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46화 (446/446)

외전 - 작별 [2]

[79]

여행을 떠나기 전.

요하나는 레이와 함께 황도 인근에 위치한 황무지를 들렀다.

요하나가 찾은 곳은 과거엔 번화한 도시와 맞닿아 있었지만 메테오의 여파로 인해 황폐화 된 땅이었다.

"여기 내 땅이다?"

요하나가 장난기가 살짝 어린 목소리로 자랑을 했다.

요하나가 황도 인근에 땅 좀 가지고 있다고 놀랄 일은 아니었기에 레이는 짧게 호응한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복구도 덜 된 황무지를 요하나가 함께 가자고 한 이유를 레이는 아직 알지 못 했다.

헌데 두리번거리다 보니 저 너머에 꽤 큰 비석 같은 것이 보였다.

레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저건 뭐야?"

"무덤."

"...누구 무덤인데?"

"스페라 프리슬란."

"...!"

요하나를 따라 걷던 레이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요하나는 멈춰선 레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 가볼 거야?"

"..."

레이가 다시 요하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요하나는 묘비 앞에 도착해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요하나의 손짓에 따라 바람이 세차게 일며 묘비에 쌓인 먼지를 저 멀리 밀어냈다.

"공개적으로 묘비를 세우기는 어려워서, 일단 여기 임시로 만들었어."

요하나는 미리 준비한 흰 꽃을 묘비 앞에 내려놓은 후 짧게 기도를 올렸다.

요하나가 기도를 올리는 사이 레이는 침묵만 이어갔다.

가볍게 추모를 마친 요하나가 묘비를 손으로 쓸어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스페라 있잖아."

"..."

"마지막까지 고상하고 기품 있었어. 처음 마주쳤던 그날처럼 말이야, 귀족다웠어."

"..."

"고고하게... 품위도 자존심도 마지막까지 내려놓지 않았어. 어쩌면... 음... 아니다."

스페라가 품위니 자존심이니 전부 내려놓고 싸웠다면, 어쩌면 요하나 또한 죽음을 피하지 못 했을지도 몰랐다.

제대로 된 근거는 없었지만 요하나는 막연하게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묘비를 매만진 요하나가 음울한 기색을 내비치며 레이를 돌아보았다.

"스페라도... 영웅이 될 수 있었어."

"...그래."

"우리가 스페라를... 스페라의 운명을 이렇게 뒤틀었어. 스페라가 악의를 품게 만들었어."

"...우리가 아니라, 내가 그랬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비극을 겪었을까?"

"..."

레이는 대답할 수 없었다.

숫자로 세는 게 무의미할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참혹한 비극을 겼었을 것이다.

침묵하는 레이를 향해 요하나가 말했다.

"있잖아, 레이. 나는 레이가 위험하다면, 레이를 구하기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어."

"요하나..."

"그러니까 레이를 이해해. 레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레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레이의 선택으로 인해 무수한 비극이 세상을 휩쓴 것 또한 진실이었다.

차라리 그 비극을 완전히 외면해버리면 편할 텐데, 레이는 변해버린 세상을 두 눈으로 마주 보려 하고 있었다.

요하나가 레이를 향해 방긋 웃으며 물었다.

"속죄하려는 거야?"

"...아니. 속죄하려 해도... 할 수 없겠지."

속죄를 입에 담기엔 너무 늦었다.

속죄를 꿈꾸기엔 레이는 너무 먼 길을 왔다.

또한 '그날' 레이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날로 되돌아간다 해도 레이는 아마 다른 선택을 고르지 못 할 것이다.

그래서 속죄를 입에 담는 게 레이는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력은... 해보려고."

"힘들겠네."

피식 웃은 요하나가 레이의 이마를 톡 눌렀다.

"내가 같이 노력해줄게. 네가 조금이라도... 바라는 걸 얻을 수 있도록 말이야."

장난스러운 손짓이었지만 요하나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레이에게 전해졌다.

레이는 못 본 사이 훌쩍 어른스러워진 요하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요하나."

"당연히 고마워야지."

요하나가 환히 웃었다.

*

여행을 떠난다.

레이는 대륙 각지를 돌아다니며 세상이 맞이한 변화를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물론 여행이라고 해도 몇 달씩 시간을 비워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틈틈이 황성을 경유하여 꾸준히 얼굴을 비칠 생각이었다.

미리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여 황성의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킨 레이는, 요하나와 함께 익숙한 곳부터 찾아가보기로 결정했다.

목적지는 다름 아닌 필립스 백작령이었다.

과연 얼마나 변하였을까.

레이는 고향의 풍경을 떠올리며 여행 준비를 마쳤다.

움직이는 건 레이와 요하나, 그리고 잡무를 담당할 인원 소수였다.

요하나는 어차피 시간이 널널했다.

황성엔 범접 못 할 대마법사인 루나가 버티고 있었으니, 전쟁이 끝난 지금 굳이 요하나가 무력을 발할 일이 없었다.

덕분에 부담 없이 레이와 함께 필립스 백작령에 다녀오게 된 요하나는 들뜬 얼굴로 준비를 마쳤다.

'레이랑... 여행을...'

과거 요하나는 실력이 모자라 레이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 했다.

위험한 전장에 레이와 동행할 수 있었던 건 오직 루나뿐이었다.

그 어린 날 느꼈던 무력감과 후회가 여전히 요하나에겐 짙게 남아 있었다.

허나 이젠 레이를 보호하기 위해 여행에 동행하게 되었다.

그 변화가 요하나에겐 꽤 기쁘게 느껴졌다.

새삼스레 과거의 추억을 되돌아본 요하나가 레이와 함께 필립스 백작령으로 출발했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워프게이트를 지나 필립스 백작령으로 향했다.

"..."

레이는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요하나가 많이 어른스러워졌다고 생각하였다.

허나 막상 여행을 떠나자 요하나는 옛날 성격이 그대로 나왔다.

"야, 허접 레이."

"..."

"어? 대답 안 해?"

"..."

"야, 허접!"

요하나는 계속해서 레이를 툭툭 건들며 레이의 성질을 긁었다.

딱 사춘기가 처음 왔을 때 요하나는 이렇게 깝죽대고는 했다.

허나 사춘기 때야 레이가 요하나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요하나가 두드리면 레이는 그냥 맞아야 했다.

장난감처럼 툭툭 차이던 레이가 결국 참지 못 하고 한마디 했다.

"야... 적당히 하지?"

"와... 적당히 하라고? 지금 그거 나한테 한 말이야? 하!"

요하나가 기가 차다는 듯 입을 벌리더니 레이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내가? 응?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고작 그런 것 가지고 투덜거리기야? 왜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

"..."

저지른 게 있는 레이는 입을 다문 채 요하나의 손가락을 피해 몸을 뒤틀었다.

물론 의미 없는 반항이었다.

요하나가 레이의 옆구리에 박힌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투덜댔다.

"나는 만날 전장에서 칼질만 하다가, 이제는 애도 낳기 어려워졌는데!"

요하나는 영육의 합일로 인해 육신의 생식 작용이 어렵게 되었다.

그 사실을 상기한 레이가 잠시 얼굴을 굳혔으나, 정작 요하나는 실실 웃으며 레이의 옆구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뭐~ 그래도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고?"

"...?"

"앞으로 쭉 피부에 주름지거나 할 일은 없으니까. 그리고 또 거기가 헐렁해질 걱정도 없단 말이야? 레이는 좋겠네? 몇 번이나 안아도 처녀 같은 여자도 옆에 있고?"

"..."

레이는 고민에 빠졌다.

아니, 얘 왜 이렇게 매워졌냐.

우리 요하나가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레이가 기억하는 10년 전 요하나는 성적인 농담을 이렇게 서슴없이 뱉는 성격이 못 되었다.

허나 10년 가까이 전장을 구른 요하나는 이제 성적 농담 따위에 얼굴을 붉힐 만큼 마음이 여리지 않았다.

콱!

당황하고 있는 레이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긴 요하나가, 레이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레이가 요하나와 입을 뗀 후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너무 강압적인데?"

"강압적인 게 싫으면 빨리 힘 좀 기르던가."

비실비실해가지고는.

요하나의 불평에 레이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

필립스 백작령은 최전선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비교적 전화의 영향을 적게 받은 지역이었지만, 그럼에도 과거와는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항상 전장을 전전하였던 요하나에겐 그러한 변화들이 익숙한 것이었다.

허나 레이에겐 달라진 필립스 백작령의 풍경이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

긴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삶의 모습들이 레이에겐 확연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물자가 부족한 것도 큰 문제였지만, 역시나 신성력의 소멸이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신성력이란 힘은, 레이가 전생을 살았던 지구의 현대의학으로도 거의 대체 불가한 초월적인 '기적'이었다.

과거엔 웬만큼 촌구석이라 해도 신성력을 지닌 성직자 한 명만 있으면 의료와 보건 체계의 유지가 가능했다.

신성 교단이 수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륙 전역에 수월하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신성력 덕분이었다.

헌데 그 신성력이 사라졌으니...

도심지는 물론이고 필립스 백작령 같은 변방은 혼란을 수습하기 매우 어려워했다.

레이는 직접 그 혼란을 경험하며 어떻게 새로운 의료와 보건 체계를 정립해가야 할까 계속해서 고민했다.

물론 백작령에 들른 레이는 필립스 백작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잘... 계셨습니까."

"무사하여... 다행이군."

이제는 노년을 바라보고 있는 필립스 백작이 담담하게 레이를 맞아주었다.

레이와 필립스 백작은 긴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과 새롭게 봉착한 문제들에 관해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 무너진 의료 체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필립스 백작이 불쑥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보육원은 여전히 운영 중이네."

"그렇습니까..."

레이가 피식 웃었다.

필립스 백작 또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전쟁 중에도 손을 놓지 않았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노력했네. 연민도 있었지만... 그대 덕분에 '가능성'이란 걸 보았으니 말이네."

뭐, 다들 그 가능성 때문에 가챠를 돌리는 법이기는 했다.

레이는 자신이 만들어낸 변화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이어졌음을 소소하게 기뻐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레이가 황성으로 돌아갈 시점이 되었을 때.

필립스 백작은 레이와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그대가 잘해 나갈 것이라 믿네."

"..."

레이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스 백작이 한발 물러서며 당부했다.

"다음엔 손녀들 얼굴 좀 보여주게."

"예. 이른 시일 내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레이는 필립스 백작에게 확답한 후 백작령을 떠나 황성으로 귀환했다.

필립스 백작령 외에도 아직 찾아가봐야 할 곳이 많았다.

레이는 불필요하게 미적거릴 생각이 없었지만, 다음 여행지로 출발할 준비를 갖추기 전 루나를 찾아갔다.

루나를 찾아간 레이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루나에게 자세히 설명하였다.

단순한 계획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성을 레이는 루나에게 거짓 없이 이야기했다.

이제야 남을 위한 삶이 아닌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레이를 바라보다...

루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레이,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어요."

"..."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는 계속해서 기다렸던, 허나 외면하고 싶었던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루나가 함께 가자던 곳을 찾아간다면 그때는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정체에 관해서.

그리고 루나에 관해서.

그때는...

눈앞의 여인에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외전 - 작별 [3] -完-

[80]

"..."

레이가 거울을 보았다.

엄청난 미남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준수하게 잘생긴 외모가 거울에 비쳤다.

첫인상만으로도 충분히 이성에게 호감을 살 수 있을 법한, 그런 얼굴이었다.

"..."

레이는 새삼스레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냥저냥 평범한 축에 속했던 전생에 비해선 지금 거울에 비친 외모는 꽤나 훤칠했다.

전생에 이런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면 얼굴값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렸을 터다.

허나 환생 이후 레이는 외모 같은 것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지 못 했다.

그만큼 각박한 투쟁을 레이는 끊임없이 이어갔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제야 레이는, 거울을 바라보며 약간이나마 흡족함 따위의 감흥을 곱씹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찾아온 작은 변화를 느낀 레이는 잠시 고개를 들고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선 다시 거울로 눈을 돌렸다.

"..."

레이는 거울을 바라보며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았나 확인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평소 잘 안 하던 짓이란 그런지, 레이는 겉치장을 확인하는데 꽤 긴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팍!

거울 앞에서 꼼지락거린 끝에 망설임을 털어내듯 옷을 한 번 강하게 당긴 레이가 방을 나섰다.

헌데 방을 나선 레이는 몇 걸음 걷지도 못 하고 예기치 않게 엘리와 카니아와 마주치게 되었다.

엘리와 카니아가 웃음꽃을 피우며 레이에게 다가왔다.

"아빠!"

"아빠!"

레이가 온기를 되찾고서 벌써 반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레이가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딸아이들과의 거리감도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물론 카렌과 알레시아의 얼굴에도 행복한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 모든 게 차근차근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해피 엔딩이라 불러도 모자람 없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았다.

레이가 딸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하자 엘리가 잠시 레이를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아빠, 황제 폐하 알현하러 가세요?"

누가 봐도 레이는 평소보다 겉모습에 신경 쓴 티가 났다.

레이가 엘리의 뺨을 살짝 쓰다듬어주며 답했다.

"그건 아닌데, 오늘 다른 약속이 있어서 신경 좀 썼어."

"아빠, 부인 너무 많이 만들면 안 돼요. 엄마 화내요."

밑도 끝도 없는 엘리의 걱정에 레이가 피식 웃었다.

이상한 책 읽고 이상한 소리하는 건 유전인 모양이었다.

레이는 걱정 말라며 엘리와 카니아를 적당히 달랜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헌데 루나와의 약속 장소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레이를 요하나가 불러세웠다.

"레이."

"아... 요하나."

"...루나를 만나러 가는 거야?"

"응."

"..."

요하나가 잠시 침묵했다가 착잡한 감정을 뒤로 숨기며 웃음을 머금었다.

"잘 다녀와."

"..."

루나라면 저 앞에 보이는 문 너머에 있을 텐데, 대체 어디를 잘 다녀오라는 것일까.

레이는 그런 의문을 속으로 삼킨 채 고개만 끄덕였다.

요하나를 지나친 레이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 루나의 집무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집무실 안쪽에선 루나가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으로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레이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루나는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고는 레이를 마주 보았다.

루나는 멀끔하게 차려입은 레이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평했다.

"...준비는 마친 것 같네요."

준비를 마쳤다는 건 옷차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루나는 레이의 눈빛에서 레이의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레이는 이제 더는 과거에 묶여만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충분해요."

과거.

레이가 세계수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엿보았던 그 미래에선, 벨라는 레이의 죽음 이후 5년도 견디지 못 하고 눈을 감았다.

단지 그 미래뿐만이 아니었다.

루나가 초월의 직전 마주한 수많은 미래의 '가능성' 속에서, 벨라는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단명하였다.

레이를 잃은 벨라는 항상 후회 속에서 죽어갔다.

벨라는 결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여인이 아니었다.

레이는 그 가능성을 간과하였다.

과거에 레이는, 벨라가 연민 때문에 남의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고 여겼다.

천성이 따뜻하고 헌신적이었던 벨라였기에 남의 아이를 진짜 아들처럼 대해줄 수 있었다고 여겼다.

또한 비록 남의 아이를 친자식처럼 대해주었다고는 하나, 진정 배 아파 낳은 딸아이에 비하면 옅은 애정을 품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벨라에게 레이는 억지로 친자식처럼 대하려 노력한 남의 아이가 아닌, 둘도 없는 소중한 아들이었다.

레아를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좌절을 이겨낼 수 없었듯, 레이를 먼저 떠나보낸 좌절 또한 벨라는 이겨낼 수 없었다.

허나 레이는 벨라를 향한 죄책감 때문에, 혹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뒤바꿀 수 없던 운명 때문에 벨라가 베푼 사랑의 형태를 멋대로 단정 지어 버렸다.

그래서 레이를 잃은 벨라는 모든 미래의 가능성에서 후회를 품고 죽어갔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벨라는 구원받았다.

벨라가 행복하게 눈을 감았음을, 또한 그것이 벨라가 바랐던 해피 엔딩이었음을 레이는 결국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이별의 슬픔을 이겨낸 레이는 이제야 자신의 삶을 걸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루나도 남겨두었던 이야기를 레이에게 할 수 있었다.

"...데이트 좀 할래요?"

"...그래."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이는 아직 루나가 향하려는 곳을 알지 못 했기에 황성을 벗어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루나와 함께 집무실을 나서는 순간.

레이를 둘러싼 풍경이 일변했다.

"...!"

어느새 레이는 맑은 하늘 아래 서 있었다.

튼튼하게 지어진 민가와 잘 다듬어진 대로변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도심지 수준은 아니었지만, 꽤 번영하는 마을인 듯 여러 사람들이 바쁘게 길을 걷고 있었다.

"...?"

레이는 어딘가 익숙한 듯 생소한 풍경 속에서 머뭇거리다 루나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루나가 레이를 지나쳐 걸어가며 입술을 달싹였다.

"디나르예요."

"...!"

디나르라면 필립스 백작령 옆에 붙어 있는 지역의 이름이었다.

또한, 루나의 고향이기도 했다.

"여기가 디나르라고...?"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졌다고 해도, '과거'에 비해선 많이 발전했죠."

루나가 계속해서 걸었다.

레이는 변해버린 풍경 속에서 과거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노력하며 루나를 쫓았다.

그렇게 걸어가다, 레이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상기하고는 턱에 힘을 주었다.

이제는 용기를 내야 했다.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이제는 루나에게 물어야 했다.

허나 몇 번이고 이 순간을 위한 다짐을 거듭했음에도, 레이는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레이는 두려웠다.

등을 돌려 도망치고 싶을 만큼 진실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더는 그녀를 실망시킬 수 없다는 일념에 기댄 채, 레이가 마침내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너는..."

레이의 목소리가 하염없이 떨렸다.

"대체 누구야."

"..."

루나가 제자리서 멈춰 섰다.

그러고는,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목소리를 떠는 레이를 돌아보았다.

(삽화)

루나의 얼굴에 깃든 표정은 삭막했다.

레이는 루나의 가라앉은 눈빛에서부터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 서로를 노려보듯 마주 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이 레이에겐 영원처럼 느껴졌다.

"글쎄요."

얼어붙었던 시간이 루나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루나는 입꼬리를 살짝 뒤틀고는 다시 등을 돌려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레이가 다급히 루나를 쫓았다.

레이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들으며 루나가 중얼거렸다.

"글쎄요, 레이. 나는 누굴까요."

"..."

"과연 나는 누구일 것 같나요?"

"...!"

레이가 루나를 쫓다가 흠칫 놀랐다.

어느샌가 풍경이 또 변화하고 있었다.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풍경은, 점점 더 과거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풍경이 과거로 흘러갈수록 레이는 루나와 함께 걷고 있던 길거리가 어디로 향하는 길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과거로 흐르는 풍경과 함께 루나와 레이 또한 점점 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린 소녀가 되어가는 여인이 다시금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나는 누구일까요? 그녀의 사도...? 복제된 인격...? 아바타라도 되는 걸까요...?"

사실, 정답은 알고 있었다.

소녀는 루나가 아니었다.

소녀는 초월을 이룬 루나가 이 세상에 남긴 잔향이었다.

루나의 기억을 공유할 뿐인, 마지막 작별까지의 여정을 위해 만들어진 대체품과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소녀는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레이. 묻고 싶은 게 있어요."

"..."

소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레이 또한 소녀를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 옆으로, 냉기만이 가득한 텅 비어있는 집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레이는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할 수 있었다.

이곳은...

레이와 루나가 처음 만났던 바로 그날의 풍경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허름한 집을 풍경으로 낡은 옷가지를 걸친 소녀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레이, 나는 착한 마법사였나요?"

"..."

레이는 침묵했다.

이제는 흐릿해져 버렸던 과거의 풍경 위에서.

소녀는 석양에서 번져 나오는 따스함을 등지고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루나가, 레이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레이, 나의 종착점은 이곳이에요."

루나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곳이, 그녀의 종착점이었다.

루나는 결국 이날 레이가 건네주었던 온기와 구원으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은 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이 그녀가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은 시작점이었고, 또한 이곳이 그녀가 택한 종착점이었다.

"하지만 레이의 종착점은 이곳이 되어서는 안 돼요."

"..."

레이의 뺨에서 떨어져 내린 눈물이 천천히 땅을 적셨다.

레이는 루나를 구원하지 못 했다.

먼저 손을 뻗은 주제에...

의심하고, 외면하고, 배반하고, 그러면서도 의지하고 기댄 끝에, 레이가 루나에게 남긴 것은 상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레이는 루나의 손을 맞잡고 용서를 비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이 기적과 같은 찰나의 순간이 지나가면, 그녀가 긴 시간을 곱씹어야 할 고독조차 레이는 함께해줄 수 없었다.

"..."

레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레이는 그녀에게 속죄할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 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미안하다는 말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리라는 걸 알았기에 차마 입에 담지 못 했다.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눈물과 함께, 레이가 힘겹게 루나를 향해 속삭였다.

"고마워..."

"..."

"고마워... 루나..."

"..."

"고마워... 정말... 고마워..."

레이는 바보처럼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레이의 고맙다는 감사를 듣고서 루나는 충분하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레이에게 다가가 두 손을 뻗었다.

"레이, 이제는 레이가 바란 삶을 살아요."

"..."

"의무에서 벗어나... 레이가 바란 삶을 살아가며... 행복해야 해요."

루나가 레이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마지막이 될 바람을 전했다.

"나를 위해서라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해요.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언제까지나..."

"루나..."

소년은 소녀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석양이 어둠에 잠기고, 결국 소녀가 떠나간 자리에 홀로 남게 되어서도.

레이는 오랫동안 소녀를 그리며 흐느꼈다.

소녀가 바랐던 앞으로의 행복을 위해.

그리 오랫동안 가슴의 쓰라림을 덜어냈다.

- 홍등가의 소드마스터 외전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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