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54화 (54/760)

#054화

멤버들은 짐(Gym)으로 와서 검사를 받았다.

성필과 한구인은 트레이너에게서 설명을 들었다.

“먼저, 이시카와 회원님은 더 건들 부분이 거의 없어요. 당장 활동 시작하셔도 되겠어요.”

한구인이 밝게 웃으면서 성필을 보았다. 성필도 마주 웃어주었다.

과장을 보태서, 두 사람에게 멤버들은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자식이 칭찬받는데 기쁘지 않은 부모가 있을까.

“팔굽혀펴기 서른 번 한 번에 하는 거 보고 저도 깜짝 놀랐거든요. 무릎도 안 대시고요. 걸그룹 연습생 통틀어서 굉장히 드문 근력을 가지고 계세요.”

리카는 KS 엔터에서도 전문적으로 관리를 받았다. 데뷔조에 가장 가까운 이들 중 하나였으니, 회사에서도 신경을 쓴 것이다.

그때의 습관이 가로 엔터에서도 잘 이어졌다.

대단한 집념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제가 세부적으로만 지도하고 식단만 잘 관리해주시면 되고요. 다음은 백설하 회원님인데. 가슴이랑 골반 쪽이 크셔서 복부에 집중하는 게 좋아 보이시거든요.”

성필은 검사지의 세부 항목을 보았다.

2에 3번 항목, 복부지방률.

허리둘레와 엉덩이둘레…….

프리사이즈 옷을 자주 입어서 체감이 잘 안 됐는데, 수치로 보니까 대단하다.

어쩌면 이런 체형이라서 프리사이즈를 선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길가를 거닐 때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테니까.

“허리를 얇게, 운동한 사람처럼 단련한 느낌을 낼 수 있도록 할게요. 백설하 회원님 같은 체형으로 너무 마르게 하면 오히려 보기가 안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금방 될 거 같아요. 평소에도 코어 단련을 계속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다음 차례는 장하양이었다.

“장하양 회원님은 일단…… 살이 찌셔야 해요. 너무너무 마르셨어요.”

“그렇죠.”

“이 몸으로 계속 춤추셨으면 허리가 많이 아프셨을 텐데. 따로 말씀은 없으셨나요?”

“연습생 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래도 많이 아프셨을 거 같은데.”

트레이너는 이 상태로 연습 강행군을 이어갔으면, 장하양이 어떤 병이든 하나 걸렸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도 이런 분이 몸만들기는 가장 좋아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느낌이랄까. 최종적으로는 전체적으로 탄탄한 느낌을 주도록 할게요. 이런 식으로요.”

트레이너가 예시를 보여주었다.

흑백으로 조명을 받은 채 촬영한 사진이었다.

“하양이가 이렇게 될 수 있나요?”

그야말로 ‘탄탄’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몸이었다. 손으로 피부를 누르면 고무처럼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울 것 같다.

지금의 여리여리한 장하양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네. 제 지도만 잘 따라오시면 할 수 있으세요. 마지막으로 조아라 회원님이신데요. 살을 빼셔야 할 거 같아요.”

“네? 아라가 살이 쪘나요?”

“아시겠지만, 아이돌 기준으로는 그렇죠. 상체는 괜찮은데 하체 쪽이요. 전체적으로 굉장히 잘 발달되시긴 했어요. 일반인이시면 문제가 전혀 없으시거든요. 오히려 이게 조아라 회원님 같은 체형에선 이상적인 몸매죠.”

조아라는 평소에도 근력 운동을 자주 한다.

거기다가 춤을 미친 듯이 추니, 지방은 깎이고 근육이 발달한 것이다.

그 건강함이 기묘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근육이 지방보다 무거우니, 멤버들 중에 키는 가장 작으면서도 몸무게는 가장 많이 나가게 되어버렸다.

“근데 조아라 회원님이 바스트에 비해서 골반 쪽이 크시잖아요. 허벅지도요. 백설하 회원님처럼 둘 다 나오셨으면 모르겠는데요. 지금 상태면 카메라에 찍혔을 때 하체가 살찐 것처럼 보이거든요. 카메라 테스트 해보시면 보일 거예요.”

카메라 테스트야 옛적에 했다.

다만 조아라를 항상 실물로 보다 보니, 카메라에 잡힌 상태로도 문제점을 잡아내기 쉽지 않았다.

조아라의 실물에 너무 익숙해진 것이다.

마냥 건강해서 좋게 보였는데…….

“조아라 회원님은 전체적으로 살을 빼는 쪽으로 진행할게요.”

“알겠습니다.”

“제가 드릴 말은 여기까지구요. 기본 전제는 아이돌로서의 몸매예요. 옷핏이 가장 잘 맞는 몸이요. 혹시나 다이어트 주사 같은 거 맞히실 계획이면 꼭 말씀해주세요.”

성필과 한구인은 산뜻한 충격을 받고 상담실을 나왔다.

멤버들은 두 사람이 나타나자 대화를 멈추고 입을 꾹 닫았다.

“가자.”

멤버들은 성필과 한구인의 뒤를 따랐다.

중간에 참지 못한 조아라가 물었다.

“트레이너님이 뭐라고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럼 지금 알려줘도 되잖아요.”

“……다들.”

성필은 뒤로 돌아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트레이너 쌤이 말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아이돌이야. 아이돌이란 협소한 기준에 맞춰서 너희의 신체 상태를 평가한 데 불과해. 그러니까 그걸로 너무 자존감 떨어뜨리지 마.”

“나 살 빼야 된대요?”

“…….”

성필은 그녀의 집요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트레이닝을 시작하면 알게 될 일이었다.

조아라는 우울해져선 터덜터덜 걸었다.

“뺄 살이 어딨다고…….”

조아라가 자신의 복근을 매만졌다.

* * *

11월 말에 접어든 가로 엔터는 바쁜 듯 바쁘지 않았다.

데뷔가 1년도 남지 않았단 생각에 잘 때마다 긴장해 있으면서도, 예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일상 덕에 평소처럼 웃고 떠들 수 있었다.

7시 30분.

“빨리 타!”

“우응…….”

성필은 조아라를 태우고 그녀의 학교로 향했다. 조아라는 비몽사몽 고개를 꾸벅거렸다.

라디오를 크게 틀고 커피가 든 보온병을 내밀었다.

“땡큐…… 우…….”

“야 커피 흘린다! 일어나!”

성필이 어깨를 세차게 흔들고서야 조아라의 눈이 조금 떠졌다.

“밤마다 뭐하길래 아침마다 이래. 잠 좀 제때 자라.”

“아으, 피곤해. 아저씨가 나처럼 살아봐요. 안 피곤하나.”

매일 춤, 보컬, 운동을 반복한다.

그나마 조아라는 다른 멤버들보다 처지가 나았다. 학교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 힘든 거 알지. 그래도 잠은 제때 자라고.”

“리카가 자꾸 말 걸어요.”

“자라고 해.”

“그럼 우울해져서 혼자 끙끙대요.”

“강아지냐고.”

“애가 외로움이 많아요. 혼자 한국에 와서 살아서 그런가.”

이제 보니 조아라가 천사였다.

정작 리카는 아침마다 기운이 쌩쌩한데 조아라만 죽어 나가고 있다.

조아라는 커피를 한 번에 절반이나 마셨다.

“어우, 이제 잠 좀 깨네.”

“너 안 춥냐? 겨울이면 레깅스나 그런 거라도 입어.”

치마도 짧으면서, 란 말은 목구멍 안에 넣어두었다.

성필은 히터의 온도를 더 높였다.

“내 알아서 할게요.”

조아라는 글로브 박스에서 야자수 프렌즈 무릎담요를 꺼내 덮었다.

성필의 차 안은 조아라의 개인 공간처럼 변해버렸다.

“요즘 공부는 잘돼? 저번에 모의고사 쳤다면서.”

“똑같죠. 영어는 한의사님 때문에 좀 올랐고.”

“몇 등급?”

조아라가 씨익 웃으면서 손가락을 세 개 폈다.

“진짜?”

이 정도면 한구인은 사교육 수능 시장에 진출해도 될 것 같다.

8등급을 3등급으로 바꿔놔?

그것도 몇 개월 만에?

조아라가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영어 거 별것도 아니드만. 애들은 왜 어려워하는지 모르겠네.”

“대단하다 진짜. 다른 과목들은 몇 등급이야?”

“쉿.”

“명탐정 박성필의 예상, 8, 8, 8, 8.”

“아니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럼?”

“……5, 8, 6, 7.”

“한국사는?”

“내가 알아서 한다고요. 아저씨가 내 아빠야?”

“우리 아라. 아빠는 밤마다 눈물이 줄줄 흘러. 공부 좀 해줘. 그거 다 사회에서 쓰는 거야.”

“짜증 나.”

조아라는 피식 웃으면서 창밖을 보았다. 거리에는 등교하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너 학교에 친구는 있지?”

“친구는 학원 친구가 있어요.”

“학원 말고 학교에는?”

“잠만 자는데 뭔 친구.”

“왕따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

“내가 거리 두는 거지. 굳이 학교 친구 필요해요?”

성필은 소름이 돋았다.

‘친구’와 ‘필요’란 단어가 한 문장 안에서 결합될 수 있는 거였나?

정말이지 끔찍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맞는 사람이랑만 사귀면 되는 거지. 안 그래요?”

조아라가 성필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성필은 백설하의 눈물이 떠올랐다.

학창 시절에 좀 더 친구를 사귀었다면, 더 놀았으면, 충실한 생활을 보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 말하며 백설하는 울었었다.

“벌써 왔네.”

조아라는 성필이 선물로 줬던 망토 담요를 두르고 밖으로 나갔다.

“다녀올게요.”

“잘하고 와.”

조아라가 교문까지 빠르게 달려갔다.

“조아라 너 이놈 셰끼! 꼴이 그게 뭐야?! 선생님이 등교할 때는 교복 제대로 입으랬지!”

“아아악! 잘못했어요!”

조아라가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붙잡혀 교문 안으로 사라졌다.

‘학교…….’

조아라는 점심 먹기 전에 조퇴하고 회사로 온다.

이게 맞는 것일까?

대형 기획사 연습생들은 예고가 아닌 이상에야 학교에 정상적으로 다니길 권유받는데.

가로 엔터는 너무도 당연하게 조아라에게 조퇴를 요구했다.

‘아라가 아이돌 활동을 끝내면…….’

뭐가 남지?

어쩌면 이 시절을 후회하진 않을까?

* * *

곧 크리스마스다.

유리 벽 너머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있으니 정말 겨울이란 감상이 들었다.

성필은 원래 자연물에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는 자연보다 사람에 민감하다.

크리스마스란 생각이 든 것도 장하양을 보고 떠오른 것이었다.

“많이 떴네.”

“헤헤, 생각보다 잘 안 돼요.”

장하양은 틈이 나면 뜨개질을 했다.

실의 색이 자주 바뀌는 것으로 보아, 자주 실패를 경험하는 듯했다.

“목표는 있어?”

“아라 스웨터 같은 거 만드는 거요.”

그건 좀 어려울 것이다.

아니, 많이 어려울 것이다.

조아라의 스웨터는 도저히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하다.

단순히 평면인 게 아니라 실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아라네 어머니의 손재주에 경탄을 보내고 싶을 정도의 수준이다.

“랩은 배울 만해?”

“네. 그 래퍼분께서 잘 가르쳐주세요.”

뭔가 래퍼라 하면 문란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성필의 편견).

자주 가사의 주제로 쓰는 게 술, 이성, 마약 같은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래서 장하양의 랩 강사로 남자를 붙여주지 않았다.

아무리 연애 금지 조항으로 정신 무장이 되어 있다 해도, 여러모로 좋은 사람이 헌신적으로 대시해오면 눈 딱 감고 넘어갈 수도 있으니.

“어제는 가사도 직접 써봤어요. Veni vidi vici 일이 많이 있지 이름 이미 길이 길이 남아 넌 희미하니 easy 이민 나는 이긴 게임이니 남아 더 말해 veni vidi vici.”

“……어?”

장하양이 부끄럽단 듯 얼굴을 붉혔다.

“이상하죠? 모음으로 라임을 맞출 수 있대요. 그래서 래퍼분이 Veni vidi vici로 맞춰보라고 하셨거든요. 제 나름 한다고 했는데 의미도 안 이어지고…….”

“아냐. 알아들었어. 그니까…… 나는 성공해서 일거리가 많이 들어온다. 내 이름은 길이 길이 남는데 네 이름은 희미하니 이민이나 가라. 나는 이 게임에서 이겼다. 이런 뜻이지?”

“맞아요.”

“근데 그거 뜻이 뭐야. 베니 비디 비치?”

욕인 거 같기도 하다.

Bitch가 들어가니…….

“라틴어로 ‘왔노라, 봤노라, 이겼노라’란 뜻이에요. 카이사르가 한 말이래요.”

“그렇구나. 하양이 유식하네. 곧 한 이사님도 따라잡겠어.”

“아하하.”

장하양이 뜨개질을 계속했다.

성필은 알 수 없는 허무함에 사로잡혀 창밖만 보았다.

생명이 져가는 계절.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그런 생각만이 떠올랐다.

“방금 눈 떨어진 거 같…….”

“이사님은 산타클로스한테…….”

“너 먼저 말…….”

“이사님 말씀하…….”

“…….”

“…….”

둘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더니, 곧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금 눈 온 거 같다고. 근데 잘못 봤나 봐.”

“저는 산타클로스한테 선물로 뭐 달라고 하셨냐고 물어봤어요.”

“산타는 없어.”

“알아요.”

“아는구나. 으음, 나는 보자. 굳이 받는다면 인연이 좋겠네. 미인이었으면 더 좋겠다.”

“앗, 혹시 저?”

“그래. 너희들이 다 내 선물이지. 내 욕심이 너무 많았다.”

“아하하.”

주말에 할 게 없어서 회사로 왔더니 장하양이 있었다. 연습이라도 하나 싶었는데 뜨개질만 하고 있다.

성필은 연습하라는 강요처럼 들리지 않도록 부드럽게 질문했다.

“연습하고 갈 거야?”

“조금 있다가요. 왜 그러세요?”

“언제 돌아가나 싶어서 물어봤지. 나중에 데리러 올게.”

“가시게요?”

“응. 딱히 할 일도 없고.”

“집엔 할 일이 있으시고요?”

“집에도 없긴 하네.”

“저 뜨개질하는 동안 대화 상대라도 해주세요. 아, 시간 괜찮으시면요.”

“그럴까? 난 한 이사님이 아니라서 알아두면 쓸데없지만 재밌는 지식 같은 거 못 알려주는데.”

“아하하, 한 이사님이 재밌는 거 많이 알려주시긴 하죠. 어제는 마르크스랑 베버란 사람에 대해서 들었…….”

그때 성필의 핸드폰이 울렸다.

양해를 구한 뒤 회사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네, 작가님. 잘 지내셨어요?”

상대는 8년 차 방송 작가였다.

실력이 좋아 슬슬 대박 하나만 터트리면 메인 작가까지 노려볼 수 있을 만한 사람이다.

성필과는 경력도 같았기에 친밀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둘은 안부를 몇 번 주고받곤 본론으로 들어갔다.

[석세스 엔터에서 나오셨다더라고요. 그래서 따로 연락드렸어요.]

“뭘 나간 사람까지 챙겨주시고 그래요. 전 뭐 이제 연예인 꽂아드릴 힘도 없는데.”

[아이돌 기획사에 들어가셨다면서요. 연습생 키우신다고?]

“네. 하루하루 그렇게 살고 있죠.”

[제가 이번에 맡은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에 팀장님 회사 연습생 출연시킬 생각 없으세요?]

“연습생을요?”

연습생을 방송에? 굳이? 왜?

무슨 교양 방송 방청객에라도 세우려고 하나?

아니, 고작 그런 이유라면 굳이 연습생을 필요로 할 이유도 없겠지.

‘이 시점이라면 혹시…….’

그거다.

연습생 서바이벌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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