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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8화 (28/760)

#028화

리카는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하단 것도 잊어버렸는지 소리를 빽빽 질렀다.

시선이 모이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침묵에 잠긴 카페 안, 성필도 그 흐름에 따르기라도 하듯 입을 다물었다.

‘내가 리카를…….’

차별했던가?

본인이 그렇게 느꼈다는데 성필이 뭐라 할 말은 없었다.

리카가 했던 말을 하나하나 따져보니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성필은 일어나서 카페 여기저기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모였던 시선이 조금이나마 분산됐다.

다시 자리에 앉아 리카를 보았다.

‘내가 리카를 만나는 시간이 많진 않잖아.’

학원에 데려다주거나 픽업할 때를 제외하곤 이야기를 나눌 시간 자체가 없다.

리카는 차에 있을 때마다 조수석에 앉아 주절주절 떠들곤 했다. 성필은 그녀에게 대충 떠오르는 대답을 던졌었다.

운전에 집중해야 하기도 하고, 리카와는 대화 코드 자체가 달라서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었다.

‘내가 뭔가 더 챙겨줄 게 있었나?’

성필은 오전·오후 대부분을 연습생 탐색에 할애한다.

챙겨주고 싶어도 기회가 그다지 없다.

그나마 백설하에게는 없는 시간도 만들어 찾아가긴 했다. 그리고 조아라는 단기 트레이닝 기간 때 신경을 더 많이 써주었다.

‘리카 눈에는 차별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구나.’

이시카와 리카.

18세.

고향을 떠나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온 당찬 아이다.

아마 강을 등지고 서 있는 기분이지 않을까.

집에 돌아가면 반겨주는 건 싸늘한 방.

같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위로해줄 가족도 없다. 그녀에게 가로 엔터는 집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리카.”

“…….”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몰랐어. 미안.”

리카는 화난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성필의 사과 한 번에 바로 무너져버렸다.

그녀는 훌쩍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가로 엔터는 이제 와선 리카의 집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리카를 가로 엔터로 데려온 사람은 성필이었다.

성필은 온갖 감언이설로 리카를 끌어들였다.

고맙게도 리카는 그 말만을 믿고, 성필을 믿고 가로 엔터로 와주었다.

회사에서 리카가 가장 믿고 의지하고 싶은 인물은 성필이었다.

그런 성필이 다른 멤버들에게 더 정성을 쏟는 듯이 보였으니, 얼마나 무섭고도 쓸쓸했겠는가.

성필은 리카의 멘탈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히잉…….”

리카가 참지 못하고 울었다.

성필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정신을 차릴 정도로 강하게, 그리고 따스하게 두드려줬다.

“너 차별한 거 아냐. 내가 왜 그러겠어?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어…….”

또 뭐였더라.

성필은 몇 개월 전 그녀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내려고 노력했다.

“아이돌이 되려고 태어난……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잖아. 리카는. 그런데 내가 너를 왜 차별해. 적당히 데려와? 내가 지금까지 누구 적당히 데려오는 거 본 적 있어?”

“……진짜요?”

“응. 나 거짓말 최대한 안 해. 내가 너 2년 넘게 기억하고 있었던 거 잊었어? 가로 엔터 들어와서 아이돌 만들기로 했을 때도 너부터 생각났어. 그래서 첫 번째로 데려왔잖아. 애정이 더 있지, 아무렴.”

“진짜? 진짜요?”

“내심 네가 KS 엔터 나오기만 빌었어.”

“한라봉 에이드 사주세요.”

“그건 안 돼.”

“크흐흨.”

리카는 빠르게 울음기를 지웠다.

“속상한 거 있으면 빨리 말하지. 앞으로는 힘든 거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 들어줄게.”

“싫은 말 하면 저 싫어하실 거 같아서요.”

“원래 매니저들은 한탄도 들어주고 그러는 거야. 그러려고 월급 받…… 아니다. 돈 안 받아도 리카 말이면 들어주지.”

“죄송해요.”

“아냐.”

“오늘 그거, 셋이서 카메라 앞에 섰잖아요. 그거 하니까 좀 북받치는 게 있었나 봐요.”

리카는 KS 엔터에서 1년 6개월을 있었다.

경쟁, 경쟁, 또 경쟁.

회사에 또래 아이들은 많지만 친구는 없다.

서로가 서로를 경쟁자라 생각하기에 진심으로 마음을 여는 사람도 없다.

연습생 생활은 사람을 앞만 보게 만든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고 선생님에게 보살핌을 받아야 할 시기에, 싸늘한 벌판을 홀로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죄송해요.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던 거 같네요.”

오늘 리카는 가로 엔터에서 처음으로 경쟁적인 상황과 마주했다.

경쟁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그저 카메라 앞에 서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아마도 전 기획사에서 있었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으리라.

“오, 리카. 북 치고 장구 친다는 말도 알아? 똑똑하네.”

“맞아요. 저는 똑똑해요!”

“센터 서고 싶어?”

“당연하죠! 이사님 말씀처럼 저는 누구보다 빛날 거니까요! 그래도, 설하 쌤이 더 잘 어울리긴 해요.”

성필은 무뚝뚝한 손짓으로 리카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네가 몇cm만 더 컸어도 설하 씨랑 좋은 승부가 됐을 텐데.”

“저 4개월 만에 3cm 자랐어요.”

“아무리 중앙에 서고 싶어도 거짓말은 하면 안 돼.”

“진짠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자라냐. 이제 성장판도 다 닫혔을 텐데. 리카는 키 작아도 돼. 작아도 세상에서 제일 예쁘잖아.”

“제 키 평균보다 큰 편인데요.”

리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눈물을 닦기 위해서였다.

“아타시(저), 이사님만 보고 여기 온 거예요. 더 소중히 대해줘요.”

“알겠어.”

“다른 연습생들 들어와도 저한테 소홀해지면 안 돼요.”

“알겠…….”

테이블에 그림자가 졌다.

직원이 티슈를 몇 장 가져온 것이다.

아까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았던 배우상 직원이다.

성필은 고맙단 뜻으로 고개를 꾸벅하고 티슈를 받았다. 그는 카운터로 돌아가는 직원을 쭉 바라보았다.

공상에서 깨어나고, 다시 리카를 보자 그녀는 또 뿔이 난 표정이었다.

“알긴 퍽이나 아시겠어요.”

“……리카 퍽이란 말도 알아? 똑똑하네.”

“티슈나 내놔요.”

오랜만에 리카와 외식을 했다.

결국 그녀의 투정에 져버린 것이다.

칼로리가 걱정됐지만, 행복한 얼굴로 젓가락을 놀리는 리카를 보니 성필도 기분이 좋아졌다.

* * *

[성필아 걔는 만나 봤어? 어때, 괜찮지? 잘 됐으면 오늘 술이나 사라. 안 됐어도 사고.]

“……형, 하루 지났는데 제가 만나 봤겠어요?”

[빨리 연락 안 하고 뭐 했어! 너 그거 근무 태만 아니냐?]

“오늘 하려고 했어요. 그리고 내일도 일하는데 오늘 술 먹긴 힘들어요.”

성윤수는 엄청난 술고래다.

혼자서 먹으면 상관없다. 그런데 그는 꼭 타인에게 같이 마시기를 권한다.

죽자는 마음으로 달리면 재밌지만, 다음 날 일이 있다면 그와의 술자리는 지옥이나 다름없다.

[오늘 너랑 술 마시려고 저녁 비워뒀는데 난 어쩌라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럼 내가 살 테니까 나와라.]

“돌겠네 진짜.”

성필은 온종일 무거운 마음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저녁이 되면 그의 페이스에 말려 진탕 술을 마실 게 분명했기에.

결국 피할 수 없는 저녁이 찾아왔다.

“야! 여기!”

곱창집에 들어가니 그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호탕한 건 여전했다.

“형님. 못 본 새에 배가 더 부르셨습니다. 술 좀 그만 드시죠?”

“내 나이 되니까 낙이 없어. 술밖엔.”

“회사도 있잖아요.”

“몰라 임마. 나 없어도 회사 잘 돌아가.”

성필은 익숙하게 곱창을 구웠다.

첫 번째 놈이 다 익기도 전에 잔이 세 번이나 돌았다.

“요즘 남 교수랑은 연락해?”

남 교수.

그가 방송 연예 관련 서적을 쓸 때 성필이 도움을 주었다.

그의 책 덕분에 한구인이 성필에게 연락을 했으니, 가로 엔터와 이어준 은인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명절이랑 생신 때 문자 드리는 정도요. 명절에는 가벼운 선물이라도 보내고 그러네요.”

“나한테도 안 보내면서?”

“그분이 먼저 보내세요. 받고 깜짝 놀랐어요.”

“너한테 그럴 이유가 있어?”

모른다.

그냥 사람 챙기기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성필도 중요한 업계 관계자들을 빼곤 명절 선물 같은 건 보내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남 교수가 특이한 게 분명했다.

“아무튼 오랜만이다. 우리 자주 얼굴 좀 보자.”

성윤수는 성필이 꼬꼬마 매니저였을 때엔 중견 매니저였다.

자금만 있으면 기획사를 세울 수도 있는 인물이었고, 정말 그렇게 했다.

현재는 모델 에이전시를 원활하게 운영하고 있다.

“저도 바빠서요.”

“튕기기는.”

“진짠데.”

소주병이 늘어나자 성윤수는 목소리가 커지고 웃음도 많아졌다.

“그래서 있잖아. 으잉? 내가? 고연주가 알바하는 카페에, 으잉? 떠억 하고 며칠을 버텼다 이 말이야.”

“진짜 이 얘기 백 번도 더 들었어요.”

“그래? 그럼 또 들어라.”

“뒷얘기 다 안다고요. 정성에 감동한 고연주 배우님이 형네 기획사 갔고, 드라마 오디션 팍 붙고, 팍 떴다고요.”

술만 마시면 나오는 18번 레퍼토리다.

성필은 그의 다음 행동도 이미 알고 있었다.

성윤수는 갑자기 침울해지더니 자신의 잔에 스스로 술을 부었다.

“고연주 내가 키웠다고…….”

고연주는 스타급으로 성장하여 현재는 대형 배우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되어 있다.

성윤수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녀를 보면 기뻐하면서도 씁쓸해했다.

“성필아.”

“예, 형.”

“매니저 인생이란 게 사람이 많이 스쳐 가기 마련이지만. 웬만하면 사람은 끝까지 안고 있어라. 여기저기 붙어 다니는 거 별로야. 회사도 옮기는 건 최대한 삼가고.”

“알아요.”

“아는 애가 원래 다니던 기획사를 나와?”

“그건 사정이 있다고요.”

둘은 차가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곤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성필은 기억을 통째로 잃었다.

* * *

“……님!”

피곤하다.

눈이 떠지지 않는다.

하지만 감각은 돌아온다.

까슬까슬한 소파의 촉감이 뺨에 느껴진다.

잠을 잘못 잤는지 목이 아프다.

“……사님!”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신경을 거스른다.

더 자고 싶은데.

“이사님!”

눈을 번쩍 떴다.

리카가 안절부절못하면서 성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눈만이 아닌 정신마저 번쩍 떠졌다.

왜 일어나니까 리카가 보이는 거지?

“므, 므에, 머야. 왜 네가…….”

“곧 사장님 출근하실 거예요! 이러다가 혼나면 어떡해요! 빨리 일어나서 씻고 준비해요!”

“으엉?”

“하야쿠(빨리)!”

리카가 억지로 성필을 일으켰다.

그녀가 밀치는 대로 걸으니 나른했던 몸이 점점 깨어났다.

“뭔데. 내가 왜 회사에서 자고 있는데.”

“여기가 집 같나 보죠 뭐! 빨리 걸어요! 회사 건물을 취침 용도로 쓰면 세무서에서 잡으러 온다구요!”

성필은 2층의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건물 입구가 열리고 홍규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싸한 냄새 뭐야. 술?”

“모, 모모, 모르겠는뎁쇼!”

“…….”

성필은 리카에게 감사하며 10분도 안 되어 샤워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홍규헌이 소파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녀는 코를 찡그리며 성필을 보았다.

“박 이사.”

“……예.”

“여기서 자면 안 된다니까. 혹시 변명 있으면 해.”

“없습니다. 그, 그나마 업계 분이랑 술 마신 게 변명이라면 변명일까요.”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 회사가 아무리 집처럼 편해도 그렇지.”

“죄송합니다.”

홍규헌은 별다른 말 없이 사장실로 올라갔다.

성필과 리카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리카 땡큐. 소파에서 자는 모습 보였으면 부끄러워서 죽었을 거야.”

“한라봉 에이드.”

“안 돼.”

“진짜 세상 사람들이 다 이사님 같았으면 범죄는 없었을 거예요. 무단으로 회사에서 자는 거 빼고요.”

리카는 아쉽단 듯이 말하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이틀 전, 리카가 속내를 고백하고 나서 묘하게 더 자주 웃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백설하도 출근했다.

조아라는 학교 때문에 점심이 지나고 기획사에 온다.

그전까지 둘은 자체적으로 연습했다.

“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

가로 엔터의 익숙한 점심 풍경.

성필, 홍규헌, 한구인이 저마다의 자리에 앉아 배달 어플을 살폈다.

“분식 어때요. 싸고 양도 많아요.”

“음, 싸다는 게 마음에 드네.”

“저는 냉면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픈 서비스로 석쇠 구이를 주는 곳이 있습니다. 배달팁도 없고요.”

“음, 석쇠 구이가 서비스라.”

“어떻게 할까요?”

“분식.”

한구인이 시무룩해졌다.

점심시간이라 주문이 밀렸는지 한 시간도 넘어서야 배달이 왔다.

음식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성필의 뒤엔 리카와 조아라가 달려 있었다.

“맛만 볼게요 진짜.”

“나는 순대 하나만 먹을게요.”

“안 된다니까. 괜히 한 입 먹었다가 의지가 무뎌지면 어쩌려고?”

“아아앙! 진짜 한 입만 먹을게요! 먹게 해줘요! 1층에 떡볶이 냄새 다 풍겨놓고 너무해요!”

“한 이사님이 정성 들여 만들어주신 영양밥 있잖아. 그거 한 그릇이 우리가 시킨 것보다 더 비싸겠다.”

“고기가 없잖아요!”

“리카 씨. 영양 밸런스는 완벽하게 맞춰둔 겁니다.”

“고기가 없어요!”

“…….”

홍규헌은 애원하는 리카와 조아라를 보더니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박 이사. 그냥 그릇 하나에 조금씩 담아줘.”

“괜찮습니까?”

“오늘만이야.”

리카는 삼보일배라도 할 기세로 감사를 표했고, 조아라는 기뻐하긴 해도 리카만큼은 아니었다.

아마도 조아라는 집에 가면 그다지 식단을 지키지 않는 듯했다.

평소에도 맛있는 것을 자주 먹으니 리카 정도로 절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사장님.”

“왜.”

“애들한테 운동이랑 식단 관리는 쭉 시키고 있잖아요.”

“그렇지.”

“근데 어차피 멤버 다 모이면 짐(Gym)에 보낼 텐데, 지금 조금은 풀어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한번 무너지면 팍 무너져. 내가 봐서 그러는 거야. 박 이사도 리카가 애걸복걸한다고 너무 무르게 나가진 마. 내가 이렇게 말 안 해도 박 이사가 잘 지키겠지만.”

성필은 이틀 전에 리카를 데리고 외식을 했었다.

홍규헌에게 죄책감이 들어서 성필은 묵묵히 젓가락만 놀렸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을 학원에 데려다줘야 하는 시간이 왔다.

‘30분까지니까 조금 여유가 있네.’

성필은 흡연을 하기 위해 건물을 빠져나왔다.

웬만하면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만 담배를 피운다.

연습생에게 흡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는 길에 냄새를 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람이 없는 골목에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마땅히 올 곳이 없었기에 ‘누구지?’하는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박성필 이사님?]

모르는 번호.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그런데도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성필이 미간을 좁히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고 했다.

“네, 맞는데요.”

[아…….]

당황과 어이없음이 절반 정도 섞인 목소리다.

성필은 전후 사정을 모르고도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언제쯤 오세요?]

언제쯤 오냐니.

약속이라도 잡은 건가?

성필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담배를 다시 갑 안에 넣었다.

“잠시만요.”

기억해라.

기억해내라.

약속을 잡아놓고 모른다고 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행동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기억해내야 한다.

‘뭔가, 뭔가가 있는데.’

죽어라 머리를 굴리니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어지러이 움직였다.

[이사님?]

불행하게도 기억나는 게 전혀 없었다.

성필은 무례를 무릅쓰고 물었다.

“죄송한데, 약속 장소가 어디였죠?”

침묵, 그리고 한숨.

다행히 그녀는 장소를 말해주었다.

[바쁜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네? 어…….”

[1시간 늦으셨는데.]

성필은 회사에 대어둔 차를 향해 달렸다.

“지금 당장 갑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핸드폰을 살폈다.

밤 10시 04분, 모르는 연락처로 발신한 기록이 있었다.

그리고 방금 통화도 똑같은 번호였다.

성필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메모장을 펴보았다. 그러자 지금은 익숙해진 번호가 보였다.

‘윤수 형한테 소개받은 사람 번호다!’

놀라워할 시간도 없었다.

약속 시각에 무려 1시간 30분 가까이 늦은 성필은 최대한 속도를 내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성필은 헐레벌떡 카페로 들어갔다.

식후 커피를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가득한 카페 안, 성필의 눈이 어느 한 사람에게 박혔다.

그녀밖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 카페 직원?’

리카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던 날, 눈물을 닦으라며 티슈를 가져다줬던 직원이다.

워낙 외모가 출중한 사람이라 단숨에 기억났다.

성필은 핸드폰으로 약속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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