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두 사람은 식당에서 나와 카페로 향하는 길에도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제가 일이 있어서 어느 보육원에 갔습니다. 봉사활동 차원에서 학원 원생분들이 공연을 오셨더군요. 그곳에서 봤습니다.”
“그런가요.”
학원 공연팀이 지방 행사나 기관에 공연을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으면 신병교육대나 훈련소 같은 곳에 가기도 한다.
“이름을 아시는 거 보니까 말도 붙여보셨나 보네요?”
성필은 내심 긍정적인 답이 나오길 바랐다.
실은, 한구인이 점점 의욕을 잃어가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홍규헌도 혀를 내두른 사실이지만, 한구인은 아이돌 연습생의 매력을 객관적으로 판별하기 위해 총 200문항으로 구성된 평가지를 개발했다.
그걸 가지고 서울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람을 찾았으나,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그러니 그의 마음에 드는 아이가 생겼단 게 꽤 기뻤다.
‘게다가 조아라는 진짜배기 댄서잖아. 지금은 실력이 어떨지 몰라도, 성인 돼서는 전문 댄서로 활동하기도 하니까.’
이로써 한구인의 안목도 증명된 셈이다.
성필이 조아라를 만났던 건 그녀가 20대 후반에 이르러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그 이전의 일은 가볍게 들은 게 전부였다.
하지만 춤으로 밥 벌어먹는 게 웬만큼 힘든가.
아마 고된 삶을 살았겠지.
“말을 붙여보긴 했습니다만.”
“왜요, 싫대요?”
“그, 아마 싫은 것 같습니다.”
“애매하게 대답했나 보네요. 보통 아이돌 해보겠냐는 말을 들으면 그런 반응이겠죠. 집에 가서 회사 이름도 쳐보고, 평가도 찾아보고.”
그 부분에서 벌써 패착이 드러났다.
가로 엔터는 유명하지 않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해체해버린 보이그룹의 이름이 하나 뜰 것이다.
그런 곳에 신뢰가 생길 리 만무하다.
성필이었으면 어떻게든 붙잡아서 미래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을 텐데, 한구인의 표정을 보니 그렇게 얼굴이 두껍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애매한 대답이란 게, 다르게 생각하면 고민하고 있단 뜻이기도 하잖아요.”
“관심 없으니까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직설적인 거절인데요? ‘아마’라는 말을 쓰실 필요도 없었잖아요.”
“그렇습니다.”
한구인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리카에게 놀림당했을 때보다 더 안쓰러워 보였다.
“이유는 물어보셨어요?”
“아니요. 너무 당황해서. 그래서, 그냥 나왔습니다. 다시 생각하니까 잘못한 것 같습니다.”
“나가라면 나가야죠. 어쩌겠어요.”
성필도 한구인에게 충분히 공감됐다.
그도 전생에서 연습생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했던 경험이 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서 말을 걸면, 곧장 싸늘하게 ‘싫다’고 하는 부류가 있다.
그럴 때는 정말 물러나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계속 말 걸고 쫓아갔다가 신고라도 당하면 낭패를 넘어서 범죄자가 되어버린다.
“그럼 앞으로 어떡하실 거예요?”
한구인은 성필이 이제껏 해왔던 일을 떠올렸다. 리카는 물론 백설하까지, 성필은 지속적으로 그녀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설득할 기회가 찾아왔을 때,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여 그녀들을 데려왔다.
한구인도 본받고 싶은 열정이었다.
“계속 접촉해 볼 겁니다. 반드시 데려오고 싶습니다.”
“잘되길 바랄게요. 혹시 도와드릴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같이 가주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한 이사님은 할 수 있으실 거예요. 진심과 열정!”
“진심, 열정……. 그렇군요. 고작 한 번으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성필은 조아라가 속한 학원의 원장과 아는 사이다. 그녀를 통해 조아라에 대해 안다면 설득이 더 쉬워질 수도 있다.
‘근데 한 이사님이 어떻게 하는지도 보고 싶어.’
한구인은 말재주가 있는 편이다.
유명 회사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으니, 사람을 상대로 한 프레젠테이션에 일가견이 있을 것이다.
그의 성취감도 채워줄 겸, 당분간은 한구인을 독자적으로 움직이게 놔두는 것이 좋으리라.
‘그리고 난 조아라랑 딱히 좋게 만난 것도 아니니까. 내가 끼어들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겠지. 하, 유하음 그놈만 없었어도 그냥 넘어갔을 텐데 괜히…….’
* * *
한구인은 며칠 동안 조아라를 쫓아다녔다.
그렇다고 스토킹을 했단 건 아니었다.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장소인 학원에 매일 같이 찾아왔다.
당연히 학원 관계자의 허락도 받았다.
“하하, 아라요?”
백민정은 한구인의 사정을 듣곤 어색하게 웃었다. 조아라는 춤도 잘 추고 외모도 뛰어났기에 예전부터 캐스팅 제의를 몇 번 받았다.
그 결과들을 알았기에 한구인을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러세요. 걔가 쉬는 시간이 보자, 점심이랑 저녁 딱 그때만 쉬어요. 그때 말곤 이야기 붙일 시간도 없을걸요.”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민정은 어련히 점심이나 저녁에 한 번 찾아가겠지 싶었다. 그리고 거절당하면 앞으로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한구인은 먼저 점심을 먹으러 나오는 조아라에게 접근했다.
조아라는 학교를 조퇴하고 학원에 짐을 가져다 둔 뒤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녀는 학원 친구들과 함께였는데, 다들 한구인의 외모를 보고 넋이 나갔다.
텔레비전에나 나올 법한 미남이 갑자기 말을 걸어온 것이다.
그녀들은 뻣뻣이 멈춰서서 머리칼을 정돈하는데, 조아라는 무심히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가로 엔터 한구인 이사입니다.”
한구인은 정식으로 명함을 건넸다.
양손으로 명함을 쥔 채 허리를 살짝 굽히고, ‘제발 받아주십시오’란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조아라의 친구들이 오오 소리를 내며 자랑스럽단 듯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관심 없어요.”
조아라는 한구인을 우두커니 남겨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제가 대신 전해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다행이랄까, 친구가 명함을 받아서 조아라에게 넘겨주었다.
조아라는 헐레벌떡 뛰어온 친구에게 명함을 받곤 뒤로 돌아보았다.
한구인과 조아라의 눈이 맞고, 그녀는 픽 웃으면서 명함을 대충 한 손으로 접었다.
그래도 땅에 버리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으니 다행…….
“…….”
그럴 리가 없다.
명함은 직장인의 영혼이다.
따로 명함을 받았을 때 대처하는 방법이 확립되어 있을 정도로 명함을 받고 준다는 건 단순한 인사 이상이다.
한구인이 충분히 화날 만한 상황…….
‘웃는 모습도 정말 매력적이시군.’
……화날 만한 상황이었지만, 한구인은 화내긴커녕 조아라의 미소를 봤다며 좋아라 했다.
그리고 다시 저녁.
한구인은 저녁을 먹으러 가는 조아라에게 달라붙어 또 명함을 내밀었다.
“아저씨. 아저씨라고 부르면 돼요?”
“네, 네. 그렇게 부르셔도 됩니다.”
한구인은 조아라가 말을 걸어줘서, 그리고 그를 처음으로 똑바로 봐줬단 이유만으로도 기뻤다.
그의 미소는 차라리 비굴하기까지 했다.
“혹시 기억력이 안 좋아요? 제가 관심 없다고 한 거 들었잖아요?”
“그렇지만, 혹시라도…….”
“혹시라도 같은 거 없어요. 찾아오지 마요.”
싸늘한 대응에 심장이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한구인은 머뭇거리다가 떠나가는 조아라를 향해 외쳤다.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자 조아라는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 다시 한구인의 앞에 섰다.
절대 좋은 말이 나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구인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나는 아이돌이 싫은 게 아니에요. 매니지먼트사가 싫어요.”
“……기획사요?”
“그리고 아저씨는 매니지먼트사 직원이잖아요. 내가 싫어할 이유가 충분하죠?”
한구인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설마 조아라가 싫어하는 게 단순히 아이돌이 아니라 기획사 그 자체였다니.
무엇보다 한구인 자신을 싫어한다니!
직업에서 오는 혐오감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겠는가.
“왜 싫어하십니까?”
“글쎄요. 어릴 때 개한테 물린 기억이 있는 사람이 개를 싫어하는 거랑 비슷하네요.”
“공포심은 직접 대면과 반복 숙달로 극복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서워한다는 게 아니고요. 나쁜 개만 있는 게 아니란 건 알아요.”
조아라는 ‘개’에 악센트를 주며 한구인을 흘겼다.
“그래도 개를 좋아할 수 없는 마음. 이해하겠어요?”
“이해합니다.”
“그럼 이제 안 찾아오겠죠? 나는 정말 기획사랑 엮일 생각 없어요.”
조아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과연, 이 지경까지 이르러서도 한구인의 멘탈이 멀쩡할 수는 없었다.
완벽한 거절이다.
이제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마지막 방법을 시도하고 난 뒤에.
“박 이사님!”
한구인은 성필에게 찾아가서 조아라와 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조아라의 앞에서는 최대한 감정을 숨기려고 노력해서, 한구인은 자신이 그녀의 거절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잘 몰랐었는데.
“그랬더니 조아라 씨가 저를 개에 비유하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어떻게 그런……. 저는 정말 순수한 선의로 다가간 거였는데!”
의외로 한구인은 조아라에게 화가 많이 나 있었다. 그건 본인으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예, 그래요.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보통 ‘개’는 귀여운 이미지가 아닙니까. 저에게 호의가 있을 가능성이 아예 영은 아니지 않을까요?”
“예, 뭐, 그럴 수도.”
“아,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군요. 저에 대한 개인적인 호의는 쓸모가 없잖습니까. 제게 호감이 있다 해도 가로 엔터에 들어오는 건 아예 다른 문제니까요.”
“…….”
성필은 그동안 한구인이 본인의 외모에 대한 자각이 그다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한구인은 자신이 관심 있는 인간에 대해서만 도끼병이 발동하는 것 같았다.
“이런 경우에는 어떡합니까?”
한 시간에 걸친 수다 끝에 본론이 나왔다.
성필은 진이 다 빠진 터라 느릿느릿 답했다.
“조아라 본인이 의지가 없으면 도리가 없죠. 방법이래 봐야 부모를 설득하는 정도인데요. 조금 더 공을 들이려면 주변 인물한테 정보를 캘 수 있겠네요. 기획사를 싫어하는 이유라거나.”
“그런 짓을 해도 괜찮은 겁니까?”
“나중에 조아라가 알면 혐오감이야 좀 생기겠지만요.”
한구인은 성필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도와달란 뜻이다.
“……네, 혐오는 제가 받죠 뭐.”
“뭐든 도와드릴 게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어차피 성필도 조아라에게 호기심을 느끼던 차였다.
뭣보다 한구인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조아라 영입에 실패했다간, 한구인이 이 업무에 영원히 싫증을 느끼게 될지도 몰랐다.
‘조아라……. 미래의 성격 그대로면 좀 쉬울 것 같기도 한데.’
“일단 민정이랑 만나봐야겠네요.”
“조아라 씨네 학원 트레이너님 말씀이십니까? 사적으로 아는 사이십니까?”
“네.”
“왜 진작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다면 더 쉬웠을 텐데요!”
한구인이 어떻게 연습생에게 영업하는지 보고 싶었다.
그런 말은 할 수 없었기에 적당한 이유로 둘러댔다.
* * *
“6개월 만에 연락이 와서 한다는 게 술 먹자는 거라……. 여친이랑 헤어져서 대체재 찾는 거야?”
“나 여친 없어.”
“있었는데?”
“없었어.”
백민정은 길거리가 떠나가라 웃었다.
사람이 애인 없는 게 뭐가 그리 웃긴 지 모르겠다.
일이 좀 바쁘면 못 사귈 수도 있지…….
매니저 일에 적응하고, 또 큰 보람도 컸던 터라 다른 데 집중할 욕구도 필요도 못 느꼈다.
하지만 외로움에 사무치던 전생의 후반기를 고려하면, 이번 생에선 일에만 빠지지 말자는 다짐이 생겨나곤 했다.
“오빠 여자한테 고백해본 적 없지?”
“아, 여자 얘기 좀 그만해.”
“부끄러우니까 말 돌리네. 진짜 없어? 와, 자만추? 진짜 그런 거야?”
“자만추……? 자만추가 뭔데?”
“맞혀봐.”
성필은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자만추의 뜻을 알 수 없었다.
백민정과 온 곳은 직장인들이 주로 들르는 고깃집이었다.
냄새 배는 게 신경 쓰이지 않냐니까, 고기 먹으려고 일부러 버려도 되는 옷 입고 왔단다.
“나 오늘 죽어. 나 오늘 집에 안 가. 소맥 시켜.”
“너 또 인사불성 되면 진짜 죽여버릴…….”
입에 소맥을 털어 넣는 백민정을 보며 성필은 할 말을 잃었다.
석세스 엔터를 나오고서 쓸 일이 없던 대리운전 어플을 메인 화면으로 꺼내놓았다.
“야, 근데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다. 어떻게 지냈어?”
“나야 뭐 잘 지냈지. 근데 너네 학원에 조아라라고 있지 않냐.”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백민정의 시선이 썩어갔다.
“아니 뭔 안부 얘기도 다 안 끝냈는데 본론이 나와?”
“안부는 무슨 안부야. 너는 트레이너랑 안무가 일했을 거고, 난 매니저 일 계속…….”
아니네.
성필은 석세스 엔터에서 나왔다는 엄청나게 큰일을 겪었다.
백민정은 빨리 취하고, 취하면 정신줄을 놓는 스타일이라서 본론을 먼저 듣고 싶었는데.
성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안부를 털어놓았다. 백민정은 술이 들어가자 공감 능력이 2배가 됐는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진짜 쓰레기들이다. 잘 나왔어. 한 잔 더 쭉 마셔.”
“그래 고맙다. 근데 너네 학원에 조아라…….”
“나 저번에 진짜 어이 털리는 일 있었다?”
“…….”
이 정도면 일부러 씹는 거 맞지?
성필은 조금 짜증이 나면서도, 일부러 말머리를 돌리는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시간이 10시를 지났을 때, 둘은 몸을 휘청거리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백민정이 한숨을 쉬었다.
“네 입에서 알코올 냄새나.”
“지는 안 나는 줄 알아. 오빠만 깨끗해.”
“……뭐 고민 있냐.”
성필이 지나가듯 물으니 백민정이 쩝 소리를 냈다. 그리고 자신의 목덜미를 꾹꾹 마사지했다.
무언가 하기 힘든 말이 있을 때의 버릇이었다.
“아니. 힘든 건 아니고.”
“뭔데. 말해봐. 자꾸 내 말 씹은 거 그거 말하려고 그런 거잖아.”
“아니. 꼭 그렇단 건 아니고.”
“어쩌라고 대체!”
“……그, 방송국에서 오빠 옆에 있던 사람 있잖아.”
“하음이?”
“응. 유하음 실장.”
나오리라 예상치도 못한 이름이라 술기운이 어느 정도 달아났다.
“아니, 아니 아니, 진짜 내가 딴 사람 앞에서 뭐. 꿇리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막, 돈 얘기는 하기 싫은 그런 거? 있잖아? 근데 뭐…….”
백민정은 얼마나 취했는지 말의 논리도 안 맞았다.
“아라가 기획사 싫어하게 된 거, 그 사람도 조금 잘못이 있다고 해야 하나. 뭐, 그래.”
“……왜?”
“아니, 뭐 직접적인 이유는 아닌데.”
“하아. 숙취해소제 사다 줄까? 너 지금 거의 제정신 아닌데.”
“제정신 맞거든. ……그, 오빠.”
백민정은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맨정신으로는 절대 하지 못할 이야기란 감이 왔다.
“돈 좀 받아주라.”
“…….”
아주 질척거리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