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아이돌을 하고 싶으냐.
그건 백설하가 1년 넘게 마음속 깊이 묻어둔 질문이었다.
그 질문을 다시 끌어올린다면 현실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그렸던 세계와 전혀 달랐다.
바라지 않던 모습으로 어른이 된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묻어두었던 질문이 성필의 입을 통해 밖으로 삐져나왔다.
“…….”
대답은 즉시 나오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성필은 희열을 느꼈다.
백설하가 고민하고 있단 증거였으니까.
“아이돌 하고 싶으시잖아요.”
백설하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억지로 짜내어 목소리를 뱉었다.
“아니요. 아이돌에는 생각 없어요.”
단호한 선언이었다.
반론을 일절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그 답은 성필의 물음을 칼처럼 잘랐다.
그러나 그 단호함이 오히려 백설하의 진심을 드러냈다.
“거짓말이죠?”
무례한 말이었다.
마음을 읽는 것도 아닌데 타인의 결정을 부정해버린다.
당연히 백설하는 반발했다.
“아뇨. 아니에요.”
“거짓말이잖아요. 실은 아이돌 하고 싶으시잖아요. 무슨 이유신데요. 제가 해결할 수 있는 거면…….”
성필이 백설하를 따라잡고 이 대화까지 오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1분이 백설하에게는 견디기 너무 어려웠다.
그룹이 해체된 뒤 1년 동안 실패한 아이돌로 살았고, 마찬가지로 1년 동안 다시 아이돌에 도전하면 안 되는 이유를 뇌리에 각인시켜왔으니까.
“나이 들었잖아요.”
그래서 이후 나온 백설하의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싸늘했다.
“저 21살이에요. 제가 데뷔하면 몇 살인데요? 리카가 그러던데, 이제 연습생 겨우 한 명이라면서요. 그러면 나머지를 모으고, 트레이닝하고, 첫 번째 앨범 준비하기까지 얼마나 걸려요? 3년? 4년? 그럼 저는 25살에 데뷔하겠네요?”
일반적인 아이돌의 활동 기간은 7년이다.
7년 뒤, 백설하는 32살이 된다.
아이돌의 절정기라는 5년 뒤에는 30살이다.
30대의 걸그룹 멤버.
젊은 아이들이 가득한 아이돌계에서 어떤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저도 이제 성인이에요. 언제까지고 부모님한테 손만 벌리고 있을 순 없어요. 연습생 생활 2년 3년 동안 돈도 못 벌고. 그룹 데뷔마저 실패하거나, 그룹 자체가 망하면 저한테 뭐가 남는데요?”
남들이 직장 다니면서 경력을 쌓거나 대학에서 스펙을 다지는 기간이다.
만약 백설하가 실패한다면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게 된다.
“아이돌이 하고 싶냐구요?”
백설하의 목소리가 조금 젖어 들었다.
본인의 처지에 무력감을 느껴서였다.
원하는 게 있음에도 달려갈 수조차 없는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현실성 없는 꿈을 보여주는 성필 또한 원망스러웠다.
“네! 하고 싶어요! 근데 못 해요! 도박이잖아요?! 현재랑 앞으로의 몇 년을 통째로 배팅하는 거잖아요!”
백설하의 고함에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지나갔으나, 몇몇은 가만히 서서 구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필과 백설하는 별세계에라도 떨어진 듯 신경 쓰지 않았다.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연습생이었어요. 힘든 거 다 참아가며 데뷔하고, 또 실패하고. 그러니까, 이제 더는 부모님 힘들게 안 하고, 또…….”
백설하의 말이 점점 꼬여갔다.
감정이 논리를 휘감아서 언어를 토막 냈다.
“그냥, 못 해요. 저는…….”
“나이는 신경 쓰지 마세요. 데뷔는 최대한 빨리할 수 있어요.”
“……네?”
백설하의 감정에 북받친 거절에도 성필은 차분하기만 했다.
그건 그녀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그럼 남은 문제는 돈이죠?”
“제 말 들으셨어요?”
“네. 들었어요. 잠시만요.”
성필은 백설하가 보는 앞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 모드로 해 뒀기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주변에도 들렸다.
[왜.]
홍규헌이었다.
“사장님. 백설하 트레이너님이 연습생 제안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트레이너님한테 연습생으로 들어오는 대신 돈을 줄 수 없을까요?”
[뭔 개소리야. 연습생 하는데 돈을 왜 줘?]
“아, 죄송합니다. 말하는 순서가 꼬였네. 트레이너님을 가로 엔터 전속 트레이너로 두는 겁니다. 그러면서 리카랑 앞으로 들어올 애들도 가르치는 거죠.”
[왜 그래야 하는데?]
“연습생을 할 수 없는 게 금전적인 문제라고 하셔서요.”
[아이돌은 하고 싶대?]
성필은 당황한 듯 쳐다보는 백설하와 눈을 맞춘 뒤 자신 있게 답했다.
“엄청 하고 싶으시대요.”
[음.]
홍규헌은 몇 초 침묵을 지켰다.
갑자기 이런 말을 들었으니 재빨리 결정을 내리는 쪽이 이상했다.
하지만 홍규헌의 판단은 비상하게 빨랐다.
[백설하가 그렇게 좋아?]
“네. 한눈에 보고 느낌 왔습니다.”
[그래. 알겠어.]
백설하가 깜짝 놀랐다.
이렇게 금방 정해도 되는 건가?
혹시 이건 사기가 아닐까?
홍규헌의 시원시원한 대답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단, 내 마음에 들었을 때야. 걔 우리 회사로 데려와서 테스트부터 받게 해. 근데 뭐 어떻게 됐는데. 걔랑 아직도 같이 있어?]
“바로 앞에 있습니다.”
[…….]
홍규헌이 전화를 끊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애’나 ‘걔’라고 했으니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리라.
성필은 보란 듯이 핸드폰을 보였다.
녹음 표시가 떠 있었다.
“트레이너님. 아니, 설하 씨.”
“네, 네.”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대화에 백설하의 칼날 같던 기세도 누그러져 있었다.
“저도 지금 대화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설하 씨가 마음에 듭니다.”
“네?!”
둘이 모르는 사이 주변의 구경꾼이 꽤 많아졌다. 그리고 성필의 방금 발언에 ‘오오’하는 목소리가 퍼져갔다.
“저도 설하 씨처럼 꿈이 있습니다.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안개 낀 것처럼 막막하기만 한 미래예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요. 그 미래에는 설하 씨가 있어요. 꼭 있어야 해요.”
“미친…….”
뒤늦게 합류한 한구인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설득을 하라고 했더니 고백을 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백설하의 눈동자는 감히 성필과 마주치지 못하고 좌우로 빠르게 흔들렸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저는 설하 씨에게 반했습니다.”
“네에?!”
미래에도 성필에게 이런 순간이 있었다.
원석을 본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전된 듯한 느낌.
‘반했다’ 외에 설명할 방도가 없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프로듀서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프로듀서의 일은, 자신이 본 매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니까.
“제가 반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뭐, 뭐머 뭐가, 뭐가요? 어디가요?”
당황해서 나온 질문일 뿐이었다.
어디에 반했는지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듣고 싶긴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데 성필은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술술 말을 뽑아냈다.
“그건 마치 첫눈이 온 다음 날 길거리를 바라본 어린아이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조심스레 구석으로 다가가 쌓인 눈을 걷어내자 드러난, 눈 아래의 더 새하얀 눈. 그 새하얀 빛깔에 대한 감탄, 자연이 만든 미에 대한 경탄. 눈은 걷어내도 걷어내도 아래를 볼 수 없습니다. 드러나는 순간 겉면이 되죠. 그리고 점점 더 하얗게 됩니다. 더 빛나고 찬란해집니다. 저와 설하 씨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의 더 아래를 보는 것처럼…….”
“그, 그만! 그만 하세요!”
“맞습니다! 제발 그만하십시오!”
한구인의 절규는 구경꾼들의 감탄에 섞여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제 그만, 됐으니까아…….”
“설하 씨. 제발, 아이돌이 돼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백설하는 열기를 느꼈다.
얼굴에 피가 전부 몰려 있는 듯했다.
뇌에 피가 쏠려 폭발할 것만 같았다.
시야가 흔들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백설하의 눈에 성필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성필도 백설하 못지않게 부끄러웠다.
본인의 진심을 말하는 건 이 세상 누구라도 부끄러운 법이다.
“제발요.”
진심이 거절당하는 건 이전에 했던 제안과 차원이 달랐다.
‘가로 엔터의 연습생이 되어 달라’와 ‘아이돌이 되어 달라’의 무게는 성필의 진심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만약 이번에 거절당한다면, 성필은 탈진해서 쓰러질지도 몰랐다.
“세상 모두가 설하 씨를 볼 수 있게 해주세요.”
* * *
“나를 쪽팔려 죽게 할 셈이구나, 너.”
홍규헌의 얼굴이 당근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녀의 앞에선 성필의 고백이 영상으로 재생됐다.
같이 보는 성필도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걸 왜 찍었어요?”
“박 이사님이 트레이너님한테 위압을 행사했단 이유로 잡혀갈 때를 대비해서 찍었습니다. 거의 언어폭력이었습니다. 폭력이 인간의 행동을 강제한단 의미에서 말입니다.”
“…….”
성필도 동감했다.
영상으로만 보는데도 압박감이 대단했다.
“뭐어, 그게 효과가 있긴 했네.”
백설하는 오늘 곧장 가로 엔터로 왔다. 그리고 기본적인 보컬, 댄스, 카메라 테스트를 받은 뒤 쏜살같이 사라졌다.
“예쁘긴 해.”
“인정합니다.”
“근데 춤추는 거 봤냐?”
“…….”
객관적으로 백설하의 춤은 기대 이하였다.
가장 자신 있는 것을 한 모양인데, 호흡이 딸려서 후반에 가면 동작이 전부 흐트러졌었다.
“변호하겠습니다.”
“해봐.”
“아이돌에 실패한 반동으로 제약을 전부 풀었던 거 아닐까요?”
“뭔 제약.”
“먹고 싶은 거 맘대로 먹고, 운동도 안 하고, 그런 것들요. 아이돌 춤이 좀 힘듭니까. 1년 쉬면 힘들겠죠 당연히. 그래도 1절까지는 동작도 딱딱 맞고 괜찮았잖아요.”
“맞아. 안무 잊어버려서 어리둥절해 하는 것도 좋더라. 예능에서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어, 억지로 데려온 것 치곤 잘한 거 맞잖아요.”
“알겠어 알겠어. 욕 그만할게.”
홍규헌은 다음 영상으로 넘어갔다. 백설하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이건 말할 필요도 없다.”
세 명의 만장일치로, 노래는 어떤 방식으로든 꼬집을 부분이 없단 게 판명됐다.
홍규헌은 직접 듣는 순간 소름이 돋았을 정도였다.
“대박이야. 임시 트레이너라고 했었지. 정말 트레이너 할 실력이 되더라.”
당연한 말이지만, 트레이너는 아이돌보다 더 나아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백설하는 임시 트레이너라곤 하지만, 현역 아이돌조차 지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비주얼인데.”
셋은 가까이 모여 카메라 테스트 영상을 보았다. 백설하가 여러 각도, 포즈로 찍혀 있었다.
“키가 몇이라고?”
“171cm입니다.”
“음, 한 이사 네 감상 말해봐.”
“……뭘 말입니까?”
“얼굴, 몸.”
한구인은 윤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사람을 품평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상이 이성이라니 더 그랬다.
“예쁩니다.”
“몸은?”
“사장님…….”
“한 이사 너 가로 엔터 이사야. 우리가 하는 일이 뭐야? 네 감상을 객관화하는 게 중요해. 빨리 말해봐.”
한구인은 죄라도 짓는 기색으로 영상을 쭉 보았다.
“비율이 좋습니다.”
“또?”
“골반이…… 넓네요. 허벅지도…….”
홍규헌이 경멸하는 시선을 던지자 한구인은 울상이 됐다.
“안 한다고 했잖습니까!”
“장난친 거야. 울지 마. 뚝. 박 이사 네 의견은 어때? 아니다, 넌 그 고백으로 전부 설명했어. 말 안 해도 돼.”
“…….”
“뭐랬더라. 눈 아래의 눈? 순결이니 백설이니 그런 말이었던 거 같은데. 어우, 소름 돋아.”
“…….”
“미안. 사과할 테니까 그렇게 보지 마. 사람 죽이겠다 야.”
홍규헌은 둘을 놀리는 게 굉장히 즐거웠다.
실컷 즐긴 뒤,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단기 트레이닝으로 한 달 지켜보자. 버틸 수 있는지 없는지. 월말 평가로 정식 연습생으로 들일지 결정할게. 솔직하게 말하면 리카 때처럼 확신은 없어. 괜찮지?”
“네.”
성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홍규헌이 거부하기라도 했으면 싸워서라도 받아들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백설하에 대한 사안은 그럭저럭 마무리됐다.
* * *
“방금 뭐라고 했어?”
백설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다시 말해봐.”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백설하는 시선을 내리까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 아, 아아, 아이돌…….”
“그 짓거리를 또 하겠다고? 너 미쳤어? 7년을 버려놓고도 정신을 못 차려?!”
어머니의 노호가 집안을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