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1화 (41/760)

#041화

성필은 자연스럽게 리카에게 다가갔다.

네 사람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내려다보니, 가장 아래쪽 서랍에 콘돔이 여러 장 들어 있었다.

성필은 리카의 손에서 콘돔을 빼앗고, 서랍에 있는 것도 전부 들어서 거실로 갔다.

찌익.

콘돔을 뜯어 봉지는 비닐 쓰레기봉투에, 본체는 일반 쓰레기봉투에 버렸다.

그게 몇 번이고 반복됐다.

리카가 성필의 곁으로 다가왔다.

“물건 함부로 버리는 거 아니랬어요!”

“유효기간 지난 거야.”

“확인하지도 않으시잖아요!”

“안 지났으면 뭐 어때.”

분리수거를 끝낸 성필은 손을 털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성필이 갑작스레 한구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딴 게 왜 숙소에 있어요?!”

한구인은 쓰게 웃었다.

“그룹이 해산되기 전에, 멤버분들이 조금씩 일탈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아무리 노력하고 기다려도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 해체돼도 이상하지 않을 그룹이니, 멤버들도 볼 장 다 봤단 생각에 마음껏 놀았겠지.

“그럴 수가, 일곱 분이 전부 동성애자셨다니. 엄청난 확률이네요……. 혹시 숙소에서 생활하면 그렇게 변하는 걸까요?”

“보통은 여자를 데려왔다고 생각하지 않냐?”

“……소카(그런가)? 소다네(그렇네).”

리카는 본인의 사고방식이 들킨 게 부끄러운지 몇 분 동안 일본어만 썼다.

성필은 쓰레기봉투 안에 든 일탈의 흔적들을 보았다.

한창 활기찬 나이인 데다가 소속사의 간섭도 없다시피 했을 것이니, 엇나가는 게 당연했다.

안 좋게 볼 생각은 없었다.

‘이 사람들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성필은 짧은 의문을 지워버린 뒤 봉투를 묶었다.

* * *

“이야아아아 박성필!”

손혜빈이 배로부터 올라오는 발성으로 성필을 불렀다.

가게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성필은 부끄러워서 아는 척하지 않았다.

“야야, 박성필. 야야. 무시하냐? 야야. 안 반갑냐?”

“아, 창피하게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누나 얼굴 안 들켜야 하는 거 아냐?”

아직도 댄스 가수 손혜빈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

얼굴을 까면 식사하기 곤란할 정도로 사람이 모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금도 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가리고 있잖아 그래서. 짠, 선글라스도 가져왔당.”

손혜빈은 마스크를 벗고 선글라스를 꼈다.

메뉴를 주문한 뒤, 손혜빈은 성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왜. 또 뭐요. 왜요.”

“너도 나이가 들긴 하는구나? 새파란 병아리 같던 게 어제 같은데.”

“그러는 누나는…….”

피부에 몇억을 쏟아서 그런가, 어찌 저렇게도 옛날이랑 똑같을까.

“나는 뭐?”

“……똑같네.”

“맞지? 넌 나이 든 티가 나.”

“…….”

“엄청 달라졌다.”

“나도 별로 안 변했거든?”

“아냐 아냐 완전 달라. 분위기 같은 거. 너 나 처음 봤을 땐 막 벌벌 떨면서 ‘어어, 으어, 어, 박, 바바박, 박성필, 으어어’ 그랬잖아. 거의 뭐 초등학생 수준이었는데.”

“내가 언제!”

“쉽게 열 받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머리도 좀 어른이 돼라.”

“으그르으그그윽.”

성필이 이를 갈자 손혜빈은 좋다고 손뼉까지 쳤다.

언젠가 이 인간이 큰코다치는 걸 보는 게 성필의 꿈이었다.

아쉽게도 몇 년 동안 이뤄질 기미가 없었다.

“박 매니저. 고기 구워. 다 구우면 내 접시 위에 두고. 아니, 쌈 싸서 먹여줘.”

“참나.”

“어? 안 해줘?”

“참나, 파하. 진짜.”

“쓰읍! 안 해?”

“자기가 아직도 연예인인 줄 알아!”

성필은 곱게 쌈을 싸서 손혜빈의 입에 넣어주었다.

“으으음, 너무 맛있다. 네가 손맛이 있다 야. 매니저 그만두고 고깃집이나 차려. 아, 미안. 방금 말은 실언. 주워 담을게. 화내지 마?”

진짜 머리 한 대 세게 때렸으면 소원이 없겠다.

“너네 애들 얼굴이나 보자. 그거 보려고 왔잖아.”

“빨리도 말한다.”

손혜빈에게 당해서 잔뜩 구겨졌던 성필의 얼굴이 펴졌다.

그는 핸드폰에서 넷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오늘을 위해서 따로 찍어둔 것이다.

“아직 네 명이고, 키는 보는 대로야.”

“…….”

사진을 본 손혜빈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너 얘들 구성 좋다고 생각해?”

“어? 왜?”

“야. 얘들…….”

엉뚱한 답을 제출한 학생을 보는 얼굴이다.

이걸 어떻게 말해줘야 하나, 그런 당황이 손혜빈에게서 느껴졌다.

성필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너무 예쁘다!”

하지만 손혜빈은 언제 정색했냐는 듯이 호들갑까지 떨었다.

또 성필을 놀린 것이다.

손혜빈은 사진을 확대해서 아이들의 얼굴을 차례로 확인한 다음.

“어떻게 이런 분들만 모았어?”

“칭찬이야?”

“칭찬이지! 다 개성도 있고 좋네. 특히 얘. 얘가 제일 예뻐.”

손혜빈의 손가락이 한 명을 가리켰다.

“리카?”

“이분 이름이 리카야? 일본인?”

“어, 이시카와 리카.”

“센터 느낌 난다. 아니 아니, 옆에 분도 괜찮고. 아, 이분도…….”

성필은 혼란에 빠졌다.

어째서 손혜빈은 리카를 가장 먼저 가리킨 거지?

아니, 리카가 가장 예쁘다고?

‘리카가 나중에 예뻐지긴 하는데…….’

아직은 어린 티가 덜 빠졌다.

성필은 사진 속에 담긴 리카를 몇 번이고 보았다.

예쁜가? 예쁘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절대적인 수치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비주얼로 입덕을 유도할 수 있다면 그건 백설하나 장하양이 될 것이다.

“퍼포먼스 영상은 없어? 네 분 다 계신 거.”

“아직 우리 회사는 주간, 월간 평가 안 해.”

“모은 지 얼마 안 됐나 보네. 근데 뭘 발바닥에 불붙은 것처럼 벌써 케미 찾고 있냐? 이분들끼리 춤추고 노래하는 거 확인한 다음에 찾아도 됐잖아.”

“멤버 다 모이면 관리도 들어가야 하고 트레이닝 계획도 조정할 거라서. 빨리 결정되면 좋지.”

“모으는 데는 얼마나 걸렸어?”

“7개월 8개월 정도.”

“고생했겠다 야. 리카, 리카, 리카, 이름도 입에 착착 붙네. 예명 따로 필요 없겠어.”

손혜빈은 적잖이 리카에 꽂힌 듯했다.

그녀가 과도한 반응을 보여줄수록 성필은 더더욱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매력은 오롯이 외모인데도, 손혜빈은 리카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네 명이라. 네 명으로 뜬 그룹 거의 없지 않나?”

“거의 없지. 대형 기획사 제외하고는 잘 만들지도 않잖아.”

“이제 그 대열에 너네 회사도 추가되는 거야? 엔터계의 새 역사를 써가는 박성필……. 너 직함은 뭐야?”

성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응? 뭐냐니까? 야야, 내 말 씹어?”

‘이사’라고 말하는 순간 엄청나게 놀림당할 것이 분명했다.

새삼스레 이사라는 직함을 준 홍규헌이 원망스러워졌다.

나중에 방송국 돌아다닐 때쯤에는 그냥 실장으로 바꿔 달라고 해야겠다.

“말 안 해주면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맞춰볼게. 인턴?”

“…….”

“아아아! 알겠다. 로드 매니저구나? 으이구, 그러게 일 좀 잘하지 그랬어? 그 나이에 아직도 로드 일을 하고 있냐?”

“…….”

“음, 아니면 캐스팅 매니저로 일하는 거지? 그것도 프로듀싱에 참여하는 거긴 하지. 전국 돌아다니느라 고생깨나 하셨겠어. 아, 이거 비하하는 거 아니야. 우리 성필이 적성에도 딱 맞고…….”

“……이사.”

“응? 뭐라구?”

“이사, 라고.”

혹시나가 역시나.

손혜빈이 손뼉 치고 텀블링하고 노래까지 부를 기세로 세차게 웃어젖혔다.

물컵을 쥔 성필의 손이 달달 떨렸다.

‘부을까? 부어버려?’

이참에 소원성취 한번 해?

“축하해.”

손혜빈이 장하다는 듯 성필의 등을 쓸었다.

이전의 경박함은 찾을 수 없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역시 능력이 있네, 우리 성필이. 작은 회사라도 인재 보는 눈이 확실해. 나중에 크게 될 곳이야. 미리 사장님이랑 안면 좀 틔워놓을까?”

말투는 아까와 같았지만, 말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다.

목구멍까지 가득 찼던 치욕감은 온데간데없이, 성필은 수줍어하면서 손혜빈의 손을 떼어냈다.

“됐어. 누나한테 이런 말 들어도 엎드려 절받기지.”

“오, 드디어 눈치가 좀 생겼네?”

“…….”

“농담이얌마.”

적당히 술을 마시고 가게를 나왔다.

“대리 부를까?”

“뭐래. 이제 시작인데.”

“또 먹게?”

“아니. 노래방 가자.”

성필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고고!”

손혜빈은 돌처럼 굳어 있는 성필의 손목을 잡고 노래방으로 이끌었다.

성필은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그녀에게 끌려가면서, 성필은 아까 가게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리카가 가장 예쁘다고 했었지.’

취향 차이인가.

* * *

리카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그녀의 자취방.

싱크대의 선반 위에는 작은 양철 상자가 존재했다.

그곳에는 투명한 비닐에 포장된 쿠키가 여러 개 있었다.

리카의 집 근처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베이커리가 하나 있다.

진열장 안에는 여러 종류의 쿠키들이 들어 있다.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귀엽고 맛있어 보이는 쿠키들이다.

“맛있겠다…….”

가격도 하나에 천 원밖에 안 했다.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돈을 아끼고 아껴 쓰는 리카에게도 그다지 부담되지 않는 가격이다.

리카는 진열장 안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가끔씩 쿠키를 샀다.

집으로 오면 그것을 후회했다.

‘정신 차려 이시카와! 이거 먹으면 안 돼!’

성필과 식단 조절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의 믿음을 배신하는 짓 따위, 리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주 가끔을 제외하고.

“맛있다.”

혀가 녹아버릴 만큼.

욕망에 져버린 리카는 쿠키가 빠져나간 비닐 포장을 보곤 훌쩍였다.

“죄송해요 이사님…….”

리카는 그 즉시 밖으로 튀어 나갔다.

‘시속 6.7km로 10분을 뛰면 100칼로리가 소모돼! 쿠키가 112칼로리니까 10분 조금 더 뛰면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어!’

리카는 뛰었다.

그리고 다시 배가 고파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주린 배를 부여잡으면서도 성필과의 약속을 지켰단 생각에 뿌듯해했다.

욕망을 해소하고 난 뒤, 쿠키 상자는 다시 선반 위로 올라갔다.

꽤 높이가 있었기에 받침대가 필요했다.

……그래, 예전에는 필요했었다.

‘어? 선반이 원래 이렇게 낮았던가?’

어느 날부터 까치발을 세우면 상자를 꺼낼 수 있게 됐다.

‘뭐야. 진작 이럴걸. 괜히 7500원 주고 발 받침대 샀잖아.’

변화는 아주 느리게 진행됐다.

항상 까치발을 들고 쿠키 상자를 꺼냈다.

세우는 발의 높이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리카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날.

“어?”

리카는 손쉽게 선반 위의 상자를 꺼냈다.

까치발도 들지 않고서.

“나…….”

성필과 만난 지 8개월이 됐을 무렵.

“키 컸나?”

리카는 본인이 아직도 성장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 * *

“너 공주병이야?”

가만히 앉아 거울을 보고 있자니 조아라가 장난을 걸어왔다.

리카는 어제 자신이 키가 자랐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자신의 모습이 자신 같지 않았다.

“아라쨩. 나 좀 변한 거 같지 않아?”

“아니.”

“쫌 성실하게 봐 줘.”

“내가 네 남친인 줄 아네.”

조아라는 리카의 머리를 양손으로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리카가 피식피식 웃었다.

“아라쨩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겼어. 아타시(나)랑 사귈래?”

“응 안 사귀어.”

“충격! 차임 10번 달성!”

“뭐가 달라졌단 건데. 귀라도 뚫었어?”

“모르겠어?”

“어. 리얼 구라 하나 안 치고 1도 모르겠는데.”

“흥.”

“모르겠다고.”

“흥 흥.”

“아, 미안하니까 알려주라. 뭔데?”

“으음…… 나 조금 더 예뻐졌달까? 손나 칸지(그런 느낌)?”

“돌아버렸군.”

조아라는 리카에게 관심을 끄고 춤을 추었다.

리카는 연습실 구석에서 자꾸 거울을 보았다.

‘그래! 박 이사님은 알아주실지도 몰라!’

리카는 성필을 찾기 위해 연습실 밖으로 나갔다.

회사를 샅샅이 뒤졌지만 성필은 발견되지 않았다.

가장 필요할 때 없다니, 매니저 실격이다.

“엇, 한 이사님!”

일주일 치 장을 봐 온 한구인을 향해 리카가 달려갔다.

“들어드릴게요!”

“무겁습니다.”

“괜찮아요! 저는 팔굽혀 펴기도 서른 번이나 할 수 있거, 오모이(무거워)!”

“다시 주십시오.”

“할 수 있어요!”

리카가 끙끙대며 장바구니를 옮겼다.

그리고 주방에 도착하자마자 한구인이 무엇을 사 왔는지 뒤져보았다.

“리카 씨가 좋아하실 만한 건 없습니다.”

“그러게요. 놀랍도록 없네요. 이 정도면 일부러 저를 골탕 먹이는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요. 아, 박 이사님 어디 가셨어요?”

“손님이 있다고 하십니다.”

“새로운 멤버?”

한구인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그것만으로도 리카에게는 충분했다.

가로 엔터의 전서구는 이미 소식을 알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방을 나가, 새로운 멤버가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퍼뜨리려던 순간.

“박 이사님!”

성필이 회사로 돌아왔다.

리카는 달려가던 경로를 틀어 성필의 앞에 섰다.

“오셨어요?”

“응.”

리카가 움찔했다.

성필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님 아프세요? 카제(감기)? 약 사다 드릴까요? 죽 드실래요?”

리카는 성필이 곧 죽을병이라도 걸린 듯 행동했다.

성필이 장난으로 ‘암’이라고 답하면 당장 기절할 정도로 안절부절못했다.

“도시요오(어떡해애)……. 이사님 많이 아파요? 쉬실래요? 수건 이마에 얹어드릴까요?”

“어제 노래방 갔어.”

“비겁자! 항상 항상 혼자만 놀러 다니고! 저도 데려가요! 저도 놀고 싶다구요! 빨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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