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56화 (56/760)

#056화

“안녕하세요.”

프로젝트 포유의 작가진 중 한 명, 정재성 작가가 가로 엔터로 찾아왔다.

그가 리카의 담당 작가였다.

촬영 전 리카에 대한 정보 수집 차원에서 왔다고 한다.

사전 조사야 전화로 해도 될 텐데 직접 온 것을 보니, 이현성 작가가 성필을 신경 써준다는 건 사실인 듯했다.

“밖에 많이 춥죠? 따뜻한 거라도 드릴까요?”

“그럼 커피로 해도 괜찮을까요?”

성필은 정성스레 커피를 타서 주었다.

담당 작가에게는 최대한 잘 보여야 한다.

비록 그의 경력이 짧다 해도, 리카의 이야기를 채록하는 건 그였으니까.

직접 회사로 찾아와준 성의는 둘째로 쳐도, 정재성이 리카에게 호의가 있어야 더 열심히 해주지 않겠는가.

“그런데 건물이 되게 좋네요. 중소라곤 안 믿겨요.”

“저도 처음 왔을 때 놀랐어요.”

“어디서 투자 많이 받으셨나 보네요. 유명한 프로듀서라도 있나요?”

정재성이 관심을 많이 가져주는 건 좋은데, 그 관심은 리카에게 향했으면 좋겠다.

“이시카와 씨는 어디 계세요?”

“지금 수업 듣고 있어요. 조금 있으면 끝날 겁니다.”

“수업? 아아, 외국어 같은 거 배우나 보네요. 진짜 힘들여서 준비하는 그룹인가 봐요.”

중소 기획사에서 멤버들의 외국어 능력까지 신경 쓰긴 불가능에 가깝다.

짐(Gym)에도 안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저 연습실에 체중계 하나만 달랑 가져다 두고 살만 빼길 요구할 뿐이지.

가로 엔터는 확실히 멤버에게 투자를 많이 하는 편이다.

“가서 봐도 될까요?”

“네.”

성필은 정재성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갔다.

멤버들이 책상에 앉아 정면의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아니, 보고 있는 걸까.

“……?”

정재성이 의문을 넘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단 듯 한껏 당황했다.

프로젝터 스크린에 비치고 있는 건 오케스트라의 합주 영상이었다.

스피커에선 감미로운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으어, 어…….”

조아라가 힘 빠진 신음을 내며 눈꺼풀과 힘겹게 싸우는 중이었다.

백설하는 슬슬 눈이 감기자 볼펜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허리를 바로 폈다.

리카는 아예 이마와 책상이 닿기 직전이었고, 의외로 장하양은 눈동자가 말똥말똥했다.

영상의 연주가 끝나고 관객들이 박수를 치자 한구인이 교실의 불을 켰다.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었습니다. 다들 어떠셨습니까?”

“스읍.”

조아라가 침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멤버들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구인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헨델과 바흐의 곡들을 들었습니다. 솔직한 감상을 말해주십시오. 감상이란 총평을 뜻합니다.”

“……지겨워요.”

솔직한 리카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조아라의 감상도 비슷했다.

백설하와 장하양은 어떻게든 포장하려는 티가 났지만, 결국은 듣기 힘들단 소리를 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다음 곡 하나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또?

이번에야말로 기절할 자신이 있던 멤버들은, 한구인이 다음 곡을 틀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거 들어본 적 있는데.”

조아라가 가장 먼저 아는 기색을 보였다.

굳이 그녀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아는 곡이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 3악장.

터키행진곡이다.

멤버들은 익숙하면서도 신나는 곡조에 웃음꽃을 피웠다.

적어도 헨델의 수상음악이나 바흐의 첼로곡보다는 훨씬 좋았다.

짧은 곡이 끝나자 한구인이 말했다.

“여러분. 뭔가 깨달았으리라 믿습니다. 이 곡이 이전의 것보다 훨씬…….”

“세련됐어요!”

“네. 그게 모차르트가 천재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는 음악의 역사를, 흐름을, 미래를 바꿨습니다. 수백 년 뒤에 들어도 전혀 지루하거나 구식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명곡을 수도 없이 남긴 겁니다. 패러다임을 바꿨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요. 굳이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여러분이 느끼신 바면 충분히 설명이 됐으리라 생각합니다.”

멤버들은 확실하게 느꼈다.

여태껏 모차르트가 천재란 말은 많이도 들었지만, 왜 그런지는 몰랐다.

하지만 모차르트 이전의 곡과 비교하니, 과연 그는 천재가 틀림없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닌 직관이 머릿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렇듯 음악사에는 불세출의 아티스트가 등장하곤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리될 수 있으리라 믿고, 응원하며, 지지하겠습니다.”

수업이 끝났다.

멤버들은 저마다 뭔가 깨달은 바가 있는 듯 눈동자가 빛났다.

정재성은 얼이 빠져서 성필에게 물었다.

“이, 이거 뭐 연출 아니죠? 카메라도 없는데……?”

“원래 하던 거예요.”

한구인의 음악사 강좌를 시작한 지는 3주 정도 됐다.

지금까지 성필이 멤버들의 원성을 얼마나 들어왔던가.

교실에 들어가면 한구인이 이상한 클래식만 주야장천 들려준다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 수업을 보니 의미가 있었다.

“이시카와 리카입니다!”

성필은 리카와 정재성을 데리고 응접실로 왔다. 정재성은 수첩을 펼치며 미소를 지었다.

“일본인이시죠?”

“예! 아버지가 일본인이시고 어머니도 일본인이십니다!”

“하하. 한국엔 언제 오셨어요?”

정재성은 리카가 KS 엔터 연습생이었단 말에 눈을 빛냈다.

KS 엔터에서의 일상들만 듣는 데 수십 분을 썼다. 그 뒤에는 가정사였다.

“고작 1년 만에 한국어를…….”

“매일 매일 한국 드라마만 봤어요! 한글은 4시간 만에 뗐습니다!”

“대단하시네요. 그럼 아이돌이 되려고…….”

“원래는 배우였어요. 그건 어느 날이었죠. 어느, 추웠나 더웠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무튼 화창한 날이었어요. 그날 저는 박 이사님과…….”

매일 큰 소리로 문장을 딱딱 끊어서 이야기하길래 몰랐는데, 리카는 말솜씨가 상당히 좋았다.

정재성은 리카의 이야기보따리에 멍하니 집중했다. 가끔 질문하는 것 외엔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다.

어느새 정재성은 정해진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아! 너무 오래 있었네요. 저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이시카와 씨,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음에 또 봬요!”

정재성은 리카의 활기찬 태도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성필은 그를 배웅하러 밖으로 나왔다.

나가는 길, 정재성은 수첩을 보면서 연신 감탄했다.

“진짜 드라마틱하네요. 소설 보는 줄 알겠어요. 한류 스타가 되겠단 꿈만 품고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온 일본인 소녀.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아이돌로 진로를 전향하고, KS 엔터에서 데뷔 직전까지 갔다가 탈락. 부모님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남아서 데뷔를 준비하는……. 아, 이거 부모님 얘기 나올 때 눈물 흘려주면 그림 나오겠어요.”

정재성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듯 실실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리카의 사정을 상품화하려는 그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작가의 일인 것을.

단지 입 밖으로 꺼낼 때는 조심해주면 좋겠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아, 그리고 말이에요.”

정재성은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이 성필에게 가까이 붙었다.

“이시카와 씨가 현재 모인 연습생들 중에서 외모는 탑티어인 것 같아요.”

“리카가요?”

“네. 특별한 서사도 있으니까 분량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제가 PD는 아니라 뭐라 확정 드릴 수는 없지만요.”

“아, 네, 감사합니다.”

“넵. 가보겠습니다.”

성필은 그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그가 했던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모인 연습생 중에서 리카의 외모가 탑티어라고?’

전생의 프로젝트 포유에서도 비주얼로 주목받는 연습생이 많았다.

그들과 비교해서도 리카가 뛰어나단 건가?

‘혜빈 누나도 리카가 제일 눈에 띈다고 하더니.’

설마 성필만 모르는 리카의 매력이 있는 건가.

성필은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리카가 성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잘했나요?”

성필이 말없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리카가 기쁘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넌 천상 아이돌이다.”

“모찌론(당연)!”

* * *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뒤로 다가왔다.

“가족이랑 함께 보내고 싶은 사람은 이브부터 휴가 줄게.”

홍규헌이 직접 연습실로 와서 선포했다.

멤버들은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다.

리카가 손을 들었다.

“저는 어떡하나요! 회사에서 비행기 표를 지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건 너 알아 할 일이고.”

“소난다(그렇구나).”

“정 가고 싶으면 박 이사한테 시켜서 부산까지 데려다줄게. 배 타고 가.”

“사장님, 제 크리스마스 이브는……?”

“이브가 휴일이야? 평일이잖아. 박 이사는 열심히 일해야지.”

“손나(그런)…….”

“아앗! 박 이사님, 저 따라 하지 마세요! 인종차별이에요!”

“……한 이사님. 리카 요즘 들어 자꾸 이러는데 왜 이래요?”

“제가 일본사 시간에 드린 말씀 때문인 거 같습니다. 인종은 피부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다. 국적이나 기타의 차이로 차별하거나 모욕하는 건 인종차별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인종차별이에요!”

리카는 아직 학생이라 그런지 선생의 말을 스펀지처럼 그대로 빨아들였다.

그런데 대체 일본사의 어떤 파트를 공부한 것일까.

“리카. 네가 일본인이라고 희화화하는 게 아니라 귀여워서 그런 거야.”

“제가 귀엽나요?”

“응.”

“어쩔 수 없네요!”

“장난 그만치고 대답이나 해. 리카 너 배 타고 갈 거냐고.”

“안 가요. 저는 설날마다 가니까요!”

“누가 설날에 보내준대?”

“에.”

“농담이야. 다른 애들은 어떡할래?”

백설하와 장하양은 이브는 물론 크리스마스에도 나와 연습할 것이라고 한다.

조아라가 질려서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마스는 걍 숙소에서 놀아도 되잖아요. 휴일인데.”

“아라는 집에 가서 보낼래?”

“아니요. 나도 있죠 뭐.”

“에헤헤. 아라가 집에 가면 마음 약해질 거 같다고 했대요! 코도모(어린애)다 코도모(어린애).”

조아라가 리카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홍규헌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너흰 내 시험을 통과했어. 이브에 나간다고 했으면 핸드폰 연락처 다 뒤져봤을 거야.”

“저번에 박 이사님이랑 상담했었지 않나요……? 그때 우리 다 애인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사장님이 우릴 못 믿나 보죠. 섭섭하다.”

“내가 전에 애들한테 당한 게 많아서 그래. 이해 좀 해줘라.”

“그룹 이름이 ‘서프레스’였죠? 그분들은 어떻게 했었는데요?”

“말도 마라. 연습하다가 도망가는 애도 있었고. 울면서 소중한 사람 보러 가야 한다는 애도 있었어. 자기 혼자 로맨스 영화 찍고 앉았어.”

“보내주셨어요……?”

“그때의 난 어렸지. 아무튼 다들 숙소에 있을 거란 얘기지? 한 이사. 크리스마스에 얘들 숙소 가서 요리 좀 해줘.”

“에에에에엑?!”

리카가 질색했다.

“크리스마스까지 한 이사님의 영양 만점 건강식(맛은 그다지 없음)을 먹어야 하는 건가요?! 적어도 닭가슴살만이라도 먹게 해주세요!”

“뭔 소리야 얘는. 당연히 기름기 넘치는 걸로 먹여주지. 너희 한 이사가 각 잡고 요리하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지?”

리카는 벌써 침이 고였다.

건강식을 만들어도 심상치 않은 솜씨인데, 진심으로 요리를 하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사장님이랑 박 이사님도 오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안한 건 장하양이었다.

“나도?”

“사장님은 크리스마스에 일정 있으신가요?”

“나야 회사에 몸과 마음 다 바쳤지.”

“남친 없으신가 봐.”

“혼또다요(정말 그렇네).”

“꼬맹이들 조용해라.”

홍규헌은 곤란하단 듯이 멤버들을 보았다.

“내가 가도 되겠어? 그냥 너희끼리 먹어.”

“저는 사장님도 있으시면 좋겠어요. 리카랑 아라도 그렇지?”

“하이(네).”

“좋아요.”

“언니는요?”

“나도 좋아.”

“어째 대답들이 영혼이 없는데…….”

결국 홍규헌도 크리스마스 식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장하양은 진심으로 기쁘단 듯 박수까지 쳤다. 그리고 성필에게로 눈을 돌렸다.

“박 이사님은 크리스마스나 이브에 일정 있으신가요?”

“친구들이나 만날까 했는데, 나도 갈게.”

“친구요? 어떤 친구요?”

“고딩 때 친구들. 다들 일하느라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었거든. 점심이나 같이 먹으려고 했었지. 그 뒤로도 놀지는 모르겠는데, 나도 가긴 할게.”

그렇게 가로 엔터 전체가 크리스마스에 모이기로 했다.

* * *

12월 23일.

성필은 출근하자마자 리카에게 자랑을 들어야 했다.

그녀는 분홍색 털장갑을 끼고 손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이거 하양 언니가 줬어요!”

무늬가 없는 손모아장갑이었다.

듣자 하니 멤버들 모두 장갑을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아라는 파란색, 설하 쌤은 흰색이에요!”

“색깔에 기준이 있는 거야?”

“그건 모르겠어요. 그렇네요. 저는 왜 분홍색일까요?”

“벚꽃? 일본인이라서?”

“……인종차별인가? 애매하네요.”

성필은 일과에 따라 홍규헌을 찾았다.

홍규헌이 거울을 보면서 털모자를 이리저리 써보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그녀와 눈이 맞았다.

홍규헌은 급히 털모자를 벗었다.

“개화기 신여성 패션이에요?”

“내 패션을 평가하려고? 어디 한번 해봐.”

“제가 어떻게 사장님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근데 지금 옷에는 잘 안 맞는 거 같아요. 캐주얼한 코트에는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이거 장하양이가 준 거야. 이걸 어떤 옷에 매치시켜야 하나 모르겠다.”

은근히 불평하는 것 같아도, 홍규헌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있었다.

성필의 가슴속에서 부러움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멤버들은 그렇다 치고. 사장님은 사장님이라서 준 거겠지?’

장하양이 사회생활은 참 잘한다.

‘그래. 사장님이 받으시면 내가 받은 거나 다름없지. 사장님이 가로 엔터 대표로 받으신 거야.’

잠시 후, 아침부터 장을 봐 온 한구인이 도움을 요청했다.

성필은 한구인의 차로 가서 장바구니를 옮겼다.

“한 이사님이 목도리 하신 거 처음 보네요. 요즘 날이 춥긴 한가 봐요.”

“아, 이거요. 하양 씨가 주신 겁니다.”

“……?”

“조금 엉성하거나 벌어진 부분이 있고 길이가 짧긴 해도 따뜻합니다. 무엇보다 정성이 있으니까요.”

성필은 심란한 기분으로 아침을 보냈다.

이런 생각은 정말 하면 안 되지만…….

‘나는? 내 선물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