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8화 (38/760)

#038화

“흐읔.”

“끄으읍…….”

백설하와 조아라가 장하양을 껴안으며 울었다. 둘은 돌에 달라붙은 이끼처럼 장하양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홍규헌이 결과 발표를 한 직후였다.

두 사람의 격렬한 반응에도 장하양은 헤실거리며 웃기만 했다.

‘언제 셋이서 저렇게 친해진 거지?’

리카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장하양을 안았다.

혼자 가만히 있으니 소외되는 기분도 들었기 때문이다.

장하양을 안으니 왠지 모르게 리카도 눈물이 나왔다.

“흐에에엥…… 고생 많았어요 언니이…….”

“고마워 리카, 고마워.”

한구인은 그 장면을 핸드폰 카메라 속에 담으며 눈물을 훌쩍였다.

감동의 포옹이 끝나고 장하양은 홍규헌의 앞에 당당히 섰다.

“사장님!”

“어.”

“정말 정말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난 열심히 하는 애가 제일 좋더라.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줘.”

“감사합니다!”

이로써 가로 엔터의 연습생도 네 명이 됐다.

연습생들 간 케미도 잘 맞는 것 같고, 네 명을 한 자리에 세워두니 드디어 걸그룹 같은 느낌이 왔다.

“하양아 축하한다.”

“넵! 박 이사님도 저 도와주시느라 많이 힘드셨죠?”

“내가 힘들 게 뭐 있어. 다 네가 했는데.”

“아하하, 아니에요.”

“맞다. 너 소원 있다면서. 뭐야? 들어줄게.”

미소 가득했던 장하양이 웃음기를 지웠다.

그녀는 당황해선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원? 하양 언니 소원 들어주기로 했어요? 뭔데, 왜 나만 그런 거 없었는데.”

조아라가 곧바로 트집을 잡았다.

“나도 없었어!”

리카도 가세했다.

백설하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남은 둘과 생각이 같은 듯했다.

“그래 그래. 너희들 소원은 뭐냐. 말해봐.”

“나느은…… 보자…… 생각해볼게요.”

“리카는?”

“맛있는 거 먹고 싶어요.”

성필이 허락을 구하는 듯 홍규헌을 보았다. 홍규헌은 어쩔 수 없단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같이 맛있는 거 배 터지게 먹으러 가자. 내가 산다.”

“제가 사장님 존경한다는 거 말씀드렸던가요?”

“리카 요놈의 꼬맹이가 말만 번지르르하네.”

“헷.”

“하양이 소원은 뭐야?”

백설하가 장하양에게 물었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직 안 정해서…….”

“너 저번에는 나한테 간단한 거라고 말하지 않았어? 미리 정한 줄 알았는데.”

“나, 나중에요! 나중에 이사님한테 말씀드릴 테니까…….”

다들 기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홍규헌이 옆구리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리카를 밀어내고 진지한 투로 물었다.

“장하양. 진짜 혹시나 해서 묻는 거거든. 너 박 이사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지?”

“아, 아니에요?”

“반문(反問)?”

“아니에요!”

홍규헌은 진실을 꿰뚫어 볼 듯 눈을 부릅떴다. 장하양은 그 시선을 계속 마주했다.

“그렇지? 너 같은 애가 왜 박 이사를 좋아하겠어.”

“방금 발언은 저를 굉장히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정정 요청합니다.”

“박 이사도 좋은 신랑감이지. 비슷한 나이대에서는 말이야. 10살 차이가 사귀면 서로한테 고통이야.”

“전혀 정정이 안 됐는데요.”

“그래서 소원이 뭔데? 나한테 말해.”

“나중에요. 나중에…….”

남들 앞에서는 밝히기 어려운 것인 듯했다.

성필은 그게 장하양의 가정사와 관련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럼 말하기 어려울 만하지.’

가장 믿는 사람에게만 알리고 싶으리라.

“알겠다. 계속 묻는 것도 이상하지. 오늘은 다들…….”

리카가 기대에 부풀었다.

“연습해.”

리카가 실망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장하양의 최종 평가라는 이벤트가 있었음에도, 가로 엔터는 평소와 같이 움직였다.

성필도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차, 홍규헌이 그를 불러 세웠다.

“박 이사. 슬슬 정해야 할 거 같은데.”

“어떤 거 말입니까?”

“그룹 규모. 네 명으로도 괜찮겠어? 아니면 더 필요할까?”

네 명.

걸그룹이란 게 작동하기 위한 최소 인원처럼 생각되는 숫자다.

“네 명…….”

장점도 있고 약점도 있다.

아니, 약점이 더 크다.

장점이 컸으면 현재 걸그룹은 전부 네 명 이하로 돌아가고 있었겠지.

“생각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랑 한 이사도 머리 굴려볼게.”

* * *

성필은 장하양을 태우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연습을 시작하자마자 장하양이 실신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진짜 병이다 싶어서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까지 받았다.

결과는 나중에 나온다 했고, 일단은 수액만 맞히고 돌아가는 길이다.

“긴장이 풀려서 그랬나 보네.”

“죄송해요.”

“저번 밤에 쓰러져 있던 것도 정신 잃었던 거야?”

“아하하, 네. 정신 들자마자 이사님이 걱정하시겠다 싶어서 잤다고 했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마.”

“넵.”

장하양은 정말 힘든 듯 말도 그다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성필과의 대화가 쭉 이어졌을 것이다.

그녀는 창밖에 펼쳐진 한강 변을 보았다.

“뭐 재밌는 거라도 있어?”

“아니요. 그냥 한강이요. 공원. 좋겠다.”

“뭐가?”

“나중에 저기 산책 가요. 가보고 싶어요.”

“그러자. 그런데 너 소원 뭐였어? 이제 말해줄 수 있지?”

“네. 그렇긴 한데. 아하하, 지금 말하려고 해도 떨리네요.”

“속 시원하게 말해. 웬만해선 들어줄게.”

장하양은 성필이 안심시켜줘도 자꾸 ‘이래도 될지……’ 같은 말이나 했다.

이대로 소원이 뭔지 말해주지 않으면 궁금해서 잠도 못 잘 것 같다.

“그게요.”

“드디어 말해주게?”

“저 혹시 회사에서 살면 안 되나요?”

성필에게 말할 만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까 홍규헌과 다 같이 있었을 때 말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아마 장하양은 홍규헌에게 직접 요청하는 게 겁났던 거겠지.

“집 나오게?”

“네.”

홍규헌은 성필이 회사에서 잘 때마다 그러지 말라고 한다.

작은 숙직실이 있긴 해도, 들어와 살라고 만든 곳은 아니었다.

홍규헌에게 아예 회사에서 살고 싶다는 요청을 하면 어떤 말을 할까.

‘나라도 무섭겠네.’

소원의 난이도가 백화점에서 명품 사주는 정도라더니, 실로 그러했다.

소원을 들어주는 데는 그만한 용기가 필요했다.

“사장님께 말씀드려볼게.”

“감사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장하양의 부탁이다.

파편적이지만 그녀의 가정사가 힘들단 것을 알고 있으니, 이 소원만큼은 꼭 들어주고 싶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요. 부담 안 가지셔도 돼요.”

“그럼 소원이 아니잖아. 내 마음대로 들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한데……. 내 힘 가는 대로 노력은 할게. 근데 못 들어주면 어떡하냐. 다른 소원은 없어?”

“있긴 한데, 물어보시면 안 되죠.”

“왜?”

“다른 목표가 생기면 포기가 빨라질 수 있어요. 이거 실패해도 다른 거 들어주면 되지, 이런 식으로요.”

“별걱정을 다 하네. 내가 그렇게 대충 사는 인간처럼 보여?”

“아니요. 믿고 있어요.”

성필은 장하양의 집 앞에 도착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볼게요.”

“……하양아. 그냥 지금 말씀드리러 갈까?”

“지금 바로요?”

“집안 사정 때문이지? 들어가기 싫잖아, 집에.”

장하양은 작두 타는 무속인이라도 보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홀린 듯 잠시 가만히 있더니,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보였어요?”

“보이지.”

“하루 온종일 저만 보고 계신가?”

“눈에 들어올 때만.”

서로의 웃음이 뒤섞이고, 성필은 다시 액셀을 밟았다.

“저 또 소원 들어주세요.”

“또? 뭐하면?”

“이사님은 제가 뭐 했으면 좋겠어요?”

“아이돌이지 뭐.”

“그럼 이사님 생각에 이 정도면 됐다 싶은 아이돌이 되면요. 그때 소원 들어주세요.”

“나는 최고밖에 몰라.”

“그럼 최고의 아이돌을 목표로 할래요. 그거 이루면 소원 들어주세요.”

“알겠어. 근데 그거 거의 내 꿈이거든? 쉽지 않을걸.”

“헤, 얼마나 걸릴까요.”

“무섭네. 다음에는 백화점에서 명품 사는 정도가 아닌 거 아냐? 부동산 데려가서 집 사달라고 한다던가.”

“난이도는 비슷하려나.”

“미리 거절할게.”

“들어보고 거절하시지…….”

“거절해도 되는 거야?”

장하양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니요. 이번에는 거절하시면 안 돼요. 제가 이사님의 꿈을 이뤄드리는 거니까요.”

* * *

“회사에서 살게 해달라고?”

당연하다고 할까, 홍규헌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곧바로 거절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가능성이 있을 듯했다.

성필은 장하양의 상황을 아는 대로 설명했다.

구체적이진 않아도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홍규헌은 이야기를 다 듣고는 책상 서랍을 열어 열쇠 하나를 꺼냈다.

“오랜만에 꺼내 보네. 장하양 소원은 이걸로 대신할게.”

“그게 뭔데요?”

“숙소 키.”

“숙소가 있었어요?”

“당연하지. 우리 회사에서 아이돌 한 팀 데뷔시켰었다고 했잖아. 걔들 거기서 살았어.”

이런 게 있었다니,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모르고 시간 남을 때마다 부동산 알아보고 그랬는데…….

“어떻게 돼 있으려나. 셋이서 같이 가보자.”

성필, 홍규헌, 한구인은 사장실을 나왔다.

문 앞에선 장하양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냐는 듯한 눈빛에 홍규헌이 대신 답했다.

“회사에서 사는 건 안 돼.”

“아, 무리한 부탁드려서 죄송합니다.”

“대신 다른 곳은 있어.”

“네?”

“갔다 와서 말해줄게.”

홍규헌이 어안이벙벙한 장하양을 지나쳤다.

성필은 홍규헌을 따라가며 장하양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장하양도 이야기가 어떻게든 풀렸단 것을 알곤 환하게 웃었다.

“여기야.”

이층집이다.

1층은 ‘한마음 국밥’이라는 식당이 있었다.

아마 2층이 주거 용도로 쓰이는 듯했다.

“이 건물이 사장님 거예요?”

“어. 종부세 내느라 죽겠다. 쓰지도 않는 건물인데.”

“밑에 가게에서 월세 나오죠?”

“그렇긴 한데. 건물이 몇 개 더 있어서.”

홍규헌 나이에 건물이 몇 개나 있다라…….

역시 노동수익은 자본수익을 따라잡지 못하는 건가.

새삼스레 세상에 대한 불만이 생겨난다.

재벌 집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가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깔끔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1층 식당의 주인이 청소해준다고 했다.

“여기야.”

평범한 나무 문이 반겨주었다.

홍규헌은 문고리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성필은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모험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숙소, 숙소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키우면서 살아갈 것이다.

과연 어떤 곳일지…….

“콜록! 콜록! 으엑, 콜록!”

가장 앞에 서 있던 홍규헌이 세차게 기침했다.

문을 열자마자 먼지가 확 끼쳐왔던 것이다.

바로 뒤에 있던 한구인도 코를 움찔거리더니 벽을 붙잡고 재채기를 해댔다.

“으아, 죽겠다. 뭐야 이거. 먼지 너무 많잖아.”

홍규헌이 코를 훌쩍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타고 햇빛이 비치자 방 안에 먼지가 얼마나 많이 돌아다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거 안 쓴지 얼마나 됐어요?”

“몰라. 몇 년 됐나. 정확하게 안 세고 있었어. 근데 상태 보니까 심각하네. 보자, 여길 어떻게 해야 하나.”

홍규헌은 계속 기침하면서 숙소 안을 돌아다녔다.

전에 있던 그룹이 나갈 때 청소도 안 했는지, 여러 가구나 물품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사장님. 손수건입니다.”

“어, 그래. 땡큐.”

홍규헌은 한구인이 준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여기저기를 확인했다.

성필은 그들을 따르지 않고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먼지 맞은 포스터가 하나 걸려 있었다.

‘서프레스.’

전 가로 엔터의 보이그룹, 서프레스.

활달한 표정의 남자들이 청량감 넘치는 배경을 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저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성필은 먼지도 신경 쓰지 않고 포스터를 손으로 훑었다.

슬픔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우리도…….’

리카, 백설하, 조아라, 장하양도.

언젠가 이렇게 먼지 속에 묻히는 날이 올까?

그런 생각을 하니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꼭 성공하자.’

그녀들을 끝없이 쏟아지는 빛 속에 세울 것이다.

세상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됐다. 더 볼 거도 없네. 박 이사…….”

홍규헌은 성필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알아챘다.

‘서프레스’의 포스터를 본 홍규헌은 씁쓸한 웃음을 띠었다.

“가자.”

그녀는 포스터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숙소를 나갔다.

숙소를 나와 다시 문을 잠갔다.

“숙소는 나중에 다 같이 들어갈 거야. 일단은 장하양 한 명만 살게 하고. 어차피 애들이 들어와서 살 곳이니까 애들 다 불러서 청소시키자. 너희 둘도 같이.”

“사장님은요?”

“내가 돈 주는데 노동까지 해야겠니?”

지당한 말씀이시다.

홍규헌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대신, 점심은 뭐든 시켜 먹어도 돼.”

“아이고오 당연히 사장님 손에는 먼지 한 톨도 묻힐 수 없지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박 이사 점점 아부가 느네? 근데 기분이 좋지가 않아. 고까워.”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래. 그 정도가 적당하지. 박 이사는 굽히기보다 꼿꼿하게 선 모습이 어울려.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내 앞에서도 항상 당당해야 해. 알겠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