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화
“……네.”
“설하 씨는요?”
“저어, 저도…….”
“제 말 따라 하시지 말고요. 솔직히 답해주세요.”
백설하는 염치가 없단 듯 입술을 감추었다.
“조금, 저번보다는 낫다고…….”
성필은 다리를 꼬고 한숨을 흘렸다.
그럴수록 백설하는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요즘 따라 성필이 변했다.
아니, 원래 이러는 게 맞겠지.
아이돌을 키운다는 건 장난이 아니다.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사업이다.
항상 연습생에게 친절할 수는 없다.
회사의 요구에 맞추지 못한다면, 맞추도록 끝없이 채찍질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왜냐, 돈이 걸렸으니까.
이 건물 안의 모든 것이 돈이다.
사람마저도.
백설하는 그것을 알았기에 성필을 이해했고, 동시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
“저번보다는……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아요.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성필의 칭찬은 단순한 칭찬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실제로 비꼬는 것이었다.
“저는 설하 씨가 부끄러워하시면 좋겠지만요.”
“…….”
“정말 얼마 안 남았어요. 데뷔라고요. 과거의 자기 자신과 비교해서 나아졌는지 확인하고 또 전진한다. 좋은 생각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아요. 끝없이 다른 그룹과 비교할 거예요. 데뷔하고서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아, 내가 옛날보다는 훨씬 낫지. 잘했어 백설하’. 이렇게요? 팬들한테도, 저희한테도 그렇게 말씀하실 거예요?”
“……아니요.”
“저도 일주일이 많은 시간은 아니란 건 알아요. 하지만 조금 더 노력을 기울여주세요.”
다른 기획사 연습생들은 매주 카피를 몇 개씩 뜨고 그런다더라.
고작 하나도 완벽하게 못 하냐.
이런 식의 비교는 하지 않았다.
평가 과제를 많이 해결하는 게 유능함의 척도가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것도 아이튜브에 올릴게요.”
“아…….”
“창피하죠? 조회 수 고작 수십 나오는데도 누가 본다는 게 창피하죠? 무대에 섰을 때는 수십 수준이 아니에요. 이미 잘 아시겠지만요.”
“…….”
“다음에는 더 잘해주세요.”
성필은 조금 더 침묵을 유지하다가, 백설하의 안 좋은 부분을 세밀하게 짚어주었다.
대부분이 고치면 나아지는 버릇이었다.
조아라에게도 여러 번 지적받은 부분이었으나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전에 있던 기획사에서 물든 것이다.
교정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백설하의 몸에 이미 굳어버렸다.
“나가셔도 돼요. 아라 불러주세요.”
“네.”
백설하는 쭈뼛거리면서 방을 나섰다.
문을 닫기 전, 그녀가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성필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다음으로 들어온 조아라는 대담한 척했지만, 성필에겐 긴장하고 있단 게 보였다.
“아라야.”
“네.”
“이거 남자 노래야. 2옥타브 파가 최대야. 여기 따라 하기 어려운 기교라도 섞여 있어?”
“……아니요.”
“이거 남자도 연습 조금 하면 노래방에서 어깨에 힘 좀 주고 부를 수 있는 거라고.”
물론 성필은 못 부른다.
“그런데 넌 뭐야? 일주일이 부족했어?”
“…….”
“왜 대답을 안 해. 비꼬는 게 아니라 네 답을 듣고 싶어서 그래. 응? 일주일이 부족했어?”
“…….”
“아아, 알겠다. 아까 노래해서 목이 쉬었나 보네. 응. 그런 거지?”
“…….”
조아라는 처음 들어왔을 때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네’라는 말만 꺼내도 울 것 같았다.
조아라는 겉으로는 강하게 보여도 약한 성격이다.
성필은 조아라를 잘 알았다.
미래에서도 몇 년 동안 보고 지냈으니 모를 리가 없다.
“아라야.”
“…….”
“조아라.”
“…….”
“고개 들어.”
조아라는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든다고 들었지만, 성필을 정면으로 보지 않도록 얼굴을 살짝 틀었다.
그것만 해도 그녀의 최선이었다.
“아라야. 기분 나쁘지?”
“…….”
“부끄럽지?”
“…….”
“그 마음 잘 기억해. 너도 나한테 이런 말 듣기 싫잖아. 그리고.”
성필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나도 너한테 이런 말 하기 싫어. 난 네가 싫어서 혼내는 게 아니야. 네가 더 나아지길 바라서 이러는 거야.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듣진 않겠지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조아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는 더 나아질 수 있어. 비록 내일이나 일주일 뒤, 한 달 뒤는 아니더라도. 매일, 매주, 매달, 조금씩 나아져서, 내가 놀랄 정도로 잘하게 될 거야. 내가 심한 말 한다고 너무 상처받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널 싫어하는 게 아니니까. 항상 믿고 있어.”
‘믿고 있다’는 말에 조아라는 기어코 참고 있던 감정을 드러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자존감 깎이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또 누군가에게 심한 말을 들은 뒤 따뜻한 위로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조아라는 이런 말에 면역력이 약했다.
지적받는 건 기분이 나빴다.
위로받으면 눈물이 나왔다.
비록 매주 비슷한 말을 듣고 비슷한 위로를 받았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성필은 그녀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가볼게요…….”
“응. 설하 씨한테 꼭 피드백 받아.”
두 사람과의 상담이 끝난 뒤, 성필은 녹초가 되어 소파와 한 몸이 됐다.
하루 종일 운동한 것보다 훨씬 더 피곤했다.
성필은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다.
‘애들한테 정을 너무 줬어.’
전생의 석세스 엔터에 있을 때는 소속사 배우, 아이돌, 가수들과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성필에게는 매니지먼트 총괄이라는 권위와 벽이 있었으니까.
가끔 튀어나와 따끔하게 한마디 하거나 위로해주는 아저씨 역할이면 됐다.
하지만 가로 엔터에서는 전혀 달랐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너무 가까워졌어.’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이대로 1년만 지나도 성필은 말라버린 나무처럼 변해버릴 것이다.
‘나도 정신과 상담 같은 거 받아야 하나.’
오늘 스케줄이 이것으로 끝이라면 좋겠지만, 아직 남았다.
본격적인 주간 평가였다.
저녁에 멤버들이 전부 모여 평가를 받았다.
백설하의 보컬, 조아라의 댄스는 지적할 여지가 적었다. 퍼포먼스도 그럭저럭 좋았다.
문제는 또 장하양이었다.
“…….”
홍규헌, 성필, 한구인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주간, 월간 평가제가 실시된 이후 장하양에게 쏟을 수 있는 비판과 위로는 전부 다 해버렸다.
더는 할 말도 없다.
치열하게 눈싸움을 벌이던 세 명 중 패배한 건 역시나 성필이었다.
‘그래. 내가 나쁜 경찰 담당이지 뭐…….’
성필이 운을 떼며 장하양을 보았다.
“하양아.”
“넵.”
“연습하고 있지?”
“네! 열심히 했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이래?”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노력이 변명이 안 된단 사실은 압니다. 노력했으니 봐달라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장하양이 허리를 굽혔다.
처음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였을 땐 ‘장난해? 연습생이 장난이야? 죄송하면 끝이야? 결과를 보여야 할 거 아니야 결과를!’ 같은 말로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도 계속하니 말하는 쪽이 괴로워졌다.
“죄송하다고 하면 끝…… 하아. 됐다.”
“정말 죄송합니다. 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랩은 나아지고 있어.”
“감사합니다!”
“그래. 들어가.”
평가가 끝나고 멤버들이 나가자 성필이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다른 이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피로를 호소했다.
“장하양 쟤는 아예 평가에서 빼버릴까? 평가받을 실력도 안 갖춰진 애한테 카피를 시킨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쟤 안 그래도 댄스랑 보컬, 랩 동시에 다 익히느라 힘들어하고.”
“아무리 그래도 평가는 해야죠. 주마다 곡 준비하는 것도 전부 경험이고 자산인데. 아예 이런 경험 없이 무대에 세울 수는 없어요.”
“장하양 쟤가 나아지는 날이 오긴 할까.”
“평가를 안 하면 멤버들의 성장을 체크할 수가 없잖아요. 학원에만 맡기는 건 그냥 방생이고요.”
“알지. 그렇긴 한데 내가 보기 안쓰러워서 그래.”
“사장님. 겨우 4, 5개월 됐어요. 기본기만 2, 3달 배우는 애들도 널리고 널렸어요. 하양이는 겨우 날개를 편 단계니까…….”
“얼씨구. 그렇게 생각하는 애가 말을 살벌하게도 한다.”
“그랬어요? 저번보다는 부드러웠는데.”
“한 이사. 너도 한마디 해.”
한구인은 평가지를 보며 줄곧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박 이사님. 이게 맞는 방법입니까? 다른 분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줘가면서 동기를 준다는 게…… 맞는 방법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구인의 눈동자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잠깐 성필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확신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빠져나갔다.
“아닙니다. 쓸데없는 소릴 했습니다. 당연히 이게 맞는 건데…….”
격려와 인정, 노력만으로 모든 게 해결됐다면 기획사 시스템이 강압적일 리가 없다.
한구인의 걱정은 이상주의에 젖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치가 없단 뜻은 아니었다.
그의 걱정은 성필과 홍규헌의 걱정이기도 했으니까.
“한 이사님. 애들이 열의 있어 보이고 노력하는 게 보이긴 해도요. 애들도 사람이에요. 자극과 긴장이 없으면 풀어져요. 아무런 피드백 없이 노력만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요.”
그런 사람이 독방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한눈팔지 않고 수백 일, 수천 일 동안 책만 보며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인간들.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는 행동 방식인데, 그런 인간은 매우 적다.
“보통 인간은 자극이 필요하잖아요. 긍정적, 부정적 두 개 다요.”
“……맞습니다. 데뷔 일정에 맞춰야 하니까요.”
한구인은 자책했으나, 이런 말을 직접 꺼낼 수 있는 게 그의 장점이었다.
그는 뒤에서 멤버들의 멘탈을 보살펴주고 있을 것이다.
그게 성필과 홍규헌이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성필과 홍규헌만 있었다면 가로 엔터의 분위기는 더 삭막해졌을 것이다.
“힘들지만 해야지.”
홍규헌의 말은 현재 가로 엔터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었다.
“애들도, 우리도, 다 열심히 해야지. 애들이 잘 따라와 주길 바라자. 그리고 박 이사. 좀 이른 거 같지만 기획 들어가 보자.”
“기획이요?”
“오늘은 간단하게 스토리보드라도 그려보자고.”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그게 오히려 좋아.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을 끄집어낼 수 있잖아.”
세 사람은 사장실로 향했다.
홍규헌은 구석에서 화이트보드를 가지고 와 벽면에 세웠다.
그녀는 가장 위에 ‘계획’이라고 적으면서 어렴풋이 미소를 띠었다.
“그립네. 옛날로 돌아간 거 같아.”
화이트보드는 이름대로 백색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세 사람의 생각으로 채워질 것이다.
“스토리보드면 콘티 같은 거 아닌가요? 영상 만들 때 쓰는 거요.”
“뭐, 주로 광고나 영상 제작에서 만들긴 하지. 근데 사업에서도 써. 우린 다 프로듀서잖아? 창작자라고.”
“저도 프로듀서에 넣어주시나요?”
“뭔 소리야. 당연하지 박 PD.”
성필은 울컥했다.
처음 가로 엔터에 입사 제의를 받았을 때 내건 조건이 프로듀싱에 참여할 권한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당연한 듯이 이 자리에 참석하고 있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몰려왔다.
“조금 오글거릴 수도 있는데, 가장 먼저 목표부터 적어보자. 한 이사부터 말해볼래?”
“모든 음악방송 1위 달성 그룹을 만들고 싶습니다.”
“구체적인 것 같으면서도 추상적이네. 박 이사는?”
“최고의 아이돌이요.”
“흠. 이러면 내가 쓰레기 같은데…….”
홍규헌은 ‘회사 순익 20억 이상 그룹’이라고 적었다.
“사장님! 아이돌은 상품이 아니라 아티스트입니다! 멤버분들을 돈으로 보고 계셨습니까?!”
“너 박 이사한테 물들었구나. 난 사장인데 당연히 돈이 제일 먼저 신경 쓰이지.”
“사장님 실망이에요.”
“박 이사 너까지…….”
홍규헌은 자신의 목표를 지우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잠시 후 나온 목표는 다른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추상적이었다.
“내가 반할 수 있는 그룹.”
“반했단 게 무슨 뜻이에요?”
“무대 보면 뻑 가는 거. 노래 들을 때마다 과몰입하는 거. 뭐어, 박 이사는 지금도 애들 보면 뻑 가니까 이해가 안 되겠지만…….”
“제가 언제요.”
세 사람의 꿈이 화이트보드를 천천히 물들였다.
“이게 뭐야. 다 쓸데없는 얘기밖에 없잖아.”
“쓸데없다뇨. 이게 저희 목표잖아요.”
“한 시간 동안 놀기만 한 거 같네.”
이게 홍규헌이 계획한 상황이긴 했다.
모두 자신의 가슴 속에 품고 있던 꿈과 바람을 구체화시켜서 동기를 부여하려는 것이었다.
사장을 위해서 일한다는 게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도록.
“구체적인 얘기로 넘어가자.”
[컨셉]
단 두 글자가 전부였으나 모두를 고민에 빠뜨리긴 충분했다.
“애들은 어떤 그룹이 되어야 할까.”
나왔다.
아이돌 그룹의 시작이자 끝, 컨셉.
성필은 컨셉이란 단어를 보자마자 손혜빈이 떠올랐다.
‘기획 짜려면 혜빈 누나도 빨리 들여오는 편이 좋겠는데.’
홍규헌은 브레인스토밍을 해보기로 했다.
저마다 생각나는 모든 요소를 적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마땅히 하나를 선택하긴 힘들었다.
“사장님, 10시 넘었습니다.”
“벌써? 애들 기다리고 있겠다. 박 이사, 한 이사. 데려다주는 길에 애들 괜찮은지 좀 물어보고 그래. 요즘 너무 잡기만 해서 스트레스 쌓였을 수도 있잖아. 근데 우리가 심하게 하는 거 아니지?”
“기분은 나빠도 이해는 할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 너무 압박만 하진 말고 적절히 하자. 도중에 나간다고 하면 큰일이잖아.”
* * *
“나 이렇겐 못 살아요.”
조아라가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