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먼저, 조아라는 인정했다.
가로 엔터의 외관은 훌륭했다.
작은 기획사라기에 작은 빌딩에 세 들어 운영하는 곳인 줄 알았건만.
“저한테 연락 주실 줄 몰랐어요. 한 이사님한테 명함 받았지 않아요?”
한구인의 명함이 있긴 하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어서 빨래할 때 같이 돌려버렸다.
덕분에 같이 돌린 세탁물들에 명함 조각들이 덕지덕지 붙었다.
“걍 쌤한테 아저씨 번호 달라고 했어요.”
성필은 아저씨란 칭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띠동갑이니 아저씨란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왕이면 오빠가 좋은데.
전생에서도 조아라는 성필을 오빠라고 불렀었다.
“잠시 앉아 계세요. 음료 내올게요.”
성필이 안쪽 휴게실로 사라진 뒤, 조아라는 본격적으로 가로 엔터를 탐색했다.
1층 홀.
오직 쉬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직원 복지에 신경을 쓰나 보네.’
이 정도면 ‘작은 기획사’란 명칭은 합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입구가 경쾌하게 열리며 조아라와 같은 또래의 아이가 들어왔다.
리카였다.
“아.”
흥겹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들어왔던 리카가 단숨에 얼어버렸다.
그녀의 시선이 빠르게 조아라를 훑었다.
과하다 싶을 만큼 줄인 교복에다가 연보랏빛으로 염색한 머리.
‘갸루다!’
한국말로 일진쯤 될 것이다.
동물적인 생존 감각으로 상황 파악을 마친 리카가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안녀…….”
“아타시 칸고쿠고 데키나이노데(나 한국어 못해서)……!”
리카는 무슨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후다닥 2층으로 올라갔다.
조아라는 그게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선했다.
‘역시 기획사인가. 외국인도 다 있네.’
리카가 사라진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다시 성필이 나왔다.
“크흠. 어떻게,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먼저 들어볼까요? 아니면 제가 한 번에 설명할까요?”
“반말.”
“네?”
“그냥 반말해요. 나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시는데.”
“아하하! 제가 좀 젊어 보이긴 하죠?”
“……?”
열 살만 많다고 한 게 어딘가.
실제 차이는 12살이었다.
“그럼 반말할게. 지금부터 아이돌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줄 테니까 신중하게 생각해줘. 원래 아이돌에 관심은 없다고 했지?”
“네. 쌤이 뭐 좋은 사람…… 좋은 회사라고 하셔서 와 봤어요. 괜찮으면 해볼 수도 있고.”
반대로 설명이 마음에 안 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갈 생각이었다.
조아라는 긴장 따위 전혀 없었다.
그저 마트에서 라면 종류 고르는 느낌으로 온 것에 불과했으니까.
사실 조금 짜증도 난다.
평소 같았으면 학교를 조퇴하자마자 학원에 가서 춤을 추는 건데.
시간을 뺏긴 기분이다.
“어중간한 마음이면 포기해.”
짧은 집중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공상의 나래로 도피하고 있던 조아라의 정신이, 성필의 말 한마디에 깨어났다.
“네?”
“아이돌은 쉬운 게 아니야. 연습생 시절부터 아이돌이 돼서까지,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못 버텨.”
“…….”
“한 이사님이 널 눈여겨보셔서 이렇게 말은 한다만, 진지하지 않으면 장난치는 마음으로라도 하겠단 말은 하지 마. 시간만 낭비할 거야.”
성필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서류를 정리했다.
오늘 조아라에게 가로 엔터와 그 비전에 관해 설명해주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물론 이런 것 따위 보지 않아도 성필은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서류를 정리하는 제스처는 조아라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
이윽고 조아라가 실소를 뱉었다.
‘물었다.’
성필은 마음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회귀하기 전, 성필은 조아라와 꽤 오래 보고 살았다.
조아라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아주 작은 일에도 ‘넌 못해’란 말을 그냥 수용하지 않았다.
조금만 자존심을 긁어도 대차게 반응해오는 터라, 그녀를 대하는 법을 익히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었다.
“알겠으면 설명 시작할…….”
“아니, 힘들면 얼마나 힘들다고 겁주고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이 회사 오기 전에 기획사에서 좀 겪었거든. 아이돌 하고 싶대서 뽑았더니 트레이닝 못 따라오는 애들 많아.”
“나도 그럴 거라고요?”
“아니. 그럴 수도 있단 거지. 아이돌이 꿈이라는 애들도 버거워하는데, 아닌 애들은……. 네가 꼭 그렇단 건 아니고.”
조아라가 부루퉁해져선 성필을 노려보았다.
성필은 그 눈빛을 마음껏 받아주었다.
“어, 어어?”
갑자기 얼빠진 듯한 감탄사가 들려왔다.
한구인이 손에 든 장바구니를 툭 떨어뜨렸다.
“조아라 씨?”
그는 길거리에 연예인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다가와서 조아라를 사방팔방에서 관찰했다.
“조아라 씨!”
“네. 조아라 맞아요. 이름이 한국인 오빠? 였나?”
왜 한구인은 오빠고 자신은 아저씨인가.
성필은 은근히 기분이 상해서 조아라를 보았는데, 그녀가 흘끗 시선을 주며 입꼬리를 올렸다.
일부러 호칭을 달리한 것이다.
“한국인이 아니라 한구인입니다. 아이돌 할 생각이 드신 겁니까?”
“아뇨. 얘기만 들으러 왔어요.”
한구인이 성필에게 동경의 눈빛을 보내왔다.
낚시터에서 팔뚝만 한 고기를 낚은 아버지를 보는 아들 같았다.
“어떻게…… 아니. 박 이사님, 설명은 어디까지 하셨습니까?”
“방금 막 시작하려고 했어요.”
“그럼 제가 해도 괜찮겠습니까?”
성필은 한구인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는 조아라와 마주 보고 미리 준비라도 해온 듯이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냈다.
조아라는 한구인의 말을 경청하는 듯하면서도, 반항심 가득한 눈빛을 성필에게 계속 쏘아댔다.
“제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음. 그러니까…….”
“예!”
“……오빠 너무 가까이 계신데요.”
“아, 죄송합니다.”
한구인은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둔 소년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러니까, 사장님 앞에서 테스트를 받고?”
“예!”
“한 달 동안 단기 트레이닝 과정을 거쳐서 또 테스트를 받고?”
“예!”
“거기서 통과해야 정식 연습생이 된단 거죠?”
“예! 정식 연습생이 되시면 정말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확신에 가득 찬 발언이었다.
한구인은 말하고도 과하다고 여겼는지 은근슬쩍 성필에게 눈짓했다.
“박 이사님이랑 사장님이요. 저는 물론이고 두 분도 열심히 직무에 임하실 겁니다.”
“여기 기획사 망한 그룹 하나 있던데.”
“아, 그건. 망한 게…… 아니, 망하긴 했지만. 그분들의 실력이 없던 게 아니라 시운이 작용하지 않아서…….”
“때가 맞지 않으면 실패한단 말이잖아요. 내가 들어가서도 시운이 안 맞으면 어쩌게요.”
“어, 어떻게든…….”
“어떻게든?”
“그…… 열심히…….”
“운칠기삼.”
성필이 10살 이상 연하에게 농락당하던 한구인을 대신해 말을 받았다.
“인간사 뭐든 운이지. 특히 이 업계는 더 그렇고. 잘 찍힌 직캠 하나로 인기가 하늘을 뚫기도 하고. 인기 없는 드라마 OST에 참여했다가 나중에 노래로 알려지거나. 심지어 인생짤 하나로 메이저가 되기도 해.”
“뭐예요 그게.”
조아라는 참지 않고 한껏 비웃음을 날렸다.
“운으로 성취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운칠기삼이라고 했잖아. 대성공이 10이고 그냥 성공의 기준이 5라면, 운을 4 채워도 기(技)를 하나 못 채워서 못 뜨는 사람들도 있어. 기는 기획사의 역량이야. 운은 하늘에 맡겨도 기는 3 전부 채워줄 자신이 있어.”
“결국 장담 못 한단 거네요.”
“어느 기획사든 그래. 네가 볼 건 우리가 채워주지 못하는 쪽이 아니라, 우리가 채워줄 수 있는 쪽이야.”
“박 이사님.”
한구인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조아라에게서 잠깐 떨어져 성필에게 귓속말했다.
“박 이사님답지 않으십니다. 너무 공격적으로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뭔가, 리카 씨나 백설하 씨 설득할 때는 솜사탕처럼 꿈에 부푼 이야기만 하셨잖습니까.”
“그 두 사람은 아이돌 되고 싶어 했어요. 반면 조아라는 동네 포장마차 오는 기분으로 여기 온 거고요.”
“포장마차……?”
“단기 트레이닝 한 달만 해도 들이는 돈이 수백만 원이에요. 열정 있는 사람만 들여도 모자랄 판에, 장난으로 온 애를 받아줄 수는 없죠.”
“아, 아니요. 여기 오긴 오셨으니 아예 마음이 없는 건 아닐 겁니다. 적어도 조금은 흥미가 있을 거예요. 예, 분명…….”
“남정네 둘이 붙어서 뭐 하세요?”
한구인은 헛기침했다. 그리고 조아라에게 다가가며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테스트 한번 받아보시겠습니까? 부담가지지 마시고요.”
과연, 조아라의 표정을 보니 알겠다.
그녀는 동네 마실 나온 기분으로 이곳에 와 있다. 그런 생각이 드니, 한구인은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눈앞에 놓인 보석이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그때 조아라가 미소 지었다.
“네. 받아볼래요.”
* * *
“아이돌은 쉬운 게 아니야. 연습생 시절부터 아이돌이 돼서까지,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못 버텨.”
아니, 아이돌이 힘들면 얼마나 힘들어서?
무대에 올라가서 춤 같지도 않은 춤을 추고 몇 번 웃는 게 전부 아닌가?
그래. 물론 노래 부르면서 춤추는 게 쉬운 건 아니지.
하지만 춤의 난이도랄 게 특별하지는 않다.
‘고작해야 힘든 게 전부지. 표현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야.’
텔레비전을 보면 조아라 자신보다 춤을 못 추는 아이돌이 널리고 널렸다.
연습생 생활 5년? 7년? 웃기지 마라.
조아라는 눈으로 카피하고 당장 무대에 올라가도 그들보다 더 잘 출 자신이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그렇단 거다.
“아이돌이 꿈이라는 애들도 버거워하는데, 아닌 애들은…….”
어른들은 자기들이 감정을 굉장히 잘 감추는 줄 아는데, 전혀 아니다.
다 느낄 수 있다.
성필은 내심 조아라를 무시하는 듯했다.
‘네가?’ 이런 기색으로 말했다.
‘참나. 어이가 없네.’
그깟 아이돌,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단지 내키지 않는 것뿐이다.
어느 정도로 내키지 않냐면, 문과가 고등학교 2학년 중간에 이과로 바꾸는 정도로 내키지 않는다.
성필의 무시 때문에 더 그랬다.
“네. 받아볼래요.”
한구인이 쩔쩔매는 것을 보는 게 즐겁기도 했지만, 조아라는 다른 것을 보고 싶었다.
성필이란 인간이 자신의 재능에 눈을 번쩍 뜨며 놀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발치에 매달려서 제발 연습생이 되어달라고 비는 것.
그러면 조아라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미안해요. 내 적성이 아닌 거 같네.”
마침 테스트란 것도 있으니, 적당히 실력을 보여주면 알아서 뻑이 가겠지.
* * *
홍규헌은 오랜만에 연습실에 들어왔다.
조아라의 테스트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 너 그런 옷으로 춤출 수 있겠어?”
조아라의 차림은 빈말로라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교복이 얼마나 줄어들 수 있는지 시험해보려는 듯 한계까지 줄여놨다.
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다.
‘요즘 잘 나가는 애들은 이렇게 입나? 일진이나 그런 거 아니고?’
홍규헌이 탐탁지 않아 하고 있자, 한구인은 헐레벌떡 밖으로 나가서 트레이닝복을 들고 왔다.
“뭐야 한 이사. 그 옷 어디서 났어?”
“리카 씨 옷입니다. 세 벌을 회사에 두고 돌려가면서 입으십니다. 제가 빨래를 해서 어디 널어두는지 알…….”
홍규헌은 짠내 나는 한구인의 설명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만 아니었다면, 한구인은 미국에서 거액의 연봉을 받는 증권맨이 돼 있었을 텐데…….
한국에서는 어린애 빨래나 해주고 있다니.
“조아라 씨. 어떤 곡으로 하시겠습니까.”
“킬 에브리바디 온 더 어스.”
“네?”
“Kill Everybody on the Earth.”
아이돌 곡도 아닌 덥스텝이었다.
클럽에서 신나게 춤출 수 있을 것 같은 곡.
한구인은 떨떠름해하면서도 착실히 곡을 준비했다.
“박 이사. 쟤 한 이사가 먼저 찾았다고 했지?”
“네.”
“박 이사가 설득해서 데려왔고?”
“설득이라기보다, 뭐냐. 지인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너는 쟤 어때 보여?”
조아라는 한구인이 처음으로 가능성을 본 연습생이었다.
홍규헌도 비상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필의 눈에는 어찌 보일지 모를 일이다.
“원석입니다.”
“오. 우리 한 이사 안목이 증명된 건가?”
“그런데, 그다지 아이돌에 관심이 없는 거 같아서 걱정이에요.”
“그거야 좀 하다 보면 생길 수도 있지.”
곡이 재생되었다.
EDM의 기본 구조인 인트로, 빌드 업, 브레이크다운, 드랍을 착실히 따르는 곡이었다.
그런데 조아라는 인트로부터 빌드 업, 브레이크다운을 전부 스킵했다.
곡이 1분에 이르기까지 간단한 스트레칭만 했다.
“드랍부터 할 생각인가 보네요.”
곡의 하이라이트.
모든 사운드가 격렬하게 내리꽂히는 드랍 파트에서 조아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나이에 안 맞게 잘 추네.”
조아라가 보이는 춤의 베이스는 왁킹이었다.
난이도가 어려운 동작도 과시하듯 했는데, 전혀 어색한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진가는 바로 다음에 나왔다.
“락킹?”
곡의 파트가 바뀌자 춤의 장르도 바꾸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팝핀, 힙합, 보깅 등.
현존하는 스트리트 댄스 장르의 거의 모든 동작을 바꿔가며 추었다.
그런 춤에 통일성이나 아름다움이 생기긴 힘들지만, 조아라는 곡의 구조마저 정확하게 파악해서 통일성을 이루어냈다.
“와, 쟤 그냥 댄서 아니야?”
홍규헌이 오랜만에 만족한 미소를 보였다.
곡의 라스트, 조아라가 펄쩍 뛰었다.
연속 덤블링이다.
기계체조 선수 같은 가벼움이다.
깃털처럼 날아오는 조아라를 보며, 홍규헌은 부딪칠 것 같아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음악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조아라는 꼿꼿이 홍규헌의 앞에 섰다.
커다란 임팩트를 남기는 완벽한 마무리였다.
짝, 짝, 짝, 짝.
한구인이 물개처럼 박수 쳤다.
조아라는 한껏 오만한 표정으로 성필을 보았다.
마치 ‘나를 봐!’라고 외치는 듯했다.
자신이 이렇게 빛날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이 모두의 가슴을 뚫었다.
“크흠.”
홍규헌마저 잠시 얼이 빠져 있었다. 그녀는 만족스레 성필을 보며 의견을 구했다.
사장이 먼저 ‘좋다’고 말하면 모양이 빠질 것 같아서.
“어때요?”
조아라가 자신만만히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쓸었다.
성필이 미간을 좁혔다.
“언더물이 너무 들었네.”
“……어, 아니, 뭐요?”
“언더물이 너무 들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