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화
홍규헌의 양옆에는 성필과 한구인이 앉아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지했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네. 시작…….”
백설하가 답하려는 찰나, 옆에 서 있던 장하양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장하양의 손은 차가웠다.
그 냉기가 백설하의 긴장을 가시게 했다.
“시작하겠습니다.”
더는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다.
* * *
전주.
oh my own이라는 목소리가 규칙적인 킥드럼에 맞춰서 연달아 들려온다.
12초 부근, 메인 멜로디가 들어오는 순간 리카가 가장 앞으로 나섰다.
[리카: 넌 왜 내 말 안 들어
내 목소리만 점점 높아져]
평소의 장난기 넘치는 리카와 정반대다.
그녀는 이 곡을 ‘집착’이라고 해석했다.
그런 리카의 표정에는 어렴풋한 분노가, 몸에는 떨림이 감돌았다.
[조아라: 넌 내 말대론 안 돼
어느샌가 멀리 떠났어]
이어서 나타난 조아라는 아련한 눈빛과 몸짓으로 아쉬움을 표현했다.
처음 조아라의 춤을 봤을 때, 성필은 그녀에게서 힘을 느꼈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순간의 동작에만 집중하던 그녀는, 곡에서 서사를 읽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백설하: 저기, 저기
나를 보면서도
너는, 너는
떨리지도 않아?]
프리코러스.
곡이 하이라이트 들어가기 전의 부분.
백설하가 쪼그려 앉아 고개를 갸웃했다.
댄스라는 틀을 파괴하고 연기를 도입한 것이다. 그녀는 눈매에 유혹을 담아 눈가를 늘어뜨렸다.
[장하양: 난 너와 함께 live]
백설하의 고백을 이은 장하양이 손을 뻗으면서 구애했다.
길게 이어지는 ‘live’는 에코를 입은 채 관객석을 울렸다.
[oh my own
언제나
oh my own
어디서나]
함께 대열을 맞춰 부른다.
언제나, 어디서나.
조아라와 장하양이 짧게 그리 말하면, 그 뒤로 리카와 백설하의 ‘oh my own’이 머무른다.
목소리가 조화롭게 이뤄진다.
그리고.
[oh my own―]
3옥타브 레.
남자의 성대로는 가성, 혹은 무리를 하거나, 하늘로부터 받은 재능이 없다면 도저히 낼 수 없는 음역대.
압도적인 음역의 가사가, 백설하의 입에서 부드럽게 퍼져 나왔다.
바로 앞에서 듣고 있던 성필의 등으로 전율이 내달렸다.
[oh my own―]
3옥타브 음역대가 10초 넘게 이어진다.
다른 멤버들은 백설하와 거리를 벌린 채, 그녀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어서 2절에 들어섰다.
아까와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하이라이트에서는 또다시 전율이 일어난다.
지금까지 외곽에 머물렀던 장하양이 중심으로 나섰다.
[장하양: 선생님 이게 사랑인 거죠?
어떤 때 어떤 곳에서 너를 보아도
몽글몽글 부드러워]
낮은 목소리의 싱잉랩이 정확한 박자를 타고 전해진다.
[노력해봐도 떨어질 수 없죠
침대에 누워서도 생각이 나게
너를 떠올리기만 해서는 안 되게]
[백설하: 영원토록―]
oh my own.
그 가사가 반복되며 사운드가 서서히 잦아간다. 피아노가 가볍게 메인 멜로디를 이어가며, 네 사람이 엔딩 포즈를 취했다.
* * *
멤버들이 무대에서 사라졌다.
성필과 한구인이 홍규헌을 바라보았다.
“먼저.”
홍규헌은 지체없이 평가를 내릴 모양이다.
“여기 무대 이상해. 어둡고, 음침하고. 이런 데서 공연하니까 이상하게 보이잖아. 밤 공연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이 장소를 잡은 건 한구인이었다.
“그걸 빼면, 이거 보여?‘
홍규헌이 팔을 걷어 자신의 팔뚝을 보여주었다. 닭살이 돋아 있었다.
“나 이런 적 몇 년 만이야. 옛날에 애들 무대 볼 때도 이렇진 않았는데. 진짜 공연 온 거 같았어.”
성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혹여나 박한 평가를 받으면 어쩌나 했었다.
“하지만. 아마 내 새끼라서 이렇게 보이는 거겠지? 박 이사가 무대가 꽉 찬 거처럼 보여야 한다고 했었지? 음, 애들한테 시선이 모이긴 하더라. 근데…… 내 비유가 적절하지 않은 건 알아. 학생 때 내가 아이돌 콘서트 많이 가봤거든?”
홍규헌은 과거 탑티어였던 남자 아이돌 그룹을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얘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어. 진짜 순수한 내 직관에 불과하지만, 난 그렇게 느꼈어.”
“그쪽은 7인조고, 역시 아우라가 있겠죠. 오래 활동하기도 했고요.”
지금의 아이들을 탑티어 아이돌과 비교하는 건 부당하기까지 하다.
“비교하면 그렇단 거야. 애들 한 달 만에 이런 무대 준비한 거 보면 대단하지. 왜, 있잖냐. 연습생 서바이벌 프로그램. 그거 애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준비한 무대보다는 훨씬 나아.”
“그분들은 방송 일정상 매주 준비해야 했으…….”
성필이 한구인에게 조용하란 신호를 보냈다.
홍규헌이 큭큭 웃었다.
“한 이사는 어땠어?”
“저는…….”
한구인은 허허 웃었다.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단 듯.
“가로 엔터에서는 보이그룹도 프로듀싱했었지 않습니까. 그분들에게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왜 그때 얘기 꺼내는데.”
홍규헌의 흑역사 같은 것이었다.
그 멤버들이 부족했단 뜻이 아닌, 홍규헌의 프로듀싱 실패라서 흑역사다.
한구인은 거의 처음으로, 홍규헌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선 느끼지 못했던 걸 느꼈습니다.”
“어떤 거?”
“리카 씨, 설하 씨, 아라 씨, 하양 씨. 그분들 중 누가 빠지거나, 혹은 누군가 추가되는 광경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극찬이다.
이대로 완벽하단 뜻이었으니까.
다음 타자는 언제나 그렇듯 성필이었다.
“그래서, 박 이사는? 네가 제일 잘 알지 않아? 어때, 그 느낌이란 게 와?”
성필은 고민하다가 답했다.
“성공확률을 높이려면 멤버를 더 들이는 게 좋습니다.”
“연습생이 늘어나면 비용이 부담이 되지.”
성필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내뱉을 말을 곱씹으면서 가만히 기다렸다.
1초, 2초, 3초.
성필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미래가 보일 리가 없지.’
후회할 미래를 보는 능력.
참으로 제한적인 힘이다.
성필은 후회란 것을 잘 하지 않는다.
어떤 안 좋은 결과가 있더라도 본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잊는 게 습관이다.
‘설령 애들을 데리고 실패하더라도, 내가 후회할 리가 없어.’
그녀들과 함께할 수 있단 것만으로도 축복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성필이 은근한 확신을 담아 말했다.
“비용을 차치하고서라도, 이건 도전해볼 만해요. 될 거 같아요.”
아니, 된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리고 앞으로 존재할 사인조 그룹들을 통틀어 비교해도 지금의 구성은 절대 꿀리지 않는다.
“결정됐네. 이대로 해보자.”
멤버 구성이 결정되는 순간 가로 엔터의 멤버 스케줄은 변화한다.
지금은 대동소이한 트레이닝을 받지만, 이제는 개인적으로 특화시킬 것이다.
짐(Gym)에 등록해서 신체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한다.
얼굴과 몸, 피부도 관리를 받는다.
거기에 댄스와 보컬, 연기 트레이닝도 개인의 특성에 맞춘다.
그녀들마다 악기를 정해서 레슨도 듣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녀들은 창조의 꽃인 작곡을 배우게 될 것이다.
“두 사람 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홍규헌이 일어나서 둘을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한구인이 오른쪽 손을, 성필이 왼쪽 손을 잡았다.
“성공하자.”
* * *
“에에, 회식이면 가게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희들 아이돌 연습생이야. 알아? 아이돌이 술집에 있는 사진 찍히면 어떡해?”
“왜 술집에 가는 게 디폴트인 거예요! 그리고 저희는 아이돌이 아니라 연습생이에요!”
“이시카와 리카. 너 정말 많이 컸구나? 나한테 소리도 높이고.”
“……와타시가(제가)? 오해에요, 헤헤.”
리카가 쭈글쭈글 고개를 꾸벅거렸다.
아쉽긴 해도 홍규헌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미성년자 둘과 함께 술집에 있는 사진이 퍼지기라도 하면 후일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리카야 처음 들어왔을 때는 혼자라서 술집에도 데리고 갔으나, 지금은 인원이 워낙 많으니.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가게에서 먹고 싶으면 포장도 해올게. 한 이사랑 박 이사가 가서 사 올 거야.”
“저희가요?”
“저희가 말입니까?”
“뭐.”
“마침 드라이브하고 싶었어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미친 사회생활력.”
조아라가 혀를 내둘렀다.
이럴 때는 눈치 있게 배달 음식이면 충분하다고 하겠지만…….
“저! 저저! 저번에 돈까스집 거기 꺼 먹고 싶어요! 박 이사님 아시죠?”
리카는 욕망에 충실했다.
“저번? 언제 나 몰래 외식이라도 했어?”
“……와타시가(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오해하신…….”
“리카. 거짓말은?”
“나쁜 겁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사장님.”
“박 이사. 어떻게 된 거야?”
“리카가 협박했어요.”
“비겁자! 거짓말쟁이! 협박이 아니라 정정당당한 요구였어요!”
홍규헌은 리카와 성필의 이마에 꿀밤을 먹이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다.
오늘은 멤버들이 먹고 싶은 것을 모두 회사로 배달시켰다.
없는 건 성필과 한구인이 나가서 사 왔다.
휴게실 가득 음식의 향연이 펼쳐졌다.
“여기가 천국?”
성인들에게는 술도 지급됐다.
장하양은 술이 처음이라고 했다.
의외로 맥주를 잘 마셨다.
“조금 맛없는 콜라 같네요, 아하하.”
10분 뒤.
“드르렁.”
“얘 피곤해서 자는 거야? 아님 술이 약해서 자는 거야?”
“아마 피곤해서 자는 걸 거예요. 하양이 매일 밤늦게까지 연습했었거든요.”
홍규헌이 장하양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장하양이야말로 노력의 결정체가 아닌가.
[직설적으로 말해서, 저는 설하 씨에게 반했습니다.]
[네에?!]
“아하하하하하핰!”
조아라가 성필의 고백 영상을 틀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으헠, 어헠! 나 죽어 진짜!”
“너 그거 안 지우면 가만 안 둔다.”
“이렇게 웃긴 걸 어떻게 지워!”
결국 그날도 영상을 지우지 못했다.
조아라가 도망가는 속도 하나는 빨랐다.
어쨌거나, 그날은 많이 먹고 많이 웃었다.
다들 데뷔라도 한 듯 행복에 겨워했다.
한구인은 다 같이 모여 웃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아.”
성필은 술기운이 돌아 회사 밖으로 나왔다.
홍규헌이 대리 부를 테니까 취하라고 해서 오랜만에 마음껏 마셨다.
‘오랜만은 아니지. 혜빈 누나랑 얼마 전에도 마셨고.’
찬 바람이 불었다.
리카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날씨였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자신감 넘치게 시작했던 연습생 탐색도 몇 개월이나 흘렀다.
회귀했으니 뭐든 마음대로 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연습생이 안 구해져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하지만 그 걱정도 오늘로써 끝이다.
보석을 네 개나 얻었으니.
“술 깨우시게요?”
보석 중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설하가 담요를 두른 채 성필에게 다가왔다. 조아라가 모두에게 자랑했던, 성필이 선물로 준 야자수 프렌즈 망토 담요다.
“네. 설하 씨는 괜찮으세요?”
“저야 홀짝이기만 했는데요 뭘.”
“술 잘 못 드시나 보네요.”
“맨정신이고 싶어서 안 마셨어요.”
“왜요?”
“취하면 오늘 기억을 잊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오, 낭만적이다.”
“헤헤.”
둘은 말없이 도로만 바라보았다.
멀리서 차가 달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안 말해주세요?”
“뭘요?”
“저한테만 존댓말 하시는 이유요.”
“아, 그거. 별거 없는데. 이미 아시지 않아요?”
“애들이 저 존중하게 하려는 거요?”
“네?”
성필이 무슨 소리냔 듯이 반문했다.
백설하가 흠칫했다.
당연히 그런 이유라 생각했건만,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가?
어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그, 그러면 뭐예요?”
“그냥 설하 씨랑 거리 두는 건데요.”
“……네?”
청천벽력 같은 대답이다.
“왜, 왜, 왜요? 왜 저한테만요?”
“…….”
“왜, 왜애, 저한테요……?”
“농담이에요. 설하 씨가 생각하신 거 맞아요.”
백설하가 벙쪘다. 성필은 그것을 보고 웃었다.
작았던 웃음은 어느새 거리를 다 울리도록 커졌다.
“하하, 미안해요. 취하니까 장난치고 싶어져서.”
“뭐예요 정말…….”
“데뷔하시면 말 놓을게요.”
“진짜 못됐어요. 사람 놀리기나 하구…….”
“설하야.”
바람이 그쳤다.
“고맙다.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성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바람이 불자 백설하가 두른 담요가 흔들렸다.
* * *
‘지금쯤이면 공항에 도착했겠지?’
성필은 손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참 매정한 사람이다.
러시아로 가는 날에도 전화 한 통 없다니.
‘아직 고맙단 말도 못 했는데.’
다행히 아직 떠난 건 아닌지 전화를 받았다.
“어, 누나. 공항이야?”
[응.]
“고향 떠나려니까 슬프긴 한가 보네. 목소리 다운된 거 전화로도 들린다.”
[…….]
“뭐야. 무슨 일 있어?”
성필은 그녀가 바로 앞에 있기라도 하듯이 핸드폰을 바로 잡았다.
손혜빈은 한동안 대답도 없었다.
대상이 없는 한숨만이 흘렀다.
“왜 그래. 문제 생겼어? 뭐 두고 왔어? 내가 가져다줄까?”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손혜빈은 또 말을 하지 않았다.
입맛을 다시는 소리, 한숨 쉬는 소리, 공항의 분주함이 번갈아 들렸다.
성필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손혜빈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나 러시아 못 가게 됐어.]
“……갑자기?”
[초청장 국적이 남한이 아니라 북한으로 나왔어……. 미친 러시아 개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