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아라야.”
백설하가 자연스럽게 조아라의 어깨에 손을 댔다. 위로를 위한 습관이었다.
사람의 온기는 마음이 더 잘 전달되게 해주니까.
“많이 힘들지?”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힘들어도 버텨라. 조금만 힘내자. 그런 것보다 공감해주는 한마디면 충분하다.
백설하가 조아라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고 할 때, 조아라가 그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네. 힘들어요. 죽을 거 같아요. 자존감 깎이고 창피하고 매일 기운 빠져서 죽겠다고요!”
이제껏 조아라는 진심으로 화낸 적이 없었다.
조아라가 열 받았단 감정을 표현했던 일이 없으니, 이번에 그녀의 분노가 폭발한 건 백설하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백설하가 당황하여 답을 구하듯 장하양을 쳐다보았다.
장하양은 연습하다 지쳐서 숨만 헐떡이는 중이었다. 도와주려 해도 체력이 없었다.
“아, 아, 응, 힘들…… 구나…….”
백설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조아라는 씩씩대며 일어나 크게 발을 굴렀다.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연습실 안에는 마땅한 게 없었다.
“힘들어요. 진짜 힘들거든요? 근데 그건 괜찮아요. 아무래도 괜찮아요. 남들 전부 하고 싶어 죽겠는 아이돌이 되려는 데 힘든 건 당연해요. 근데 그건 못 참겠어요. 사장님이랑 이사님들 태도, 시선, 말투.”
백설하는 성필에게 진지하게 상담을 받아볼까 고민했다.
조아라가 터지기 직전이니 무슨 짓이든 해서 잡아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후 조아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백설하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우리 연습 시간 늘려요.”
“어? 여기서 더 어떻게 늘려.”
“한두 시간이나, 적어도 30분 정도는 늘려도 되잖아요. 조금이라도 더요.”
“나는 아라 말에 찬성…….”
“아라야. 사람이 한계란 게 있어.”
장하양이 황급히 말을 거두었다.
“우리가 몇 시에 일어나? 아니, 넌 6시도 전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잖아. 그리고 밤 10시 11시까지 연습하고. 그걸 1년 넘게 하면 몸이 망가져. 우린 몸이 재산이야. 그걸 망가뜨리고 뭘 하겠다는…….”
“그러니까 30분이라도 더 하자고요! 나 진짜 미치고 돌아버리겠다고요!”
진짜 돌아버리겠다는 듯, 조아라는 머리칼을 쥐어뜯을 기세로 잡아당겼다.
도저히 화를 주체할 길이 없었다.
백설하는 조아라가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은 것인가 걱정됐다.
사람이 분노가 쌓이면 이상이 생긴다던데…… 어쩌면 이미 한계선을 넘은 게 아닐까?
“사장님이 초조해하는 것도 보기 싫고! 옛날보다 한의사님이 우리한테 친절해진 것도 싫고! 아저씨가 혼내면서 달래주고 씁쓸하게 쳐다보는 것도 싫어요! 내 몸 망가지는 건 백번 천번 참을 수 있는데, 세 사람이 그러는 못 보겠다고요! 나만 그래?!”
“…….”
“…….”
“나, 나만 그러냐고요!”
조아라는 대답이 없자 당황했다.
최소한 한 명이라도 호응해줄 줄 알았는데, 다들 짜기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에이 씨 또 나만 진심이었지…….”
기어코 화를 다스리지 못한 조아라가 울먹이기까지 했다.
리카가 맹장염 때문에 연습에서 빠진 뒤, 조아라는 감정을 컨트롤하기 힘들어했다.
여태껏 리카의 애교와 과장된 리액션이 조아라의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기제였는데, 그게 없으니 더 격한 성격이 되어버린 것이다.
백설하가 따스한 미소를 보냈다.
“이런 걸 영상으로 남겨야 하는데.”
“뭐라고요?”
“그러자. 아라 네가 그걸로 편해지면 나는 찬성이야. 하양이 너는?”
“저도 좋아요. 사실 계속 연습 시간 늘리고 싶었는데 다 같이 숙소 들어가니까 눈치 보여서 못 말했거든요.”
장하양이 연습 시간을 늘리고 싶다는 건 그냥 한 시간 정도가 아니었다.
새벽까지 하자는 말이었다.
아무리 조아라라도 그건 무리였다.
“그럼 언제까…….”
“지금 말하러 가요. 한 시간 늘려달라고요.”
“응. 그러자! 하양이 넌 피곤할 테니까 쉬고 있어.”
“저 이제 다 쉬었는…….”
조아라와 백설하가 연습실을 나섰다.
* * *
백설하와 조아라는 목표를 하나 정했다.
‘이번 주만이라도 아무런 지적도 받지 말자.’
두 사람은 힘들어 죽을 지경까지 연습을 이어갔다.
매 순간 그만두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휴식을 최대한 절제하고 연습에만 몰두했다.
한 달을, 1년을 이렇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이라면 할 수 있다.
자신들도 노력하면, 진심으로 해내겠단 마음가짐만 있으면 해낼 수 있단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힘 너무 많이 안 넣어도 돼요. 조금 여유롭게 해도 충분히 예뻐요.”
“이렇게?”
“네. 쌤은 키도 크고 팔다리도 길잖아요. 여유롭고 부드럽게 보이는 게 쌤 장점이에요. 명심하세요. 차분하게, 차분하게 하는 거예요.”
조아라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백설하에게 1대1 코칭을 해주었다.
“고개 조금만 더 내려요.”
“이렇게?”
“살짝 왼쪽으로.”
“이렇게?”
“음, 네. 그게 더 예쁘다. 다음은 골반 살짝 위로.”
“응.”
“아니다. 아래로.”
백설하는 조아라의 코칭을 받으며 신세계를 느꼈다.
조아라가 춤에 대해 가진 열정은 보통이 아니었다.
1초도 안 되는 잠깐의 동작을 수십 분씩 점검하곤 했다.
조아라는 이것을 ‘다듬기’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들이 눈을 깜빡이거나 고개를 돌리면 보지 못할 수도 있는데도, 춤의 완성도를 위해 단 한 동작에도 놀랄 만큼 큰 정성을 쏟는다.
“항상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보일지 생각하세요. 팔을 조금만 더 꺾을까, 고개를 살짝 더 내려볼까, 발을 들어볼까. 계속해서 자신에게 질문하는 거예요.”
“으, 응.”
조아라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니 백설하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리고 그건 조아라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 아! 아! 가 아니라니까. 아― 아― 아― 로 잡으라고.”
“네…….”
“다시 해보자.”
조아라는 백설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노래를 불렀다.
백설하가 손을 저어 멈추었다.
“아라야. 이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생각해. 귀에 꽂히게 부를 필요 없어. 들리기보다 감정이 더 중요해. 울릴 수 있도록 하는 거야.”
“네.”
“발음 조금 씹혀도 상관없어. 음을 이어. 계속 이어지게 해.”
“……네.”
조아라는 백설하의 코칭을 받으면서 ‘나 노래 부르게 할 생각이 없나?’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4일인데도 조아라는 백설하의 앞에서 준비한 곡을 끝까지 부른 적이 없었다.
2초 부르다가 스톱.
5초 부르다가 스톱.
10초 부르다가 스톱.
이것을 계속 반복했다.
완벽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3분 10초의 곡을 온전히 부르는 날이 왔다.
노래가 끝나고 정신을 차리니, 백설하는 클래식이라도 감상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아라야.”
“네.”
“더는 내가 알려줄 게 없네.”
“…….”
이 곡 하나만큼은 마스터했다, 라고 백설하는 판단했다.
조아라에게는 무엇보다 큰 찬사였다.
그리고 다음 날은 조아라가 백설하의 춤을 인정했다.
“쌤.”
“응.”
조아라는 엄지를 드는 것으로 칭찬을 대신했다.
둘은 서로 껴안고 자축했다.
내일은 주간 평가 날이다.
반드시 홍규헌과 성필의 입에서 칭찬만이 나오게 하리라.
두 사람이 처절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동안 장하양은…….
[언니 대체 언제까지 회사에 있으려는 거예요?! 빨리 오라구요!]
“응? 몇 시인데?”
[2시 넘었어요!]
“벌써? 그렇구나. 그런데 리카는 안 자?”
[테레비 보고 있었어요.]
“뭐 봤어?”
[……그냥, 이것저것요. 있어요. 아무튼 빨리 와요! 그러다가 몸 상하면 어떡해요!]
“아하하, 괜찮아. 리카도 빨리 자.”
장하양은 조아라와 백설하보다 훨씬 늦게까지 연습을 했다.
어느 날은 아예 숙소에 돌아가지 않고 연습실에서 자기까지 했다.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쉬는 것도 일이예요!]
“응, 고마워.”
전화를 끊은 장하양은 가만히 시계를 보았다.
‘한 시간만 더 하자.’
그녀도 백설하와 조아라의 계획에 동참했다.
이번 주만큼은 비판이 아닌 칭찬만 들으리라.
꼭!
‘그리고 케이블 끊어달라고 박 이사님한테 말하자.’
리카가 자꾸 밤늦게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는 것 같다.
* * *
주간 평가.
홍규헌과 성필은 당황했다.
‘꼬집을 게 없어.’
백설하와 조아라의 완성도는 대단했다.
댄스, 보컬, 퍼포먼스, 분위기 등등.
보면서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얘들이 이렇게 잘하나? 고작 일주일밖에 안 지났는데 어떻게 이 정도로 성장했지?
‘뭔가 말해야 하는데…….’
홍규헌도 무표정으로 도움을 요청하듯 성필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뭐라도 말해보란 뜻이었다.
평가의 주요 기능은 연습생의 성장을 파악하고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지 않도록 일깨우는 것이다.
뭐라도 짚을 부분이…….
‘아니야.’
억지로 꼬투리 잡고 싶진 않다.
최근 아이들의 기를 많이 죽였으니, 오늘은 기를 살려도 괜찮으리라.
성필은 말했다.
“완벽해. 노력 많이 했구나.”
조아라와 백설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특히 하양이.”
정말.
정말 정말 놀랐다.
여태껏 가지고 있던 걱정이 완전히 날아갔다.
장하양이 완벽했단 뜻은 아니었다.
다만 크게 성장했단 게 눈에 띄게 보였다.
“고생 많았다.”
그제야 홍규헌도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주간 평가는 전원 A다.
* * *
저번 주간 평가 때 억지로 꼬투리 잡을 걸 그랬다.
이번 주 주간 평가는 저번 주와는 달랐다.
비판할 점이 있었다.
그래서 성필은 조아라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성필이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흐흥.”
어떤 말을 듣든 의기양양한 표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다 껌이라구’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것만 고치면 되죠?”
“어.”
“뭐, 알겠어요.”
“…….”
“칭찬할 점은 없어요?”
칭찬까지 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조아라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있잖아요. 안 참아도 되는데.”
그래, 자신감이 생기면 좋은 거지.
“말해요.”
그렇다고 칭찬을 강요하는 건 아니지…….
조아라는 내보내고 백설하를 불렀다.
그녀의 이번 댄스 버스킹에도 비판점이 있었다.
피드백을 끝내니 백설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할게요.”
그게 끝이었다.
전혀 기죽은 태도가 아니다.
마치 매사 긍정적인 장하양을 보는 듯했다.
이번 주간 평가가 끝나고, 성필은 걱정에 휩쓸렸다.
‘얘들 너무 자만하는 거 아니야? 고작 칭찬 한 번 해줬다고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
성필은 연습실 안을 빼꼼 들여다보았다.
조아라와 백설하는 열심히 연습 중이었다.
활기차고 진취적인 분위기였다. 얼굴이 잔뜩 굳어서 연습하던 이전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문득 한구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른 분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줘가면서 동기를 준다는 게…… 맞는 방법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두 사람에게 더 필요했던 건 당근과 채찍이 아니라, 그저 가능성에 대한 인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이사님이 맞으셨네요.’
성필은 연습실 감시는 하지 않기로 했다.
가만히 둬도 두 사람은 목표를 향해 부단히 달려갈 것이다.
저번 주간 평가로 바뀐 건 백설하와 조아라만이 아니었다.
장하양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이사님, 이거 보세요.”
장하양이 손과 팔을 정교하고 현란하게 움직였다.
“텃팅이라는 춤이에요. 아라가 가르쳐줬는데 어때요? 저도 잘하죠?”
무엇이 바뀌었느냐 하면, 바로 칭찬을 요구하게 됐단 것이다.
옛날의 장하양은 자신이 부족하단 것을 알았다.
그래서 무언가를 해도 ‘못하죠?’ ‘아직 부족해요’ 같은 말을 했었다.
하지만 이젠 성필의 앞까지 와서 춤이나 노래를 시연하고 ‘잘하죠?’라고 물었다.
“잘하네.”
“안 보셨잖아요.
“봤어.”
“핸드폰 그만 보세요.”
“에이, 너 춤추는 거 봤다니까.”
“저만 봐줘요.”
장하양의 갑작스런 집착 발언에 성필이 크게 웃었다.
그녀도 노리고 한 말이라 성필과 함께 웃었다.
“곁눈질로 봤거든?”
“저한테만 집중하라시구요!”
“응.”
“두 번은 안 먹히네요. 뭐 보시는데요?”
성필이 핸드폰을 뒤집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장하양의 주간 평가 영상이었다.
“저, 정말로 저만 보고 계셨네요.”
“항상 보고 있지.”
“아앗…….”
“눈꼴시려 못 봐주겠네 진짜.”
조아라가 혀를 차며 지나갔다.
* * *
“박성필 하이.”
손혜빈은 무심하게 성필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성필은 소주를 주문했다.
“누나 왤캐 죽상이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일 있으면 들어줄게. 말해봐.”
“음. 내가 아는 동생이 하나 있거든.”
“응.”
“걔가 나한테 도와달라고 할 때는 막 자주 만나고 그래 줬거든. 근데 일 끝나니까 연락도 드문드문하고 그런 거 있지?”
연애 상담인가?
요즘 썸이라도 타고 있는 모양이다.
“배은망덕하지?”
“와, 진짜 사람 이용해먹는 거 같다. 그래서?”
“뭘 그래서야. 아니꼽지 그냥. 근데 어이없는 게 또 갑자기 술 마시자고 부르는 거야. 내가 자기 필요할 때 술 먹어주는 사람인가.”
“너무하다 진짜.”
“그게 너야.”
“……?”
“그게 너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