“이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아, 맞아. 여자의 시각이 필요하댔지. 우리 회사 임직원 중에 여자가 없어서 말야. 응? 그렇지? 그렇지 박 이사? 우리, 회사에, ‘여자’가, 없어서.”
“…….”
“왜 말이 없어. 뭐라도 말해봐. 그 이유가 맞아?”
“그으, 그 이유도 있긴 한데 일단…….”
“맞아 맞아. 우리가 온리 남자팬 타깃인 그룹을 만드는 게 아니니까 여자의 눈도 필요하지.”
“……마음에 담아두고 계신 줄 몰랐어요. 제가 그때 말을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놀린 거야. 울상짓지 마.”
왜 이렇게 주변에 자신을 놀리려는 사람만 있을까.
손혜빈도 홍규헌도 조아라도 정말 너무하다.
특히 조아라가 가장 괘씸하다.
‘내가 놀리고 싶어지는 성격인가…….’
“그럼 바로 말해볼까요?”
“응. 할 수 있으면.”
* * *
“우리 회사 올래?”
갑자기 손혜빈의 표정이 싹 굳었다.
마치 땡전 한 푼 없는 창업자에게 영입 제안을 받은 대기업 사원 같은 얼굴이다.
“또 또 가스라이팅한다 또! 말해봐! 또 뭔 말하게?!”
“아니, 이렇게 빨리? 앞으로 2년은 더 걸리는 거 아니었어? 좀 놀라서 그래.”
손혜빈은 데뷔 날짜가 예상보다 당겨졌단 사실을 몰랐다.
이야기를 다 들은 그녀는 소주잔을 비웠다.
“1년…… 아니지. 이제 1년도 안 남았지. 다른 분들은 몰라도 하양 씨는 걱정되는데.”
“연습생 기간이 가장 짧기도 하지. 그래도 열정은 있어. 제일 열정이 넘쳐. 아니다. 열정은 다들 넘치는데, 하양이는 정말 저러다가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노력하거든. 보기 안쓰러울 정도인데 또 말리면…….”
“알겠으니까 주접 그만 떨어. 혹시 내가 하양 씨 집중 마크 해도 돼?”
“누나가? 누나 뭐, 은퇴한 지 꽤 오래됐잖아.”
“나 은퇴하고도 춤은 계속 연습했어.”
“맞네. 무용 배우러 유학도 간다고 했었지. 누나가 시간만 있으면 봐줘. 오히려 그러면 좋지.”
손혜빈은 음방에서도 라이브로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었다.
그게 그녀의 자존심인 듯, MR이 자신의 목소리를 덮는 것을 용서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나 완전 은퇴한 것도 아냐. 나중에 기회 되고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 컴백할 수 있어.”
“오오…….”
“뭔데 그 반응. 나 이제 늙어서 팬도 없을 거란 뜻이야?”
“감탄한 거잖아. 누나 뭐만 하면 오해하는 거, 그거 자격지심이야.”
“나 아직도 예능 출연 제의 막 오고 그런다고!”
“알겠어 내가 미안해…….”
“암튼 나 바로 너네 회사 가도 되는 거야? 그럼 나 드디어…….”
* * *
“취직이다!”
손혜빈이 크게 외치며 회사 안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백설하가 커피를 뿜었다.
“어머! 괜찮아?”
“으에, 에, 에, 네에.”
손혜빈은 티슈를 뽑아 백설하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백설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괜찮아요’란 말만 반복했다.
“나 취직했어.”
“추, 축하드려요 언니. 박 이사님 보러 오셨어요?”
“아니. 나 여기 취직했어.”
“네?”
“비정규직으로! 앞으로 자주 보자?”
손혜빈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백설하에게서 떠나갔다.
백설하는 멍하니 그녀가 떠나간 자리를 보았다.
‘혜빈 언니가 우리 회사에 취직했다고?’
어린 시절의 우상이……?
아니, 손혜빈이 왜 이렇게 작은 회사에?
이런 생각을 하면 실례란 건 알지만 이해가 안 된다.
‘아. 나 놀림당한 거구나.’
그럼 그렇지.
손혜빈이 가로 엔터로 올 리가 없지.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백설하의 예상과는 달리, 손혜빈은 정말 가로 엔터에 취직했다.
이곳에 오려고 러시아 유학마저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손혜빈에게 가로 엔터 취직이란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다.
‘드디어 내 손으로 아이돌을 만드는 거야!’
비록 프로듀싱 업무만 있는 건 아니지만.
손혜빈은 은퇴한 뒤에도 계속 댄스와 보컬 실력을 갈고닦았다.
이미 춤과 음악이 삶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 장기를 살려 멤버들의 전체적인 퍼포먼스를 점검하고 조언을 주는 게 손혜빈의 업무였다.
또한 정기적인 숙소 점검, 멤버들과의 내밀한 상담과 케어 등이 있다.
본격적인 앨범 제작 단계에 들어가면 할 일이 더 많았다. 사실 그쪽이 손혜빈의 전문 영역이었으니까.
“한 이사. 혜빈 씨 안내해드려.”
“알겠습니다.”
“사장님. 제 직함은 뭔가요?”
“아직 회사가 작아서 구체적인 체계는 없어.”
갑자기 홍규헌이 반말을 썼다.
그녀는 처음부터 반말을 썼다는 듯 익숙하게 말했다.
“반말해도 되지?”
“네.”
이미 성필에게 들은 내용이라 크게 당황스럽진 않았다.
“직함은 PD 어때?”
프로듀서.
그렇다면 손 PD가 된다.
썩 마음에 드는 직함이다.
“좋아요.”
“그래. 잘 부탁해 손 PD.”
손혜빈의 사무실 자리는 성필과 한구인의 사이였다.
그녀는 깔끔한 사무실을 유심히 관찰했다.
‘사무실이 편한 분위기는 아니구나. 진짜 일만 하는 곳이란 느낌이네. 휴게실은 1층이었나?’
집에서 챙겨 온 물품들로 자리를 꾸몄다.
다 끝내니 할 일이 없었다.
한구인은 제 자리에 앉아 무언가 작성하는 중이었다.
손혜빈은 조심스레 그의 뒤로 가 모니터를 흘끗거렸다.
“IR(Investor Relations) 쓰세요?”
“예.”
“음, 투자받는구나. 성필이가…… 성필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회사니까 박 이사님이나 박 이사라고 불러야 할까요?”
“성필이라고 불러도 괜찮습니다. 아라 씨도 박 이사님을 아저씨라고 부르거든요.”
“푸흡. 걔가 아저씨에요?”
“아라 씨한테는 그렇죠.”
“한 이사님도 아저씨겠네요?”
“저한테는 그러지 않으십니다.”
한구인은 조금 섭섭한 티를 냈다.
“성필이가 가로 엔터는 멤버들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가 장점이라고 했었는데. 투자를 받긴 하네요.”
“재무 쪽은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한구인이 휠을 올려 IR의 세부 내용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손혜빈도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일은 재무가 아니었으니까.
“저는 뭐하면 될까요?”
“조금 있다가 저랑 사장실로 가서 회의에 참여하시면 됩니다.”
“회의면…….”
“컨셉 회의입니다.”
“아직 안 정했나요? 성필이가 막 엄청나게 거창한 기획서도 썼잖아요.”
“구체적으로 나와야 하잖습니까. 그래야 곡 수급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흐음.”
잠시 후, 사장실에 들어선 손혜빈은 화이트보드에 적힌 스토리보드를 훑었다.
“와아. 저 완전 초창기 멤버네요? 진짜 딱 시작하기 직전에 들어왔어요.”
“손 PD도 가로 엔터가 성공하면 개국공신 되는 거야.”
손혜빈은 더 동기부여가 됐다.
세 사람은 회의를 위해 자리에 앉았다.
“성필이는요?”
“곧 올 거야. 오늘 일이 있어서 늦는대.”
“이런 아침에요?”
때마침 성필도 문을 열며 등장했다.
짧게 인사를 나눈 성필은 손혜빈의 옆에 앉았다.
“너 아침부터 일이 있어?”
“아라 선생님이랑 면담하고 왔어.”
“네가 학부모야?”
“그냥 이것저것.”
회의가 시작됐다.
세 사람은 손혜빈에게 집중했다. 그녀는 대형 기획사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다.
디자인팀도 A&R과 동떨어진 부서가 아니다.
앨범 제작 때는 함께 긴밀히 협업하니, 손혜빈도 그쪽 지식이 상당할 것이다.
“일단 이걸 확실히 해야죠. 남자를 타깃으로 해요? 귀엽고 청순하고 샤랄라, 이런 느낌?”
“아니. 그쪽은 아니야.”
“트렌드 따르면 걸크러시나 걸스파워죠. 제가 이전 회사에서 레퍼런스 엄청 많이 챙겨왔거든요. USB에 담아왔는데.”
“그거 가져와도 되는 거야?”
“저도 지분 있는데요 뭘. 문제없는 걸로만 허락받고 챙겨왔어요.”
손혜빈이 가져온 자료를 보고 나머지 세 사람은 입을 떡 벌렸다.
사진, 영상 등 온갖 텍스트가 가득했다.
아이돌을 만들기 위한 참고 자료의 총본산 같은 느낌이다.
스타일, 컨셉에 따른 대중의 반응이나 검색량 같은 자료도 가득했다.
이게 대형기획사?
“이야. 다시 보니까 추억이다. 이것들 찾느라 두세 달 동안 인터넷 검색만 한 적도 있거든요.”
“대, 대단하네.”
자료가 너무 많아서 회의에서 확인하긴 힘들었다. 나중에 각자 확인하고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
일단은 오늘 회의는 대략적인 지향점만 정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회의 중간, 손혜빈이 문득 말했다.
“근데 제 생각이랑 많이 다르네요.”
“뭐가?”
“아니. 성필이 기획서 말이에요. 그거 보고 떠올렸던 거랑 달라요. 저는 당연히 멤버들한테 ‘어떤 컨셉이 좋아?’라거나 ‘어떤 그룹이 되고 싶어?’라고 물을 줄 알았는데요. 그거 두고 사장님이 고민하실 줄 알았는데…… 그냥 저희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정하나요?”
성필은 탑다운 방식으로 조직하는 아이돌이 아닌, 아티스트로서의 아이돌을 키우고 싶었다.
그 열망은 기획서에 녹아 있었고, 홍규헌도 공감했던 바였다.
“맞아……. 애들한텐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었지.”
홍규헌은 뭔가 깨달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어보러 가자.”
* * *
1층에 있는 텔레비전에 컴퓨터를 연결하고 각 멤버가 롤모델로 삼는 아이돌 영상을 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나선 멤버는 조아라였다.
“나는 이런 거요.”
어느 그룹의 콘서트 무대였다.
[내 모든 것 우주를 찾아 헤매던
불확실한 환상, 우주의 비행사.
어두운 밤하늘을 도화지 삼아 스케치.
I’m fine 네가 무리라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이라면
make a wish to our universe]
꿈을 향해 달려 나간다는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띠는 음악이었다.
그룹 멤버 전원이 열정을 불태우며 무대에 임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좋죠?”
영상이 끝난 뒤, 조아라가 조금 흥분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을 친구에게 영업하는 여고생의 표정이다.
홍규헌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보이그룹을 보여주면 어떡해. 네 롤모델 중에 걸그룹은 없어?”
“난 저런 옷 입고 저런 노래에다가 저런 춤 추고 싶어요.”
이제 고작 한 명에게 물어봤을 뿐인데도 난관에 봉착했다.
“이게 좋아요.”
조아라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그녀는 아이돌에 관심이 생긴 후에도 걸그룹보다는 보이그룹을 더 많이 찾아봤다고 한다.
주요한 이유는 퍼포먼스 때문이었다.
조아라는 강렬한 춤을 좋아한다.
그녀의 음악 취향도 춤과 비슷해서 뱉어내는 듯 억센 창법과 강인한 타입을 마음에 들어 했다.
“나는 살랑거리는 거보다 이렇게 팍, 팍 하는 느낌이 좋아요.”
“대충 어떤 건지 알겠다…….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줘야 할까. 너희들이 이런 컨셉을 잡는다면 이벤트성으로는 괜찮겠는데…….”
홍규헌은 손혜빈에게 시선을 주었다.
조아라의 의견에 대해 피드백을 주란 뜻이었다.
“아라야.”
“네.”
“이 그룹이랑 방금 보여준 영상 퍼포먼스가 네가 그리는 이상형이란 거지?”
“아니요. 이상형이란 게 아니라요. 저런 그룹이 되고 싶다고요.”
“응, 알아. 그런데 너희들은 쟤들이랑 똑같은 옷 입히고 똑같은 퍼포먼스 해도 저런 느낌이 안 나.”
“나도 똑같다곤 생각 안 해요. 근데 분위기가…….”
“그래, 저런 분위기를 못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