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51화 (51/760)

#051화

홍규헌은 황망히 시선을 내리고 책상 위를 더듬댔다.

정리할 것도 없으면서 서류만 만지작거렸다.

“내가 예스맨을 바라는 건 아닌데…….”

“1년으로 맞출까요?”

“음, 하아.”

홍규헌은 자세를 바로잡고 성필을 똑바로 보았다.

“1년이면 나도 좋지. 훨씬 좋지. 그런데 하나부터 짚어보자. 1년 뒤 데뷔라 치면 6개월 뒤쯤부터는 앨범 준비에 들어가야 하는 거지?”

“예.”

1년.

1년…….

말이 1년이지, 멤버들의 기량을 상승시킬 시간은 고작 6개월에 불과하다.

“불가능하지 않아? 리카랑 백설하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조아라랑 장하양은? 앨범 준비할 시점이면 조아라는 노래 배운지 고작 1년밖에 안 돼. 아니, 하아.”

홍규헌은 혼란에 빠졌다.

‘내가 어쩌다가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악마의 대변인이란 논의를 진척시키기 위해 일부러 반대 의견만 펴는 사람을 뜻한다.

집단의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였다.

홍규헌은 성필이 그 역할을 맡을 줄 알았건만, 의외로 둘의 역할이 바뀌게 됐다.

“유의미한 발전이 없다면 아라의 파트는 줄여야겠죠.”

“장하양은? 장하양한테 가사 고작 몇 마디 배분할 거야?”

“기한에 맞추면서도 곡의 완성도를 올리려면 어쩔 수 없겠죠. 정말 최악의 경우엔 그렇다는 거지만요.”

“…….”

홍규헌은 할 말을 잃었다.

1년 뒤에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확실한 건, 성필이 원래 목표로 했던 수준보다 훨씬 낮으리란 것이었다.

홍규헌은 괜히 미안해졌다.

“박 이사는 퍼포먼스적으로 완성된 그룹을 바랐던 거 아니야?”

“그거야 그렇죠.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성장하는 그룹을 목표로 달려 나가는 수밖에.”

“성장하는 그룹이라니…….”

일본 아이돌계도 아니고.

“데뷔는 아마 싱글 앨범일 겁니다. ……싱글 앨범인가요?”

“그때 상황 보고 애들이 좀 낫다 싶으면 볼륨을 좀 올려도 되겠지.”

“어쨌거나 결국 데뷔 활동 기간에 해야 할 건 고작 곡 하나잖아요. 그거 하나 완벽히 소화하지도 못할 리 없어요. 그럴 거면 아이돌은 그만두는 편이 낫죠.”

성필의 기준은 장하양이었다.

아무리 습득이 느린 장하양이더라도 같은 곡을 몇 개월 동안 연습하면 못하는 게 이상하다.

게다가 현대 기술의 힘을 빌리면 장하양의 보컬도 커버치는 게 가능할 것이다.

‘활동 곡은 단 하나. 멤버들이 소화해야 할 범위는 좁아.’

아이돌의 성패를 가르는 시점은 앨범이 세 개가 나왔을 때라고들 한다.

2년에서 3년 차에 계속할지 말지 결정할 통계가 나온다.

성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막 데뷔한 2, 3년 차 아이돌처럼 콘서트에서 십수 곡을 해낼 필요도 없다. 역량을 하나의 곡에 모을 수 있으니 일반적인 실력 미달을 숨길 수 있다.

‘내 목표는 완벽이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지.’

데뷔부터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는 게 그의 계획이었으나, 그러려면 최소한 2년은 필요할 것이다.

‘회귀하자마자 샀던 주식을 팔아서 가로 엔터에 투자해도 되겠지만.’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미루고 싶다.

성필이 직원이 아니라 투자자가 되는 순간, 현재의 관계는 부서질 것이다.

홍규헌은 성필의 의견을 의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압박으로 느낄 게 틀림없다.

‘지금 관계가 가장 나아.’

홍규헌이 성필이 존중하고, 성필이 그녀의 신뢰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것.

성필의 생각이 너무 멀리 나가면 홍규헌이 잡아줄 수 있다.

“1년, 1년. 그럼 대략 1년을 기준으로 잡아서 사정 보고 조금씩 늘리는 쪽으로 하자. 괜찮을 거 같아?”

“예. 하겠습니다.”

“나 때문에 무리한 의견 펴는 거 아니지?”

“할 수 있습니다. 해보겠습니다.”

항상 성필을 믿는 홍규헌이었지만, 너무도 허들이 높은 목표를 제시해버린 나머지 이번만큼은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1년이란 기한은 홍규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칼같이 잘라서 1년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보면서 결정하자.’

홍규헌은 성필을 믿기로 했다.

“내가 안 말해도 잘 알겠지만. 백설하는 지금처럼 스트릿 댄스랑 아이돌 댄스 동시에 연습하는 걸로. 보컬은 완성형이나 다름없으니까 기량을 유지하는 쪽으로. 조아라는 백설하의 반대로.”

“예.”

“장하양은 알지? 기본만 갖추자. 특기를 살릴 수 있게 랩에 더 비중을 두고. 리카는…….”

리카는 딱히 집중하고 말 게 없다.

KS 엔터에서 데뷔조로 뽑히기만 했으면 지금쯤 신나게 데뷔곡을 연습하고 있었을 수준이다.

“리카는 지금처럼만.”

“알겠습니다.”

“뭐라도 더 배우게 해볼까? 현대 무용이라던가.”

“리카가 배우고 싶은 의지만 있으면 악기나 작곡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 뭐어, 천천히 생각해보자.”

성필은 홍규헌과 대화하며 멤버들이 다녀야 할 학원들을 검토했다.

이미 예전부터 합의가 되어 있던 사항이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더 할 말 있어?”

“데뷔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제가 전에 드린 기획서를 봐주세요.”

홍규헌은 책상 선반 아래쪽에서 두꺼운 서류 뭉치를 꺼냈다.

옛날, 성필이 가로 엔터에 들어왔을 때 제출한 기획서였다.

홍규헌은 서류를 팔락팔락 넘긴 뒤, 성필이 알려준 페이지를 폈다.

“데뷔 전 전략. 이런 것도 있었지.”

홈페이지, 멤버별 SNS, 그룹 전체 SNS 페이지, 아이튜브 채널 개설 등이 있었다.

“아이튜브 채널에 정기적으로 콘텐츠 업로드. SNS에도 마찬가지고. 박 이사가 열심히 생각해낸 느낌은 들어. 뭐, 커버곡. 커버댄스. 애들 일상. 개인 코너, 자체 프로그램 등등…….”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안 든다기보다, 꼭 필요해?”

홍규헌은 성필의 계획에 의구심을 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야, 초장부터 너무 힘 빼는 느낌이거든.”

연습하는 것도 힘든 멤버들에게 SNS며 아이튜브 채널까지 신경 쓰게 하고 싶진 않았다.

의욕이 있는 건 좋았지만, 기획서대로 진행하면 성필도 지칠 것이다.

“이런 건 데뷔하고 해도 되잖아.”

홍규헌은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성필이 그녀의 무리한 의견을 수용해줬다 해도, 등가교환으로 성필의 의견을 곧장 받아주진 않았다.

성필은 비호의적인 홍규헌을 보곤 의지를 다잡았다.

어투도 극존칭으로 바꾸었다.

“꼭 필요합니다. 데뷔까지의 시간이 짧은 건 감내하겠지만 이건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보통 반대 아냐?”

연습생 시절부터 콘텐츠를 공개하는 전략은 아직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다.

대형 기획사는 연습생을 데뷔까지 철저히 숨기는 편이다.

중소기획사야 궁여지책으로 시도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성공 사례가 없었다.

그렇다.

‘아직까지는’ 없다.

‘미래의 WTP를 제외하면.’

지금이야 WTP는 2티어와 1티어에 걸쳐져 있는 그룹이다. 하지만 미래엔 전 세계를 휩쓰는 케이팝의 아이콘이 된다.

WTP는 풀뿌리처럼 바닥으로부터 팬과 함께 커왔다.

팬의 헌신적인 사랑과 응집력으로 인해 영향력을 확보한 것이다.

미래에서 온 성필은 그들의 성공전략을 안다.

‘SNS와 아이튜브의 방대한 콘텐츠와 소통. 멤버들의 자체 프로듀싱 능력. 완벽한 퍼포먼스.’

성필이 가장 본받아야 할 건 콘텐츠와 소통이다. WTP는 자체적인 콘텐츠 제작과 소통으로 중소기업의 기적을 일구어냈다.

완벽히 그들의 전략을 적용할 수는 없더라도, 현재 가로 엔터의 상황에 맞아들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무조건 성공하진 않을 것이다. 큰 성과가 없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먹혀들어 간다면 투입한 자원 대비 매우 큰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예, 필요합니다. 현재 WTP도 중소기획사 출신인데, 이런 방법으로 팬을 차근차근 모아갔습니다. 화제만 되면 급격히 팬을 늘릴 수 있을 겁니다. 관심을 가져도 덕질이 힘들면 금방 떨어지는데, 접근성 있는 매체에 콘텐츠가 많으면 쉽게 덕질이 가능하니까요.”

“아, WTP가 박 이사 모델이었어? 크게 잡았네. 그 정도만 성공해도 소원이 없겠다. 그런데…….”

홍규헌이 반박을 시작하려 한다. 성필은 그녀에게 말머리를 넘기지 않았다.

더 강하게, 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중소돌이 음악이 좋은 것만으론 뜨기 힘듭니다! 입덕 후에 붙잡아 둘 요소가 필요해요!”

“어? 뭐어, 그렇지?”

“요즘이 어떤 시대입니까? 레거시 미디어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드는 뉴미디어 시대입니다! 콘텐츠가 곧 돈이고 돈이 곧 콘텐츠예요! 콘텐츠 자체가 영향력이고 팬들의 확대 재생산이 이뤄지는 최고의 마케팅 수단이란 거죠!”

“어어…….”

“요즘 기획사들을 보면 그런 콘텐츠를 유료 서비스로 둡니다. 네, 물론 돈이 벌리겠죠. 팬이 어느 정도 있으면요. 하지만 저희야 그렇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저희는 콘텐츠를 풀어야 해요! 멤버들이 팬과 지속적으로, 직접적으로 소통도 해야 합니다!”

“알겠…….”

“저희가 큰 기획사처럼 마케팅에 쓸 돈이 많은 것도 아니거니와 이름값도 없잖습니까!”

“…….”

“처음엔 당연히 반응이 없겠죠. 하지만 그게 1년, 2년, 3년, 시간을 들여 쌓아간다면 어느 날 화약고의 폭약처럼 터질 겁니다! 이제 소비자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팬의 시대예요! 팬의 조건이 뭔지 아십니까?”

“알았으…….”

“팬은 소비자와 다릅니다. 소비자는 멋진 아이돌을 보고 관심을 가지지만, 팬은 아이돌이 지닌 이야기와 삶을 함께해나갑니다!”

“알…….”

“저희가 만들어야 할 건 소비자가 아니라……!”

“알겠다고!”

홍규헌이 고함을 지름으로써 성필의 독주를 막았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하면 되지. 알겠다고. 박 이사 말 알겠으니까, 알아서 해.”

고작 대화 몇 분 했는데 며칠 분 기력을 다 소모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성필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강했다.

“업로드할 콘텐츠 기획은 간단하게라도 서류로 남겨. 나한테 꼭 보고하고.”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자, 이제 얘기할 건 끝났지? 마지막으로…….”

“더 남았어요?”

홍규헌은 얼핏 미소를 보였다.

“애들 보고 숙소에 들어가라고 해.”

“드디어.”

“이제 정말 데뷔만 보고 살아가는 거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어요.”

“해야 할 거?”

* * *

백설하는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연습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연습실 구석에 놓인 디지털 키보드 앞에 앉았다.

“하아.”

오늘 하루도 시작됐구나, 피곤하다.

졸린 눈을 비비며 힘들게 잠을 깨웠다.

백설하의 손이 익숙하게 ‘도’를 짚었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

음정 연습은 백설하의 아침 일과였다.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그렇기에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연습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2옥타브 후반까지 도달했다. 조금은 진심을 발휘해야 했기에 표정도 진지해지려던 찰나.

“아아.”

“설하 씨.”

“아악!”

갑자기 성필이 뒤에서 나타나자 백설하가 2옥타브 ‘솔’로 소리를 질렀다.

성필은 놀라서 눈을 끔뻑이다가 크게 웃었다.

“귀가 뻥 뚫리네요. 역시 가수다.”

“가, 갑자기 나타나시면 어떡해요. 놀랐잖아요…….”

“옛날부터 생각했는데 아침에는 정말 둔해지시네요. 잠에 많이 약하신가 봐요.”

“좀 그렇긴 한데…… 보이나요? 티 안 낸다고 생각했었는데요…….”

“보이죠. 커피 드실래요?”

백설하는 키보드와 성필을 번갈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휴게실로 가서 인스턴트커피를 마셨다.

확실히 커피를 마시니 잠이 좀 깼다.

‘하양이는 조금 있다가 오겠지. 아, 트레이닝 자료 안 뽑아뒀네. 커피 마시고 뽑으러 가야겠다.’

백설하는 따스한 커피를 홀짝홀짝 목구멍으로 넘겼다.

아침이라 멍한 기분에 탁한 커피를 보고 있자니, 앞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성필이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니요. 요즘 지내는 건 어때요? 불편한 점은 없어요?”

“네, 별로. 옛날이랑 똑같죠.”

“놀 시간도 없어서 많이 힘들겠어요.”

“연습생이니까요. 힘들긴 해도 해야만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휴일에도 제대로 쉬면서 몸 관리하고 있어요.”

“으음, 휴일에는 뭐 하시는데요?”

“네? 음, 그냥, 남들이랑 똑같은 거 같아요.”

“놀러 가거나?”

“요즘은 추워서 밖엔 잘 안 나가요, 헤헤. 이사님은 휴일에 뭐 하세요?”

그때 휴게실 문 너머로 회사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양이 왔나 봐요. 아, 저 프린트 뽑아야 하는데. 커피 잘 마셨어요. 다음엔 제가 타드릴게요.”

백설하가 일어서려던 순간, 성필이 선수를 가로채듯 먼저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성필은 조용히 문을 잠갔다.

“이사님……?”

“설하 씨.”

성필의 부름에는 그윽함이 담겨 있었다.

평소 멤버들과의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떨던 야단법석함도 없었다.

백설하는 성필이 이렇게 변했을 때 어떤 말을 했던가 떠올렸다.

‘하양이가 애들 속에 잘 섞여들도록 잘 부탁한다.’

그런 류의 진지한 부탁이었다.

‘제가 바라는 미래엔 설하 씨가 있어요. 꼭 있어야 해요.’

아니, 그때 일은 떠올리지 말고.

아무튼 성필은 또 진지한 부탁이나 질문을 해올 게 틀림없었다.

커피를 마셨음에도 조금은 멍해 있던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말씀하세요.”

“남자친구 있어요?”

백설하의 정신이 다시 멍해졌다.

“……애인이요?”

왜 이런 걸 묻는 거지?

머리를 굴려도 의도를 모르겠다.

아침이라 머리 쓰는 게 힘들었다.

남자친구 있는 게 궁금한가?

애초에 백설하의 생활 패턴을 보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할 텐데.

굳이 왜 물어보는 거지…….

생각을 거듭하던 백설하의 눈에 성필의 손이 잡혔다.

그는 휴게실의 문을 잠그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문에 귀를 가까이 댄 데다가 손잡이까지 꽉 잡고 있었다.

누구도 이곳에 들일 수 없다는 듯.

“아.”

무언가 깨달아버린 백설하가 수줍게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아, 안 돼요 이사님. 회, 회사. 비즈니스, 인데 저희는. 사장님한테도 죄송스럽고, 미, 미래의 팬들한테도 실례……. 이, 이러시면 안 돼요…….”

백설하의 목소리는 손바닥에 막혀서 웅얼거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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