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성필은 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많이 기다리셨죠? 어떻게 사과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 좋게 웃는다면 그게 호구지 뭐겠는가.
성필은 그녀의 앞에 놓인 커피잔을 보았다.
벌써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그녀는 명함을 받곤 테이블 구석에 각을 잡고 놓아두었다.
그리고 말이 없었다.
“저도 음료 좀 시키고 오겠습니다. 혹시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시면…….”
“괜찮아요.”
“넵.”
성필은 카운터로 가면서 머리를 굴렸다.
‘이름이 뭐지?’
어젯밤에 전화했다면 분명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사람 이름을 들어놓고 잊어버리다니?
심지어 약속까지 잡아놓고?
매니저의 수치다.
일부러 명함을 내밀며 상대도 이름을 말하길 바랐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뭐지. 뭐지. 뭐지. 뭐였더라. 아, 제기랄 왜 난 어제 저분한테 전화를 걸었지?’
스멀스멀 기억이 올라오려고 한다.
“손님, 주문은…….”
“가장 오래 걸리는 게 뭐죠?”
“네?”
“가장 오래 걸리는 거요.”
“오늘의 커피 톨 사이즈가 가장 오래 걸려요.”
“그걸로 주세요.”
성필은 카운터 근처에서 서성였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기억해내야만 한다.
열심히 머리를 혹사시키자, 정작 떠올라야 하는 기억 대신 다른 게 떠올랐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얘기 나온 김에 지금 연락해!”
어렴풋이 울리는 성윤수의 목소리.
성윤수는 당장 그녀에게 연락하라고 강요했었다.
성필은 술김에 전화를 걸었고 취했단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었다.
그 결과, 오늘 12시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하필 12시, 점심시간…….
‘그 형이 시켜서 했던 거구나!’
성윤수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떠돌았다.
당장이라도 전화해서 원망하고 싶었지만 결국 연락하기로 한 건 성필이었다.
성필 자신의 잘못이다.
통화 목록을 한 번이라도 확인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이름만 기억하면 된다.’
“오늘의 커피 톨 사이즈 나왔습니다.”
망했다.
성필은 커피를 받고 최대한 천천히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는 순간까지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혹시 늦은 이유를 물을까 가슴 졸였으나, 그녀의 다음 말로 가슴 졸일 필요도 없어졌다.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이해해요.”
“예? 어떤……?”
“어제 술 드시고 연락하셨잖아요. 잊어버리셨죠?”
“…….”
취한 티 안 낸다고 노력하긴 개뿔이…….
전화 너머로도 느껴질 만큼 취해있던 모양이다. 애초에 술집이었으니 주변의 소음이 그대로 전해졌겠지.
‘최악이다.’
성필은 최악의 선입견을 심어준 셈이다.
만약 성필이 그녀를 정말 연습생으로 데려오길 바랐다면 진땀깨나 뺐을 것이다.
아니, 아예 무릎 꿇고 땅에 머리를 박았을지도 모른다.
“제 이름은 장하양이고요, 스무 살이에요.”
장하양은 성필이 원하던 말을 전부 해주었다.
이름, 나이.
이러니 더욱더 미안해진다.
성필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장하양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저 어차피 백수라서 일도 없어요.”
성필은 사람의 감정에 민감했다.
누군가 진심을 말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감별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장하양에게서는 정말로 성필이 늦은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단 기색이 느껴졌다.
‘천사다.’
성필은 미안하고 또 고마워서 실없이 웃기만 했다.
장하양은 그런 성필을 배려한 듯 일부러 대화의 주도권을 쥐었다.
스무 살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하고, 또한 마음이 넓었다.
“그런데 기획사 직원분이라고 하셨죠? 어제?”
“네. 가로 엔터란 곳에 있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성 대표님한테 번호 드린 게 벌써 몇 년 전이거든요. 저를 기억해주신다는 것도 신기했어요.”
“저도 그 말 듣고 놀랐습니다. 몇 년 전에 만난 사람까지 기억하는 게 쉽지가 않거든요.”
“정말요.”
“그런데 혹시, 데비리너스에서 일하시지 않으세요?”
장하양은 살짝 놀란 눈으로 수긍했다.
“기억하고 계셨네요.”
“그럼 하양 씨도 저 기억하고 계셨던 거예요?”
“네. 전화로 목소리 들었을 때부터요. 그때 카페에서 엄청 크게 ‘죄송합니다!’라고 소리치셨잖아요.”
리카가 큰소리 냈던 것을 대신 사과했던 때다.
“그때 티슈 가져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고맙긴요.”
“제가 다른 사람들한테 기억될 얼굴도 아닌데, 이렇게 기억해주시고 또다시 만난 게 참 신기하네요.”
“저도요. 근데 오늘 저는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
“제가 말씀 안 드렸나요?”
“네. 그냥 전화해서 약속만 잡으셨어요. 기획사 분이라고 하면서요.”
성필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몹쓸 짓을 많이도 했다.
장하양은 무엇이 재밌는지 실실 웃었다.
원래 웃음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제가 왜 하양 씨를 보자고 했냐면요, 참. 이걸 제일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장하양이 아이돌 연습생으로서 어떠한지 보기 위함이다.
하지만 막상 장하양을 보니 용건을 꺼내기 어려웠다.
‘배우상이다.’
배우든 아이돌이든 예쁜데 무슨 상(相)이냐?
실제로 보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흔히 주역을 차지하는 젊은 여배우들은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아이돌을 하기엔 무겁다고 해야 하나.
화면에 튀지 않고 잘 녹아드는…… 성필로선 잘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 있다.
‘그런데 목소리가 좀 옥에 티네.’
전화로 들었을 때도 생각했지만 장하양의 목소리는 보통 여자에 비해 굵었다.
가볍고 날카롭다기보다 무겁고 울린다.
배우로 나선다면 이미지를 맞추기 쉽지 않으리라. 외모를 목소리에 적합하도록 전략을 짜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돌 노래를 부를 때도 썩 좋진 않을 텐데. 귀에 꽂히는 타입이 아니야. 래퍼라면 괜찮겠다.’
아이돌로서 적합한지는 긴가민가했다.
성필은 확신을 갖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합격.’
회사로 데려가서 테스트를 받아보면 느낌이 더 확실히 올 것이다.
“저희 가로 엔터가 걸그룹을 준비하거든요. 그래서 연습생을 찾고 있어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간단하게 테스트라도 받아보실 수 있으실까요?”
장하양이 눈을 크게 떴다.
곧이어 큰 웃음이 터졌다.
장하양은 눈물까지 찔끔대며 시원하게 웃었다.
“제가 뭐 웃긴 말이라도……?”
그녀는 간신히 웃음을 갈무리했다.
“아이돌이요? 저는 그런 거 못 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아이돌은 대한민국의 얼굴 반반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보는 게 아닌가?
“아이돌이면 그런 거잖아요. 막 경쟁하고 떨어뜨리고. 누구 위에 서고. 어휴, 못 해요.”
아이돌 연습생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순위 경쟁에서 밀린 아이들의 눈물은 시청자의 가슴을 울리기 충분했다.
왜냐? 불쌍하니까.
장하양은 자신도 그런 꼴이 되길 바라지 않는 거겠지.
충분히 이해할 이유였다.
“만약, 정말 만약인데, 저야 재능도 없겠지만, 아하하! 진짜 만약이에요? 제가 데뷔하면 저 때문에 떨어지는 애들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자리에 어떻게 있어요.”
성필의 예상이 틀렸다.
가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장하양은 자신이 떨어지는 것보다 남을 떨어뜨리는 것을 더 걱정했다.
즉각적으로 답이 나왔으니, 준비한 게 아니라면 저게 진심일 것이다.
“저는 경쟁 같은 건…….”
갑자기 웃음으로 가득했던 장하양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빈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경쟁 같은 건 성미에 안 맞아요.”
“가로 엔터에는 연습생 경쟁이 없습니다. 데뷔할 인원만 한 명씩 뽑고 있거든요.”
“제가 그런 자리에 가도 돼요?”
“음.”
확답하는 건 위험하다.
장하양의 어투로 보아하니, ‘제가 아이돌에 어울리나요?’라고 묻는 듯했다.
이럴 때는 칭찬만 한 게 없다.
칭찬을 생각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칭찬할 거리가 넘쳐났으니까.
“하양 씨는 비주얼만으로도 연습생에 뽑힐 만합니다. 예쁘다는 얘기는 많이 들으셨죠?”
“아휴, 질리도록 들었죠.”
장하양이 장난스레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의 도발적으로 치켜뜬 눈빛에 성필의 마음도 쓸어 넘겨졌다.
“물론 대형 기획사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을 겁니다. 그쪽은 어릴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한 애들을 데뷔조로 뽑거든요.”
“제가 늙었다?”
“아니요!”
성필은 데자뷔를 느꼈다.
백설하 때도 비슷한 대화를 한 적 있었다.
“그보다는, 그룹 데뷔 계획이 임박했는데 멤버 구성을 고민하는 곳이라면 당장 메인으로 발탁될 수 있을 정도란 거예요.”
“아아, 그러니까 떨이로 멤버를 뽑는 곳? 그 정도면 저한테 어울리겠다?”
“아니요!”
장하양이 당황하는 성필을 보며 신나게 웃었다.
사람 놀리는 게 재밌기라도 한 것일까.
솔직히 계속 놀림 받더라도 성필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소중한 시간을 1시간 30분 가까이 허비하게 했으니까.
“그럼 가로 엔터에서는 저를 필요로 하는 거예요? 아, 질문이 이상하네. 오늘 처음 봤는데, 그쵸?”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회사로 가시면 사장님 앞에서 테스트를 받을 겁니다.”
“헥. 엄청나게 긴장되겠네요. 제가 잘할 거 같지도 않고.”
“제가 하양 씨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아이돌을 하셔도 잘하실 거 같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씀해주시는데 좋은 대답 못 드려서 죄송해요.”
갑자기 거절?
“사실 제가 배우 지망생? 헤, 부끄럽네. 배우를 목표로 하고 있거든요.”
그러리라고 생각하긴 했다.
성윤수가 번호를 받아 갈 사람이니 당연히 배우로 활동했겠지.
“그럼 아이돌에는 아예……?”
“으음,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구. 할 거냐 안 할 거냐고 물으면 안 한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제 목표는 배우니까요. 갑자기 바꾸는 건 무섭죠.”
장하양이 아이돌에 관심이 없단 건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그녀에게 다른 꿈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장하양이 마음에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성필도 다른 꿈이 있는 사람에게 미친놈처럼 들이대는 인간은 아니었다.
“아쉽네요. 다른 목표가 있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하양 씨가 꼭 꿈을 이루시도록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제가 텔레비전에 나오면 꼭 응원해주세요?”
장하양이 윙크했다.
성필의 심장도 그녀의 눈꺼풀과 같이 깜빡였다.
‘아이돌 되면 팬 조련 잘하시겠다.’
적어도 성필은 그녀의 팬이 될 것 같았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둘은 카페 밖으로 나섰다.
“가볼게요.”
“늦어서 죄송했습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된다니까요.”
성필은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고민했다.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생각을 뱉었다.
“혹시라도 관심 생기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이게 현재 성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어프로치였다.
질척대는 느낌도 들었지만, 다행히 장하양은 웃으면서 받아주었다.
“네. 그럴게요.”
장하양은 경쾌하게 대답하곤 등을 돌렸다.
* * *
“갑자기 어디 가셨던 겁니까?”
“연습생 후보로 소개받은 사람이 있어서요. 깜빡하고 약속을 잊어버렸어요.”
“저런. 화내지 않으셨습니까?”
“화는…… 냈던가. 안 냈던 거 같아요.”
“마음씨가 좋으신 분이군요.”
경쟁 같은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그렇게 말했던 장하양의 씁쓸한 얼굴이 뇌리를 떠돈다.
“그분은 어땠어요?”
휴게실에 물을 가지러 왔던 백설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성필은 그녀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응시가 이어지자 백설하는 당황하며 눈을 피했다.
“설하 씨. 사람 시선을 그렇게 피하시면 무대에서는 어쩌려고 그러세요.”
“무, 무대에서는 잘할 거예요……. 그래서 그분은 어땠냐니까요.”
‘배우상인 사람이었다’라고 말하려니, 왠지 백설하가 떠올라서 그녀를 바라봤던 것이다.
성필은 처음 백설하를 보았을 때 ‘아나운서 같다’고 생각했다.
당장 하얀 와이셔츠 차림으로 데스크에 앉아 뉴스를 전해야 할 것만 같은 외모였다.
그만큼 정갈하고 깔끔해 보인다는 거였는데…….
‘정하양은 오히려 뭐랄까…….’
그래!
“사장님 같은 분이셨어요.”
“사장님이랑 닮으셨어요?”
“분위기가요. 뭔가 드라마에 자주 그런 캐릭터 나오잖아요. 젊은데 회사 상무나 전무 같은 캐릭터요.”
“아아, 재벌.”
“그분은 개인 집무실 같은 곳에서 검은 정장 빼입고 앉아 계실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백설하가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비유를 되게 재밌게 드시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박 이사님이 이렇게 사람을 표현하시는 건 처음 봅니다. 설하 씨 때는 눈에 비유했는데 말입니다.”
“그, 그만 하세요. 그때 일은 말하지 마요…….”
부끄러워해야 할 건 성필인데 정작 백설하가 얼굴을 붉혔다.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라도 된 것일까.
‘하긴. 나라도 누가 백주대낮에 거리에서 그런 말 쏟아내면 창피해서 도망가겠다.’
백설하는 용케도 버텨주었다.
고맙기 그지없는 인연이다.
“그런데 제 설명이 특이했나요?”
“예. 리카 씨 때는 ‘옆에서 돌봐주고 싶은 아이다.’라고 하셨고. 설하 씨 때는 ‘제가 반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아아! 아! 됐어요! 그만 해요!”
“그리고 아라 씨한테는 ‘띠꺼운 애’라고 하셨고요.”
“그건 그나마 낫네요.”
“박 이사님은 세 분에 관해 말할 때는 다른 사람에 비유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필은 희미하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전생에서 성필은 배우도 여럿 맡았었다.
바로 옆에서 보필하진 않았어도, 총괄 매니저로서 여러 방면에 관여했다.
당연히 신인 배우를 뽑는 데도 입김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성필은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쟤는 ◯◯ 느낌 난다. 그치?’
항상 성필은 배우를 다른 배우, 혹은 사람에게 비유했다.
성필이 느끼기에 장하양은 배우와 더 가까운 인간이었다.
그래서 장하양을 설명할 때 자연스레 다른 사람과 비유한 것이다.
“그럼 그 만났다던 분이랑은 어떻게 됐습니까. 테스트받으러 오십니까?”
성필이 고개를 저었다.
“배우가 꿈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분한테 계속 권해드리긴 뭐하죠.”
“저 때는 싫다고 해도 계속 권유하셨지 않으셨어요?”
“설하 씨는 놓치기 싫었으니까요.”
백설하는 성필의 무심한 대답에 숨을 헛 삼켰다.
“그런데 그분은 설하 씨만큼은 아니었어요.”
“…….”
“아, 물론 제 개인적인 직감이에요. 원래부터 아이돌을 꿈꾸시던 분도 아니었으니까요. 계속 들이대긴 뭐하죠.”
“…….”
“그런데 안 올라가 보셔도 괜찮으세요? 10분 지났는데?”
“네? 그, 그렇네요. 올라가 볼게요.”
“연습 힘내세요.”
백설하가 계단을 급하게 올라갔다.
* * *
[……괜찮지?]
“아니요.”
[야! 내가 네 부탁받고 친히 아는 애까지 소개해줬는데 이럴 거야?!]
“아는 애? 몇 년 전에 마주치고 한 번도 못 본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걔 별로였어? 아니잖아!]
“…….”
장하양은 확실히 매력적인 인재였다.
다만 성필의 마음에 확 꽂히는 건 아니었고, 장하양이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었다.
성윤수도 성필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아니이, 그건 아닌데요…….”
[그럼 나한테 빚진 거지. 한번 가줘.]
“제 회사에는 배우도 없다고요!”
[그게 중요하냐? 네가 기획사 관계자라는 게 중요하지. 이사 직함까지 달고 있다면서? 이야! 우리 성필이 다 컸다 야!]
성필이 이를 갈았다.
몇 번이나 성윤수에게 반박할 말을 찾았으나, 곧 그만두었다.
반박해봤자 성윤수는 그만두지 않을 테니까.
“진짜 오랜만에 연락 왔다고 끝까지 부려 먹으려고 하네. 알겠어요.”
[사랑한다 박성필! 박 이사! 이사 박성필!]
부끄러워 죽겠네.
이사란 직함을 바꿔 달라고 하든가 해야지.
“극장 이름이나 말해줘요.”
성윤수의 아는 사람이 연기 학원 관계자라고 한다.
그 학원은 한 달에 한 번 직영 극장에서 수강생들이 공연을 펼치게 한다.
그때마다 대학교수나 매니지먼트 관계자들을 부른다는 모양이다.
학원의 가치와 위신을 높이기 위해서다.
‘우리 학원이 준비하는 연극에는 이런 사람들도 옵니다!’라며 홍보하는 것이다.
[고맙다. 그럼 말해둘게?]
전화를 끊자 골이 지끈거렸다.
‘안 그래도 연습생 찾느라 바쁜데.’
진척이 없긴 해도, 근무 시간을 빼고 참여해야 하는 것이라 부담이 됐다.
성필은 당일 홍규헌에게 양해를 구한 뒤 극장으로 향했다.
극장의 관객석에는 소수의 인원이 있었다. 아는 얼굴도 없는 터라 적당히 떨어져 앉았다.
“성윤수 대표님 쪽 분이시죠?”
학원 관계자가 연극 팜플렛을 주었다.
성필은 팜플렛을 꼼꼼히 읽었다.
“잉?”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여자친구3 역(役), 장하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