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왜 회사 분을 데려오신 거지?’
백설하는 영락없이 성필이 작업을 건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맞은편에 성필뿐 아니라 한구인까지 앉자 혼란이 일었다.
‘아! 저분이 근처에 볼일이 있으셔서 같이 오셨나? 그렇겠다.’
백설하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음료는 벌써 시키셨어요?”
“아뇨. 오시면 주문하려고 했어요.”
“메뉴는 뭘로 하실래요? 저희 쪽에서 살게요. 한 이사님은?”
“저는 녹차라떼로 부탁드립니다.”
성필은 주문을 수합하더니 카운터로 갔다.
여기서 백설하는 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금방 갈 줄 알았던 한구인이 음료까지 주문한 것이다.
‘아! 테이크아웃 하시려는 거구나.’
그녀의 예상은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지 못했다.
둘만 남은 자리, 처음 만나는 사람들 특유의 어색한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크흠.”
한구인은 가볍게 헛기침을 해서 주의를 모았다. 그리고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서 배운 것을 실천했다.
“귀걸이 예쁘십니다. 어디서 사셨습니까?”
“네? 그냥 노점에서…… 가다가 예뻐 보여서…….”
“그렇군요.”
한구인은 질문을 가다듬었다.
“귀는 언제 뚫으셨죠?”
“17살이요.”
“그렇군요.”
“…….”
“피어싱도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네.”
“…….”
“…….”
한구인은 닳도록 읽은 인간관계론의 구절을 계속 떠올렸다. 그리고 데일 카네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큰일이다. 그냥 만나는 거였으면 이렇게 안 어색했을 텐데.’
가로 엔터에 연습생으로 들어올지도 모르는 귀중한 사람과 만난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대차게 꼬였다.
혹시나 말실수해서 호감도를 깎아 먹지나 않을까 걱정됐다.
두 사람이 저마다의 이유로 끙끙대는 사이, 성필이 음료를 받아왔다.
둘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 에스프레소 시키는 사람 처음 봐요.”
백설하의 메뉴는 에스프레소였다.
흰 접시에 작디작은 컵이 올려져 있었다.
“아침에 밥을 많이 먹어서…….”
속이 더부룩하다, 라고 말하려던 백설하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남녀가 만나는 자리에서 하기엔 품위 없는 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에스프레소 좋아해서요.”
“원두는 어떤 걸 좋아하십니까?”
“……네?”
“저는 조금 클래식한 느낌도 들긴 하지만, 자메이카 블루 마운틴을 가장 좋아합니다. 밸런스가 좋죠. 특별한 맛을 느끼고 싶지 않으면 대부분은 블루 마운틴을 선호합니다.”
한구인은 자신의 취향을 열렬히 피력했다.
내심 ‘커피’라는 공통점을 발견해서 기쁘기까지 했다. 이대로 이야기를 잘 이어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는 그렇게 자세하게는 몰라서…….”
안타깝게도 백설하는 그의 이야기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구인이 입을 다물고 성필을 보았다.
자신은 어떻게 대화를 틀 방도가 없으니 도와달란 것이었다.
“전 에스프레소는 마셔본 적이 없어요. 매일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거든요. 근데 아메리카노가 그거죠? 물에다 에스프레소 탄 거.”
“네, 맞아요. 저는 아메리카노는 밍밍해서 잘 못 먹겠더라고요.”
“근데 확실히 프랜차이즈마다 아메리카노 맛이 조금씩 달라요. 원두가 다른가? 에스프레소도 그렇죠?”
“네. 미묘하지만 다른 맛이 있죠. 예를 들어 여기는…….”
“살짝 더 쓰죠?”
“네, 맞아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었네요.”
성필은 커피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잘 끌고 갔다.
타인의 흥미에 따라 분위기를 푸는 기술은 질리도록 익혀왔다.
매니저란 일 자체가 대화를 트는 기술이 없으면 할 수 없었다.
한구인은 20분 넘게 이어지는 토크를 들으며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로 20분 넘게 대화할 수 있지?’
백설하의 웃음이 점점 더 많아졌다.
그녀는 성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손뼉을 치며 웃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성필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해온 아이스 브레이킹 기술이 빛을 발했다.
“앗, 커피가 다 식었어요. 한 모금도 안 마셨네요.”
백설하는 시간이 지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웃기만 한 것 같은데 벌써 40분을 훌쩍 넘었다. 성필도 백설하의 반응이 좋았기에 계속 이야기하다가 멈추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한구인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가끔 대화에 참여할 뿐 가만히 있었다.
‘……안 가시나?’
백설하는 한구인과 성필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왜 한구인이 계속 자리에 버티고 있는지 짐작조차 안 갔다.
“죄송해요. 본론 없이 시간을 너무 끌었네.”
“뭐가요?”
“오늘 트레이너님을 뵙자고 한 건요, 짐작하셨겠지만 연습생 제의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네?”
“설마 먼저 연락 주실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제가 그때…… 좀 꼴사나운 짓을 했잖아요. 근데 어떻게 미리 제 의도를 알고 연락 해주셨네요.”
“……네?”
“하긴, 리카가 미리 물어보기도 했으니 당연히 아셨겠네요.”
백설하의 머릿속이 뒤엉켰다.
이전까지 굳게 믿고 있던 사실이 깨어지면서 이 상황이 다르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한구인이 계속 이 자리에 버티고 있는 이유를.
‘근처에 일이 있어서 기다리시는 게 아니었어?’
한구인은 가로 엔터의 이사로서 온 것이다.
성필과 함께 백설하를 설득하기 위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백설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연습생이요? 저요?”
백설하가 놀라자 성필도 당황했다.
“이미 알고 계신 거 아니었나요?”
“아, 아뇨. 오늘 이거 데이트라고…… 생각했…….”
백설하는 성필과 한구인의 눈치를 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성필의 말문이 닫혔다.
한구인은 남에게 말하지 못할 희열을 느꼈다.
‘내가 맞았어! 그린 라이트 맞았잖아!’
사람의 감정을 잘 맞추지 못하는 그로서는 오늘의 사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세 사람이 저마다의 이유로 침묵을 지켰다.
그것을 깬 건 백설하였다.
“저 21살이에요.”
자신의 나이를 말하는 건 완곡한 거절이나 다름없었다.
21살에 다시 연습생이 된다? 사람들이 비웃을 게 뻔했다.
옛날에 실패했던 꿈을 포기하지 못해, 가망 없는 줄을 잡으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시 아이돌 활동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성필은 구구절절 이유를 늘어놓기보다 백설하의 의지를 물었다.
그 질문에, 백설하는 심장이 찔린 듯했다.
아이돌을 하고 싶은가?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있던 질문이었다.
“이전 회사 일은 들었습니다. 경영상의 이유로 그룹이 해체됐다고요.”
“……네.”
“아쉬우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쉽다마다.
당시의 백설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초등학생 고학년부터 아이돌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기획사를 전전하며 겨우 얻은 기회다.
그 기회가 바닥부터 꺼졌는데 아쉬움뿐이겠는가? 세상에 대한 증오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예전에 트레이너님이 활동하셨을 때 영상과 곡은 전부 확인했습니다.”
백설하로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었다.
그때 사장이 했던 말이 비수처럼 남아 있었기에.
‘너희가 못 떠서 해체하는 거야. 누굴 원망해?’
과거, 백설하가 아이돌로 활동했을 때 만들었던 곡은 추억도 뭣도 아니었다.
사장의 말과 합쳐져, 백설하를 자기혐오의 구렁으로 모는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다시 그 이야기가 나오니, 백설하는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좋았습니다.”
하지만 성필은 그것을 긍정했다.
백설하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트레이너님이 좋았습니다. 적어도 저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이대로 사람들에게서 잊혀질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실례되는 줄 알지만, 이렇게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
“가로 엔터에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만약 성필이 사장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반드시 데뷔시켜주겠습니다’란 말까지 뱉었으리라.
그때 한구인이 성필의 옆구리를 찔렀다.
성필은 고개를 살짝 숙인 백설하에게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하며 일어났다.
둘은 카페를 나갔다.
“박 이사님, 말씀이 너무 적극적입니다. 마치 바로 연습생으로 받아들일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한구인은 성필의 말을 듣는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성필의 어조는 백설하를 꼭 데뷔시키겠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백설하가 오해할 소지가 많았다.
“최종적인 결정은 사장님이 합니다. 그렇게 백지수표를 마음대로 던지면 박 이사님에게도, 트레이너님에게도 상처가 될 겁니다.”
“알아요. 제가 너무 나가긴 했죠.”
“네. 다시 들어가면 정정하시고…….”
“근데 좀 보세요.”
성필은 한구인의 뒤에서 그의 두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그가 백설하가 있는 방향을 보도록 만들었다.
카페의 유리 벽 너머로 고민하고 있는 백설하가 눈에 들어왔다.
“안 보이세요?”
“보입니다. 트레이너님이 계시네요.”
“아니, 그거 말고요. 사람 자체에서 풍기는 그런 아우라가 있잖아요.”
“적어도 빛 같은 건 안 보입니다만…….”
“자세히 보세요.”
성필은 한구인을 한 걸음 앞으로 가게 만들었다.
“저 하얀 피부. 도자기처럼 매끈하잖아요. 가까이 가면 얼굴이 비칠 것 같아요.”
“음.”
“머리칼은 또 어떻고요. 가까이서 보셨어요? 비단처럼, 아니, 강물처럼 흘러내리는 거요. 트레이너님이 춤추면 밤하늘처럼 일렁일 거예요. 상상해보세요.”
“으음…….”
“눈동자도 마주 보셨어요? 안에 진짜 우주가 있어요. 웃는 모습은요? 저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는데. 트레이너님은, 진짜, 진짜예요.”
성필도 오늘 백설하와 마주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자신이 이토록 그녀에게 빠졌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와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눠보니 알 수 있었다.
“진짜 재능이 있어요.”
“……아이돌의 재능이란 건 춤이나 노래 아닙니까? 외모가 포함되긴 한데, 아직 춤과 노래는 직접 확인하지도 못했잖습니까.”
“아뇨. 아이돌의 재능은 그런 세부적인 게 아니라 매력 그 자체예요. 단순히 수로 따지면 판사나 검사, 의사보다 훨씬 수가 적은 희소하기 그지없는 재능이요.”
“그런 걸 볼 수 있단 겁니까?”
“물론 객관적인 기준은 아니죠. 근데 자세히 보세요. 트레이너님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끄는지요. 매력이 확확 느껴지잖아요.”
“으음, 모르겠는데…….”
한구인이 유리 벽에 얼굴을 가져갔다.
그때 둘은 근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몇 사람이 둘의 대화와 행동을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범죄 모의로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여자를 두고 어떤 부분이 아름다운지 줄줄 읊었으니.
“……들어갈까요?”
“네, 빨리 들어갑시다.”
둘은 다시 카페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업무 연락이 와서요. 생각은 좀 해보셨어요?”
“네. 죄송합니다. 저는 못 할 것 같아요.”
칼 같은 대답이었다.
이토록 직접적으로 거절당할 줄은 몰랐던 터라 두 사람은 한동안 답조차 할 수 없었다.
“왜…….”
라고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
백설하는 두 사람이 나간 사이 생각을 모두 정리했는지 막힘없이 이유를 풀어나갔다.
“다시 연습생 생활하긴 나이가…… 좀 있잖아요. 그리고 저도 사정이 있어서 지금 일을 관두긴 힘들어요. 겨우 일도 손에 잡혀가고, 시간 더 들이면 정식 트레이너도 될 수 있을 거 같구요.”
요컨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단 뜻이었다.
백설하는 유능하다.
아이돌 연습생 시기를 오래 보내는 동안 질리도록 노래를 불렀다.
그뿐 아니라 보컬에 관심이 많았기에 전문적인 지식도 습득했다. 남들이 대학 가서야 배울 것을 타고난 열정으로 독학했다.
덕분에 임시지만 유명 학원의 트레이너가 될 수 있었고, 경력만 쌓으면 정식 트레이너 자리가 보장됐다.
“모처럼 제안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결판이 났다.
당사자가 명확하게 거절했으면 더는 빼도 박도 못한다.
그저 체념하고 수긍하는 수밖에.
한구인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듯 성필을 보았다. 성필이라고 무언가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더 설득을 이어나갈 수도 있다.
‘금전적인 문제가 있구나.’
성필은 미래를 안다.
몇 년 뒤 백설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고, 그녀의 내막이 방송의 재미를 위해 속속들이 밝혀진다.
그녀는 준우승을 하곤 울면서 말한다.
‘정말 아이돌로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그만두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 소감은 나중에라도 꿈을 이룬 사람의 훈훈한 이야기로 끝났다.
하지만 성필은 그 안에서 백설하의 지독한 후회를 느꼈다.
‘트레이너님은 아이돌에 관심이 없단 말은 한 번도 안 했어. 들었던 이유라곤 경력과 나이야. 즉, 돈과 주변의 시선이 걱정이란 거지.’
주변의 시선이야 성필이 몇십 번이고 설득할 수 있으나, 돈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결국 성필은 설득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가요. 아쉽습니다.”
백설하는 묵묵히 고개만 숙였다.
셋은 카페 밖으로 나왔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감사해요.”
“아닙니다. 도리어 죄송하네요. 오늘 오신 게…… 그…… 목적이…….”
성필은 말실수했음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백설하는 부끄러운 기색으로 웃었다.
“오해라도 이렇게 나와주셔서 기쁘네요. 그런 이유라고 생각하셨으면 거절하는 게 당연했을 건데. 제 매력이 트레이너님처럼 젊으신 분에게도 통하는 줄 몰랐네요.”
“아, 아하하…….”
“농담입니다. 저 병원에 보낸 거 미안해서 나오신 거죠? 아무튼,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앞으로도 리카 잘 부탁드려요.”
“아, 네. 저도 오늘 즐거웠어요.”
그렇게 성필은 백설하를 떠나보냈다.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그녀를 아련하게 보고 있자니 입 안에 씁쓸한 맛이 퍼졌다.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하십니까.”
“제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거든요. 제가 약속할 수 있는 건 데뷔가 전부인데, 그걸로는 트레이너님의 현재 문제를 해결 못 해요.”
“문제요?”
한구인은 아리송한 얼굴이었으나 더 묻진 않았다. 성필은 백설하가 떠나간 반대편으로 걸었다.
몇 걸음 뗐을까, 성필이 멈춰 섰다.
그리고 뒤로 돌았다.
그리고 또 뛰었다.
“박 이사님……?!”
한구인이 놀라서 성필을 쫓았으나, 그는 이미 저 멀리 가 있었다.
사방을 가득 채우는 인파를 밀치며 성필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백설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기에 성필의 뜀박질 소리를 듣지 못했다.
성필은 그녀의 앞에 섰다.
갑작스런 등장에 백설하가 놀라면서 이어폰을 뺐다.
“이사님?”
“못 물어본 게 있어서요.”
“어어, 네. 말씀하세요.”
성필은 호흡을 가다듬고 진중히 물었다.
“아이돌, 하고 싶으세요?”
백설하가 얼음처럼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