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화 (7/760)

#007화

“이시카와…….”

“리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리카.”

“네!”

리카는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었다.

거기다 면접이라도 온 것처럼 자세는 곧기 그지없었다.

성필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리카가 만나줬다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이었다.

‘먼저 갔던 기획사가 별로 안 좋았나.’

그런 것이라면 가로 엔터에도 기회가 있었다.

성필은 목청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꺼냈다.

걸그룹을 만드는 데 연습생을 뽑는다는 것, 그리고 옛날의 리카가 생각났기에 찾아왔다는 것.

“옛날에도 말했지만, 리카는 아이돌이 되려고 태어난 거 같아.”

“아하하!”

과도하게 애교 섞인 웃음소리에 카페의 이목이 쏠렸다.

성필마저도 움츠러들었건만, 리카는 해맑기만 했다.

리카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손에 턱을 괬다.

자신의 매력을 남김없이 보여주기 위해, 거울 앞에서 수백 번도 연습한 자세를 취한 것이다.

“에이, 그런 말 다른 애들한테도 다 하는 말이죠?”

“어…… 아니. 너 말고는 한 적 없는데.”

“거짓말! 제 기분 좋게 해주려는 거 다 알아요!”

리카는 거짓말이라고 하긴 했으나 기뻐하는 게 눈에 보였다.

성필의 어깨를 가볍게 때리며 애교까지 부렸다.

보통 리액션이 좋으면 말이 더 잘 나오는 법이지만, 성필은 오히려 살짝 거북하기까지 했다.

“…….”

이쯤에서 짚어야 할 건, 리카는 성필의 반대편이 아니라 바로 옆에 앉았다.

성필은 술집이라도 온 것 같다고 생각하며, 슬쩍 리카와 거리를 띄웠다.

“진짜야. 연예인만 죽도록 보다 보니, 이제는 외모만 봐도 감이 잡히는 경지까지 이르렀거든.”

“몇 살이신데요?”

“서른.”

“그럼 저랑 만났을 때는 28쯤이고…… 뭐야, 매니저 한 지 6년밖에 안 됐었잖아요.”

“대학도 4년인데 6년이 부족해? 대학으로 따지면 난 그때 석사까지 딴 거나 마찬가지지.”

“아, 꽤 그럴듯할지도. 그래서요? 막 저한테 대스타의 아우라가 보인다거나? 손나 칸지?”

“손나…… 뭐?”

“그래서, 저를 못 잊어서, 이렇게 찾아오신 거죠? 그쵸?”

리카가 성필과 거리를 좁혔다.

숨까지 맞닿을 거리에서, 성필은 벌떡 일어나 반대편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리카도 성필의 옆으로 왔다.

빙글빙글 돌기를 반복하자, 성필이 먼저 멈춰 섰다.

“내가 불쾌해서 그런 건 아닌데, 다가오지 말아줄래?”

“왜, 왜요.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너 어조가 좀 이상하다?”

“그런 거죠?! 막상 보니까 옛날이랑 전혀 달라서 실망하신 거죠?! 그쵸?!”

리카가 빽빽 소리를 질렀다. 성필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또 이목이 쏠렸다.

“나이 들어서 그래요?!”

“진정…….”

“고작 1년 6개월 지났는데 나이가 들면 얼마나 들었다고 그래요! 저 아직 고등학생 나이라구요?! 늙는 나이가 아니라 성장하는 나이라구요!”

리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이돌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세월이 1년 6개월이다.

다른 연습생들에 비하면 아주 적은 편에 속했으나, 리카는 그런 것에서 위안을 얻지 못했다.

무려 1년 6개월이다.

오직 KS 엔터의 데뷔조로만 뽑히길 바라며 살았던 세월인데, 그게 눈앞에서 무너졌다.

현재 수능에 실패한 재수생의 기분인 리카는 어떻게든 동아줄을 잡고 싶었다.

“뭐야?”

“남자가 저 여자 찼나 본데. 나이가 들었다나…….”

“헉, 진짜? 여자는 아직 학생처럼 보이는데?”

성필의 이마로 식은땀이 흘렀다. 리카는 아예 성필을 팔을 붙잡고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연습생으로 뽑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제발!”

이러다가 정말 무릎이라도 꿇겠다.

성필은 계속해서 리카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녀는 씨알도 들어먹지 않았다.

결국 성필이 택한 방법은.

“아, 남자가 도망간다.”

“여자애는 쫓아가네.”

* * *

“……그렇게, 저는 학원을 중심으로 다니고 있습니다.”

한구인의 보고가 끝나자마자 홍규헌은 양주병을 땄다. 그녀는 담배와 술을 함께 즐기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의자에 깊이 몸을 묻고 천장을 보는 홍규헌에게는 은근한 불안이 엿보였다.

“이시이카우와 리카라고 했나?”

“이시카와 리카입니다.”

“박 이사는 왜 걔한테 꽂힌 걸까. 왜 걔지?”

성필은 한구인처럼 여러 곳을 돌며 연습생을 찾았으나, 정신은 리카에게 팔린 상태였다.

홍규헌마저 알아차릴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심지어 두 번이나 까이다시피 했잖아. 이시카와란 애는 이미 마음이 기운 것 같은데. 아무렴, KS 엔터 연습생이니 어디서든 데려가려고 하겠지. 그런데 박 이사는 이시카와를 설득할 자신이 있는 건가?”

“직감이란 게 있는 모양입니다.”

“직감?”

“매니저나 기획사 대표의 인터뷰를 보면, 흔히 아우라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 박 이사님도 이시카와 씨에게 아우라를 본 건 아닐까요.”

“그냥 꽂혔단 거잖아. 직감이래도 아무런 근거도 없고. 물론 걔를 데려오면 좋기야 하겠지만.”

홍규헌은 잔을 비우곤 한구인에게 물었다.

그 질문은 이미 대답을 알고 하는 것이었다.

“데려올 수 없겠지?”

“네. 가로 엔터의 인지도는 0에 가깝습니다. 저희가 제시하는 조건이래도 결국은 불확실한 것뿐. 실적이 있는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다면, 당연히 그쪽으로 갈 겁니다.”

“유명세가 없는 건 확실히 문제구나. 돈이라도 많으면 좋으련만.”

둘의 예상이 맞다면, 성필은 현재 되지도 않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었다.

홍규헌에게 받는 월급을 합치면 돈을 낭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에 드네.’

비록 불가능하더라도 희망을 걸고 끝까지 부딪쳐보는 모습.

홍규헌은 그런 바보 같은 인간상을 좋아했다.

“그래도 시간은 꽤 줬어.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가지도 않는데 뒤꽁무니만 쫓는 거라면 여기서 그만두게 해야 해. 너는 이시카와가 그다지 마음에 안 든다고 했지?”

“테스트를 해보기 전에는 모르지만, 그래도 박 이사님이 이시카와 씨를 짚은 건 합당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긴 네가 이시카와를 마음에 들어 했으면 지금 여기 안 있었겠지. 뭐어, 박 이사 시간 낭비하는 것도 슬슬 끝내게 해야지. 돌아오면 이시카와는 포기하라고 운 떼보자.”

“예.”

그때 사장실의 문이 열리고 성필이 나타났다.

“데려왔습니다.”

성필의 뒤에는 리카가 있었다. 그녀는 성필이 미리 일러줬던 대로 힘차게 인사했다.

“이시카와 리카, 18세! 꿈은 아이돌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홍규헌은 재빨리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양주병은 바닥에 굴려버렸다.

그녀는 어느새 근엄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서 와요 이시카와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 * *

한구인.

그의 꿈은 대기업의 개국공신이 되는 것이었다.

누가 본다면 허무맹랑하다고 할 꿈 때문에, 그는 미국의 대형 벤처 캐피탈마저 뿌리치고 한국으로 왔다.

심지어 그 기업은 한국 신입 사원으로서는 꿈도 못 꿀 연봉과 스톡옵션까지 제안했는데도 말이다.

그런 한구인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너 진지충이냐?”

대학 오티에서 선배에게 들었던 말.

“넌 매사에 너무 진지해.”

헤어진 첫 여자친구에게 들었던 말.

“방금 대화는 그런 맥락이 아니잖아요.”

인턴 동료에게 들었던 말.

“진지…….”

한구인은 인간관계에 서툴렀다.

특히 평등한 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윗사람 상대라면 그저 굽히면 끝이지만, 수평적 관계에서는 서로의 거리를 잘 정립해야 한다.

한구인에게는 그 기술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의 진심을 부딪치지만, 사람들은 그런 그를 이상하게 볼뿐이었다.

‘연습생을 보러 다니라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성필과 함께 리카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한구인은 자료를 잔뜩 준비해서 리카를 설득하려 했다.

페이지 15가 넘어갈 즈음, 성필이 그를 만류하고 리카와 대화했다. 하지만 성필도 리카를 효과적으로 설득하진 못했다.

성필은 리카가 퍽 마음에 드는 듯했으나, 도저히 데려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시카와 씨는 이대로 놓치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시카와 리카, 18세! 꿈은 아이돌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성필이 리카를 데려왔다.

애매한 반응만 보여주며 대답을 회피하던 리카가 가로 엔터로 온 것이었다.

만약 한구인 자신이 성필처럼 리카를 쫓아다녔다면, 그녀를 데려올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겠지.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리카가 홍규헌과 대화하러 간 사이, 한구인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이에 성필은 간단히 답했다.

“진심을 보여주면 돼요. 진지하게, 계속.”

사실 진심을 보여준 건 리카 쪽이었다.

성필은 리카가 대로에서 무릎 꿇었던 것을 도저히 잊지 못했다.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한구인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진심을…… 진지하게…….”

진심, 진지.

평생 한구인을 따라다녔던 말이다.

한구인은 성필을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리카의 거절에도 성필이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한구인도 웬만해서는 마음에 드는 걸 포기하지 않는 성정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건 진심을 전하는 방식이었다.

‘배우고 싶다.’

박성필.

이 사람은 한구인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자꾸 쳐다보세요?”

“아닙니다. 이시카와 씨 설득한 내용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설득이라기도 뭐하죠. 별거 없어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

“진심으로 설득하는 법, 꼭 알고 싶습니다.”

성필은 난처했다.

* * *

“잘하는 건가?”

홍규헌은 리카의 댄스 영상을 확인하곤 의견을 물었다.

“한 이사 의견은 어때?”

“기본기가 잘 닦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 어떤 점에서?”

“그렇게 물으시면 저도 대답이 궁한데…….”

한구인도 일반인 이상의 안목은 없었다. 홍규헌의 측근으로 활동하긴 했어도, 그의 전공은 경영과 경제였으니까.

자연스레 둘의 시선은 성필에게로 옮겨갔다.

“리카가 춘 춤이 뭔지는 아시죠?”

“엡실론의 ‘내꺼 해라’.”

“맞습니다. 춤 동작을 봐주실래요. 여기, 여기, 또 여기. 뭔가 느껴지는 거 있으신가요.”

“음…… 뭔가 있나? 팔이랑 다리를 쭉쭉 펴고, 방방 뛰고. 그 정도?”

“‘내꺼 해라’의 댄스 베이스는 올드스쿨입니다. 그걸 기반으로 3분 동안 계속 진행되죠. 모두 동작들이 굉장히 크고, 계속 바운스를 주고, 거의 날아다니는 것처럼 춤을 춰요.”

“잘 춘다는 얘기야?”

“잘 추는 것도 추는 거지만, 솔직히 놀라워요. 동작이 크다는 건 힘들단 뜻이거든요. 저런 동작이 3분 넘게 반복되면 거의 죽어 나가는 거죠. 그런데도 리카는…….”

조금도 동작이 어긋나지 않는다.

심지어 표정은 항상 미소를 지고 있다.

화룡점정은 춤이 끝났을 때였다.

분명 숨이 엄청나게 차오를 텐데도, 엔딩 포즈에서는 미동조차 없다.

표정도 흐트러짐이 없다.

거기까지 설명하자 홍규헌과 한구인도 리카의 대단함을 알아챘다.

“엄청나게 노력했을 거예요. 춤뿐 아니라 기초체력부터 연기까지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부분만 보여주기 위해 힘든 부분을 전부 지운다. 춤추는 사람이 힘들어하면 보는 사람도 힘드니까.

하지만 그게 쉬운 게 아니다.

리카 정도로 기운이 갈무리되었다면 이미 예술의 수준이다.

“고작 1년 6개월 만에 이렇게 됐다는 게 놀랍죠. 저희가 연습생을 잡아서 리카처럼 만들려면 시간이 얼마나 들지 몰라요.”

“……잠깐만. 얘 노래도 부르면서 했잖아.”

홍규헌은 리카가 찍은 영상을 보면서 막연히 ‘노래는 좀 못하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금 성필이 해 준 설명과 합하면.

“그렇게 힘든 춤을 추면서도 노래에 삑사리 하나 안 났단 거네?”

“심지어 여러 명이 파트를 나눠 부르는 노래를요.”

홍규헌은 이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리카에 대한 감탄은 성필에 대한 인정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로 찍은 연습생이 이런 보석이라니. 심지어 데려오기까지 했잖아.’

KS 엔터의 상위권 연습생이다.

모르긴 해도 데려오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성필의 능력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KS 엔터의 연습생들은 신분이 최대한 감춰진다지. 누가 연습생인지 아는 것도 어려웠을 거야. 게다가 KS 엔터 데뷔조가 확정됐단 소식이 쉽게 외부로 빠져나올 리가 없어. 그런데 박 이사는 그걸 알았고.’

즉, 성필이 리카에게 접근했단 것 자체가 업계에 상당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단 뜻이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 힘쓰는 KS 엔터 신인개발부마저 뚫을 정도의 정보망 말이다.

홍규헌은 겉으로 보이려는 웃음을 삼켰다.

‘박성필, 이 사람을 데려온 건 정답이었어.’

앞으로도 반드시 잡아둬야 하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