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45화 (445/446)

외전 - 작별 [1]

[78]

벨라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눈을 감을 때까지 벨라는 공식적으로 어떠한 직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벨라는 자신의 미천한 신분과 과거가 레이와 레이에게 누가 될까 염려하여 생전 그 어떠한 상징적인 직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황제의 모친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지미의 반려조차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벨라는 귀족과 그 어떤 접점도 없는 천한 신분의 여인일 뿐이었다.

허나 벨라의 장례식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벨라의 장례식은 황성 인근에 위치한 지미의 영지에서 진행되었고, 대륙의 수많은 유력자들이 직접 벨라의 장례식에 참석해 조문을 이어갔다.

황명을 받고 파견된 제국의 관리들과 군단이 장례 절차를 도왔다.

생전 제대로 된 공적 하나 없는 여인의 장례라기엔 전례가 없는 예우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에 관해 겉으로 투덜거리는 이들은 없었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은 뒷말조차 삼갔다.

말실수 하나가 밖으로 새어나갔을 때 감당해야 할 대가를 대륙의 유력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불만을 드러내는 이가 없다고는 해도, 절차적인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벨라를 마지막까지 아무 직위도 없는 여인으로 둘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지미는 벨라 사후 벨라가 자신의 반려자였음을 공표하였다.

벨라의 마지막 신분은 헬름 공작가의 공작 부인이 되어 묘비에 새겨졌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레이는 영면에 든 벨라의 곁을 조용히 지켰다.

하루가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며 장례 절차가 하나씩 마무리되어 갔음에도, 레이는 그 모든 게 현실로 잘 와 닿지가 않았다.

레이는 장례식 내내 눈을 한번 붙이지도 않은 채 멍하니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리 짙은 비애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레이에 비해, 레아는 벨라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동요를 거의 내비치지 않고 벨라의 안식을 기원했다.

레아는 언제부턴가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이러한 순간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레아는 버겁게나마 이별의 슬픔을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수많은 이들의 조문이 이어진 끝에, 벨라의 장례식이 마무리되었다.

벨라는 헬름 공작가의 영지에 안치되었다.

지미는 벨라의 관이 안치된 무덤 주위에 작은 정원을 조성하였다.

벨라가 평소 좋아했던 꽃들이 피어나 무덤의 곁을 은은하게 밝혀주었다.

그렇게 장례식을 포함한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 지 며칠이 더 지났다.

허나 레이는 여전히 꽃향기가 가득한 정원을 떠나지 못 하고 벨라의 묘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미가 레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레이의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지미는 레이와 함께 벨라의 묘비를 바라보았다.

묘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지미 또한 벨라와 함께했던 과거의 추억들이 떠올라 울적한 감정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자기 뺨을 매만진 지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래 귀족 흉내 내느라 교양이라는 걸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말이다."

"..."

"그제 본 서적에 그런 글귀가 나오더라. 삶이란 고난과 역경이 있기에 빛나는 것이라고."

"..."

레이는 계속해서 침묵했다.

대화가 힘들어 보였지만, 레이가 귀를 열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지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항상 행복했던 삶은 아니었겠지."

벨라의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평탄하지 못 했고, 분명 이상적인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을 터다.

허나 항상 행복하지 못 하였다는 것이, 삶이 불행했음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벨라는 헌신하는 삶을 살았어. 헌신한 이에게 배신당하기도 했지. 그 헌신으로 인해 상처받기도 했어. 하지만... 결국 그 헌신에 보답 받았잖아."

"..."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잘난 아들이 벨라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주었고..."

"..."

"벨라는 존중받았고, 사랑받았고, 그리고 평생을 꿈꾸었던 소망을 이룰 수 있었어."

"..."

"그런데 그 소중한 아들이 긴 잠에 든 후... 벨라는 많이 두려워했어. 너를 이대로 잃을까 봐 두려워했어. 긴 시간을 울면서 자책했지.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어."

"..."

"네가 돌아온 날, 벨라는 구원받은 거야."

레이가 돌아오고 나서야 벨라는 마침내 평온한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

벨라가 되찾았던 그 평온한 웃음을 떠올리며 지미 또한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레이, 벨라는 빛나는 삶을 살았어. 평생을 꿈꾸었던 소망을 이루었고, 삶이 다하기 전에 구원받아...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 눈을 감았어.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고 편안히."

"..."

지미의 위로를 듣고서 레이가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참을 침묵한 채 입술을 꾹 물고 있던 레이가 슬픔이 억눌린 목소리로 지미에게 물었다.

"지미... 나는... 모르겠어요. 내가... 잘못한 걸까요?"

"..."

"엄마는... 자기가... 버거운 짐이라고... 저한테 자기가 버거운 짐이 될 뿐이라고... 자책했는데... 내가 엄마를 그렇게 몰아붙인 걸까요...? 그래서 괴로워했을까요...?"

레이가 흐느꼈다.

그런 게 아니었는데.

결코 그런 게 아니었는데.

레이는 벨라의 헌신이 있었기에 삶을 살아가리라 결심할 수 있었다.

좌절하고 주저앉은 레이를 벨라가 구원해주었다.

레이에게 벨라는 버거운 짐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이유이자 심장을 뛰게 하는 햇살이었다.

분명 그랬었는데...

벨라에겐 레이의 그 사랑과 헌신이 괴로움으로 다가온 것일까.

"끄... 흡..."

레이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다잡지 못 한 채 어깨를 떨었다.

그 순간 지미가 레이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고서 고개를 저었다.

"레이, 그게 아니야."

"..."

"벨라는, 너를 어머니로서 사랑했어.

동정심에 어쩔 수 없이 키운 아이가 아닌...

벨라는 너를 진정 아들이라 여기고 사랑한 거야.

네가 벨라를 사랑한 만큼...

너 또한 벨라에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이였어."

"..."

"부모가 되어... 나의 삶보다 내 아이의 미래와 행복을 바라며... 그렇게 아이를 위해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아이를 위한 헌신이 부모의 행복이 웃음을 짓게 만들어. 부모는 그런 거야."

나의 평안보다 아이의 평안을.

나의 즐거움보다 아이의 즐거움을.

나의 미래보다 아이의 미래를 꿈꾼다.

아이를 위해 헌신하는 부모의 삶은 불행한가.

결코 아니었다.

그게 부모의 행복이었다.

"레이... 벨라는 꿈처럼 행복한 삶을 살았어. 네가 벨라의 소망을 이루어주었잖아. 그리고 벨라의 마지막 소망은... 사랑하는 아들의 행복이었어."

벨라는 레이가 본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엄마의 품을 떠나, 레이가 진정 자기가 원하는 삶을 이루어 나가기를 바랐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헌신이 벨라를 괴롭게 만들었다고 생각해?"

"..."

"아니야, 레이. 자식을 위한 그 헌신이야말로 부모에게 있어 최고의 행복인 거야."

"..."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넌 아들이잖아. 벨라의 둘도 없는 소중한 아들이잖아. 그러니까 엄마의 헌신에 감사하면 되는 거야. 그게 벨라가 원했던 거고."

"..."

레이의 입가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 세상에 처음 환생했을 때 좌절하고 주저앉은 레이를 벨라가 구원해주었다.

벨라의 헌신이 있었기에 레이는 좌절을 극복하고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후 레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소중한 인연들을 새롭게 쌓아 나갔다.

언제부턴가 그 새로운 인연들이 레이의 삶을 이끌어주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연이 생겨날수록 벨라의 존재감은 점점 더 흐릿해져 갔다.

본디 아이는 그렇게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법이었다.

허나 레이는 그리하지 않았다.

레이에게 있어 벨라는 언제나 삶의 중심이었다.

앞으로도 그것만은 변치 않을 터였다.

그래서 벨라는 아들을 위해 아들의 곁에서 떠나가기를 택했다.

이미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을 이루었던 벨라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아직 해줄 수 있는 게 남아있음을 기뻐하였다.

그 덕분에 벨라는, 마지막 순간 진실로 행복한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

"..."

레이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 너무나 쓰라려 눈물이 계속해서 뺨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본디 헤어짐의 아픔은 떠나간 자가 아닌 남겨진 이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몫이었다.

레이는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보았다.

"..."

짙은 비애가 가슴을 헤집어댄다.

허나 그와 동시에, 환생 이후 평생 동안 레이의 마음 한 편을 짓누르고 있던 의무감이 서서히 흩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벨라가 바라던 대로, 레이는 이제야 벨라에게서 독립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

레이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억지로 웃음을 머금어보려고 노력했다.

벌써 벨라의 온기가 그리웠다.

우리 아들이라고 불러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허나 그건 누구나 겪게 되는 이별의 진통이었다.

모든 이별이 비극인 것은 아니었다.

이별은 하나의 결말이었고, 벨라의 삶은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이제 레이는, 벨라에게서 독립하여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했다.

"엄마... 열심히... 열심히 할게요. 엄마가 바란 대로... 내 삶을... 열심히 살아볼게요..."

레이는 벨라의 묘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리 속삭였다.

지미가 조용히 레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기구한 삶을 살았으나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한 벨라의 삶을 기리며.

지미 또한 눈물을 떨어뜨리며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

레이의 삶의 중심은 언제나 벨라였다.

하지만 벨라가 떠나갔다고 해도 여전히 소중한 인연들이 레이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기에 레이는 무너지지 않았다.

잠깐의 방황을 끝내고 레이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다시 일어선 레이는 이제야 '벨라를 위한 삶'이 아닌 '나의 삶'을 고민해볼 수 있었다.

"..."

레이는 여전히 레이였다.

나의 삶이라고 해서 과거와 다른 사상이나 가치를 꿈꾸지는 않았다.

단지 레이는 평생의 의무감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롭게 본인이 꿈꾸었던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고민을 이어간 끝에.

레이는 요하나를 찾아갔다.

"요하나, 부탁이 있어."

"무슨 부탁?"

"나랑... 여행을 같이 가줄 수 있어?"

전쟁이 끝났음에도 지금 세상은 혼란이 가득했다.

그건 레이의 선택이 초래한 결과였다.

옳고 그름, 그리고 루나가 남긴 부탁과는 별개로, 레이는 그 비극을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레이는 엉망이 된 대륙을 직접 살필 생각이었다.

그리하며 혼란을 안정시킬 방법을 찾고, 상처받은 이들의 치유를 도우리라고 마음먹었다.

그건 하나의 속죄였고, 또한 한때 적대감만 품었던 이 세상을 사랑하기 위한 레이의 도전이었다.

물론 지금의 몸 상태로 대륙을 홀로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요하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

벨라가 떠나간 후 레이가 자신의 의지로 내린 첫 번째 결정이었다.

아직도 레이의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나, 레이의 눈동자에 서린 의지는 결코 나약하지 않았다.

레이와 마주 선 요하나가 이내 활짝 웃었다.

"좋아."

"고마워."

그렇게 레이는 벨라의 그늘에서 벗어나 첫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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