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화
“음식 옮기는 것 좀 도와줘.”
성필과 홍규헌은 접시를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휴양지와 같은 인테리어와 그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정경은 성필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와, 한강이 보이네. 여기 펜트하우스였구나.’
풍경에 감탄만 하면 좋으련만, 성필은 세속적으로 이 집이 얼마인지부터 따져보았다.
안타깝게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먹자.”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음식은 간단했다.
구운 식빵, 베이컨, 매쉬 포테이토, 샐러드, 거기에 블랙커피가 은은한 향을 뿜어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위가 찌르르 울렸다. 술로 점철된 위벽을 커피가 씻어내는 듯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이렇게 멋들어진 곳에서 아침 식사를 하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심지어 홍규헌과 함께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래도 느낌 있네.’
성필은 잼 바른 식빵을 먹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홍규헌에게서 시선을 돌려 탁 트인 전망을 보니, 아까까지 머리를 휘젓던 곤혹스러움이 조금이나마 사라졌다.
“어제 자면서 자꾸 뒤척이던데, 불편했어?”
성필은 당황해서 쿨럭였다. 황급히 커피를 마셔서 음식물을 목구멍 너머로 보냈다.
간신히 억눌렀던 불안이 다시금 기어 나왔다.
‘나 어제 대체 뭘 한 거야?’
왜 자신은 이 집에 있는 걸까?
홍규헌은 성필이 자면서 뒤척였단 것을 어떻게 알지?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지?
옷은 누가 갈아입혔지?
모든 게 의문이었다.
아주 약간이라도 기억이 나면 좋으련만.
‘내가 사장님이랑 잔 거야? 술김에?’
그래 놓고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그만큼 쓰레기도 없을 것이다.
‘아니, 잠깐. 내가 사장님 집에 쳐들어왔을 리는 없잖아. 그럼 사장님이 나를 집에 초대했다는 건데. 사장님이 나를 유혹한 거라면…….’
성필은 그 가설을 머릿속 깊숙이 묻었다.
절대 그럴 리는 없다.
자신이 뭐가 이쁘다고 그러겠는가.
‘아니면 둘 다 인사불성이 돼서 예상치 못한 아방튀르를…….’
“왜 대답이 없어?”
“어, 아뇨. 불편하진 않았습니다. 크흠.”
“다행이네.”
홍규헌은 커피만 홀짝일 뿐 도통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눈은 성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성필은 그 미소의 뜻을 알지 못해 속이 탔다.
“어제 재밌었지?”
“……뭐, 뭐가요?”
“나도 그렇게 술 먹은 건 오랜만이었어.”
“어, 맞아요. 그러게요. 저도 오랜만에 마음껏 마셨습니다.”
“근데 너 특이하다.”
“네?”
“보통은 어색해서 바로 가려고 하지 않나.”
그 말을 하며, 홍규헌은 처음으로 성필에게서 눈을 뗐다. 그녀는 아래로 펼쳐진 한강을 보면서 커피잔을 가늘게 쓸었다.
그 행동에 성필은 체할 것만 같았다.
‘어색하다니? 어색할 이유가 있나? 당연히 있으니까 저런 말을 하시겠지! 생각해, 생각해라 박성필.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아니면 밤이 지났으니 옛날 일이란 거야? 생각보다 자유로운 영혼이구나.”
성필은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 제가 어제 무슨 짓을 했는지 정말 조금도 기억이 안 납니다! 쓰레기, 쓰레기 같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는데 정말 기억이 안 나요!”
“흐응…….”
홍규헌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팔짱을 꼈다.
성필은 지금에야말로 확신했다. 자신이 무슨 짓거리를 했다는 것을.
“그렇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뭐든…….”
“박 이사님 일어나셨습니까. 음? 무릎은 왜 꿇고 계십니까?”
테라스 문이 열리며 한구인이 나타났다.
“……응?”
“한 이사, 좋은 아침.”
“아까 인사하셨잖습니까. 이제 가보겠습니다.”
“그래. 어제 고생했어.”
“아닙니다.”
그때 한구인의 뒤에서 리카도 나타났다. 그녀는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다.
“사장님 안녕히 계세요!”
“리카도 잘 가.”
“박 이사님도 일어나셨네요.”
리카는 그리 말하곤 작게 웃었다. 마치 성필이 웃겨서 참지 못하는 듯했다.
“박 이사님은 술 드시면 안 되겠어요!”
“뭐가, 왜?”
“설마 기억 하나도 안 나세요? 아하하! 한 이사님 들으셨어요? 기억이 안 난대요!”
한구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곤 홍규헌에게 고개를 숙인 뒤 리카와 함께 사라졌다.
성필은 얼떨떨하게 홍규헌을 보았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뭐. 너랑 내가 자기라도 했을까 봐?”
“그, 그런데 왜 아까 이상한 어조로…….”
“놀린 거지. 아, 재밌었다. 근데 잤으면 뭐 어때서. 대죄라도 지은 것처럼 무릎이나 꿇고 말야. 아주 순정파야?”
성필은 천천히 일어나서 무릎을 털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다 같이 왔던 거네요.”
“응. 그러고 또 놀았어.”
“리카는 왜 저를 비웃은 겁니까?”
홍규헌은 핸드폰에서 영상을 하나 재생했다. 술로 떡이 된 성필이 길거리에 드러누운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다들 말리지 않고 웃기만 하는 게 포인트였다.
“그만.”
“응? 이제 하이라이트 나오는데. 이거 말고도 더 있어.”
“그만…… 해주세요.”
“그럴까? 아무튼 우리 박 이사 더 마음에 들어. 난 놀 때 확실하게 정신줄 놓는 사람이 좋더라.”
말 그대로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성필은 부끄러움에 당장 이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명을 지를 것이다.
“하하, 네, 재밌네요, 진짜.”
“그치. 30살 먹은 사람이 대학 신입생처럼 굴면 재밌지.”
“…….”
“얼굴 펴. 우리끼리 얘기 다 끝냈어. 앞으로 어제 네가 했던 일 절대 입 밖으로 안 꺼낼 거야. 부끄럽잖아? 그리고 나중에 한 이사한테 꼭 고맙다고 해. 걔가 거의 너 들고 다녔어.”
“……네.”
“아아, 그래도 이건 말해야겠네. 너 어제 나 좋아한다고 소리치고 그랬거든. 무릎까지 꿇고. 엄청 취해 있어서 대답은 안 했는데, 술 깬 거 같으니 대답해줄게.”
“제, 제가요? 아니, 그건…….”
“사장으로서 좋아하고 존경한다고. 이 기획사에 뼈를 묻을 테니, 자기 진심을 알아달라고 했잖아.”
“아, 아아.”
성필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자신이 술김에 여자한테 마구잡이로 고백해대는 쓰레기였다면, 더는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없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석세스 엔터에서 김태훈에게 배신당한 반동으로, 성필은 가로 엔터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그 마음을 들켰다고 생각하니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나도 박 이사 좋아해. 이만큼.”
홍규헌이 엄지와 검지를 모아 원을 만들었다. 동전 하나 들어갈 작은 크기였다.
성필은 픽 웃었다.
“동전 크기면 앞으로 갈 길이 머네요. 더 신뢰받을 수 있도록 노력…….”
“이 부분을 제외한 모든 곳만큼.”
홍규헌이 밝게 웃었다. 역으로 성필은 빈틈이 찔린 나머지 표정이 굳었다.
“나머지 부분도 채울 수 있도록 앞으로도 잘 부탁해. 믿고 있어.”
* * *
홍규헌은 성필이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테라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커피를 음미하고 있자 성필이 떠올랐다.
‘믿고 있어’란 말에 성필은 상당히 감동한 것처럼 보였다.
‘이걸로 거리를 좀 좁혔다면 좋을 텐데.’
성필이 술을 먹고 개가 됐던 날. 그는 홍규헌을 붙잡고 아이돌 산업에 대한 비전과 본인의 꿈, 그리고 그녀에 대한 헌신을 이야기했다.
듣는 쪽이 부끄러워질 정도의 말이었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헛웃음이 나왔다.
‘또 죽도록 술 먹여보고 싶네.’
은은히 미소를 띠고 있을 때, 테이블에 둔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작은 오빠’란 단어가 떠오르자, 홍규헌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응, 오빠야. 세계 여행은 재밌었…….”
[실패했다면서.]
첫마디부터 아픈 곳을 찔러온다.
홍규헌은 겨우 욕지거리를 삼켰다.
“나한테 진짜 관심 없나 보다. 전에 만들던 그룹 해체한 게 언제인데 지금 와서 이래.”
[지금이라도 그만둬. 넌 사업에 재능 없어.]
“겨우 한 번이야. 한 번으로 오빠야가 어떻게…….”
[사업 영역 선택부터 알 수 있어.]
확실히 아이돌이란 게 초심자가 뛰어들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홍규헌은 성필이 남긴 베이컨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오빠야. 내 손에 들어온 건 내가 스스로 놓기 전까지 내 거야. 절대 손에서 안 놔. 건물부터 사람, 쌀 한 톨까지. 그만해라 마라, 그딴 말 오빠야한테 들을 거 아니야. 그니까 나한테 신경 그만 쓰고, 오빠야는 그 잘난 종이 쪼가리나 팔아.”
신랄한 대답에 작은 오빠는 말이 막혔다.
이윽고 나온 말은 아까보다 부드러웠다.
[잘 지내고 있긴 해?]
“응.”
[술은…….]
“알아, 알아. 우리 집안 병력이니까 조심하라고. 나도 어지간히 친한 사람 아니고선 안 마시도록 노력하고 있어.”
* * *
“와, 길거리에서 무릎 꿇고 고백한 사람이다. 사장님한테 답은 받으셨어요?”
성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붉어져서 리카를 쫓았다. 그녀는 크게 웃으며 도망쳤다.
회사를 전부 돌아다닌 끝에 붙잡힌 리카는 형벌에 처해졌다.
“한 이사님. 오늘 리카 수업 10분 연장해주세요.”
“안 돼!”
“알겠습니다. 진도가 조금 모자랐는데 보충할 수 있겠네요.”
“안 돼요!”
리카는 공식적으로 KS 엔터에서 나왔다. 그리고 가로 엔터의 정식 연습생이 됐다.
그 계약의 일환으로 한구인에게 공부를 배웠다.
한구인은 교사로서의 재능도 있었다. 리카는 그의 지도에 힘입어 학업 능력이 일취월장했다.
“마더, 파더, 워터, 파이어.”
“잘하셨습니다. 이제 대부분의 단어는 읽을 수 있게 됐네요.”
영어 발음기호도 몰랐던 리카였으나, 지금은 몇몇 개의 단어는 쓸 수 있게 되기까지 했다.
“리카 가르치는 건 어때?”
“배우는 게 빠릅니다. 역시 한국어를 1년 만에 독학한 분입니다.”
“참 신기하지. 영어는 읽지도 못하면서 한국어는 그렇게 빨리 배우고. 확실히 흥미란 게 중요한 거 같아.”
홍규헌은 학부모처럼 리카의 학업 성취를 검사했다. 그게 계약상의 의무이기도 했고, 진심으로 리카의 진로를 걱정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리카는 가로 엔터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적응과는 별개로, 가로 엔터의 경영진은 한 가지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네 말은 대략 알겠어.”
홍규헌은 성필이 작성해 온 계획서를 천천히 넘겼다.
이미 여러 번 읽었으나, 작성자의 앞에서 꼬집을 부분이 있으니 정확한 정보가 중요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홍규헌이 입을 열었다.
“음악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음악과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발전해야 한다.”
“음음.”
“음악은 인류의 사상과 감정을 담는다. 살아온 환경, 국가, 문화권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이 전체를 표현하는 게 음악이며…….”
“그렇습니다.”
“그 창조자인 아티스트는 상품으로서 대해지면 안 된다.”
“음, 구구절절 다 옳은 말입니다.”
“……맞장구 그만 쳐.”
한구인은 어지간히 성필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 홍규헌에게 입이 봉인 당한 뒤에도 눈빛은 죽지 않았다.
“우리의 아이돌이 음악에 담아야 할 건 자신만의 꿈과 생각, 사랑, 삶, 아름다움이다. 팬의 입장에서 교감하고 위로하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아이돌은 삭막한 현대 사회에 인간애와 인본주의를 전파할 것이다.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 트렌드다.”
“캬아.”
“……획일적인 능력주의, 경쟁주의, 캐피탈리즘과 메리토크라시를 벗어나 인간의 다원성과 가치를 존중하는 음악을…… 하아.”
홍규헌은 한숨을 쉬고 계획서를 내려놓았다.
“이런 건 아무래도 좋아.”
“아무래도 좋다뇨…….”
성필은 그 말에 조금 실망했다.
물론 저 말들은 전부 뜬구름 잡는 소리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성필은 미래에서 회귀한 입장으로서, 저게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란 것을 안다.
성필이 계획서에 쓴 건, 미래에 전 세계를 휩쓸 그룹 ‘WTP’가 받은 평가였다.
즉, 그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의 분석이나 다름없었다.
“맞습니다. 아무래도 좋은 게 아닙니다. 이 글 전체가 마음을 울리고 있잖습니까.”
한구인은 드물게도 들떠 있었다.
성필의 이상적인 글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구인은 개인적으로 성필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마음을 울리긴 하지.”
홍규헌도 어렸던 시절 아이돌에게 위로받았던 적이 있다. 그러니 성필의 글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아이돌이란 꿈과 희망을 주는 존재라는 것에 백번 천번 동의했다.
“여기 트레이닝 목록 있잖아. 댄스, 보컬, 중국어 회화, 영어 회화, 연기, 커뮤니케이션 훈련. 외국어는 나중에 한다고 치면, 나머지는 나도 동의해. 그런데 이건 왜 있어?”
홍규헌이 가리키는 곳에는 ‘작곡, 작사, 악기연주’란 단어가 있었다.
성필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티스트 본인의 사상을 직접 표현하려면 당연히 작곡 능력이 있어야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전문적으로 작곡도 배우지 않은 아이돌의 곡을 앨범에 담을 수 있겠어?”
“그러니까 지금부터 가르치면 되죠.”
“곡은 작곡가랑 작사가한테 맡기면 되잖아. 왜 업계의 전문가를 두고 굳이 아이돌이 직접 작곡해?”
“아이돌은 아티스트니까요.”
홍규헌은 웬만해선 가로 엔터의 지출을 줄이고 싶었다. 그리고 작곡은 프로그램과 기기부터 레슨비까지, 어느 것 하나 싼 게 없다.
심지어 미래에 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능력이다.
돈 낭비나 다름없다.
“계획서에도 쓰여 있다시피 아이돌 하나하나가 아티스트로서 본인의 사상을 표현하는 건, 팬들과의 교감을 늘리는 동시에 곡의 진실성을 높이는…….”
홍규헌은 도와달라는 뜻으로 한구인을 보았다.
한구인은 가로 엔터의 재정을 책임졌다. 그라면 성필의 행태에 통렬한 일침을 놓을 수 있으리라.
“박 이사님 말이 맞습니다. 작곡이랑 작사도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홍규헌은 부하 둘이 동의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