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42화 (442/446)

외전 - 이별 [6]

[75]

전쟁이 끝났다.

그럼에도 세상은 통제하기 버거울 만큼 혼란스러웠다.

루나는 레이의 선택으로 인해 초래된 변화들을 레이가 직접 두 눈으로 돌아보기를 바랐다.

레이는 루나의 요구를 따를 생각이었다.

허나 그 전에, 일단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약 10년간 이루어진 전쟁에 관한 기록이 황성에 정리되어 있었다.

소수의 인원만이 열람 가능한 기록이었지만, 레이는 자유롭게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츠즉-!

레이가 황성의 비밀 서고에 들어서자 한 소녀의 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실로테가 창조한 아프텔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루나가 새롭게 창조한 인공지능이었다.

황성의 관리를 담당하는 인공지능의 이름은 메이즈였다.

레이가 혹시나 싶어 메이즈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허나 메이즈의 외모는 레이와 친분이 있는 그 누구와도 닮아있지 않았다.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봐도 메이즈의 외형은 레이에게 생소했다.

레이가 침묵한 채 가만히 서 있자 메이즈가 질문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열람하고 싶은 자료가 있어서..."

레이는 지난 10년간의 기록을 확인하고자 했고, 메이즈는 레이의 요청대로 자료를 정리해 레이에게 소개해주었다.

레이는 메이즈에게 받은 자료를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기록은 삭막했다.

불필요하게 제국의 입장을 대변하지도 않은 채, 그저 어느 시점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허나 레이는 그 기록들을 담담하게 살피기가 참 힘들었다.

"..."

10년 간 무수한 교전이 있었다.

마경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혹은 대륙의 내분을 해결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전투가 있었다.

그 기록 속에서 레이는 요하나의 이름을 너무나 쉽사리, 그리고 자주 찾아볼 수 있었다.

레이가 긴 잠에 든 후 요하나는 전장에 몸을 던져넣기를 그치지 않았다.

잠깐의 휴식조차 없이 요하나는 끊임 없이 전장을 전전했다.

그건 학대와 마찬가지였다.

데런 또한 요하나를 좇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데런조차도 항상 요하나와 함께하지는 못 했다.

요하나가 세운 무수한 전공의 이면을 모를 수가 없었던 레이는 중간중간 자료에서 눈을 돌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어야 했다.

"..."

물기 어린 눈가를 매만진 레이가 계속해서 자료를 살폈다.

전투가 한 번 벌어질 때마다 수백의 전사자들이 발생했다.

대륙 내전에 의해 한 번에 수천 수만 단위의 민간인이 희생되기도 했다.

자료에 기재된 숫자들이 레이에게 그다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못 했다.

그러던 중 레이는 스페라와 관련된 자료를 읽게 되었다.

"..."

스페라 프리슬란.

레이의 선택이 그녀에게 악의를 품게 만들었다.

스페라는 본디 그런 길을 걷게 될 인물이 아니었다.

반짝이는 재능과 충분히 올곧은 심성을 타고난 제국의 기재였다.

찬란하게 빛났어야 할 그녀의 미래가 레이로 인해 뒤틀렸다.

레이는 자신의 그 죄악을 부정할 수 없었다.

우습게도, 여전히 레이의 기억 속의 스페라는 아름답고 도도하지만 아직은 미숙한 면이 보이는 귀여운 소녀였다.

그 기억 속 스페라의 모습과 지난 10년간 스페라가 걸었던 행보의 괴리감이 레이에게 이루 표현하기 힘든 참담함을 안겨주었다.

레이는 일그러뜨린 표정을 차마 되돌리지 못 한 채 계속해서 자료를 읽어갔다.

그리고 안소니우스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구원하지 못 한 자..."

언젠가 과거에 입에 담았던 중얼거림을 레이가 다시 한번 입에 담았다.

안소니우스.

레이가 구원하지 못 했으며 마지막까지 외면하려 했던 자.

성격은 달랐으나 삶의 목적성에 있어 레이와 안소니우스는 서로를 닮아 있었다.

한때 레이는 때때로 느껴지는 그 동질감을 외면하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레이는 벨라가 존중받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안소니우스는 자신의 누이가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결국 레이는 성공했고, 안소니우스는 실패했다.

그리고 안소니우스는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자기 삶의 모든 것이었던 누이를 앗아간 별빛 너머의 존재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남은 삶을 바쳤다.

그 처절한 안소니우스의 증오를 레이는 기록 속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복수와... 대의..."

안소니우스에게 남은 것은 복수뿐이었다.

그럼에도 안소니우스는 마지막까지 대의를 입에 담았다.

교단에 속했던 이로서, 복수보다 대의를 내세우는 것이 다수의 사람을 이끄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수의 행복만을 대의로 분류한다면 레이와 안소니우스의 선택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하지만 레이와 안소니우스의 선택이 '성녀'라는 이 세상의 모순이자 희생의 고리를 끊어내고 필멸자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하르시아라는 몽상가가 바랐던, 그 이룰 수 없던 기적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이 기적을 대의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대륙을 휩쓸었던 그 수많은 죽음이 충분히 가치 있는 희생이었다고 평해도 좋은 것일까.

"..."

레이는 감히 자신의 선택이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초래한 재앙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참담한 죽음을 맞이한 것을 필요한 희생이었다고 합리화할 생각은 없었다.

허나 역사는 대개, 레이의 선택을 대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는 했다.

"..."

레이가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속죄가 필요하다면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었기에 눈을 돌렸던 문제와 감정들이 레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허나 아무리 직면하기 힘겹더라도 제자리에 가만히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걸 레이는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레이에겐 '나의 사람들'이 우선이었다.

그들이 입었던 상처를 치료할 수 있게 노력하며, 고민을 이어가면 될 일이었다.

지난 10년간의 기록을 대략적으로 확인한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고를 나온 레이는 약속이 잡혀있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헌데 복도를 걷던 중, 마침 약속을 잡아놨던 상대와 마주칠 수 있었다.

"..."

걸음을 멈춘 레이가 울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째 울트는 레이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보다 도리어 젊어 보였다.

레이가 뚱한 얼굴로 울트를 쳐다보자, 울트가 인사를 하려다 말고 두 눈을 깜박였다.

들은 게 있던 레이는 울트에게 일단 욕설부터 한 마디 뱉으려다가, 울트도 전쟁에서 무지하게 굴렀다는 걸 떠올리고는 인내를 발휘해 인사말을 골랐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벌레 씹은 표정 짓지 말고, 차라리 욕을 하지?"

"아, 괜찮습니다. 그쪽 싹수가 노랗다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하하."

내가 괜히 보육원에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겠습니까, 레이가 웃는 얼굴로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울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울트의 어깨가 흔들리자 울트의 어깨 위에 타고 있던 레시나의 몸도 흔들렸다.

참다 못 한 레시나가 신경질적으로 발길질을 했고, 레이는 또 그 발길질에 턱을 얻어맞고 뒤로 넘어졌다.

퍽!

"컥...!"

가벼운 발길질이었지만 코어가 완전히 소멸한 레이로서는 피할 수가 없었다.

넘어지는 레이를 울트가 재빠르게 잡아채준 후 피식 웃었다.

"굼뜨군. 몸을 회복할 동안 조심해야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레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얼얼한 턱을 매만졌다.

눈을 뜨고 나서 자기 몸뚱이가 예전과 다르다는 걸 자꾸 깜박하는 탓에 계속 봉변을 당하고 있었다.

아픔이 가시길 기다린 레이가 울트와 레시나를 번갈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두 분 다 무사한 것 같아 다행이군요."

"운이 좋았어."

울트가 진심을 담아 그리 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레이가 레시나를 향해 물었다.

"오염된 대지의 정화는 언제쯤 마무리되는 겁니까?"

"짧으면 10년. 길어진다면... 30년 정도."

악신의 기운이 사라졌어도 마경이었던 대지에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선 대지의 오염이 정화되어야 했다.

세계수도 대전쟁 시기 막대한 힘을 소모했기에 정화 속도가 한계가 있었다.

허나 30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아무리 길어도 30년 안에 대륙은 완전히 정화된다.

레이가 그 긍정적인 소식에 감탄을 내비치려다 문득 말꼬리를 흐렸다.

"아, 다행... 다행인데..."

잠시 고민에 빠졌던 레이가 레시나에게 물었다.

"그러면... 그 다음엔... 정화가 다 끝나면 엘프의 영역도 확장되겠죠...?"

이제 세계수는 다른 초월적인 존재의 방해 없이 대지를 자신의 색으로 칠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추후 대륙 전역이 엘프의 영역처럼 변화될 수도 있을 터다.

그게 반드시 나쁜 변화는 아니었지만, 종국에는 인간이 대륙에 서게 될 자리가 매우 좁아지게 될지도 몰랐다.

레이는 잠시 그에 관한 걱정 내지 의심을 내비쳤지만, 레시나가 고개를 저었다.

"대륙의 정화가 끝난 후, 어머니의 영향력은 점차 옅어질 거예요."

"...옅어진다고요?"

"종국에 어머니는 이 대륙에 생명이 살아갈 기반을 안배하시고 존재감을 지우시겠죠."

"..."

"엘프도... 어머니의 축복을 뒤로하고 천천히 인간과 동화되어 갈 거예요.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

레이는 세계수가 어째서 그러한 미래를 택했는지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세계수는 이 대지를 향한 애정이 매우 강했다.

그 애정은 소유욕에 가까운 욕망이기도 했다.

이 대지에 생명을 태어나게 한 것이 세계수이니, 그 소유욕은 합당하다면 합당했다.

세계수와 접촉한 적이 있던 레이는 세계수의 그러한 욕망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레이가 의아함을 드러내자, 레시나가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그게 '계약'이었다고 하네요."

영향력의 제한.

그리고 이 세계의 독립.

그게...

세계수와 루나의 계약이었다.

세계수는 자신이 가꾸어낸 세계를 자신의 손에서 떠나보내기를 택했다.

그게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세계수의 결단이었다.

레이는 레시나의 이야기를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레시나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레이에게 해주지 않았다.

생각이 복잡해진 레이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울트와 레시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물었다.

울트는 레이의 질문을 하나하나 답해주다가, 문득 복도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울트가 시선을 돌린 복도 끝에서.

엘리와 카니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울트에게 발각되었음을 알아챈 엘리가 화들짝 놀라더니 카니아에게 속삭였다.

"아빠가 위험한 아저씨랑 같이 계셔."

엘리의 말을 듣고 카니아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빠한테 위험한 아저씨는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드려야 하나?"

엘리나 카니아나 나름 속삭인다고 속삭인 거였지만, 둘의 목소리는 울트와 레이에게까지 아주 잘 들렸다.

아예 정착이 되어버린 '위험한 아저씨'란 호칭에 울트가 참지 못 하고 인상을 썼다.

울트의 표정을 보고 레이가 참지 못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긴 잠에서 깨어난 후.

레이는 쉽게 웃음 지을 수가 없었다.

웃음을 머금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죄악감을 비롯한 수많은 감정이 레이를 버겁게 만들고 있었다.

소중한 인연들과 재회하여 너무나 행복하였지만, 그 행복만큼이나 그들을 향한 거대한 죄책이 레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딸아이들만큼은 레이를 활짝 웃게 만들어주었다.

모르는 새 훌쩍 자라 버린 두 아이가...

레이에겐 구원과 같았다.

레이가 복도를 걸어가 엘리와 카니아를 안아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두 사람에게 주의를 주었다.

"위험한 아저씨라 하지 말고 위험한 변태 아저씨라고 불러야 돼."

울트가 뒷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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