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44화 (444/446)

외전 - 이별 [8]

[77]

시간이 흘렀다.

레이는 코어를 다시 구축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었다.

요하나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며 애들한테 아빠 허접하냐고 놀림받는 것도 오래는 못 할 짓이었다.

얼른 어떤 코어든 새로 마련해 무너진 아빠의 위엄을 다시 세워야 했다.

하지만 레이는 새롭게 구축할 코어의 기반을 무엇으로 할지 아직 고민 중이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길게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최상위급 마나 정제법은 황성에 종류별로 충분히 구비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중에서 안전성을 우선으로 고려하여 적당히 선택하면 될 일이었다.

허나 레이는 다른 이에겐 설명하기 힘든 막연한 초조함에 휩싸여 아직까지 결정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 초조함의 정체를, 레이 또한 정확히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하아..."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 한 레이가 황성을 벗어나 밖을 걸었다.

따뜻한 햇볕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레이가 눈부심을 이겨내고 고개를 들어보았다.

"..."

하늘이 참 맑았다.

날씨는 따스했고 바람은 잠잠했다.

있던 근심도 사그라질 만큼 평화로운 하루였다.

잠시 생각을 비우고 호흡을 고른 레이는 오늘도 황성 가까이 마련된 작은 화단을 찾았다.

작은 화단이라 해도 온갖 진귀한 꽃들이 가득한 화단이었다.

"엄마."

"아들 왔어?"

화단을 구경하던 벨라가 레이를 맞아주었다.

이 시간대쯤 벨라는 대개 화단을 구경하며 간단히 차를 마시고는 했다.

그리고 레이는 거의 매일 벨라가 화단을 구경하는 시간에 맞춰 이곳을 찾아왔다.

레이는 화단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벨라와 마주앉아 어제오늘 있었던 일들을 담담하게 늘어놓았다.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어떤 과제를 진행 중인지, 앞으로는 무엇을 할 계획인지...

그런 자잘한 이야기들을 레이가 하나씩 풀어놓았고, 벨라는 언제나처럼 따뜻한 웃음을 머금고 레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쨌든..."

잠시 이야기를 멈춘 레이가 벨라를 바라보며 살짝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이전에 비해서는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벨라는 여전히 걱정될 만큼 야위어 있었다.

길었던 마음고생이 벨라를 그토록 메마르게 만들었다.

레이가 황좌에서 숨을 거둔 후, 벨라는 자신의 소망이 아들을 절벽 끝으로 밀려나게 만들었음을 긴 시간 자책했다.

10여 년 전 하염없이 뒤틀려있는 목소리로 루나가 입에 담은 힐난을 벨라는 여전히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부린 과욕의 대가를 레이가 치렀다는...

마지막까지 레이의 헌신에 기댄 채 기생충처럼 레이의 삶을 갉아 먹었다는...

그 루나의 힐난을 벨라는 여전히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

벨라는 그날의 절망과 죄책을 잊지 않고 고스란히 간직했다.

잊을 수도 없었고 잊으려 하지도 않았다.

외면하지 못 한 그날의 절망과 죄책이 벨라의 육신과 마음을 오랫동안 으깨고 헤집었다.

그럼에도 벨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던 건, 레아가 아직 자립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기적이 일어났다.

다시는 안아주지 못 하리라 생각했던 레이가 온기를 되찾았다.

레이가 되살아난 후 벨라의 가슴에 새겨진 마음의 상처는 간신히 아물 수 있었지만, 피폐해진 벨라의 육신은 여전히 회복이 더뎠다.

레이는 벨라가 되도록 빠르게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랐다.

물론 그녀도 이제 나이가 있었기에 과거와 같은 생기를 되찾을 수는 없을 터다.

허나 아직 노년도 아니었기에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건강을 회복 가능한 나이였다.

레이는 적어도 벨라의 심신이 안정될 때까지는 벨라의 곁에 계속 머물 생각이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레이에겐 벨라가 우선이었고, 앞으로도 그 기준만은 변치 않을 터다.

벨라 또한 레이가 그러리란 걸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더는 모를 수 없었다.

"..."

벨라는 레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조금 부셨지만 푸른 하늘은 안도감과 더불어 약간의 해방감을 벨라에게 가져다주었다.

얼마 안 가 나른한 따스함이 벨라를 찾아왔다.

벨라는 그 따스함에 거스르지 않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

레이는 계속해서 어제오늘 겪었던 일들과 우스갯소리를 이어가다가 문득 표정을 굳혔다.

벨라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편안한 얼굴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허나 레이는 벨라의 심박에 변화가 생겼음을 곧바로 인지했다.

심장의 박동이 자꾸만 불규칙하게 요동친다.

"...!"

지난 10년 간 벨라의 육신은 계속해서 피폐해져 갔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근육의 수축은 심장에도 큰 무리를 주었다.

10년 가까이 무리한 부하를 감당한 벨라의 심장이, 지금까지의 혹사를 항의하듯 수축을 멈추고 경련하려 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한 레이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마...!"

방치하면 심정지가 올 수도 있다.

아니, 방치하면 확실하게 심정지가 올 것이다.

정말 위험한 응급 상황이었지만, 바로 조치를 취한다면 충분히 극복 가능했다.

레이는 벨라를 안심시킨 후 곧바로 사람을 불러 도움을 받으려 했다.

정 다급하면 레이가 직접 심폐소생술이라도 시작해야 했다.

헌데 일어서서 움직이려는 레이의 손을 벨라가 꽉 잡아왔다.

"아들..."

"엄마, 잠깐만...!"

레이는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필요한 조치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벨라는 레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단다..."

"그래, 엄마. 걱정하지 마. 큰일 아니니까, 잠깐만 기다려."

레이는 아직 벨라가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다고 생각하고 벨라를 토닥였다.

허나 벨라는 끝까지 레이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엄마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니..."

아들은 장성했다.

사실 장성하기 전부터 걱정할 게 없는 아들이었다.

너무 잘난 탓에 어르고 달랠 필요도 없어 농담 삼아 키울 맛도 안 난다고 투덜거렸던 아들 아니던가.

딸아이도 이제는 괜찮았다.

딸아이는 자기 의지로 황가의 핏줄로서 의무를 받아들이고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딸아이의 곁을 많은 이들이 지켜주고 있었다.

게다가 손녀들도 보았다.

아직 철은 없지만 예쁘고 똑똑한 손녀들은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벨라는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젠 정말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었다.

벨라는 환히 웃으며 레이의 손을 꽉 말아쥔 채 속삭였다.

"천한 창녀가 과분한 행복을 누렸는데..."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다.

가진 것이 몸밖에 없었다.

그래서 목숨을 연명하고 동생을 지켜주기 위해 몸을 파는 창녀가 되었다.

처음부터 원한 삶을 아니었으나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벨라는 자기 분수에 넘치는 희망을 품었다.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의지할 수 있는 동반자를 만나고 싶었다.

동반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나는 제대로 받지 못 했던 부모의 사랑을 나의 자식들에게 후회 없이 베풀고 싶었다.

이룰 수 없는 소망이었다.

누군가에겐 소박한 소망이겠지만, 길거리의 창녀에겐 분수에 넘치는 바람이었다.

그럼에도 벨라는 결국 그 모든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벨라는 가족을 만들었다.

가족을 만들어 아들과 딸에게 사랑을 베풀며 키웠다.

그 아들과 딸이 장성하여 예쁜 손녀들도 벨라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 모든 것을 이루었다.

분명 후회 한 점 남지 않는 너무나 행복한 삶이었어야 하는데...

벨라에겐 딱 하나 후회되는 게 있었다.

"레이... 내 사랑하는 아들..."

벨라의 아들은 너무나도 뛰어났다.

배운 게 없어 촌구석에서 몸이나 팔던 벨라가 이해하기엔 너무나 빛나는 재능을 타고났다.

촌구석이 담아낼 수 없는 재능을 타고난 레이는 세간의 상식조차 간단히 뒤집으며 세상 모두를 놀라게 할 위업을 쌓아갔다.

벨라는 레이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벨라는 레이를 의지했고, 신뢰했으며, 결국 그러한 믿음은 맹목이 되었다.

그 맹목을 벨라의 잘못이라 지탄하는 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벨라가 아무리 노력했어도 레이가 이룬 위업과 레이가 감당해야했던 희생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을 터다.

레이 또한 벨라에게 약한 모습을 최대한 감추려 했기에, 결국 벨라가 품을 수 있었던 건 레이를 향한 맹목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벨라 또한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레이의 삶의 중심엔 항상 벨라가 있었다.

벨라는 과거에는 그 사실을 잘 알지 못 했다.

레이가 효자이긴 하나 결국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개척해 나아가고 있다고 착각하였다.

허나 레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벨라를 위한 삶을 살았다.

그 진실을 벨라는 레이가 긴 잠에 들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벨라는 온몸이 헤집어진 채 얼어붙은 레이를 마주 보고 나서야...

자신의 존재가 레이를 옥죄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이 바보 같은 엄마가... 너의 족쇄가 되었구나..."

"엄마...!!"

레이가 발작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가, 이내 벨라의 손을 꽉 움켜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 했을 텐데..."

어느새 레이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벨라가 바라는 것.

그리고 벨라가 택하려는 결말을 알아챈 레이가 벨라의 손등에 뜨거운 눈물을 떨어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레이가 쥐어짜낸 목소리로 애원하듯 속삭였다.

"엄마가 있어서...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아들이라고 불러줘서... 내가 일어설 수 있었는데..."

레이는 아이처럼 울었다.

벨라가 그런 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우리 아들... 이제는 네 나이가 몇인데... 엄마 품에서 독립해야지..."

"엄마...!"

레이가 이를 악물었다.

레이는 벨라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무리 울고불며 애원해도 결코 벨라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란 걸, 레이는 모를 수가 없었다.

벨라는, 아직 갓난아기였던 레이의 손에 자기 손가락을 쥐여주었던 그날의 미소를 머금은 채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벨라의 의지를 존중해주었던 레이는 이번에도 벨라를 강제로 말리지 못 했다.

그 올곧고 우직한,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에게 벨라가 부탁했다.

"이제... 너의 삶을 살아가렴..."

"..."

"엄마는... 이미 너무너무... 많은 행복을 아들한테 받았으니까..."

"..."

"이제 그만... 아들도 엄마한테 독립해서... 아들의 꿈을 이루어나가렴..."

벨라가 울고 있는 레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꼭 안아주며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우리 사랑하는 아들 덕분에... 엄마는 많이많이 행복했어."

하늘이 참 맑았다.

날씨는 따스했고 바람은 잠잠했다.

그리고 아들의 온기는 따뜻했다.

바라던 모든 소망을 이룬 벨라는 세상 그 누구보다 편안하였다.

진실로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서, 벨라는 잠이 들듯 천천히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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