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9화 (39/760)

#039화

성필은 목청을 가다듬고 전화를 걸었다.

문자나 톡이 아닌 전화로 연락하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퇴근 시간도 지났을 테니 전화 받겠지?

[성필이. 웬일이야?]

전화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음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밥 먹어?”

[회식. 준비하던 프로젝트 끝났어서. 한잔하고 있지. 왜? 오래 걸려?]

“몇 분. 바쁘면 나중에 걸게.”

[아냐. 전화 받으러 나왔어. 말해.]

“음.”

상대의 이름은 손혜빈.

성필이 처음 매니저로 업계에 발을 들였을 때, 그는 손혜빈의 로드 매니저가 됐었다.

정말 오랜 인연이다.

10년이 넘었으니.

손혜빈은 유명 솔로 댄스 가수였었다.

그녀의 노래를 틀어주면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물론 20대 중후반에서 30대까지만…….

활동을 접은 지는 꽤 됐다.

“내가 지금 걸그룹 만들고 있거든.”

[진짜? 너 독립했어?]

“……걸그룹 만드는 데 ‘참여’하고 있거든.”

[에이, 뭐야. 화환이라도 사줘야 하나 생각했는데. 근데 너를 누가 프로듀싱 단계부터 넣어주든?]

“나 누나 수발들던 박성필 아니다?”

[암튼 축하해. 좀 작은 데지?]

성필이 프로듀싱에 참여하는 회사이니 작을 것이다.

그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에 화가 나기도 하면서, 정확한 판단력에 소름이 돋기도 했다.

[회사 규모는 상관없어. 열심히, 잘만 하면 작은 데서도 스타는 떠. 힘내라 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뭐 물어보려고? 미리 말하는데 내가 어디 방송이나 광고에 꽂아줄 급은 아니다? 아, 설마 우리 회사 애들이랑 엮어서 마케팅이라도 하려고? 절대 안 돼!]

“내가 그렇게 치졸한 사람처럼 보이나.”

[아니면 뭐야?]

“지금 연습생 네 명 모았어. 슬슬 생각해야 하잖아.”

[아, 맞네. 몇 명이나 모을지. 계획은 없었어?]

“인원 계획이야 하다가도 엎어지고, 엎다가도 만들어 두고 하는 거지.”

[근데 네 명은 너무 적다.]

“그렇긴 하지? 그래서 누나 의견 들어보고 싶어서. 이쪽에 감이 좀 있잖아.”

현재 손혜빈은 대형 기획사 디자인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담당은 굿즈나 앨범 쪽.

기획사 사장과 연이 있어서 처음부터 일을 배웠고, 현재는 거뜬히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원래 댄스 가수로 활동한 데다가, 소비자의 트렌드에 가장 가까워야 하는 디자인팀에서 오랫동안 일했으니, 시장을 보는 눈은 확실하리라.

[지금 물어봐도 내가 딱히 해 줄 말이…….]

“나중에 좀 만나서 조언 좀 해주면 안 돼? 그룹 색깔이라든지 여러 가지로.”

성필의 꿈은 아이돌 프로듀싱이다.

하지만 신처럼 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다.

미래에 성공할 그룹을 카피해서 현재에 내놓는다고 과연 성공할까?

아니다.

모든 조건과 시기, 타이밍을 맞춘다 해도 똑같은 결과는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성필만으로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같이 프로듀싱을 이끌 아군이 필요하다.

‘이 누나는 가요계를 겪어보기도 했고. 디자인 쪽에 있으면서 업계 동향도 많이 파악했어. 뭣보다…….’

여자다.

성필은 여자의 눈을 모른다.

아이돌 업계에 이런 말이 있는데, ‘여자가 좋아하는 그룹을 만들면 남자도 좋아한다.’이다.

아이돌 소비층의 다수는 여자다.

여자가 어떤 부분에서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는지, 그 포인트를 분석할 사람이 필요한데.

‘사장님은 걸그룹을 좋아한 적이 없다고 하셨지.’

[내가 뭐라도 되는 듯이 말하네. 믿어주는 건 고맙긴 한데. 나도 딱히 혜안이 있는 건 아니거든?]

“아니면 어때. 오랜만에 만나서 밥 먹고 그러는 거지.”

웬만해선 손혜빈을 가로 엔터에 끌어들이고 싶었다.

안 된다면 그녀에게 소개를 받아 비슷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데려왔으면 좋겠다.

‘이 누나 좀 나중에는 프로듀싱까지 손댔었지.’

미래의 손혜빈은 질렸다면서 회사를 뛰쳐나온다. 그리고 댄스 가수를 하면서 모아두었던 소속사 주식을 전부 팔았다.

몇 년 후, 손혜빈은 그 돈을 어느 기획사에 투자해서 이사급이 됐다.

돈에서 나온 입김으로 본인 감각에 맞는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게 반응이 좋았다.

성필도 그 그룹의 음악을 자주 들었다.

취향이 맞았단 것이겠지.

[성필아. 미리 말해둘게.]

“뭘?”

[나한테 여자 소개받을 생각하지 마. 나도 없어서 죽겠는데 뭔…….]

“내가 언제 그딴 말 했어?!”

[아니. 이 나이 되니까 주변 애들이 자꾸 소개시켜 달란 거야. 30대 되면 끊기잖아 그런 게. 근데 내가 뭐 젊은 애들 엄청 많이 아는 줄 알아. 웃기지 않냐? 자기는 30대면서 20대 소개받고 싶대.]

“난 그럴 생각 진짜 1도 없으니까 안심하고 나오기나 해.”

[우리 성필이. 잘살고 있나 보네. 누나한테는 여친분 소개 안 시켜 줘?]

“없…… 긴 한데.”

[너 딱 서른이지? 그때가 적기야. 빨리 찾아 빨리! 나중에 후회해도 늦어!]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다.

실제로 전생의 성필은 일에 너무 몰두해서 사느라 결혼과는 멀었으니까.

연애해도 피곤함 때문에 금방 그만두곤 다시 일에 집중했었다.

다시 생각하니 후회막심이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럼 언제 만나.]

“누나 괜찮을 때.”

[토요일로 하자. 술 마실 거지?]

“누나가 먹고 싶으면.”

[너 언제 이렇게 소극적인 애가 됐니. 옛날엔 나랑 술 먹어보겠다고 나 나오는 술자리 꼬박꼬박…….]

“응, 아니야. 끊는다.”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 한다더니. 누나는 슬프다.]

전화를 끊었다.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다.

‘분노가 심장을 거쳐 머리를 뚫고 다시 발끝까지 가는 기분…….’

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이 놀림당했던가.

‘그래도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 * *

“리카야, 돈까스 먹으러 가자.”

“톤카츠?!”

리카가 호다닥 성필의 옆에 붙었다.

며칠간 집 비운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 같은 기세다.

호텔 뷔페라도 데려가면 무릎이라도 꿇는 거 아닐까 싶다.

“돈까스는 비유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저거 봐, 저거. 또 리카만 편애하지.”

“아라도 가자.”

“이거 어쩔 수 없구만. 나도 편애받는 수밖엔…….”

“너 말투가 왜 그래.”

“어? 리카 때문인가. 내, 내 말투가 오타쿠처럼 변했어?”

백설하와 장하양, 언니 라인이 성필을 멀뚱멀뚱 쳐다본다.

진짜 리카와 아라만 데려가나? 그런 시선이었다.

“다들 와. 다 같이 가야 해.”

“저희 그런 거 먹어도 돼요?”

“돼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명탐정 조아라의 예상. 아저씨 생일임.”

“아닌데.”

“예상 실패.”

네 사람은 갑작스런 외식에 기뻐하며 회사를 나섰다.

밖으로 나가니 한구인이 트렁크 안에 무언가를 넣고 있었다.

쾅, 트렁크가 닫혔다.

“다 나오신 겁니까?”

“네. 제가 설하 씨랑 리카 데려갈게요.”

“저거 봐 저거. 곧 죽어도 리카랑 설하 언니야. 회사에 들어온 순서대로 좋아하나 봐. 하양 언니도 동의?”

“아니.”

“……네?”

장하양의 단호한 대답에 조아라가 적잖이 당황했다.

“그럼 저는 아라만 데려갈게요. 한 이사님, 다른 분들 부탁드려요.”

“으잉?”

한구인이 리카, 백설하, 장하양을 태웠다.

성필은 조아라만 태우고 숙소를 향해 갔다.

“으잉? 진짜 나만 탔네?”

“아라야.”

“나쁜 말 하려고요?”

“장난으로라도 멤버들끼리 서열 나누려고 하지 마. 나랑 사장님이랑 한 이사님 정말 편애 같은 거 안 해.”

“……알아요.”

“근데 사람이란 게, 자꾸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진짜 그렇게 믿게 되거든. 앞으로는 자중해줘. 알겠지?”

조아라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가로 엔터의 나쁜 말 담당은 성필이다.

회사에서 규정을 둔다 해도 연습생들이 그것에 충실히 따르진 않는다.

규정뿐 아니라 회사 풍토에 반하는 행위나 언행도 지적해줘야만 한다.

성필이 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더 밑의 직원이 있었다면 그에게 맡겼겠지만, 지금은 성필이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성필도 좋은 말만 하고 싶다.

“알았으면 됐어.”

조아라에게서 들떴던 기운이 쏙 들어갔다.

그녀는 다른 애들보다 더 성필의 말에 영향을 받았다.

사소한 거라도 지적받으면 종일 어깨가 늘어져 있곤 한다.

보통 달래주는 건 한구인의 역할이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아라야. 앞에 글로브 박스 열어봐.”

“…….”

조아라는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박스를 열었다.

안에는 종이백이 하나 있었다.

“선물.”

“으엥? 갑자기? 선물?”

“열어봐.”

조아라는 반신반의하며 종이백을 열었다.

노란색의 커다란 박스가 있었다.

박스에 찍힌 글자를 보곤 조아라가 호들갑 떨었다.

“야자수 프렌즈!”

대한민국 국민 메신저인 야자수톡의 마스코트 캐릭터들이다.

한국인치고 야자수 프렌즈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기본 이모티콘으로 지급되니 모를 수가 없지.

“나, 나, 나 이거 엄청 좋아하는데. 어, 이거.”

“그랬어? 그냥 네가 좋아하겠다 싶은 걸로 산 건데. 다행이다.”

“왜, 왜요? 왜 줘요?”

“저번에 네가 내 머리카락 만지려고 할 때. 내가 네 손 쳤잖아. 좀 인정 없던 거 같아서.”

성필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조아라에게 상처가 됐을 법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친근함의 표시로 어깨를 두드려주려 했다고 치자.

그런데 갑자기 그가 빠르게 손을 쳐낸다면 기분이 어떨까.

성필이었다면 절대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넘어서, 평소에 친밀감을 느꼈던 만큼 충격도 크겠지.

“그, 나는…….”

조아라는 갑자기 받은 선물 때문에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몇 번 더듬거리더니 크게 웃으면서 성필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마구 쳤다.

“나 그딴 거 신경도 안 쓴다구요!”

“야, 야! 나 운전! 운전하고 있어!”

“이야, 이 아저씨 어쩌면 좋아? 그거 걱정했어요? 나 같이 뒤끝 없는 사람한테? 아저씨 마음 약해서 어찌 살아?”

뒤끝 없는지는 모르겠고, 계속 침울했던 건 알겠다.

하지만 지금의 조아라는 그까짓 것 아무렇지도 않단 듯 만개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선물한 사람의 어깨가 절로 으쓱일 정도로 격한 기쁨이다.

“열어봐.”

조아라는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박스를 여니 더 그랬다.

“핸드폰 케이스!”

계란말이를 의인화한 토끼 캐릭터가 핸드폰을 감싸는 형태였다.

거기에 더해서.

“숭이 무릎 담요! 아, 방석도! 마, 망토 담요까지?!”

“더 있어.”

“배지랑…… 머그컵?! 나 죽어 진짜!”

돌고래 비슷한 고성에 성필이 움찔했다.

조아라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발까지 동동 굴렀다.

“으하하하! 기분 째지겠네 리얼 죽을 거 같아! 아저씨 고마워요. 아, 돌아버리겠어. 으헤.”

“…….”

무섭다.

미래의 조아라도 야자수 프렌즈를 좋아했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일주일에 한 번씩 프렌즈샵에 들러서 눈에 띄는 것을 집어오곤 했다.

언젠가 한 번 조아라네 집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방 안이 전부 야자수 프렌즈 굿즈 투성이였다.

침대에 바디 필로우가 8개나 있는 것을 보곤 얼이 빠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영입 제안할 때 하나 사 가는 거였는데…….

“이런 거 받을 수 있으면 아저씨한테 뺨 맞아도 좋겠다. 그럼 뭐 사줘요? 바디 필로우 10개? 100개?!”

“안 때려.”

“아, 하아, 아아, 에아아아…….”

아니,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담요를 안으면서 이상한 신음까지 내기 시작했다. 슬슬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어진다.

다행히 목적지에는 금세 도착했다.

“그거 다시 안에 넣어둬. 애들한테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물을 하려면 한 명에게 몰래 하거나,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만약 조아라가 성필에게 선물을 받았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면, 다른 멤버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비록 선물에 이유가 있더라도 말이다.

“안 말해요. 아저씨 지갑 거덜 낼 일 있어요?”

다행히 조아라는 남들에게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무리 사과의 뜻이 담긴 선물이라 해도, 홀로 받는 선물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 이해한 것이다.

“근데 나 진짜 아무렇지 않아요 그때 일.”

그거야 선물 받았으니까 그렇고.

“아저씨 생각보다 담이 작네. 이런 식으면 우리 회사 사람들한테 다 선물 사줘야겠어.”

“그러게나 말이다.”

“근데, 머리카락 만지는 거 얼마나 싫어해요?”

“딱히 안 싫어해. 그땐 운전하고 있어서 그랬던 거고.”

‘미래의 너 때문이야.’,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조아라는 처음 보는 동물을 대하듯 성필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잠시 후, 부드럽게 그녀의 손이 성필의 머리에 안착했다.

“진짜네.”

“내가 맹수냐?”

“아직은 머리숱이 풍성하네요.”

“그만하고 나가자. 아, 그만 만져. 너 때문에 빠지면 어떡해.”

숙소 근처에 차를 세운 뒤 아이들을 한곳에 모았다.

그녀들의 눈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한마음 국밥? 여기서 먹는 거예요? 손나, 우소(그런, 거짓말)!”

“리카는 국밥 싫어해?”

“돈까스 사준대서 따라왔는데 국밥을 주면 당연히 싫어하죠?!”

리카, 먹을 것에 진심인 아이다.

평소에 마음대로 못 먹어서 그런가.

아이들이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동안, 성필과 한구인은 트렁크에서 청소도구들을 꺼냈다.

상자에 담겨 있었기에 아직 아이들은 청소도구의 존재를 몰랐다.

“올라가자.”

성필과 한구인이 앞장섰다.

아이들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성필은 박스를 내려두고 열쇠를 꺼냈다.

“여기가 너네 숙소야.”

침묵에 잠긴 것도 잠시, 리카가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좀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우리 진짜 데뷔하는 거구나아아…….”

울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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