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화
두 사람은 웃음으로 가면이라도 만든 것인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가지 않고 대화했다.
주절주절, 뭐라뭐라.
“그쵸?”
조아라는 생각이 다른 곳에 팔려있던 터라, 백설하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알 수 없었다.
“뭐가요.”
하지만, 내용이 무엇인지는 관계없이 조아라의 말투에 날이 섰다.
그 대답에 백설하는 살짝 당황했다.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구나, 조금 자책하면서 다시 설명했다.
“아라 님은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어.”
“……아뇨. 좀. 급식으로 뭐 먹었나 생각하느라.”
“너 오늘부터 스케줄에 두 개 더 추가될 거야.”
“네?”
그 말마저 넘길 수는 없었다.
현재도 스케줄을 따라가는 게 힘든데, 여기서 또 추가된다고?
“한 이사님이 영어 가르쳐주실 거야. 가로 엔터의 목적은 세계적인 스타를 배출하는 거거든. 외국어 두세 개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요.”
“그렇게 됐다. 리카도 벌써 2개 국어 구사할 수 있어. 곧 유창해질 영어까지 합치면 3개 국어.”
I Can Speak English가 유창한 것이라면 말이다.
“아라도 세계화 정세에 발맞춰서 외국어를 배워야지. 참고로 영어 등급은 얼마나 돼?”
“…….”
조아라는 백설하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어떤 의미의 시선인지 깨닫지 못하고 큰 눈망울을 깜빡이기만 했다.
성필이 그 기색을 알아채곤 조아라와 잠시 구석으로 갔다.
조아라가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8등급이요.”
부끄럽다.
공부를 못 한다는 게 이렇게 부끄러운 적은 처음이다.
부모님한테는 ‘나 대학 안 간다고!’라고 말하던 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렇지, 성적이 낮단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려니 창피했다.
심지어 성필에게.
“음.”
역시, 성필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수록 조아라는 쥐구멍이 절실했다.
아니, 이럴 때는 더 당당하게 나가야겠지.
‘뭐요’라며 반항적인 기운을 보이려 할 때, 먼저 성필이 물어왔다.
“알파벳은 알아?”
“……사람을 뭘로 보고.”
“발음 기호는?”
“‘A’가 ‘아’고 그런 거요?”
“응. 읽을 줄 알아?”
“네. 익숙하진 않지만.”
“그럼 됐네!”
성필이 격려하듯 조아라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리카도 1년 좀 안 돼서 한국어 회화 가능하게 됐대. 너도 리카처럼 빨리 습득할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리카도 이제 막 영어 공부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라서, 둘이 여러모로 도와주면 더 빨리 늘 거야.”
“아까는 리카가 곧 유창하게 영어로 말할 거라면서요.”
“그랬나?”
“빈말하지 마요. 나도 내가 공부 못하는 거 알아요.”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한 거겠지. 부끄러운 거 아니야.”
100% 빈말이다.
자신감을 주기 위해 아무런 말이나 해대는 것이겠지만. 그건 알고 있지만…….
조아라는 그 격려에 살짝 기운이 났다.
조금은 영어를 배울 용기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저, 저도 영어 배워야 하나요?”
“네. 물론이죠. 설하 씨도 배우셔야 해요.”
“으.”
“시험도 있어요.”
“으으…….”
백설하가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보자 조아라는 갑자기 영어에 엄청난 열의가 생겨났다.
‘저 사람보다는 잘할 거야.’
왜냐.
조아라의 목적은 성필의 콧대를 꺾는 것이니까.
얼마나 잘난 사람이기에 성필이 저토록 싸고도는지 모르겠지만, 결국엔 조아라 자신이 이길 것이다.
‘단기 트레이닝 끝날 때까지는 이 회사의 연습생들 다 씹어먹을 거야.’
단기 트레이닝 종료까지 24일.
반드시 모든 스케줄을 소화해내리라.
“그리고 다음은, 설하 씨한테 보컬 트레이닝 받는 거야.”
“잘 부탁해요.”
무릎 꿇은 채 비는 성필을 상상하고 있던 조아라는 깜짝 놀랐다.
“설하, 아, 백설하 님…… 한테요?”
“응. 유명 학원에서 보컬 트레이너 하시다가 오셨어. 잘 가르쳐주실 거야.”
“이, 임시밖에 못 됐어요.”
“그거나 그거나. 잘 가르치시는 건 맞잖아요. 노래도 잘 부르시고.”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둘.
거기다 백설하가 트레이너였단 말을 들으니, 조아라는 뭔가 패배한 기분이었다.
* * *
한구인의 영어교실.
원래 수강생은 리카 혼자였다.
그런데 백설하와 조아라의 합류로 셋이 됐다.
한구인은 부담감을 느끼기보다 열정이 더 넘쳤다.
반드시 이 셋을 영어 숙달자로 만들리라 다짐했다.
“오늘부터 이 교실 안에서는 영어만 써주셔야겠습니다.”
그 계획은 하루 만에 깨졌다.
다들 수업 시간 동안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처음부터 회화가 가능한 사람은 아무도 없죠. 자신감은 단어와 문법으로부터 나옵니다. 해석부터 해보죠.”
일단은 중학교 수준부터 시작했다.
한구인은 간단한 문제로 백설하와 조아라의 선행지식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해석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john is a lovely little young boy who lives next door.
백설하는 드문드문 말했다.
“존은…….”
“좋습니다.”
“사랑스러운, 작은, 어린 남자.”
“잘하고 계십니다.”
“누가 옆문에 산다……?”
“……아, 어, 네.”
수준, 중학생 이하.
초등학교 이후 영어에서 손을 뗀 수준이다.
한구인은 남몰래 웃고 있는 조아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절대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따뜻한 미소를 지었으나, 그의 시선을 받은 조아라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존은…….”
“좋습니다.”
“하나의 사랑스러운 작고 젊은……?”
“아, 네.”
“누가 옆집에 살고 있는지……?”
“…….”
한구인은 준비했던 모든 자료를 파기했다.
대신 완전히 새로운 교육을 준비했다.
“노래로 배웁시다. 어찌 보면 여러분들이 영어를 배우는 일차적 목적은 노래를 부를 때 영어 가사를 더 잘 읽기 위함이기도 하니까요.”
이건 꽤 효과가 있었다.
리카와 백설하는 노래를 부르는 게 익숙해서 그런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잘 따라불렀다.
외우는 속도도 빨랐다.
문제는 조아라였다.
“아라 씨.”
한구인이 따스하고 자비로운 투로 그녀를 불렀다. 혹시라도 지적하는 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금만 더 목소리를 크게 해주시겠습니까?”
“초, 초콜릿 칩, 스무디, 아이스 앤 콜드…….”
일단 조아라는 사람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창피해했다.
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한구인은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리고 조아라와 백설하가 참여한 영어교실이 4일째 되던 날.
“제가 참관해도 되나요?”
성필이 수업 참관을 요청했다. 한구인이 거절할 명분이나 이유는 없었다.
흔쾌히 수락하고 수업을 진행했다.
“오늘은 비틀즈의 I Wanna hold your hand를 외우고 불러보겠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수업 풍경.
리카는 프린트물 표지에 있는 비틀즈 멤버들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백설하는 가사를 눈으로 한번 훑어보았다.
조아라는 뒷자리에 있는 성필을 흘깃거렸다.
‘왜 참관 같은 걸 하는 거야 진짜…….’
조아라의 계획은 단기 트레이닝의 마지막, 즉 테스트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 영어교실에서 가장 못 하는 건 조아라 자신이었다.
이런 모습은 성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설하 씨는 언제나처럼 발음이 좋으시네요.”
“아니에요. 미국 회사에 다니신 한 이사님에 비하면…….”
“겸손하시군요.”
백설하는 팝송을 꽤 불러보기도 했고, 한국 노래의 영어 가사를 잘 발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당연히 발음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외우는 것도 빨라서, 몇 번 부르면 가사도 안 보고 완창할 수 있었다.
비록 문법을 몰라도 이 정도면 이후의 교육이 매우 수월해진다.
“아이 워너 홀드 유어 한드.”
리카는 발음이 문제였다.
전 기획사에 있으면서 교정을 받았으나 아직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일본어가 모국어라 받침 발음이 힘든 것이다.
그런데도 부끄러움 없이 잘 불렀다.
“리카 씨는 점점 나아지십니다. 가사도 가장 빨리 외우시네요.”
“에헤헤.”
리카는 한구인의 칭찬에 순진무구한 웃음을 보였다.
다음 차례는 조아라였다.
조아라는 침을 꼴깍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사 프린트를 덮고 멜로디에 따라 입을 열었다.
“아이 워너 홀드 유어 핸드…….”
어떡하지.
백설하랑 비교해서 발음도 엄청 구린데.
다음 가사가 뭐였지?
아, 가사 까먹었다…….
“조금 시간을 더 드릴까요?”
반주를 끈 한구인이 부드럽게 물었다.
조아라는 입술을 살짝 물며 뒤를 보았다.
성필은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혀 깨물고 싶다…….’
* * *
조아라는 원래 있던 유 노 댄스 아카데미에 더해 다른 댄스 학원을 더 다녔다.
아이돌 퍼포먼스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곳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머리 위! 망치! 아래! 하나! 둘! 셋! 넷! 앉고!”
트레이너가 동작마다 이상한 이름을 붙이며 춤을 췄다.
연습생들은 트레이너보다 한 박자씩 늦었다.
“아라야! 표정!”
조아라는 황급히 미소를 만들었다.
춤에 열중하느라 얼굴을 신경 못 쓴 것이다.
그게 그녀의 문제였다.
시종일관 미소만 지으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 강하게! 강렬하게! 유혹하는 미소!”
심지어 미소가 다 똑같은 것도 아니었다.
조아라는 지적을 몇 번이나 받았다.
“리카 좋다!”
반면 리카는 칭찬만 받았다.
조아라가 보기에도 리카는 대단했다.
몸의 동작과 표정의 감정이 정확히 일치한다.
누구든 그녀의 춤을 아주 잠깐 눈에 담기만 한다면 단숨에 매력을 느끼리라.
조아라는 자신이 춤에서만큼은 지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아이돌 퍼포먼스는 확실히 조아라가 있던 세계와 달랐다.
“휴식!”
트레이너가 휴식을 선언하자마자 연습생들이 바닥에 퍼질러졌다.
조아라도 바닥에 누웠다가, 구석의 가방으로 가서 프린트물을 꺼내왔다.
“아이 워너 홀드 유어 핸드…….”
백설하를 떠올려본다.
그녀가 발음을 어떻게 했더라.
혀를 더 굴려볼까.
따라 해보니 그냥 느끼해지기만 했다.
조아라는 조금 절망감을 느껴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사를 외우고 발음하는 데 집중했다.
“세이 유 섬띵…….”
리카는 조아라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그마한 외로움을 삼켰다.
‘연습생 들어오면 같이 화장실도 가고 쉬는 시간에 수다도 떨고 싶었는데…….’
여전히 리카는 외롭기만 했다.
그 마음도 모르고 조아라는 팝송 가사를 외우는 데만 집중했다.
다음에는 성필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안녕하세요.”
그때 성필이 학원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트레이너가 그를 알아보고 다가갔다.
둘은 무어라 대화를 나누더니, 성필이 연습실의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다시 시작하자!”
트레이너가 손뼉을 쳤다.
연습생들이 한탄하며 일어서는 와중, 조아라의 눈은 거울 속의 성필에게 박혀 있었다.
“자, 아까 했던 거 쭈우욱 이어서 한다!”
곡이 흘러나왔다.
조아라는 그때 깨달았다.
‘저 아저씨 날 보고 있잖아?’
숨이 턱 막힌다.
안 되는데.
분명히 트레이너가 또…….
“아라야! 아라야! 스마일! 스마일!”
역시…….
그날, 조아라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리카와 비교하면 처참할 수준이었다.
* * *
“아아아아악!”
조아라는 회사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며 괴성을 내질렀다.
“왜! 왜! 자꾸 날 보러 오냐고!”
왜 하필 트레이너한테 지적받을 때 보러 오고. 자신도 없는 영어 수업 시간 때 보러 오고.
대체 성필은 왜 그러는가?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고 월말 평가 때 보면 안 되는 건가?
“후우, 후우.”
화가 나서 숨을 씩씩거려도 바뀌는 건 없었다.
조아라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표정을 보았다. 그냥 봐도 화가 나 있었다.
그런 표정을 미소로 바꾸었다.
어제도 퍼포먼스에서 표정을 가장 많이 지적받았다.
성필이 또 보러 올 수도 있으니, 그때까지 반드시 지적받는 일이 없도록 하리라.
‘두고 봐라 진짜. 내 실력은 그 정도가 아니라고. 팝송도 더 잘 부를 수 있어. 영어도 더 잘할 수 있어. 춤도 더 잘 춰. 보컬도. 전부 다 잘할 수 있다고. 더 잘할 수 있단 말야…….’
조아라는 거울 앞에서 미소 짓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성필이었다.
‘벌써 10시가 넘었어?’
조아라는 터덜터덜 회사를 나섰다. 성필이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뒷좌석에 앉았다.
성필이 운전석에 앉자 흐린 담배 냄새가 났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도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조아라는 그가 말을 걸까 봐 심장이 조여왔다.
‘오늘도 아저씨가 다 봤었지.’
학원에서는 트레이너에게 여러 번 지적받았다.
한구인의 영어교실은 학원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겉으로 보기에 한구인은 조아라를 부드럽게 격려해주었다.
그런데 그게 더 자존심 상했다.
배려받아야 할 정도로 수준이 떨어지는 아이처럼 보이는 것 같아서였다.
‘뭐라고 하는 거 아냐?’
조아라가 홀로 불안에 끙끙거릴 때.
“아라야.”
“므, 뭐요.”
“어른이랑 둘이 차에서 타면 조수석에 앉아야 해.”
“네?”
“조수석이 1번. 운전석 뒷자리가 2번. 조수석 뒷자리가 3번. 가장 높은 사람이 3번에 타는 거야.”
현재 조아라의 자리는 3번이었다.
그녀는 성필이 트레이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서 안심했다.
동시에 그의 지적에 괜한 반항심이 생겨서 툴툴댔다.
“뭐예요 그게. 꼰대 문화 같은 거? 지금 조수석으로 가요?”
“나랑 있을 때는 트렁크에 들어가든 뒷좌석에 눕든 상관없는데. 혹시나 다른 사람이랑 타면 그렇게 앉으란 거야.”
“네 네 알겠어요.”
“아라야.”
“왜요.”
“사람이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어.”
조아라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성필의 아무렇지도 않은 위로가 그녀의 마음을 콕콕 찔렀다.
“천천히, 네가 할 수 있을 만큼만 나가면 돼. 조급해하지 마.”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못한다고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던 조아라로서는 당황스럽고, 다행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했다.
결국 조아라는 고개를 돌리며 작게 읊조리기만 했다.
“뭐래…….”
조아라는 차에서 내릴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성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만 던지곤 아파트를 올랐다. 오늘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썼다.
타박타박, 규칙적이었던 걸음이 급속히 빨라졌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집으로 들어와 침대에 엎드렸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굴러다녔다.
“하아, 하아.”
기분이 이상하다.
조아라는 씻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불을 끄고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결국 다시 불을 켜고 가방을 열어 한구인이 준 프린트물을 꺼냈다.
‘조금만 더 하고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