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7화 (47/760)

#047화

“……아니다, 하양이도 이리와.”

“넵.”

세 사람이 백설하의 앞에 나란히 섰다.

백설하는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나 부끄러웠어. 너희는 안 그랬어?”

감정을 강요하는 질문이다.

솔직히 리카와 조아라는 부끄러운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주어진 시간이 일주일밖에 없었다.

거기다 창작 안무까지 더해져야 했으니 느린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부끄러웠어요.”

장하양만이 백설하의 말에 동감해주었다.

백설하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요구하고 한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야지. 설령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하더라도 부끄러운 게 맞아. 아니, 부족한 건 맞았어? 너희들 하루만 줘도 안무는 다 따잖아. 동선도 조금 맞춰보면 바로 외우잖아.”

장하양이 감탄해서 큰 눈망울을 깜빡였다.

백설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퍼포먼스 창작 시간 제외하고도 3일 남지? 그런데도 결과가 이러면 진짜 처참한 거야. 근데, 근데 말이야. 나는 우리가 모자라서 그렇다곤 생각 안 해. 내가 잘못한 거야.”

리카와 조아라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백설하가 본인을 탓하자 심장이 철렁였다.

다들 암묵적으로 백설하를 리더로서 인정해왔다. 그녀를 리더로서, 인간으로서, 선생님으로서 의지했다.

그런 백설하가 본인의 탓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 아녜요. 쌤. 제가 잘못했어요…….”

리카의 눈물샘부터 터졌다.

조아라는 말없이 두 손만 모았다.

“저도 잘못했어요.”

장하양은 정말 잘 못 했다.

백설하는 제발 그녀가 끼어들지 않길 바랐다. 장하양을 비난하면 그건 팩트 폭력이 되니까…….

죽을 정도로 노력하는 사람에게 비난까지 퍼붓는 건 정말 폭력이잖은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장하양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잘못 짠 거야. 안무랑 동선, 파트 배분까지 전체적으로 손 볼게. 이러면 안 돼. 내가 너무 성급했어.”

“지금 바꾸면 더 힘들…….”

백설하는 노려보는 것으로 조아라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지금 안무가 제일 좋은데.’

조아라는 반대를 삼켰다.

백설하가 강하게 나오자 대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단순히 그녀의 나이가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백설하는, 성필이 유일하게 존댓말을 하는 인물이었다.

즉, 성필이 백설하를 성인으로 존중하고 있단 의미였다.

지금까지 성필은 백설하를 조금은 딱딱하게, 그리고 격식 있게 대하면서 힘을 실어주었다.

그게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현재 백설하의 말은 성필의 말과 다름없이 받아들여졌다.

“이제 내가 하라는 대로 바꿀 거야. 오늘 휴식은 반납하고 밤까지 연습하자. 알겠어?”

“네.”

“네…….”

“넵.”

독재 ON.

* * *

“훨씬 낫다.”

2주 차 주간 평가.

손혜빈은 전과 확연히 달라진 퍼포먼스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직접 지도했어?”

“아니. 설하 씨한테 피드백만 전달했어.”

“진짜?”

“누나가 콕콕 잘 집어준 덕이지 뭐.”

“아이구, 우리 성필이 말도 예쁘게 한다. 누가 이렇게 예의 바르래? 응? 누가 이러라고 가르쳐줬어? 장하다 장해.”

“…….”

성필이 분노로 손을 부들부들 떨자 손혜빈이 경박하게 웃었다.

그녀는 웃음을 거두곤 뿌듯한 듯 말했다.

“설하 씨 재능 있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아.”

백설하 자신도 놀랐던 부분이었다.

그녀는 퍼포먼스를 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드러낼 수 있는지, 혹은 안무를 조화롭게 만들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건 수도 없이 아이돌 댄스를 카피했기에 나올 수 있는 능력이었다.

리카와 조아라도 만만찮게 춤을 추었지만, 백설하만큼 아이돌 댄스를 카피하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어디서 따왔는지 알 거 같은 부분이 있긴 하네.”

“그러게.”

아쉬운 점은 오리지널리티를 해치는 파트가 있단 것이었다.

백설하는 초등학생 때부터 아이돌 댄스를 너무도 많이 외웠기에, 어디서 뭐가 나왔는지 잊어버리는 경지에까지 도달했다.

다 그게 그거 같은 것이다.

어떨 때는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안무를 본인의 창작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수정하라고 할 거야?”

“아니.”

세상에 오롯이 독창적인 게 어디 있겠는가.

현재의 네 사람에게 창의성을 발휘하란 것 자체가 무리한 요구다.

지금은 이 정도가 딱 좋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한데. 이대로 2주 지나면 놀랍도록 달라질 거 같아.”

“응. 진짜 아쉽다. 이 곡이 쟤들 거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EMC의 무대를 못 봤기에 그런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차라리 가로 엔터에서 안무를 추가해서 완성하는 게 어떨까.

허황한 생각이란 건 알지만, 상상해보면 절로 입가가 올라간다.

“남의 떡에 눈 주면 안 되지. 우리 애들은 이거보다 더 좋은 곡 만들 거야.”

oh my own은 EMC의 은퇴곡이자 완성작이다.

예술형 아티스트를 지향하는 기획사답게, 그녀들은 연습생 때부터 작곡을 배웠다.

그리고 oh my own은 그녀들의 실력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창작했다.

성필의 목표는 멤버들이 언젠가 oh my own을 능가하는 곡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 애들이래, 푸하핰! 누가 보면 네 배 아파서 낳은 애들인 줄 알겠다 야.”

“누나도 나보고 우리 성필이라고 하잖아.”

“그건 임마. 귀여워서 그런 거고. 외모는 변했는데 성격은 옛날이랑 똑같네, 우리 성필이.”

“애 취급 좀 그만해.”

대화가 끝났다.

그동안 정승처럼 가만히 있던 한구인이 드디어 입을 뗄 수 있게 됐다.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월말 평가도 이곳에서 합니까?”

“제 의견인데요. 소극장 무대 잠깐만 빌리는 게 어떨까 해요.”

연습실과 무대는 엄연히 다른 공간이다.

꽉 막힌 공간에서 보는 것과 탁 트인 무대에서 보는 건 느낌부터가 다르다.

연습실이란 배경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그것이 사라진 퍼포먼스는 어쩌면 생각보다 더 끔찍할 수도 있다.

“그렇군요. 한 시간 정도만 빌려주는 곳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아볼게요.”

“아닙니다. 제가 지금부터 전화 돌려보겠습니다. 두 분은 계속 대화 나누셔도 됩니다.”

한구인은 무대에 관한 지식과 직감이 부족했기에 피드백에 참여하길 꺼려 했다.

그는 피드백이 끝나자마자 다른 일을 처리하러 연습실을 나갔다.

그의 배려가 고맙기도 하면서 안타까웠다.

“한 이사님도 의견이 있으실 텐데.”

“점점 아이돌에 대해 알아가실 거야. 이제 흥미가 붙기 시작하셨거든.”

“아, 맞다. 성필아. 나 2주 뒤면 초청장 올 거 같아.”

“벌써? 한두 달 뒤에 온다면서?”

“좀 빨리 나올 거 같네.”

“……나오자마자 갈 거야?”

“아마도.”

“가기 전에 전화해.”

“에게. 그게 끝? 누나한테 크게 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누나는 나밖에 얻어먹을 사람이 없어?”

“내가 누구한테 유학 간다고 말하겠냐.”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먹고 싶은 거 생각해놔.”

“다 컸네, 우리 성필이.”

“그리고 나중에 돌아와서 연락해. 그때도 우리 회사 오고 싶으면.”

“뭐야. 오기 싫으면 연락하지 마?”

“……그냥 한국에 오면 연락하라고.”

손혜빈이 장난스레 성필의 어깨를 쓸었다.

“이번에는 안 울어줘?”

“그 얘기 꺼내지 말랬지!”

* * *

내일, 대망의 월간 평가가 시작된다.

성필은 해당 내용을 재차 홍규헌에게 알리기 위해 사장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나가려던 차.

‘그냥 안에서 기다리면 되지 않나?’

홍규헌이 잠깐 화장실에 갔을 수도 있으니까.

성필은 홍규헌의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보니 사장실은 참으로 고압적인 구조다.

반드시 사장의 앞까지 걸어와서 앉도록 만들어졌으니.

입장부터 상하를 나눈다고 해야 하나.

‘사장님은 매일 여기서 뭘 하시는 거지?’

성필과 한구인이야 아이들을 관리한다 쳐도, 홍규헌은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그룹이 활동하는 것도 아니니 영업에 시간을 쏟는 것도 아닐 텐데.

성필은 자그마한 죄책감을 가지고 테이블 위를 보았다.

사업에 쓰이는 듯한 서류가 몇 장 보였다.

그녀의 제지 공장과 관련된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성필의 이목을 끄는 게 있었다.

마치 고등학생이 한 글자씩 정성 들여 쓴 요약 노트 같은 것이었다.

글자도 큼지막해서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쉽게 읽혔다.

‘직원을 성숙한 인간으로서 취급한다. 자발적 책임감, 중요. 목표지향성. 신뢰하는 인간관계 형성. 대인관계능력과 협력, 협동, 융통성, 효율성. 회사는 가족이나 팀에 비유된다. 애정, 우정, 협동, 보호, 신뢰, 친밀…….’

경영학인가?

“박 이사 웬일이야.”

문이 열리며 홍규헌이 들어왔다.

성필은 죄라도 지은 듯 시선을 빠르게 돌렸다.

“사장님 오시는 거 기다렸습니다.”

“난 또. 우리 박 이사가 회계자료라도 훔치려는 줄 알았잖아. 112 눌러두고 있었는데, 안심이야.”

농담도 살벌하게 한다.

‘우리 박 이사…….’

묘하게 손혜빈의 어투와 겹친다.

손혜빈도 성필을 ‘우리 성필이’라고 부르곤 한다.

문득 홍규헌의 필기가 떠올랐다.

‘회사는 가족이면서 팀이다…….’

그래서 굳이 부를 때 ‘우리’를 붙이는 건가?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뭔가 속이 쓰리네.’

정말 친근하다고 생각해서 친밀한 호칭으로 부르는 줄 알았는데.

냉혹하고 철저한 계산에 근거한 것이었다니.

그럼 멤버들과 거리를 유지하는 이유는 가족으로 대하지 않아서인가?

직원이 아니라 연습생이니까……?

“내일입니다.”

“알고 있어.”

“다시 전달 드리려고 왔습니다.”

성필은 소극장 무대를 단시간 대여했단 것과 내일의 평가가 어떻게 진행되며 기준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했다.

“여기서 느낌이 안 오면 다른 연습생을 보충하겠단 거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겨우 한 달 연습시켰잖아. 벌써 새싹의 질을 알아보는 건 성급하지 않아?”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무대에 세워두면 뭔가 보일 겁니다.”

“뭔가……. 그것도 직감이지? 계량적인 ‘뭔가’가 아니라.”

“사장님도 느끼실 겁니다. ‘허전하네’, ‘좋네’, 이런 식으로요.”

“평가는 여기 이거 보고 하면 되는 거지?”

놀랍게도 성필이 평가의 기준으로 쓰는 건, 한구인이 제작한 ‘아이돌의 자질 210항목’을 개량한 것이었다.

옛날에는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꼼꼼히 보니 기준점으로 삼기 좋은 항목이 많았다.

작은 기획사는 빅 데이터 활용력이 떨어져서 프로듀싱을 직감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개인 제작이더라도 객관화된 기준이 있으면 시야를 다양화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된다.

“예.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알겠어. 박 이사도 수고 많았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내가 많이 믿고 있어.”

홍규헌은 칭찬에 후하다.

옛날에는 그 칭찬을 순수하게 받아들였지만, 학문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니 이젠 순수하겐 들을 수 없었다.

“왜?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 아니요. 저도 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싱겁긴.”

* * *

“내가 또 한 바느질 하지.”

조아라는 멤버들과 함께 동대문 시장으로 가서 원단을 직접 뗐다.

조아라는 본인의 호언장담대로, 신기에 가까운 바느질 솜씨를 발휘해서 무대 의상을 만들어냈다.

평소에 반응이 옅던 장하양마저도 눈을 크게 뜰 정도였다.

“아라 대단하다. 진짜 가게에서 파는 옷 같아.”

“히. 대회 같은 데 나가면 의상도 직접 준비해야 하거든요. 학원 언니들이랑 밤새워서 만들고 그랬어요. 뭐, 재능이랄까? 손나 칸지(그런 느낌)?”

“에에에, 아라쨩 오타쿠 같아.”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놀이 당해볼래?”

“엣, 놀이? 돈나(어떤)?”

“멍석말이.”

리카와 조아라가 티격태격하는 동안에도 장하양은 요지부동이었다.

“와…….”

장하양은 홀린 듯이 계속 의상만 보았다.

조아라는 재능이니 뭐니 한껏 가슴을 폈지만, 진심으로 감탄해주니 부끄러웠다.

“나중에 나도 가르쳐줄 수 있어?”

“바느질을 어디에 쓰게요? 이럴 때 말고는 쓸 데도 없잖아요.”

“나중에 쓸 때가 있을 거야.”

확신에 찬 말투라서 더는 물어볼 수 없었다.

평가 전날, 의상과 퍼포먼스를 전부 완성했다.

모든 게 준비된 상태로 진행했던 연습은 기대 이상이었다.

영상으로 확인하니 더욱 그랬다.

“우리 이 정도야?”

“바로 데뷔해도 될 거 같지 않아요?”

“응응! 진짜 잘했어!”

장하양은 영상을 보면서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을 본 백설하의 눈시울이 젖어왔다.

항상 장하양을 보면 고맙고 미안하고 아무튼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그랬다.

“하양아 고생 많았어…….”

“고생은 다 같이 했잖아요.”

“앗. 쌤 또 운다. 나도 울래!”

“나도 안아줘요.”

네 사람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면서 서로의 노력을 치하했다.

당일, 네 사람은 무대에 섰다.

백설하가 첫 번째로 들어섰다.

소극장의 무대라지만 압박감이 남달랐다.

관객석이 보이는 자리까지 온 순간 백설하가 느낀 건.

‘넓다.’

고작 십수 걸음 정도 될 법한 폭과 넓이다.

그런데도 바다처럼 넓게만 느껴졌다.

분명 옛날에 아이돌로 활동했을 땐 이것보다도 더 큰 무대에 서 봤건만.

어째서 이 무대만이 이토록 크게 느껴질까.

‘긴장돼.’

수십, 수백 번을 연습했던 대열과 준비 동작.

그런데도 처음인 것처럼 떨렸다.

백설하는 눈동자를 돌려 옆을 보았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인 듯 얼굴이 굳어 있었다.

백설하는 침을 삼킨 뒤, 옆으로 향했던 시선을 앞으로 주었다.

“시작할까?”

사장, 홍규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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