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이별 [7]
[76]
벨라의 건강이 좋지 못 했다.
10년 간 마음고생이 심해 심신이 피폐해진 탓이었다.
레이가 잠에서 깨어나 온기를 되찾고 나서야 벨라는 과거의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허나 이제 나이도 있는지라 한번 망가진 몸을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레이는 벨라가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을 때까지 벨라에게 집중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벨라의 곁에만 붙어있겠다는 건 아니었다.
해야할 일들을 하고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되, 벨라를 우선해서 행동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레이는 한동안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돌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달이 훅 지나갔고, 어쩌다보니 레이는 레아와 단둘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훌쩍 자라 버린 자신의 동생이 레이는 여전히 좀 낯설게 느껴졌다.
오빠오빠 노래를 부르며 앵기면서 어린애다운 고집을 부리다 토라지고는 했던 동생이 이제는 고상한 여인이 되어 우아한 품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워낙 기억 속 모습과 괴리감이 심하다보니 레이는 레아와 단둘이 있을 때 괜히 말문이 좀 막히고는 했다.
"음..."
식사 도중.
괜히 목을 가다듬어 본 레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레아."
"네."
"어... 그... 엄마 몸 좀 괜찮아지시면, 가족끼리 여행이라도 가볼까?"
"...여행이요?"
"어... 바다라든가..."
"..."
레아의 시선이 삐딱해졌다.
명백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레이는 자기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싶어 레아의 눈치를 보다가, 내가 왜 동생 녀석 눈치를 이렇게 보고 있나 싶어 자괴감에 어깨를 떨었다.
그리 혼자 끙끙거리며 고뇌하는 레이를 바라보다 레아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오빠, 저 바다 무서워해요."
황제의 위엄을 고려하면 뭘 무서워한다고 함부로 발언해선 안 되지만 레아는 편하게 말했다.
"여전히 가끔 악몽을 꿔요. 바닷가에서 검은 그림자에게 쫓기는 꿈 같은 걸요."
레아는 어렸을 때 카렌을 졸라서 바닷가에 갔다가 죽을 뻔했다.
그날의 공포스러운 기억은 여전히 레아의 뇌리에 깊게 새겨져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레아는 바다에 관한 감정이 좋지 못 했다.
그 이후에 바다에 가볼 기회도 딱히 없었지만, 아마 기회가 생겼다고 해도 굳이 찾아가진 않았을 터다.
레이가 뒤늦게 레아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고 살짝 당황스러워했다.
"아아, 맞다. 그랬지."
"그리고 지금 느긋하게 여행 다닐 여유 없어요. 자는 시간도 아까울 지경이라고요."
대륙이 많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레아는 대외적으로 대륙의 최고권력자였다.
아예 꼭두각시 황제 노릇을 할 게 아니라면 직접 확인하고 처리해야 할 사안이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레아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리라 결심했고, 그랬기에 현재 감당하기 벅찰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황제가 여행을 간다고 밖으로 움직이면 그로 인해 소모되는 물자와 인력 또한 상상 이상이었다.
그렇게까지 여유 부릴 여력이 레아에겐 없었다.
레아는 10년 정도는 자신이 황성에서 멀리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런 레아에게 레이는 눈치 없이 여행 운운한 것이다.
레아가 살짝 삐친 기색을 내비치며 레이에게 한마디 했다.
"이 시국에 여행이라니요. 오빠도 이제 철 좀 드세요."
"..."
이번엔 레이의 시선이 삐딱해졌다.
기억 속에선 얼마 전까지 빽빽 울어대기만 했던 동생에게 철 좀 들으란 소리를 들으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혈압을 떨어뜨리려 노력하는 레이를 보며, 레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에게 철이 좀 들라니 뭐니 했던 건 당연히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해맑게, 허나 우아함을 잃지 않고 웃음을 내보이는 레아를 바라보며 레이 또한 피식 웃었다.
과거와 많은 게 달라졌다.
여전히 잘 적응되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식사를 하며 몇 가지 더 자잘한 이야기를 레아와 나누던 레이가 문득 화제를 돌렸다.
"아, 근데 황성 동쪽에 있는 건물 말이야... 거기에..."
"선황의 혈육이 유폐되어 있어요."
이미 한 번 들었던 정보이긴 하지만, 레아에게 다시 한 번 확답을 받은 레이가 복잡한 기색을 내비쳤다.
선황의 아이.
레이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엉켜버린 운명을 지닌 자였다.
시시비비를 떠나, 레이와 선황의 아이는 결코 서로를 용인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물론 레아의 입장 또한 레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황의 아이는 아직 처형되지 않고 유폐되어 있었다.
고민하던 레이가 그 문제에 관해 레아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괜찮겠어?"
"글쎄요."
선황의 아이를 처형하지 않고 유폐하기로 결정한 건 레아였다.
선황의 아이가 현 제국의 위험 요소인 것은 명백한 진실이었다.
문제는 과연 얼마나 위험하냐는 것이었다.
레아가 잠시 고민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용혈의 능력이 약해지고 있어요."
"...!"
처음 듣는 이야기에 레이가 살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허나 조금만 생각해봐도 황족의 육신에 흐르는 용혈의 힘이 약화되리라는 건 추측 가능한 일이었다.
용혈은 드래곤이라는 생명체로부터 황가에 전해져 일천 년 동안 이어진 축복이자 저주였다.
그리고 드래곤은 엘-람에 의해 탄생한 상리를 벗어난 생명체였다.
헌데 드래곤의 기원이 되었던 엘-람의 영향력이 소멸했다.
그러니 결국 드래곤이 안배해둔 장치나 권능들 또한 천천히 소멸해 갈 수밖에 없었다.
레아가 용혈을 활용해 작은 불꽃을 일으켜보며 말했다.
"이 힘이 바로 사라지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빠르게 옅어지겠죠."
"..."
"그때가 되면 황족을 상징하는 건 독특한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상밖에 남지 않을 거예요. 어쩌면 그마저도 사라질 수도 있고요."
"..."
레이는 황족의 특성이 사라져 가는 것이 과연 긍정적인 변화일까 잠시 고민했다.
헌데 레아의 목소리가 레이의 상념을 끊었다.
"사실 그런 것보다도... 전쟁 후 혼란이 계속되면서 과거 중시했던 정통성이나 혈통보다도 힘을 중시하는 기류가 대륙 전역에 짙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과거에 중시했던 가치에 목을 매달고 있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격변했다.
혼란을 이겨내고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결국 힘이었다.
"루나 언니가 제국의 우군으로 남아주는 동안엔 제국은 안전할 거예요. 로드 급을 넘어선, 권능을 다루는 대마법사잖아요."
"...그렇겠지."
"루나 언니의 권능은... 음... 기적을 일으켜요. 오빠를 되살릴 수 있었던 것도 루나 언니의 권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죠."
긴 잠에 들었을 때 레이는 이미 온몸이 헤집어져 있었다.
엘-람과의 계약이 소멸한 이후에도 이미 헤집어진 육신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망가진 육신을, 루나가 수 개월에 걸쳐 신성력도 없이 수복해 냈다.
루나의 권능은 불가역적인 변화조차 역행시킨다.
그건 상식을 벗어난 기적이었다.
"..."
루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레이가 다시 침묵했다.
식사도 멈추고 생각에 잠겨 있는 레이를 향해 레아가 불쑥 물었다.
"오빠."
"응?"
"혹시 나랑 혼인 관계 좀 맺을 생각 있어요?"
레이가 잠시 자기 귀를 매만지고는 되물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방금 뭐라고 했어?"
"나랑 혼인 관계 좀 맺을래요?"
"아니, 미친년아."
레이가 일단 욕설부터 뱉었다.
레이의 반응을 예상했던 레아가 담담하게 답했다.
"황제에게 무엄하네요."
"뭐 잘못 처먹었냐? 식사 잘 하다가 왜 갑자기 헛소리야?"
"제국을 지탱하는 무력적인 두 축이 요하나 언니랑 루나 언니거든요."
현 대륙제일검인 소드마스터 요하나.
그리고 역사상 다시는 존재치 못 할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 루나.
"근데 두 언니 다 오빠 사람이잖아요. 오빠 말 한 마디면 제국이 주저않는다고요. 두 언니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 테니 오빠라도 황가에 끌어들이는 게 최선이지 않겠어요?"
"최선은 뭔...! 아니 동생아, 이게 지금 남매 간에 나눌 대화냐? 어?"
"촌수로 따지면 사촌 아닌가요? 사촌 정도면 유난 떨 일은 아니래요. 역사적으로 말이죠."
"아니 시발 역사고 나발이고 너 진짜 엄마가 뒷목 잡고 쓰러지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냐? 어? 뭐 시발 나 없는 동안 엄마랑 싸웠어? 미쳤어 진짜?"
레이는 슬슬 욕설이 필터링되지가 않았다.
그런 레이의 반응을 보며 레아가 유쾌해하며 키득거렸다.
레아도 혼인에 관해 레이에게 진담으로 건넨 말은 아니었다.
물론 제국의 장기적인 안정을 위해선 진짜로 그런 극약 처방이라도 필요할 지경이었지만, 당장 급한 일은 아니었다.
적당히 오빠를 놀리면서 시간을 보낸 레아가 식사가 끝난 후 오빠를 짧게 배웅했다.
"저는 바빠서, 이만 돌아가볼게요."
"예, 계속 바쁘신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황제 폐하."
혼인에 관한 언급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는지 레이가 삐딱하게 인사를 받았다.
레아는 오빠를 놀리는 게 꽤나 즐거웠는지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레이가 레아의 뒷모습을 보며 자기 뒤통수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그후, 레이는 벨라와 함께 황성 주변을 산책하며 어제오늘 있었던 일들을 유쾌하게 이야기했다.
물론 레아가 혼인에 관해 헛소리를 했던 것은 아예 생략했다.
레이는 굳이 벨라가 뒷목을 잡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벨라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즐겁게 레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중간에 엘리와 카니아도 두 사람을 찾아와 조잘거리며 산책을 함께했다.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아쉽게도 아직 벨라는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기에 산책을 길게 이어갈 수는 없었다.
레이 또한 벨라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적당한 시점에 이야기를 멈추고 벨라에게 휴식을 권했다.
"그만 들어가서 좀 쉬어, 엄마."
"응, 알았어. 우리 아들도 바쁠 텐데 가 봐. 찾는 사람 많잖아."
벨라가 레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레이는 굳이 고집 부리지 않고 벨라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 미리 레이와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던 요하나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음에도, 요하나는 레이 앞에 서더니 괜히 정강이를 한번 슬쩍 걷어찼다.
퍽!
"악...!"
요하나 입장에서 아주 약하게 걷어찬 거긴 했지만 레이 입장에선 전혀 약하지가 않았다.
레이가 엄살을 부리는 것처럼 낑낑대자 요하나가 퉁명스레 물었다.
"엄살 좀 그만 부리지?"
"진짜로 아픈... 아니 근데 왜 걷어찼는데?"
"그냥?"
"..."
레이의 고개가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었다.
허나 요하나는 도리어 뻔뻔하게 다시 물었다.
"뭐? 불만있어?"
"..."
우리 요하나가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레이는 요하나의 가슴에 쌓인 울분이 아직 참 많이 남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조용히 끙끙거렸다.
벨라의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리가 두눈을 깜박였다.
이유 없이 정강이를 까이고도 제대로 된 항의 한 번 못하는 아버지의 등이 참으로 초라했다.
고민하던 엘리가 벨라에게 불쑥 물었다.
"할머니!"
"왜 그러니?"
"우리 아빠 혹시 허? 접? 이에요?"
"?"
난데 없는 딸아이의 비하에 레이가 고개를 홱 돌려서 엘리에게 물었다.
"엘리, 허접이란 말은 누구한테 들었어?"
"음... 위험한 변태 아저씨가 가르쳐줬어요. 아빠가 허? 접? 이래요."
아, 그 속 좁은 새끼가.
레이가 뒷목을 붙잡았다.
레이는 엘리를 불러서 그런 나쁜 말은 쓰면 안 된다고 타일렀고, 엘리는 그냥 좋다고 꺄르르 웃었다.
그 모습을 벨라가 한 걸음 떨어져 조용히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