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숙소가 나왔으면 데뷔는 확정된 거죠……?”
“여기 있는 네 명으로요? 네 명이 다야?”
백설하와 조아라가 번갈아 가며 질문을 날렸다.
리카는 울고 있고, 장하양은 왜 여기 데려왔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흐에에엥. 이사님 고마워요, 저 뒷바라지 하느라 많이 힘들, 흑, 힘드셨죠오…….”
“아직 데뷔 안 했잖아.”
“박 이사님 양로원 들어가시면 수발들러 갈게요 꼭…….”
얼마나 고마운지는 알겠지만, 비유가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리카에 이어 조아라가 경쟁하듯 말했다.
“그럼 나는 한의사님 양로원 들어가면…….”
한구인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렸다.
“비용은 절반 정도 대드릴게. 한 달에 한 번 면회도 가고.”
“감사합니다…….”
한구인이 눈물을 훔쳤다.
감동한 거야?
저런 말로?
감정이 심히 말랑말랑하다.
“지금 바로 숙소에 들어가는 건 아니야. 하양이가 사정이 있어서 조금 먼저 들어와서 사는 거야. 오늘은 청소하러 온 거고.”
“박스에 든 거 청소도구였어요?”
“미안하지만 고생 좀 해줘라. 오늘 점심은 너희들이 좋아하는 거 다 사줄게. 사장님이 카드도 주셨어.”
리카는 양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눈물을 닦고 일어선 그녀의 표정에는 어느 때보다도 큰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요시(좋아)! 광이 나서 미끄러지도록 청소할게요!”
“부탁한다.”
“아, 제가 열래요! 제가 열게 해주세요!”
“그럴래?”
리카는 열쇠를 잡고 크게 심호흡했다. 그러곤 당당히 문을 열었다.
“여기가 우리의 숙소……!”
먼지가 확 풍겨왔다.
“끼에에에에엑!”
리카가 팔을 휘저으면서 뒤로 쓰러졌다.
한구인이 제때 받지 않았다면 다쳤을지도 모른다.
“리카 씨! 괜찮으십니까!”
“먼지! 먼지가 제 얼굴에! 제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에 닿았어요!”
“다치신 겁니까?!”
“눈이 따가워요오…….”
한구인이 손수건을 꺼내 리카의 눈가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읏, 감사합니다.”
“조심하십시오. 다치시면 큰일입니다.”
“그런데 먼지가 심하긴 하다. 환기도 안 시켰나.”
“어제 와서 나랑 한 이사님이 창문은 열어뒀어. 화장실도 대강은 청소해뒀고. 물 쓰는 데는 지장 없어.”
아이들 모두가 들어가는 것도 꺼릴 정도였다.
저번에 왔을 때 홍규헌의 반응은 선녀였다.
성필이 박수 치며 말했다.
“빨리 끝내고 점심 맛있게 먹자. 다들 먹고 싶은 거 하나씩 말해. 다 시켜준다. 먼저 리카.”
“톤카츠!”
“오케이. 다음은 설…….”
“고구마 치즈 철판 톤카츠!”
“……어, 그래. 설하 씨는요?”
“저는 리카가 시키는 가게에서 메뉴 보고 정할게요.”
“따로 시키셔도 돼요.”
“아니요. 따로 시키면 번거롭기도 하고.”
“알겠어요. 아라는?”
“나는 냉면이랑 불고기.”
“좋고. 하양이는?”
“저도 아라가 시키는 가게에서 보고 정할게요.”
동생 라인은 욕망에 충실한 데 비해서 언니 라인은 염치를 챙기려고 했다.
“나중에라도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줘. 두 분 다. 알겠죠? 알겠지?”
한 명한테 존댓말을 섞어야 하니 불편하다.
백설하도 그것을 감지하곤 뭐라 말하려 했으나, 그냥 입을 다물었다.
성필에게 반말하라고 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전에 성필이 거절했던 것을 기억하곤 말을 삼간 것이다.
“자, 시작하자!”
대청소가 펼쳐졌다.
다 함께 걸레질하고, 먼지를 털고.
“콜록! 콜록! 케흑, 캬윽, 콜록!”
“리카 너 기관지염이라도 있어?”
“목이랑 코에 먼지가 꼈어요! 제 폐 새까맣게 변했을 거예요! 수명 10년 손해 봤어어!”
아무튼 정말 큰 일이었다.
벽이며 천장, 바닥까지.
사람 손이 안 닿으면 이렇게 더러워지는구나.
성필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걸레를 빨았다.
한구인은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어떻게든 절약하려고 고군분투 중이다.
“두, 두 시라니. 점심도 안 먹고 두 시까지…….”
리카가 깨끗해진 거실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녀는 한탄을 반복했다.
아직도 청소해야 할 방이 두 개나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 끝내고 먹으려 했더니만.’
저녁까지 청소해야 할 듯했다.
그나마 현관 복도와 거실은 깨끗하니, 음식을 시켜도 청결하게 먹을 수는 있었다.
“남은 방들은 밥 먹고 하는 게 나을 거 같네요. 한 이사님 생각은 어떠세요?”
“동감합니다. 힘들군요.”
한구인은 땀이 너무 많이 나서 와이셔츠까지 벗은 채였다.
티셔츠도 땀으로 범벅이었다.
리카가 드러누운 채로 한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리카 씨,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그, 그게 아니라. 아니에요! 성희롱 같으니까 안 말할래요!”
아이들의 시선이 모인다.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이다.
침묵 속, 리카는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이 붉어져서 말했다.
“나, 남자도 가슴이 크구나…… 같은 생각 했어요!”
한구인이 자신의 가슴을 재빨리 가렸다.
운동을 꾸준하게 했는지 흉근이 잘 발달되어 있긴 했다.
그건 그렇고 진짜 성희롱이었네…….
“리, 리카 씨. 그러시면 안 됩니다. 사람을 그런 눈으로…….”
“그렇게 조신하게 반응하시니까 진짜 성희롱한 거 같잖아요?!”
“맞잖아.”
“했잖아.”
“응, 성희롱이지.”
“예. 죄송합니다. 아타시(저), 죄를 지었습니다. 벌을 주세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주시길 바라요. 저도 이 사회가 만들어낸 피해자라는 것을…….”
한구인은 소파에 걸어둔 와이셔츠를 입었다.
단추까지 전부 잠갔다.
“저 상처받겠어요?!”
“상처받은 건 한 이사님이지.”
“죄송해요…….”
“아닙니다. 생각은 자유입니다. 중요한 건 시선을 처리하는 것과 입으로 생각을 내뱉지 않는 것이죠. 생각은 생각으로 그쳐주십시오.”
“……저 말 좀 야하지 않아요? 생각은 해도 된다고 공인해준 거 아닌가?”
조아라가 백설하에게 동의를 구했다.
당연히 백설하는 동의해주지 않았다.
한구인은 자식이 야동 보는 것을 목격한 부모처럼 창백해졌다.
“아, 아라 씨…….”
“다들 한 이사님 수치스럽게 만들지 말고 먹을 거나 정해.”
다들 성필과 한구인을 중심으로 모여서 가게를 검색했다.
“여기 평점 좋다. 3000원 할인 이벤트도 하고. 냉면이 끝내준대.”
“배고파서 죽겠으니까 아저씨가 골라줘요.”
“그러다가 맛없으면 내 탓 하려고?”
“탓 안 해요.”
“하양이는 뭘로 할래?”
“으음, 저는 일반 냉면으로 할게요.”
“그럼 각자 냉면 하나씩 시키고 석쇠구이도 하나로…….”
“그건 또 내가 빠질 수 없지.”
누워서 휴식을 취하던 조아라가 성필의 어깨에 얼굴을 얹었다.
“무거우니까 빼.”
“스크롤 더 내려봐요. 아, 땀 냄새 난다.”
“나와! 저리 가! 가라고!”
“그니까 옷 좀 벗고 청소하지. 뭐 그리 부끄럽다고 셔츠 단추도 안 푸시나.”
“수치스럽잖아. 리카가 보면 어떡해?”
“저 좀 그만 놀려요 제발! 제가 다 잘못했어요!”
돈까스를 보며 행복에 젖어있던 리카가 울상을 지었다.
“이거 맛있겠다. 숯불구이랑 석쇠구이는 뭐가 다르지? 비싼 걸로 시켜요.”
“슬슬 어깨 아프다. 너 턱 너무 뾰족해.”
“이렇게? 아파?”
“아파! 진짜 아파!”
“아라야.”
잠자코 있던 장하양이 목소리를 깔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너무도 갑작스러운 부름이었기에, 모두의 눈이 장하양에게로 몰렸다.
장하양이 싱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사님이 힘드시다잖아. 내려와.”
“아, 네.”
조아라는 성필이 말했을 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장하양의 말 한마디에는 고분고분 따랐다.
장하양은 미소를 더욱 깊게 하며, 조아라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였다.
방금 광경을 못 봤다면 세상 친한 언니 동생 사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라는 뭐 먹는다고 했지?”
“어, 이거요.”
“좋다. 세트도 있네. 이거 시켜서 언니랑 나눠 먹을래?”
“네, 네.”
역시, 저 나이대는 또래 언니가 가장 무섭구나.
‘30대 아저씨는 만만하다 이거지.’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나.
석세스 엔터에 있을 때는 연습생들이 성필만 보면 벌벌 떨었는데.
그렇다고 그때가 그리운 건 아니었다.
현재의 가족 같은 분위기도 충분히 좋았다.
‘아직은.’
회사 규모가 작을 때야 가족적인 문화가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가로 엔터가 더 커진다면 이렇게 유지될 수는 없다.
후일 성필과 한구인에게는 권위가 필요해진다.
그럼 애들과 이렇게 격의 없이 떠드는 것도 금지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게 회사를 잘 굴리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지금을 소중히 여겨야지.’
식사가 오자 아이들은 말도 하지 않고 먹는 데 집중했다.
이렇게 짜고 단 음식을 먹어볼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항상 한구인이 만든 영양 만점(맛은 그다지) 음식을 먹으니, 설탕과 소금이 그리운 거겠지.
“나, 이젠 죽어도 좋아.”
리카가 만족스럽게 벽에 기대었다.
“다들 디저트도 먹어야지. 테이크아웃 해올 건데 뭐 먹을래?”
“커피도 시키면 안 되나?”
“산책하는 김에.”
“아.”
성필의 산책은 곧 담배였다.
회사 사람들 대부분이 알았다.
성필은 회사에서 담배란 단어는 꺼내지도 않았고, 아이들에게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럼 이렇게 사 온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성필과 한구인은 카페로 가서 커피를 여섯 개와 케이크를 샀다.
성필 혼자서도 들고 올 수 있지만, 한구인이 나가고 싶어 하기에 같이 온 것이다.
“네 분이랑 저 혼자만 남으면 어색할 거 같았습니다.”
“그런 거 있죠. 애들끼리도 자기네들끼리만 있는 게 더 편하고요.”
숙소 앞에 도착한 성필은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저는 10분 정도 있다가 들어갈게요.”
“저도 같이 있겠습니다.”
“저 흡연…….”
“사장님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원래 한구인도 담배 냄새를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과 미국에서의 인턴 생활 때 질리도록 익숙해졌고.
화룡점정으로 항상 홍규헌 옆에 있다 보니, 담배에 무감각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종국에는 한구인이 홍규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있을 때 피우셔도 괜찮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한구인이 탄생했다.
성필은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가서 연기가 한구인에게 향하지 않도록 했다.
“인원이 네 명인 그룹이 많이 없습니까?”
“없는 건 아니에요. 현재 탑티어 그룹 중에서도 사인조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역사를 살펴보면, 성공한 사인조 그룹은 전부 대형 기획사 소속이었어요.”
“따로 이유가 있습니까?”
“아이돌이란 게 원래 멤버 수가 많으면 좋죠. 퍼포먼스 폭도 확대되기도 하고. 뭣보다 ‘이 중의 한 명은 마음에 드는 애가 있을 거다’란 전략이 있거든요.”
“인해전술 같은 느낌이군요.”
“그렇죠. 아이돌의 팬이 되는 첫 번째 이유가 비주얼이라고들 해요. 입덕 멤버라는 애들도 보면 거의 다 비주얼 센터가 많아요. 그런데 사람 취향은 가지각색이니까, 최대한 개성의 폭을 늘려서 입덕을 유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작은 기획사는 멤버의 수를 늘리려고 하지만, 웬만큼 늘려도 7명 정도가 한계라고 한다.
멤버의 수가 많다는 건 양날의 검이다.
팬을 많이 모을 수 있기도 하지만, 멤버 수가 많으니 회사가 투자해야 하는 돈도 많아진다.
“규모의 경제와 링겔만 효과가 양립하고 있군요.”
“네?”
“규모의 경제는 이 경우로 비유하는 건 적절치 않지만. 요컨대,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늘어나면 기대 수익은 높아지지만 비용은 그에 상응하는 만큼 커지지 않는단 뜻 아닙니까. 그러니 멤버가 많을수록 이득인 거고요.”
“네, 그런 식이죠. 링겔만 효과는 뭐예요?”
“프랑스의 막시밀리앙 링겔만이 만든 이론입니다. 집단에 소속된 개인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책임 분산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죠. 아이돌 그룹 멤버수가 일정 이상 높아지지 않는 건, 이 링겔만 효과를 고려한 결과인 듯합니다.”
“오, 그럴듯하네요.”
성필은 한구인의 경제학 강의를 즐겁게 들었다.
“멤버수가 무한정 늘어난다 해서 기대 수익이 무한정 늘어나지는 않죠.”
“일본에는 소속 인원이 몇백 명이나 되는 그룹도 있다던데, 사실입니까?”
“아, 그건 1년에 한 번씩 멤버로 활동할 사람을 투표로 뽑아요. 총선이라고 불러요.”
“팬이 직접 드림팀을 만드는 거군요.”
“드림팀이 베스트팀은 아니지만요.”
성필은 아까 끊긴 사인조에 관한 설명을 이어서 했다.
“멤버 수가 많은 그룹을 보면 각각 실력이 천양지차인 경우도 있어요. 회사도 많은 인원을 한 번에 신경 쓰긴 어렵거든요.”
“그럼 멤버 수가 적으면 상대적으로 실력이 뛰어날 확률이 높겠습니다.”
“예. 그 마지노선이 사인조인 것 같아요. 대형 기획사가 사인조를 낸단 건…….”
“실력, 비주얼, 개성 모두 완성에 가까운 분들이란 뜻입니까?”
“네. 육성과 관리에서 비용을 줄이니 마케팅과 음악에 힘을 쏟을 수도 있어요. 비용 면에서 이점이 있죠.”
물론 대형 기획사에 한정된 설명이다.
인재풀이 넓은 그네들 입장에서야 사인조가 매력적이지.
한정된 자원으로 승부하는 중소 기획사에서 사인조는 도박 중의 도박이다.
어지간히 연습생들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없고선 함부로 시도할 수 없다.
“저희는 어떻습니까?”
성필이 담배를 끈 것과 동시에 한구인이 물어왔다.
성필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상의를 가볍게 털었다.
“모르겠어요.”
탈취제를 몸 곳곳에 뿌린 뒤, 성필과 한구인은 숙소로 들어갔다.
멤버들은 거실에 없었다.
방 안에서 소리가 들리고 있었는데, 기특하게도 먼저 청소를 시작한 듯했다.
“디저트 먹고 하지. 뭐가 그리 급해서…….”
방구석에 쪼그려 있던 네 명이 미어캣처럼 성필 쪽을 보았다.
그녀들은 서랍 앞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무언가를 찾은 듯했다.
성필은 눈가를 좁혔다.
리카가 손에 들고 있는 거…….
‘콘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