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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6화 (16/760)

#016화

아침 5시 기상.

현대인들이 가장 우울해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성필은 달랐다.

그는 잠들 때조차 빨리 내일이 오길 바랐다.

백설하의 영입 덕분이었다.

‘꿈인가?’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볼을 꼬집어 보니 아팠다. 현실이었다.

원하는 사람을 연습생으로 데려왔단 사실만으로도 성필은 인생의 절정기를 달리는 듯했다.

‘이대로 하나둘씩 연습생으로 들어오다 보면 그룹 꾸리는 것도 곧이겠어.’

힘차게 씻고 밖으로 나섰다.

도로를 타고 회사로 가는 길, 오늘만큼은 자신의 중고차도 전혀 아쉽지 않았다.

옆과 앞에 깔린 외제차를 보고서도 부럽단 감정은 없었다.

왜냐하면 성필에겐 더 소중한 게 생겼으니까.

“다들 안녕하십니까!”

회사 문을 열고 기운차게 인사했다.

아침엔 항상 1층에 한구인이 있었으나,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성필은 뻘쭘하게 사무실로 향했다.

‘언제나 생각해도 넓단 말야.’

아직 채워지지 않은 다른 사무실을 떠올리면 절로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회사 규모에 비해 엄청난 공간 낭비였다.

‘뭐, 가로 엔터가 성공하면 알아서 채워지겠지.’

사무실에도 한구인은 없었다. 그의 가방만이 주인이 왔단 것을 알려주었다.

성필은 휴게실에서 커피를 타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오늘 연습생을 구하기 위해 가봐야 하는 장소를 체크했다.

몇 분 만에 끝났다.

‘진짜 나 월급 도둑 같네.’

아이돌 그룹을 맡게 되면 이런 생각을 했던 때가 그리워지리라.

할 일도 없던 터라 사무실을 쓸고 닦았다.

아직도 힘이 넘쳤다.

성필은 레슨룸에 가보기로 했다.

항상 리카가 사용하는 곳인데, 청소가 제대로 되는지 의문이었다.

‘거기도 한번 청소하자.’

레슨룸 문을 열자 리카가 있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뇌쇄적인 자세를 취한 채였다.

골반을 한쪽으로 빼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더듬는, 도저히 리카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 포즈였다.

거울을 통해 둘의 눈이 맞았다.

“…….”

“…….”

“미안.”

“그냥 가면 어떡해욧!”

리카가 도도도 달려와서 성필의 옆구리를 향해 팔꿈치를 내질렀다.

장난기가 서려 있어 아프진 않았다.

“창피해하지 마. 나도 샤워실에서 가끔 그래.”

“이사님 자아도취랑 제 포즈 연습을 똑같이 보지 말아주실래요? 제가 방금 한 건 일이라구요! 추가수당 받아야 할 일이라구요?!”

“창피해하지 말라니까.”

리카가 말은 그렇게 해도 굉장히 부끄러운 듯 귀가 붉어졌다.

“아시겠어요? 저는 아이돌이에요. 어떤 모습이 가장 예쁜지 점검해야 해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있든 팬들이 좋아할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구요. 유식한 말로 자기객관화라구요!”

“알아. 그럼 구경해도 돼?”

“아, 그건, 쫌.”

“왜. 일이라며. 그리고 혼자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 피드백 받는 게 더 낫지 않아?”

“…….”

리카는 자기 꾀에 자기가 빠져들었다.

물론 리카의 말은 전부 맞다.

거울을 보며 자세를 연구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다만 남 앞에서 하면 창피할 뿐이다.

“알겠어요. 보고 반하지나 마세요!”

“안 그러니까 빨리 해봐.”

“왜요?! 쌤한테는 반했느니 사랑에 빠졌느니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겠다느니 그런 말 했으면서?!”

“그렇게까진 안 말했어!”

리카가 부끄러운 기억을 끄집어내자 성필은 모른 척 구석의 의자에 앉았다.

“시작 시작.”

그녀는 이를 갈며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이번에는 섹시함을 강조한 포즈는 없었다.

평소에도 표정이나 자세를 연구했단 건 거짓말이 아닌 듯,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웠다.

‘음…….’

성필이 리카를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던 건 순전히 미래의 지식 때문이었다.

또한 옛날에 오디션장에서 만난 기억도 한몫했다. 그런데 리카와 오래 지내다 보니 점점 확신이 섰다.

‘쟤는 아이돌 하려고 태어난 애 맞다.’

특히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다.

누구든지 리카의 미소를 마주하면 심장이 뛰지 않곤 못 배기리라.

‘한 이사님은 안 그런 거 같지만.’

리카의 포즈 퍼레이드가 끝났다. 그녀는 어떠냐는 듯 가슴을 폈다.

“미소가 예쁘네.”

“감상이 겨우 그거? 더 있지 않을까요?”

“왜, 뭐 바라는 말이라도 있어?”

“저한테도 쌤한테 했던 말 같은 거 해줘요.”

“안 해.”

“해줘요!”

성필은 일어서서 레슨룸을 나서려고 했다. 리카가 뒤에 따라붙어 그의 상의를 쥐었다.

“해 달라구요!”

“아, 싫어.”

“아앙 즈루이(치사해)!”

“뭐? 너 방금 욕했어?”

“욕 아니거등요!”

“너 내가 일본어 못한다고 자꾸 그러면…….”

“치사해, 란 뜻입니다.”

복도 모퉁이에서 한구인이 튀어나왔다.

“아, 한 이사님. 안녕하세요.”

“박 이사님도 안녕하십니까. 일찍 나오셨네요. 신기하게도 오늘은 다들 일찍 나오셨습니다.”

다들?

“사장님도 있으신가요?”

“잠깐 밖에 산책하러 나가셨습니다. 리카 씨도 오늘 새벽에 오셨고요.”

“응? 리카 새벽에 왔어?”

리카는 끝까지 성필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지 않자 잔뜩 삐졌다.

“네에, 네에, 일찍 나왔습니다아!”

“몇 시?”

“6시쯤입니다.”

성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왜 그렇게 일찍 왔어?”

“왜긴요. 연습하려고 왔죠. 당연한 거 아님?”

말이 짧아졌지만, 성필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열정에 감동해서 말투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피곤하진 않아? 커피라도 타 줄까?”

“됐어요. 저는 한 이사님의 건강즙이면 충분해요!”

“리카 씨, 드디어 제 레시피를 좋아하게 되셨군요.”

한구인도 감동했다. 리카는 말실수했단 걸 깨달았다.

“한 잔 더 드릴까요?”

“생각해 보니까 커피도 괜찮을지두. 이사님이 직접 타주세요. 그럼 이만.”

리카는 시크하게 손을 흔들며 레슨룸 안으로 사라졌다.

성필은 살짝 실망한 한구인에게 물었다.

“한 이사님은 리카보다 더 일찍 오신 거예요?”

“네. 그렇게 됐네요.”

“평소에 매일 새벽에 오세요?”

“아니요. 오늘은 일부러 더 일찍 왔습니다.”

“왜요?”

한구인이 쓰게 웃으며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전말은 홍규헌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한 이사네 조부님이 아프시대. 그래서 며칠 동안 본가에 갔다 온다고 하더라.”

“어쩐지. 어떡해. 많이 힘드시겠네요.”

“그치. 거리도 멀어서 더 힘들 거야.”

“본가가 어디신데요?”

“독일.”

“…….”

독일?

본가가 독일이면, 한구인은 독일인인가?

본명은 한스 예거라던가…….

“암튼 그렇게 됐어. 며칠은 네가 리카 픽업해줘.”

어차피 일도 많지 않은데 잘 됐다.

성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로 일을 했으나, 구체적인 실적이 나오지 않아서 불안했다.

차라리 다른 기획사에 가면 매니저로 일할 수 있으니 열심히 한단 체감이라도 될 텐데.

오랫동안 매니저 일을 손에 놓으니 좀이 쑤셨다.

“알겠습니다.”

“그래. 더 할 말 없으면 나가도 돼.”

홍규헌은 그리 말하곤 수심 가득한 눈빛으로 담배를 꺼냈다.

어딘가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전부 성필의 짐작이었을 뿐인데다가, 그녀가 슬퍼하더라도 위로해줄 깜냥은 없었다.

‘며칠 동안 직원은 나 혼자인가.’

한구인이 며칠간 없을 거라 생각하니 쓸쓸해졌다.

우울한 기색을 보이던 홍규헌이 이해됐다.

성필은 무거운 공기를 털어내곤 힘차게 움직였다. 연습생을 찾기 위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시간에 맞춰 리카를 픽업했다.

“리카야 오늘도 파이팅.”

“흥.”

학원에 데려다줄 때마다 리카가 싸늘했으나, 그것도 성필의 눈엔 귀엽게 보이기만 했다.

시간이 저녁에 가까워질수록 성필은 더더욱 활기차졌다.

리카의 마지막 스케줄이 보컬 학원, 즉 백설하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사님, 오늘 저녁 같이 드실?”

저녁이 되자 리카도 기분을 푼 듯 친근히 대해왔다. 그리고 생기지도 않은 성필의 죄책감을 이용하려 들었다.

“응, 같이 안 먹어. 샐러드나 맛있게 먹으렴.”

“이사님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리카가 우는 척하며 복도를 뛰어갔다.

‘미안하다 리카야. 한두 번 봐주다 보면 끝도 없어. 험난한 아이돌의 길을 헤쳐나가려면 식단 조절도 완벽해야지.’

생각해 보니, 리카는 얼마 전 허락도 없이 수백 칼로리의 과자를 먹었다.

그걸 떠올리는 순간 미안함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성필은 마지막 학원 스케줄인 만큼, 리카의 레슨이 끝날 때까지 게스트 휴게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레슨이 끝나고 복도에서 리카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성필은 날 듯이 밖으로 나갔다.

리카가 백설하와 함께 오고 있었다.

“앗, 이사님이다. 쌤 아시겠죠? 무시하세요.”

“으응? 아…….”

리카는 흥 하며 성필을 지나치려 했으나, 곁에 있던 백설하는 그의 앞에 섰다.

리카가 쪼르르 돌아와서 억울한 투로 말했다.

“제가 무시하자고 했잖아요?!”

“설하 씨 안녕하세요.”

“이사님도 안녕하세요.”

“둘 다 너무해…….”

분명 백설하에게 가로 엔터로 들어오겠단 확답을 받았으나, 아직도 어색함이 남아 있었다.

성필은 멋쩍게 물었다.

“이제 퇴근하시죠? 모셔다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아요. 혼자서 가도 돼요.”

분명 이제 같은 식구가 됐을 건데…….

성필은 데이트 신청에 거절당한 청년처럼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아직 학원 일은 정리 안 되셨죠?”

“네에. 원장 선생님한테 말했어요. 한 달 약간 안 걸릴 거예요.”

그리 말하는 백설하는 살짝 곤란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부모에게 거짓말을 들킬 걸 걱정하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성필은 예민하게 그녀의 기색을 읽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네? 아니요, 없어요. 괜찮아요, 네.”

없는 게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본인이 저토록 부정하는데 더 물어보는 것도 실례였다.

“모셔다드리는 거 부담돼서 걱정하시는 거면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이제 곧 저희 쪽으로 오실 거잖아요. 오시면 매일 저나 한 이사님이 모셔다드릴 거예요.”

“아…….”

“쌤 그냥 이사님 차 타세요. 이사님은 일하는 거 좋아해요. 평생 일만 하고 싶어하세요.”

“……그럼 그럴까?”

성필 자신의 공손한 권유에도 괜찮다고 했으면서, 리카의 저런 말에 설득되다니.

왠지 배신감이 들었다.

“저 준비할 거 있는데 십 분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세요?”

“알겠어요. 리카 데리고 밑에 있을게요.”

성필은 리카를 데리고 학원 아래로 내려갔다.

백설하는 그들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숨을 내쉬었다. 성필을 보고 있으면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짓거리를 또 하겠다고? 너 미쳤어? 7년을 버려놓고도 정신을 못 차려?!’

성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저번에 들었던 어머니의 노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백설하는 눈을 질끈 감고, 억지로 그 기억을 잊으려 노력했다.

‘생각하지 마. 엄마는 모를 거야. 내가 말만 안 하면 괜찮아.’

백설하는 어머니를 속이려고 한다.

다시 아이돌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던 날 깨달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절대 백설하가 연습생이 되도록 놔줄 리 없단 것을.

그러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혼자만 죄책감을 짊어지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

바로 거짓말이다.

“설하 씨.”

짐을 챙기고 있자 동료 트레이너가 말을 걸어왔다.

“아까 왔던 사람 그분 맞죠? 박성필 이사?”

“네, 맞아요.”

“데려다주겠다 그런 말 들은 거 같은데. 그날 만나서 잘 된 거예요?”

“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럼 거절했는데도 계속 찝쩍거리는 거예요? 어우, 어떡해. 제가 같이 가서 약속 있다고 말해드릴까요?”

근처에는 다른 트레이너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백설하는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말할 용기가 없었다. 만약 말한다면…….

‘연습생이요?’

라고 말하며 이상하게 쳐다볼 게 뻔했다.

이곳에서는 자신의 꿈조차 자랑스레 말할 수 없었다.

손가락질이 두려워서였다.

“괜…… 찮아요.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앗, 백 쌤!”

백설하는 부름에 답하지 않고 빠른 발걸음으로 학원을 내려갔다. 그리고 성필의 차를 발견하자 재빨리 조수석에 탔다.

운전석의 성필이 따스하게 웃어주었다.

“빨리 오셨네요. 설하 씨 집부터 갈게요.”

“네, 네에.”

“쌤 저랑 같이 앉아요오.”

“그럴까?”

백설하는 제자의 부탁에 다시 뒷좌석으로 옮겨탔다.

리카는 백설하와 팔짱을 끼곤 여느 때와 똑같이 재잘재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이제 영어 문장 짧은 건 읽을 줄 알아요. 쌤 관계대명사가 뭔지 아세요?”

“응? 들어본 거 같긴 한데…….”

“관계대명사가 뭐냐면요.”

백설하는 리카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백미러로 비치는 성필의 눈만 바라보았다.

성필은 백설하와 거울로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보냈다.

그녀는 느꼈다.

‘편해.’

물론 성필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나타났다. 어머니를 속였단 생각은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 느낌은 단순한 죄의식과 달랐다.

전통과 규율을 부수고 모험을 떠나는 것과 같았다.

마치 새로운 땅에서 모르는 사람과 벌이는 한 여름밤의 모험.

‘이사님과 리카는 내 꿈을 혼내지도, 손가락질하지도 않아. 거기다가 이사님은…….’

단순히 손가락질하지 않는 것을 넘어, 자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해주었다.

백설하는 이 좁은 차 안이 집이나 학원보다 훨씬 편하고 안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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