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박 이사님이 혜빈 언니 매니저셨어요?”
기묘한 침묵을 깬 건 장하양이었다.
다들 성필의 평론을 곱씹기 바빴던 와중이었던 터라, 그가 손혜빈의 매니저였단 부분은 쉽게 지나쳤다.
그것을 장하양이 지적한 것이다.
“응. 근데 얼마 안 했어. 누나, 내가 매니저 몇 달 했지?”
손혜빈의 정신이 퍼뜩 깨어났다.
“어? 응, 반년? 그건 넘었을걸.”
“왜 그만두셨어요?”
“이 누나 성격 진짜 안 좋거든. 못 버티고 도망갔어.”
“손나(그런). 박 이사님이 못 버티고 도망가시다니…….”
성필은 매일 9시 전 출근, 9시 후 퇴근을 반복한다.
연습생 탐색, 멤버 픽업, 멤버들의 상태 점검, 마지막으로 집까지 데려다주기까지.
중간에 비는 시간이 많더라도 힘든 건 힘든 것이다.
그런 성필마저 못 버틸 수준이면 얼마나 성격이 나쁜 것일까?
“야아! 오해하시잖아!”
“아닌가요?”
“아녜요. 제가 그때 있던 소속사에서 나왔거든요. 근데 박 이사가 나…….”
“그거 말 안 하기로 했잖아.”
“이제 괜찮지 않아? 어릴 때 일인데 뭘.”
“그럼 내가 누나 얘기해도 돼? 어?”
“오케이. 그만하자.”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협약이 오갔다.
“아무튼 아무튼! 너희들 혹시 넷이서 같이 할 수 있는 곡 있어?”
없다.
네 사람은 함께 레슨을 받지 않는다.
멤버별, 분야별로 실력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 같이 모여 연습하는 경우도 없었다.
“그럼 누나한테 각자 퍼포먼스 하나씩 보여줄 수 있어?”
멤버들은 동의했다.
가로 엔터에는 주간, 월간 평가가 없기에 딱히 성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었다.
학원 과제를 연습하거나 트레이닝을 소화하는 게 전부다.
그렇기에 성필에게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는 게 부담되기도 했다.
“누구부터 할래?”
“저부터 할게요.”
장하양은 투쟁심을 가득 머금은 채 가장 먼저 나왔다.
‘경쟁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나?’
매도 먼저 맞는 게 좋단 것일까.
다 함께 연습실로 가서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손혜빈은 그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장하양을 보았다.
성필은 장하양의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와중에도 손혜빈을 곁눈질했다.
* * *
“일리가 있네.”
전날, 성필은 손혜빈을 영입해야 하는 이유를 홍규헌에게 설명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여자가 아이돌을 보는 안목.
과거 유명 댄스 가수로 활동했던 경험.
그로써 쌓아온 인맥.
조금 비겁하긴 해도, 손혜빈의 영입으로 얻을 수 있는 홍보 효과.
그리고 대형 기획사 디자인팀으로 일하면서 쌓은 경력.
손혜빈은 준비된 인재였다.
무엇보다.
“숙소에 들어갈 수 있어요.”
남자인 성필이나 한구인이 수시로 숙소에 들락날락할 수는 없다. 멤버들도 심리적인 불안감을 느낄 게 분명했다.
손혜빈이 오면 그 문제는 해결된다.
게다가 성별이 달라 성필이나 한구인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도 손혜빈이라면 마음껏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너 내가 여자란 사실 잊고 있는 거 아냐?”
“애들이 사장님을 좀 어려워하잖아요. 문제 있을 때마다 사장실에 올라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뭐어, 혜빈 씨를 데려오면 좋은 이유는 알겠어. 잘 알긴 하겠는데, 혜빈 씨가 왜 여길 와?”
손혜빈이 있는 기획사의 디자인팀 구성은 세 파트로 나뉘어 있다.
손혜빈은 앨범 디자인, 상품 디자인, 콘서트 기획 세 파트를 모두 겪었고, 현재는 상품팀에 정착해서 착실히 커리어를 쌓고 있다.
당장 동종 업계로 이직해도 문제가 없는 수준인 것이다.
“우리 회사보다 좋은 데는 널렸잖아. 애초에 그분이 계신 곳이 가장 좋지 않아?”
굳이 손혜빈이 가로 엔터에 올 필요가 없다.
“옛날에 알던 사이니까 어떻게 비벼보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헤드 헌팅은 어느 업계든 민감한 문제다.
멀쩡히 일하고 있는 사람을 빼 오면 당연히 욕을 먹는다.
특히 엔터 업계는 더하다.
한 다리 건너면 누구든 알 수 있는 곳이니, 소문도 삽시간에 퍼져나갈 것이다.
인재 교환이 가장 잘 이뤄지는 업계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서다.
“요즘 매너리즘에 빠진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거야 모든 직장인이 느끼는 거고.”
“아뇨. 진짜 심각하게.”
성필은 미래를 안다.
올해 안에 손혜빈은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전생에서도 갑자기 성필에게 전화를 걸어서 ‘누나 간다. 나중에 보자’란 말을 하곤 사라졌다.
그리고 몇 년 뒤 홀연히 돌아와 프로듀싱에 뛰어든 것이다.
손혜빈은 자신의 잠적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놀다 왔어.’
몇 년이나 스타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던 사람이 평범한 직장 생활을 얼마나 견딜까.
지루할 것이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관심은 마약 같은 것이라고들 한다.
손혜빈은 톱니바퀴와 같은 생활에 질렸을 것이고, 본인의 미래를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음이 틀림없다.
‘이왕이면 재충전의 시간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바꿔보자는 거지.’
그렇기에 성필은 손혜빈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고 싶었다.
“박 이사가 그렇게 판단하면 그런 거겠지.”
“그럼…….”
“지금은 곤란해. 지금 혜빈 씨가 우리 회사 들어와서 뭘 하겠어. 나중에는 공헌할 부분이 많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 말 이해해?”
“예.”
“본격적으로 데뷔 계획을 실행할 시기면 나도 쌍수 벌리고 환영이지.”
인건비도 회사 운영에 만만치 않은 부담을 준다.
아마 데뷔 멤버가 정해지면 1년 뒤쯤에 시동을 걸 텐데, 그동안은 손혜빈이 할 게 없다.
고급 인재를 멤버들 픽업에만 쓸 수도 없고.
“그럼 그 부분까지 감안하면…….”
“나도 반대할 이유는 없지. 언제까지고 박 이사랑 한 이사만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는 없으니까.”
* * *
“연습생분들 다 잘하시네.”
손혜빈은 한구인이 만든 건강즙을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거 너무 맛있어요! 뭐 넣었어요?”
“……예?”
한구인이 충격을 받아서 반문했다.
지금까지 그의 건강즙을 맛있다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아니, 평가를 해준 사람 자체가 드물었다.
다들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가만히 삼키기만 했을 뿐이었다.
리카는 ‘그만 먹고 싶어요……’라고 하긴 했지만, 그런 평가는 한구인의 마음에 상처를 줄 뿐이었다.
“오늘은 마랑 요거트랑 꿀이랑 양파를…….”
“정말요? 저도 옛날에 비슷한 레시피로 만들었는데도 이런 맛이 안 나더라구요.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나요?”
한구인의 미소가 만개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지식을 기쁘게 털어놓았다.
성필은 괜히 그에게 미안해졌다.
평소에 관심 좀 쏟아줄걸.
“그래서 평가는 그걸로 끝이야? ‘잘하네?’”
“진짜 잘하네?”
“…….”
“아, 하양 씨는 연습이 많이 필요해 보이시더라. 제일 먼저 나오시기에 에이스인가 했어.”
“얼마 전에 들어왔어. 전에는 배우 준비하셨고.”
“진짜? 어쩐지 배우의 아우라가 막막 나온다고 했어.”
외모만 그렇다.
“네 명, 네 명……. 역시 넷이서 하는 퍼포먼스를 보는 수밖에 없지. 가장 중요한 건 무대를 얼마만큼 채울 수 있느냐는 거고.”
사인조의 장점이자 약점은 인원수 그 자체다.
장점은 네 명의 개성이 더 뚜렷이 부각될 수 있단 것이고.
단점은 네 명만으로는 그룹의 특색을 갖추는 게 힘들단 것이다.
네 명으로는 무대를 장악하는 게 힘들다. 그러니 각자의 역량보다 결과물이 낮게 나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아우라가 약한 무대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치명적이다.
“쉽게 말해서, 팔다리 길쭉한 애들 일고여덟 명이서 무대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거랑 비교가 안 된단 거지.”
일곱, 여덟 명쯤 되면 칼군무를 맞추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퍼포먼스가 된다.
무대가 꽉 찬 느낌이 들어 퍼포먼스의 완성도도 저절로 올라가는 것이다.
사인조가 그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보조 댄서를 써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될 수도 있다.
“멤버 개개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조화가 되어야 해. 그걸 뛰어넘어서 아예 무대 전체를 채울 아우라가 필요한 거고.”
쉽지 않다.
기획사들이 사인조를 시도하는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애초에 네 명을 무대에 세워서 퍼포먼스를 시키면 대강 이런 느낌이 온다.
‘왜 이렇게 허전해?’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인조는 보조 댄서를 네 명 정도 쓴다.
확신을 지니고 만들더라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이 사인조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나하나가 다 보석이어야 한단 거지. 무임승차가 불가능해.”
손혜빈은 성필이 막연히 갖고 있던 생각을 구체적인 언어로 설명해주었다.
“네 명의 퍼포먼스를 봐야겠네.”
“봐도 그냥 연습실 같은 데서면 안 돼. 진짜 무대에 세워야지.”
넓은 곳에 세우는 순간 밑바닥이 드러난다.
네 명이 함께 열심히 춤을 추고 노래를 해도, 무대가 휑하게 느껴지는 순간 다 끝이다.
“죽어도 네 명이서 간다, 그러면 나도 할 말은 없어. 활동마다 백댄서를 고려하고 안무를 받아야겠지. 그럼 단점은 어느 정도 커버가 될 거야.”
멤버가 일곱 명이 넘는데도 보조 댄서를 쓰는 그룹들도 있다.
그만큼 무대 전체를 채우는 느낌이란 게 내기가 힘들다. 물론 퍼포먼스의 완성도 측면에서 댄서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시험받는 기분이네.’
성필이 모아온 아이들에게 그만한 가능성이 있는가.
그 시험대에 성필과 아이들이 올라온 것이다.
“곡은…….”
성필은 여러 사인조 그룹의 곡을 떠올렸다.
“oh my own 어때?”
“oh my own이면…… EMC 거 말하는 거야?”
왜 하필 oh my own이지?
뮤직비디오도 없는 데다가 음방에도 나온 적 없는 곡이다.
EMC의 곡 중에서도 적게 알려진 건데…….
“아.”
성필이 손혜빈의 의도를 깨닫고 감탄을 터뜨렸다.
“어때, 좋지?”
“어. 좋다. 어떻게 이걸 바로 생각해냈어?”
“내가 널 모르냐. 그 이상한 아이돌 계획서까지 읽었는데, 네 생각을 모를 수가 없지.”
“이상한 계획서라니…….”
EMC는 손혜빈의 회사에서 활동하던 4인조 그룹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거겠지.
하지만 성필의 의도를 가장 적절하게 읽은 곡인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MC가 또 전설 아니겠냐.”
“응. 첫 음방에서 보조 댄서 하나도 안 세우고도 레전드 찍었잖아. 처음 그 무대 봤을 때 ‘댄서도 없이 데뷔 무대를 꾸민다고?’ 반신반의했었는데, 무대 끝나자마자 앨범 사러 갔어.”
“나 걔들이랑 같은 시기에 활동도 했었거든? 인기 많대서 무대 한 번 봤더니 와…… 진짜 미쳤어.”
“나도 봤어. 뭐랄까, 막 대단한 퍼포먼스들은 없는데 힘이 있다고 하나.”
“어! 그거! 맞어 맞어!”
“왜 갑자기 활동 접었지? 누나 회사였으니까 알지 않아?”
“그냥 회사 내적으로 다툼이 있었어. 덕분에 애들 활동도 방치되고 그랬지.”
“아직도 팬들이 앨범 내달라고 성화던데.”
“가능성은 거의 없지. 근데 걔들 외국에서도 인기 많아. 외국에서만 활동하는 애도 있어.”
“외국에서? 어디?”
“한 명은 중국. 걔 한국에서보다 돈 더 많이 번다? 심지어 혼자서 활동하는데도 그래.”
하긴, 한때 부동의 1티어라고 불리기도 했으니까.
“근데 내가 제안하고도 좀 그렇긴 하다. oh my own 괜찮은 거 맞아? 랩 파트도 있고 싸비엔 음도 높잖아.”
“난 애들 믿어.”
“아, 맞아. 아까 내 곡 듣고 감상 말했던 거 있잖아. 진짜 그렇게 생각해? 나 얼굴 화끈거려서 네 옆구리 개쌔게 때리고 싶었자너.”
“좋았단 거야 싫었단 거야.”
“조금 소름 끼친다?”
“…….”
“기분 좋기도 하고. 우리 성필이 귀여워 죽겠어 아주. 다시 누나 매니저 될래?”
“아, 머리 만지지 마. 빠지면 어떡해.”
그렇게 멤버들의 평가곡이 정해졌다.
평가일은 한 달 뒤.
그 결과에 따라 연습생을 더 모을지 말지가 결정될 것이다.
슬슬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쯤, 성필은 영입 이야기를 꺼냈다.
실례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의지를 가득 담아서.
“누나도 아이돌 만들어보고 싶지 않아?”
성필은 손혜빈의 열망을 잘 알았다.
전생에서는 손혜빈이 성필의 목표이기도 했다.
언젠간 그녀처럼 모든 열정을 다 쏟아서 아이돌을 만들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한번 우리 회사에서 해 보자.”
그 말을 들은 손혜빈은.
“하하.”
예상대로 곤란하단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멋쩍은 웃음은 단순한 이유가 아닌 것 같았다.
가로 엔터가 작다거나.
미래가 불확실하다거나.
그런 것보다…….
“오늘 술 먹을래?”
“또? 어제도…….”
“맨정신에 하기 힘든 얘기라서 그래. 나도 네 제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긴 한데. 이유가 있어. 같이 술 먹어주면 말해줄게.”
“술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들렸나. 노래방 안 간다고 약속하면 갈게.”
“그럼 안 말해.”
“…….”
“…….”
“…….”
“…….”
“오케이. 내가 졌다…… 가자. 누나가 사줄 거면 아예 크게 한 번 쏴. 고급 호텔이나 요정 같은 곳.”
“얘는. 내가 뭐 한 달에 천만 원 정도 버는 줄 알아? 나도 그런 데는 누가 사줘서 가본 적밖에 없어.”
“의외네. 몸이랑 얼굴 관리에는 몇억씩 썼으면서…….”
손혜빈이 성필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성필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누가 어디에 돈 쓰든 상관하지 말란 거 못 배웠어? 그래서 일 언제 마쳐?”
“나, 나, 커허…….”
“많이 아파?”
“뉴냐…… 냐, 나 쥬글 거 가태…….”
“어떡해. 배라도 만져줄까?”
고통이 조금 가신 뒤, 성필은 다시 말을 꺼냈다.
“오늘 병원 가야 해. 그거 갔다 오고 가자.”
“어디 아파? 아, 목이 쉬었구나. 감기야?”
“목은 누나랑 노래방 가서 이런 거고. 하양이 때문에.”
장하양의 영입이 결정된 날, 그녀는 연습 중 또다시 실신했다.
그래서 며칠 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었다.
오늘은 그 결과를 듣는 날이다.
“나 병원 갔다 온 뒤에 퇴근하면 가자.”
수 시간 뒤, 성필은 장하양과 함께 건강검진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진중한 표정이었다.
“이런 건 저도 처음입니다만…….”
성필의 피가 천천히 식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