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한국에서 아이돌 연습생 생활을 했던 리카는 어째서 일본으로 돌아갔던 것일까?
막연히 데뷔에 실패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시카와네 부모님이 반대해?”
홍규헌도 예상외의 문제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녀가 상정했던 문제는 가로 엔터보다 더 좋은 기획사가 나타나거나, KS 엔터가 연습생 계약을 해지해주지 않는 정도였다.
가족 문제에 대한 건 생각도 안 했다.
“왜 반대한대?”
“부모님 시선에서 보자면 간단하죠. 소중한 딸이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타국으로 가서 연예인이 되겠다며 2년을 날려 먹었어요.”
“바로 감정이입 되는구만.”
자국이면 몰라도 외국이라니.
출생지가 아닌 곳에만 살아도 힘든데 아예 외국에서 사는 딸이 얼마나 걱정되겠는가.
“보내준 것도 신기하고 2년을 기다린 것도 신기하긴 하네. 인내심의 한계가 딱 2년이었던 건가.”
홍규헌은 리카의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할지 생각해 보았다.
몇 초의 계산 끝에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설득할 말이 없었다.
“우리가 아무리 설득해봤자 효과는 적을 거 같아. 그분들이 보기에 우리는 어린애 가지고 돈 벌려는 인간들이니까.”
“맞습니다. 리카의 재능이나 꿈 이야기를 해도, 어린애로 장사하려는 인간으로 보일 뿐이겠죠.”
“부모님이 반대하는데 뭐 어쩌겠어.”
홍규헌은 포기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성필과 한구인을 노려보았다.
“라는 말로 포기하려는 건 아니지? 반드시 설득해야 해. 맡길게. 꼭 이시카와의 부모님을 납득하게 만들어.”
리카의 부모님도 속이 탈 것이다.
홍규헌도 그것을 생각하면 리카를 놓아주고 싶다. 자신이 부모라도 딸을 데려오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나한테 그럴 의리는 없어.’
리카 본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연습생으로 삼을 것이다.
그녀의 재능을 본 이상 절대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성필도 똑같았다.
* * *
“한 이사님 일본어 할 줄 아신다고 했죠? 원어민이랑 대화도 가능한가요?”
“능숙하게 가능합니다.”
성필은 그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기쁘면서도 왠지 모르게 위축됐다.
자신보다 유능은 사람과 같이 일하면 그런 법이다.
“그럼 설득은 한 이사님한테 맡겨도 괜찮을까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한구인은 자신보다 성필이 적임자라고 느꼈다.
리카를 설득해서 데려온 것만 봐도 그러했다.
“차라리 제가 통역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분야의 설득은 서툴러서요.”
“아뇨. 한 사람을 건너 이야기하는 것과 직접 이야기하는 건 완전히 달라요. 제 감정과 논리를 전해주는 것보다, 한 이사님이 직접 대화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겁니다.”
한구인은 불안했다. 하지만 성필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마냥 거절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저는 이시카와 씨의 양친께 더 마음이 기웁니다. 이시카와 씨 편에 서서 변호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건 아직 리카 이야기를 못 들어봐서 그런 거죠. 저희는 리카의 변호사가 돼야 해요.”
“변호사라. 그렇군요. 이시카와 씨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
중요한 수준이 아니라 들어야만 한다.
리카의 동기와 목적을 알아야만 그녀의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으니까.
“좋습니다. 이 시간부터 저는 이시카와 씨에게 완전히 감정이입하겠습니다.”
한구인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제가 아이돌을 하려는 이유? 으음, 멋있잖아요.”
한구인은 그 대답에는 도저히 감정이입할 수 없었다.
오히려 리카에 대한 호감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겨우 그런 이유로 아이돌이 되려고 한 거야? 그냥 공부하기 싫었던 건 아니고? 별다른 야망이나 소망이 있다면 몰라…….’
철없는 아이가 가진 생각 따위, 부모님은 물론이고 같은 편조차 설득할 수 없었다.
한구인은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들려주려 했으나, 성필이 그의 말을 막았다.
“원래는 배우 하려고 했었지? 배우도 멋있어서 하려고 했어?”
“네. 배우 멋있지 않아요?”
“멋있지. 그런데 검사나 의사, 사업가, 교사, 기술자, 상담사 같은 직업도 멋지잖아.”
“그렇긴 한데…….”
한구인은 성필의 질문에 의구심을 품었다.
‘아이돌이나 배우가 되고 싶은 건 주목받기 때문 아닌가? 사람들의 칭송을 원해서. 사춘기 특유의 관심받고 싶은 심리 때문에 연예인을 진로로 정한 거겠지. 전문직이랑 비교할 게 아닌데.’
“그렇긴 하지만…… 저, 공부랑은 안 맞거든요.”
‘역시, 공부하기 싫어서였구나. 이건 이시카와네 부모님께 드릴 말씀이 없겠어.’
“그게, 그렇잖아요? 공부란 건 전혀 재밌지 않아요.”
‘중등 교육과정 공부가 재밌는 사람은 없겠지.’
“제가 지금 고등학교에 들어간다 치면, 공부로 성과를 얻으려면 7년도 넘는 시간이 필요해요. 저는 그렇게 긴 시간은 못 참아요.”
“무슨 뜻이야?”
“아, 이걸 뭐라고 하지? 안개 낀 들판을 걸어가는 것 같달까. 걷다 보면 뭔가 나올 건 알지만, 그게 나오기 전에는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꾸준히 걸어야 하잖아요. 아무런 보람도 없이.”
“그치.”
성필은 리카에게 공감했다.
그도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리카와 똑같은 이유에서였다.
계속되는 시험으로 등급이 매겨지기만 할 뿐, 공부의 보상이랄 게 존재하지 않는다.
“저는…… 그냥…… 지겨운 걸 못 참아요. 미래에 쓸지 안 쓸지도 모를 공부보다, 아이돌이란 확연한 꿈을 정하고 춤과 노래를 연습하는 게 더 즐거워요.”
“와…….”
리카의 대답에 부정적인 반박만 생각하던 한구인이 감탄을 토했다.
“이시카와 씨, 한국어 구사 능력이 엄청나십니다. 고작 3년 만에 이렇게 되셨다곤 상상도 못 하겠습니다.”
“…….”
“아, 죄송합니다. 계속해주십시오.”
“……어떻게 보면 한국으로 온 게 도피라고도 할 수 있는 게, 한류 드라마가 좋아서기도 했고 학교생활이 싫어서도 있거든요. 수업을 듣고 있으면 ‘이걸 어디다 쓰지?’, ‘대학 갈 때?’, ‘시험만 잘 치면 내가 이걸 다 이해한 건가?’ 같은 생각이 들어서. 시간을 버리고 있단 생각도 들구.”
“교육과정에 속한 과목은 인간의 인지, 사고능력 발달을 목표로 합니다. 일반적 전이 이론에 따르면, 어느 분야에 대한 학습과 성취는 다른 분야에 적용해도 비슷한 능력 수준의 성취 정도를 보여주는…….”
“한 이사님.”
“아, 죄송합니다.”
한구인은 가끔 리카의 말을 끊었고, 성필은 그런 한구인을 만류했다.
긴 대화 끝에 리카에 대한 정보수집이 끝났다.
“솔직히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성필과 한구인은 리카를 내보냈다.
결과적으로 리카가 한국으로 온 동기는 간단했다.
“이걸 낭만이 있다고 해야 하나.”
되는대로 포장하자면, 리카는 꿈을 좇아 만리타향도 서슴지 않은 것이다.
비하하자면, 리카는 그냥 공부하는 게 싫어서 멀리 도망 온 것이다.
하지만 성필의 머리는 최대한 낭만적인 방향으로 리카의 이야기를 조합해낼 수 있었다.
“한 이사님은 리카 얘기 어떻게 들으셨어요?”
“저는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이시카와 씨는 만족 지연 능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만족……, 뭐요?”
“미래의 성취를 위해 현재의 만족을 뒤로 미루는 능력입니다. 놀고 싶어도 참고 공부한다던가 하는 걸 말합니다.”
“……한 이사님은 너무 자기중심적이에요.”
“네? 제가 말입니까?”
“마치 사람이 성공하는 길은 공부밖에 없다는 듯이 말하시잖아요.”
“……아.”
한구인은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걸었다.
그에게 공부를 못 한다는 건 인내심이 부족한 것이었고, 인간으로서 능력이 떨어진단 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게 리카를 비하해버리고 말았다.
“아,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학교에 안 갔단 사실에만 집중하다 보니.”
뒤집어 생각하면, 리카는 단지 노력하는 게 싫어 학교를 뛰쳐나왔을 리가 없다.
그런 애가 KS 엔터의 연습생 중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매일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노력이 소망의 정도를 나타낸다고 치면, 리카의 꿈은 소망이란 단어로 표현하기도 힘들어요. 야망 정도는 돼야 느낌이 살겠죠.”
요즘 아이돌은 연습생 생활이 기본 4, 5년이다. 그런데 리카는 1년 6개월 만에 그런 아이들을 모두 따라잡았다.
“어중간한 결심으로는 안 돼요.”
“이시카와 씨는 어떻게 그 큰 동기를 가졌을까요? 이야기에서는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가 필요했단 식이던데. 그렇게 따지면 체육이나 예술도 있었을 겁니다.”
“제가 리카랑 30분만 따로 얘기해 볼게요. 분명 다른 동기가 있을 거예요.”
“……제가 있어서 전부 말하지 않은 걸까요?”
“그렇단 건 아니고요.”
한구인은 영락없이 리카가 모든 이야기를 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자신이 불편해서 숨겼던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속이 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리카가 성필은 믿는 듯했으니.
“알겠습니다.”
성필이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한구인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신문을 읽었다.
다시 그가 왔을 때는 정확히 30분이 지난 후였다.
“동기 들으셨나요?”
“네. 지금부터 제가 리카의 풀스토리를 들려드릴게요. 이걸로 리카네 부모님을 설득해주세요.”
성필은 리카의 이야기를 전부 조립하여 그녀의 동기를 만들어냈다.
한구인이 최대한 공감할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한구인은 완벽하게 리카의 처지를 이해했다.
어째서 그녀가 한국으로 와야만 했는지.
무엇이 그녀를 죽도록 노력하게 했는지.
부모님의 반대에도 남으려 하는지…….
* * *
리카의 부모님이 가로 엔터에 오기로 한 날.
한구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성필이 해준 리카의 이야기였다.
씻고, 밥 먹고, 옷을 입으면서 몇 번이고 서사를 복기했다.
이미 암기는 완벽했다.
남은 건 감정을 적절히 담아 말하는 것뿐이다.
“후우.”
한구인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옆에는 리카, 홍규헌이 있었다.
하지만 한구인은 곁에 아무도 없는 듯이 행동했다.
그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리카의 부모님을 설득할 말을 갈고닦았다.
“오셨나 보네.”
1층에서 작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필이 리카의 부모님을 모시고 온 게 틀림없었다.
한구인은 눈을 뜨고 리카를 보았다.
둘의 눈이 맞았다.
“반드시 이시카와 씨의 부모님을 설득하겠습니다. 여기서 꼭 꿈을 이루실 수 있도록요.”
“예, 예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리카라고 부르세요. 제 파파랑 마마도 이시카와 씨잖아요.”
얼마 후 문이 열리고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뒤에는 성필이 있었다.
홍규헌은 활짝 웃으며 일어나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저는 가로 엔터 사장 홍규헌…….”
“리카 씨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한구인이 대뜸 일본어로 소리쳤다.
들어온 남자는 물론이고 방 안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저, 모두 들었습니다. 아버님의 직업이 교사라고 하셨죠. 네, 자식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은 압니다. 백 번 압니다. 하지만 자식에게 공부만을 강요하고, 그게 세상의 전부 양 말하고, 자유를 제약하는 건 부모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한구인은 피맺힌 심정으로 말했다.
그의 아버지도 리카의 아버지와 비슷했다.
온실 속에서 세상과 격리된 채, 미래를 위해 공부만을 시켰다.
어쩌면 한구인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할 말을 리카의 아버지에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야 부모로서 걱정되겠죠. 금지옥엽 같은 딸이 먼 타지에서 살면 누구나 그럴 겁니다. 하지만 어째서 딸이 그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르십니까? 그저 돌아오라고 소리만 치면 그만입니까?”
“한, 한 이사님…….”
리카가 한구인의 소매를 당겼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쏟아냈다.
“아뇨. 리카 씨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겁니다. 리카 씨에게 일본은, 집은 새장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리카 씨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한국 드라마, 영화가 전부였습니다.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 그곳에서 꿈을 키운 건 당연합니다.”
“저기…….”
“안개가 낀 숲을 걸어가는 기분. 목적지에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느낌으로, 영원한 미로에 갇힌 것처럼 나아간다. 리카 씨가 직접 하신 말입니다. 따님에게 집과 학교는 안개 낀 미로였단 말입니다! 이건 학대입니다! 아십니까? 따님은 지나친 학원 스케줄로 학교에서 친구조차 변변찮게 사귀지 못했단 걸요?!”
“그게 아니라…….”
“이런 삶에 희망이 있을까요? 따님의 미래를 위한다고요? 7년, 8년 뒤의 성공을 위해서 현재를 모두 희생하는 게 인간으로서의 삶입니까?! 심지어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데? 아니, 아니요! 그건 인간이 아닙니다!”
“이사니임…….”
“리카 씨가 처음 춤을 추고 익히며 자신이 나아졌단 걸 깨달았을 때의 해방감. 만족감. 충족감.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 이런 걸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어린아이의 소망이 한 지점을 가리키는…….”
“이사니이이이임!”
리카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구인은 그제야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리카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리카 씨도 아버님께 말해주십시오. 나는 가고 싶지 않다고…….”
“우리 아빠 아니에요!”
“어, 네?”
“이분 우리 아빠 아니라구요!”
“그럼 누구……?”
“제 삼촌이요!”
일본어를 모르는 성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구인의 폭주가 끝나자 리카의 삼촌은 당황한 듯 웃었다.
“저기…….”
“……한구인 이사라고 합니다.”
“예. 한 이사님의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은 제가 아니라 이쪽에…….”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 패드를 가슴 부근으로 들었다.
화면에는 한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리카의 부모님이었다.
회사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영상통화를 켠 채 1층에서부터 들어온 것이었다.
[이렇게 화면으로 인사드려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갈 여건이 되지 않아서요.]
“아, 아, 아닙니다.”
한구인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혼신을 다한 연설을 제삼자에게 했단 게 부끄러웠다.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연습했는데.
[그리고 말씀해주신 건 모두 들었습니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학대라니……. 꽤 심하게 말씀해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