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화
한구인은 머릿속에 저장된 반박 목록을 뒤졌다.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감정을 실어서 말하는 건 힘들었다.
창피함 때문에 화면에 시선을 주는 것조차 꺼려졌다.
[할 말이 많습니다만 제쳐두도록 하죠. 그건 그렇고, 리카가 그런 말까지 했을 줄은 몰랐네요. 아무리 그래도 부모인데 무슨 악당처럼 묘사하고 말입니다.]
리카의 아버지, 이시카와 켄타로는 씁쓸함을 머금었다.
아까 한구인에게 들었던 말에 반박할 거리는 넘쳐났다.
굳이 논리적으로 대답하지 않더라도, 당신이 뭔데 집안 사정에 간섭하냐고만 해도 쉽사리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우리 집사람도, 저도 가난한 환경에 자랐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평범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식주, 그리고 가족과의 평온한 일상. 우리 리카도 평범하게 살길 바랐습니다.]
평범함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조건이 필요하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졸이란 타이틀이 중요하다. 명문과 비명문을 따지며, 학력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되는 경향이 강하다.
적어도 괜찮은 대학은 나와야 한다.
그게 바로 평범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조건이다.
[한 이사님은 모르실 겁니다. 리카가 나쁜 길로 빠지진 않을까 얼마나 걱정했는지요. 하지만 이제 보니, 저희의 걱정은 껍데기였군요. 좋은 성적이 바른길로 가고 있단 보장도 아닌데 말입니다. 리카.]
아버지의 부름에 리카가 쭈뼛거리며 화면 앞에 섰다.
[남들한테 가족 욕하고 다니니 좋으냐?]
“파파, 딱히 욕은 아니구, 으응, 뭐랄까…….”
[KS 엔터 데뷔조에도 떨어졌다면서.]
“으, 응…….”
켄타로가 리카에게 돌아오라고 하는 이유도 데뷔조에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한 번 해봤으니 충분하지 않느냐고.
[힘냈구나.]
“……응?”
[박성필 이사님한테 들었다. KS 엔터가 어떤 곳인지, 거기서 데뷔 후보에 들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성필은 화면을 통해 회사를 구경시켜주는 동시에 리카의 가능성을 어필했다.
통역은 그녀의 삼촌에게 부탁했다.
그 때문에 짧게밖에 하지 못했으나, 리카의 업적을 설명해주긴 충분했다.
[미안하다. 갑자기 떠난 너한테 화가 나서,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관심도 안 가졌으니.]
리카의 눈가에 눈물이 핑 맺혔다.
“우, 우웅. 아니야. 괜찮아, 나.”
[한 이사님.]
갑자기 지목당한 한구인이 어깨를 떨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조곤조곤 설득해도 모자랄 판에 저희를 비난하시다니요?]
“…….”
[하지만 그래서 믿음이 갔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리카의 관점에서 봐주시는구나 해서요.]
“가, 감사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구인의 막무가내식 설명은 켄타로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보아야지요. 저도 제 딸이 성공하길 바라지만, 인생이 항상 성공하는 것만은 아니잖습니까.]
한구인의 켄타로의 요지를 즉시 이해했다.
“리카 씨의 공부도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일본의 고등학교 졸업 학력 인정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설령 리카 씨가 아이돌이 되지 않더라도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도록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계약서에도 명기되어 있는 부분이고…….”
[이해했습니다. 회사에서 신경 써 주신다면 저도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리카. 여기 있고 싶어?]
“……응! 나 꼭 최고의 아이돌이 돼서 테레비에도 나갈 거야!”
[알겠다.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와.]
“안 돌아가!”
[한 이사님, 저희 딸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켄타로가 고개를 숙였다.
한구인도 얼떨결에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영상통화는 끊긴 후였다.
침묵 속, 감동에 빠져 있던 리카는 너무도 빨리 끝나버린 면담에 당황했다.
“에? 오와리(끝)? 혼또(진짜)?”
부모님과 대화한 지 30분도 안 됐다. 그런데 벌써 허락을 받았다.
리카는 황당했고, 기뻤다.
한국에 남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뭐 어떻게 된 건데?”
“허락받았어요!”
“그래?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리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반면 홍규헌은 무표정으로 품에서 담배를 뒤졌다.
“한 이사, 잘했어. 네가 갑자기 소리 지를 땐 어떻게 되나 했는데.”
“……아뇨. 아니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겸손하긴.”
“정말입니다. 전부 박 이사님 덕입니다. 저는 그저 앵무새였습니다. 박 이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를 말한 게 전부죠.”
한구인은 손을 미세하게 떨며 팔짱을 꼈다.
원래 이런 감정적인 스타일로 설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특기는 논리적인 설명이었다.
하지만 성필의 강권으로 감정에 호소한 설득을 했을 뿐이다.
‘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었구나.’
항상 감수성이 모자라니, 눈치가 없니, 진지충이니 하는 말만 들으며 살았다.
그런데 오늘 그 벽을 깬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성필의 도움이 있었지만, 리카의 부모님을 감정으로 설득해낸 자신이 대견하기만 했다.
“전부 박 이사님 덕분입니다.”
한구인의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성필은 그게 공을 돌리는 것이라 여기며 손사래를 쳤다.
저마다 승리를 만끽하는 중, 소외되어 있던 리카의 삼촌이 헛기침했다.
“에…… 제가 한국에선 리카의 보호자입니다. 형한테 허락도 받았으니 계약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런데 분위기도 추스를 겸 5분만 쉬어도 될까요?”
“괜찮습니다.”
홍규헌은 양해를 구한 뒤 성필과 한구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을 베란다에 끌고 온 홍규헌은 둘의 등을 팡팡 쳤다.
“대견하다 임마들아! 잘했어 잘했어!”
홍규헌은 응접실에서의 분위기와 180도 달라져 있었다.
미소가 떨어지지 않고 귀까지 붉어져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다.
“이시카와네 부모가 반대한다고 했을 땐 어떻게 되나 했거든? 잘했어 너희 정말로! 한구인 너!”
“네, 사장님.”
“일본어 개잘해. 너 진짜 일본인 아니냐?”
“……?”
“그리고 또 박성필!”
“예.”
“한 이사가 한 말 알아듣지도 못했긴 한데. 암튼 기깔나는 글 써서 박 이사한테 넘긴 거지? 그걸로 이시카와 부모님들이 설득된 거고? 다들 잘했어 진짜, 정말.”
홍규헌은 깊이 숨을 내쉬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한구인이 재빨리 불을 붙여주었다.
“이게 우리 가로 엔터의 시작이야. 여기부터 시작하는 거야. 우리 잘해보자. 아니, 꼭 잘할 수 있어. 시작이 좋아.”
홍규헌은 리카를 얻은 게 어지간히 기뻤다. 그녀가 여태껏 내색하지 않았을 뿐, 사실 성필보다 리카를 더 바랐다.
이미 아이돌이 될 자질을 충분히 단련했단 부분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우리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자.”
홍규헌이 성필의 어깨를 꾹 쥐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신뢰가 차올랐다.
성필도 그것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옛 기억이 떠올랐다.
‘김태훈…….’
김태훈과 함께 석세스 엔터를 시작했을 때도, 그는 성필을 신뢰해주었다.
현재의 홍규헌과 비슷한 눈길을 주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리카를 가로 엔터로 데려온 건 기뻤지만, 성필은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내 입지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 해.’
그러니 아직 기뻐하긴 이르다.
가로 엔터의 핵심, 홍규헌이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 * *
성필은 리카의 삼촌을 배웅하기 위해 나갔다. 리카도 그와 함께 갔다.
사장실에는 홍규헌과 한구인만 남았다.
“리카는 보물이야.”
리카가 테스트 때 춘 춤인 ‘내꺼 해라’.
홍규헌에게도 익숙했다. 왜냐하면 이전에 만들었던 그룹 멤버들도 연습했던 것이니까.
다들 쉽게 소화하지 못했었다.
사실, 홍규헌과 한구인은 일부러 성필에게 모르는 척을 했었다.
성필이 리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로써 성필의 안목을 알 수 있었기에.
“리카를 꼭 잡아야 했어. 박 이사가 열정적이어서 다행이야.”
“그렇습니다.”
홍규헌은 선호하는 리더십 전략이 있었다.
그녀가 명령하고 부하가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하가 좋은 제안을 들고 와 보스를 설득하고, 인정받기 위해 분골쇄신하는 타입이 좋았다.
그러면 부하는 주도적으로 일하는 느낌을 받아 성취감을 얻고, 제 일이라 생각하기에 시킬 때보다 더욱 열심히 한다.
“빨리 포기하기라도 했으면 내가 명령했어야 했을 텐데. 딱 내가 좋아하는 인간상이야.”
홍규헌은 만족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녀는 한동안 천장을 보며 고민했다.
“그런데 박 이사 말이야. 은근히 나랑 거리 두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전에 있던 회사 때문일 겁니다.”
“아아.”
형제나 다름없던 김태훈의 총애가 굴러온 돌인 윤상열에게 넘어갔다.
바닥부터 같이 일했던 김태훈의 변심은 성필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으리라.
홍규헌은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참 나쁜 인간들 많아.”
“그렇습니다.”
“나는 절대 안 그러는데. 그냥 마음을 활짝 열어주면 좋겠다.”
그 말을 끝으로 사장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1층에서부터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성필과 리카일 것이다.
“좋아. 리카가 오기도 했으니 회식이라도 하자. 회사 사람들끼리 똘똘 뭉치는 계기로 삼자. 특히 박 이사랑 친해져야지.”
* * *
리카는 콧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걸었다. 그 모습을 보는 성필은 절로 미소가 나왔다.
앞에서는 홍규헌과 한구인이 도란도란 대화하며 걸어갔다.
회식하러 가는 밤거리는 평소보다 더 밝은 듯했다. 리카의 영입이라는 큰일을 완수한 뒤라서 더욱 그랬다.
‘잘 끝나서 다행이야.’
막상 회사에 있을 때는 실감이 안 났다.
하지만 홍규헌이 회식을 제안하고, 이렇게 식당에 가는 중이니 성공의 여운이 몸을 적셨다.
성필은 괴상한 음정의 노래까지 부르며 기뻐하는 리카에게 물었다.
“그렇게 좋아?”
“그럼요! 회식이라구요 회식! KS 엔터에 있을 때는 이런 적 없어요. 이러니까 막 가족 같은 느낌이랄까?”
“와, 너 말투 좀 오글거린다 야. ‘랄까’가 뭐냐 랄까가.”
“에헤헤.”
성필은 오글거린다고 했으나 이것도 리카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씹덕말투라고 하던가. 연예인의 귀염 터지는 말투 같은 거.’
리카가 데뷔하면 저런 일본어 번역체도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것이다.
“근데 리카야.”
“네?”
“좀 떨어져서 걸어.”
“앗, 혹시 서양인? 프라이베이트 공간 감각에 민감하신가?”
“너무 가깝잖아.”
“에에, 저는 이 정도가 딱 좋은데.”
“혹시라도 나한테 아양 떨어서 호감 사려는 거면 아서라. 나보다는 사장님한테 잘 보여야지.”
“들켰네요. 어장관리로 회사에서 내 편 하나 만들려고 했는데.”
“말하는 꼴 봐라. 선 넘네 진짜.”
“죄송합니다……. 노, 농담인 건 아시죠?”
“나도 농담이었어.”
그러고 보면 리카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거리감이랄 게 그다지 없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이러나?’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한구인이나 홍규헌에게는 달라붙지 않으니까.
‘옛 인연도 있고 하니 내가 편해서 그런 거겠지.’
회식 장소는 횟집이었다.
리카는 회를 좋아해서 가게 간판을 보자마자 환호했다. 하지만 가게 안은 리카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점원의 인사는 밝았으나 가게는 어두웠다.
조명 자체가 약했다.
남색이 가라앉은 듯한 사방의 테이블에서는 손님들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며 술을 마셨다.
“이거 횟집이 아니라 술집인 거…….”
“횟집이 술집이지. 저기 앉자.”
홍규헌과 한구인이 같은 편에, 리카와 성필이 그 맞은편에 앉았다.
점원이 오자 홍규헌은 능숙하게 4인 특선 메뉴와 술을 시켰다.
“신분증 좀 보여주실래요?”
점원은 리카를 보며 그리 말했으나, 반응한 건 홍규헌이었다.
“참나. 이 미모는 어딜 가든 오해를 불러일으키네. 자, 여기 봐요.”
“아, 예. 감사합니다…….”
“당황한 거 너무 눈에 보이시네. 저도 저 때문에 확인하는 거 아니라고 알거든요? 얘 빼고는 다 성인이에요. 쟤한테는 술 안 먹어요.”
“저, 손님. 테이블에 미성년자가 있으면 술을 시키실 수 없습니다.”
“네? 그럼 저 테이블은요?”
젊은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있는 곳이었다.
아이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고, 부부의 앞에는 술이 있었다.
“유아는 혹여나 마실 위험이 없으니…….”
“정말 얘한테는 안 먹인다니까요.”
“죄송합니다, 규정이라.”
“흠.”
홍규헌은 작게 혀를 차곤 리카에게 명령했다.
“리카, 옆 테이블로 옮겨.”
바로 옆에도 4인 테이블이 있었다. 점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홍규헌은 지갑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 리카에게 넘겼다.
“리카. 너 먹고 싶은 거 그 테이블에서 다 시켜. 자, 이러면 가게도 손해 아니니 괜찮죠? 같은 테이블 아니잖아요?”
결국 점원은 사장에게 갔다 온 뒤, 테이블을 따로 쓰면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리카는 따로 테이블에 앉았으나, 세 명의 테이블에 붙었기에 사실상 같이 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와, 사장님 대단해요. 저 같았으면 가게 나가거나 술 안 시켰을 거예요.”
리카는 왠지 홍규헌을 동경의 시선으로 보았다.
“사람이 안 된다는 말 듣는다고 바로 포기하면 안 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지. 알겠지 이시카와?”
“리카라고 불러주세요!”
성필은 리카가 홍규헌을 동경하듯 보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홍규헌에게는 당당한 기세가 있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매력이 풍겼다.
복장에서부터 그랬다.
흰색 와이셔츠에 하이웨스트 슬랙스.
셔츠의 소매를 전부 내리고 단추를 채운 것도 철저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야말로 깔끔함과 단정함의 극치였다.
“자, 리카가 들어온 걸 환영하며 건배!”
맥주잔 세 개와 음료잔 하나가 부딪혔다.
술이 들어가고 시간이 지나자 테이블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오늘 처음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리카는 물론이고, 거리감을 두던 성필도 완전히 즐기는 상태가 됐다.
“사장님.”
“응, 그래 우리 박 이사.”
“제지공장 있다고 하셨죠? 처음 들었을 때부터 물어보고 싶었거든요. 젊은 나이인데 기획사 사장인 것도 그렇고, 혹시 엄청 부자이신가요?”
“프핫! 어, 맞아. 엄청 부자야.”
“얼마나요?”
상대의 집안에 관해 물어보는 건 실례였으나, 술을 상당히 마신 성필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홍규헌 자체가 술자리에서 격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기술 덕에 이 자리의 모두 친근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느꼈다.
“하아, 글쎄다. 손가락으로는 못 세겠네. 좀 귀찮아. 감히 사장님한테 귀찮은 일을 시키려고?”
“말해주기 싫으면 마세요.”
“누가 싫대? 어디 보자. 아! 여기 나갈 때 안 취해 있으면 말해줄게.”
성필은 술김에 살짝 비웃음을 띄었다.
‘나한테 주량으로 승부를 걸어?’
하루가 멀다고 업계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졌던 성필이다.
어디 가서 술로 지지 않을 자신은 충분했다.
“무르기 없기입니다?”
“굿. 소맥으로 가자.”
성필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 *
“어, 어으…….”
목이 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성필은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일어나는 건 고사하고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뒹굴거리던 도중, 아득하게 샤워기 소리가 들렸다.
‘누가 씻고 있나. 누구지.’
잠결에 의문을 넘겼다.
다시 잠이 들고, 정신을 차리자 눈꺼풀 너머로 빛이 들어왔다.
날이 밝은 것이다.
성필은 그제야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즉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뭐야.”
처음 느껴보는 이불의 감촉.
세상에 이토록 부드러운 매트릭스와 이불, 베개가 존재해도 괜찮을까.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의 고급 소재였다.
사방의 인테리어들도 고급스럽기 그지없었다.
성필은 자신의 차림을 확인했다.
원래 옷은 어딜 가고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었다.
“어, 어?”
당황한 성필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복도가 길다.
끝에는 거실인 듯한 공간이 보였다. 그곳에서 무언가 굽는 소리와 향긋한 음식 내음이 풍겨왔다.
성필은 알 수 없는 예감에 덜덜 떨며 거실로 갔다. 거실과 연결된 주방에서 어느 여자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성필의 기척에 뒤로 돌아보았다.
“일어났네. 아침 먹어.”
“…….”
사장, 홍규헌이었다.
그녀의 차림은 성필이 입은 것과 같은 스타일의 티셔츠와 반바지였다.
‘내가 입은 옷은 사장님 꺼고. 이 집도 사장님 꺼고. 내가 잤던 곳도 사장님 방…….’
방금까지 성필을 괴롭히던 숙취가 확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