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이별 [5]
[74]
레이가 자기 콧잔등을 잠시 매만졌다.
여전히 죽었다 되살아났다는 현실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 직전의 기억도 다시 깨어난 후의 기억도 전부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허나 요하나에게 처맞았을 때의 감각은 여전히 생생하게 뼈마디를 울리고 있었다.
"..."
레이는 각오를 다지며 루나와의 재회를 준비했다.
옷을 갈아입은 레이는 루나와 재회하기 전 데런과 잠시 대면했다.
데런은 10년 전에 비해 외관이 많이 변해 있었다.
죽음 전에 레이가 알던 데런은 아직 미숙함이 남아있는 청년이었다.
허나 이제 데런은 무수한 전장을 겪은 완숙하고 건장한 기사가 되어 있었다.
데런에게서 느껴지는 기사의 '연륜'이 레이에겐 참 어색하게 다가왔다.
쉽게 할 말을 고르지 못 하는 레이를 향해 데런은 활짝 웃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형님."
"...데런."
레이는 억지로 웃음을 머금으며 데런과 짧게 포옹을 나누었다.
데런은 레이와 재회 후 긴 이야기를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저 형님이 돌아와서 다행이라며, 진심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이제 요하나 누님 좀 잘 챙겨주세요. 많이... 힘들어했어요."
짧은 해후를 끝내기 전 데런이 그런 당부를 덧붙였다.
레이가 면목이 없이 잠깐 데런의 시선을 피했다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는 소중한 이들에게 많은 상처를 준 채 죽었다.
죽음을 앞두었기에 외면해버린 그때의 죄악이 레이를 참 힘겹게 했다.
아마도 긴 시간 동안 레이는 그 죄악감을 견뎌야 할 터다.
"..."
레이가 자기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리고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이제 루나를 마주해야 했다.
레이가 가장 큰 상처를 주었고, 끝내 배반하였던 그녀를 마주해야만 했다.
루나의 처절한 호소와 원망을 외면하였던 그날의 기억을 곱씹을 때마다 레이는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났다.
어떻게 잘못을 빌어야 할지, 어떻게 자신의 죄를 속죄해야 할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또다시 루나를 외면할 수는 없었기에, 레이는 힘겹게 복도를 걸었다.
"..."
이내 레이는 루나가 사용하고 있다는 집무실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저 너머에 루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육신이 쇠약해져 있는 레이는 저 너머의 인기척조차 읽어낼 수가 없었다.
호흡을 고른 레이가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 너머로...
종이 냄새가 가장 먼저 풍겼다.
레이는 긴장한 탓에 자꾸만 흐릿하게 번지는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두 눈을 깜박였다.
간신히 초점을 맞춘 시야에는 집무실 가득 쌓여 있는 문서들이 먼저 보였다.
서서히 시야를 돌리는 레이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나요?"
서류를 확인하던 여인이 레이를 향해 흘깃 시선을 주었다.
루나였다.
루나는 10년 전에 비해 조금도 변치 않은 모습으로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소녀라고 칭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루나는 과거와 같은 모습을 하고 레이를 바라보았다.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아서 깨어날 때까지 못 기다렸어요."
루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표정도 몸짓도 담담하기만 했다.
일말의 긍정적인 감정도 부정적인 감정도 그녀에게서 묻어나오지 않았다.
사무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모습으로, 루나가 말을 이었다.
"레이의 육체를 수복하는 데 예상보다 시간이 몇 개월 더 걸렸어요."
"..."
루나의 반응이 너무 예상을 빗나가 있었기에 레이는 당황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레이는 루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릎이라도 꿇을 생각이었지만, 루나의 담담한 목소리는 레이의 그런 행동조차 막아 세웠다.
"몸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거예요."
"..."
"공간검의 코어를 재구축할 생각은 하지 마요. 레이도 잘 알고 있겠지만, 그건 인간의 육신이 장기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에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다 해도 공간검의 코어가 주는 부하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
단명하기 싫다면 공간검의 코어를 심장에 재구축하는 것은 피해야만 했다.
"코어를 다시 구축할 거면 안정성이 높은 검술을 알아봐요."
"..."
루나가 주의를 주는 동안 레이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결국 묻고 싶은 걸 먼저 묻지 못 하고 애꿎은 서류 더미로 눈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산출하고 보상과 함께 전후 복구를 진행해야 하니까요."
10년 가까이 진행된 대륙 단위의 총력전이 끝났다.
대륙 전역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국토를 통째로 소실한 국가 또한 존재했다.
전후 뒤처리가 쉽사리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마나 다행히도, 전쟁이 끝난 후 마경에 침식되어 인간이 살 수 없게 썩어버린 대지가 세계수의 축복에 의해 점차 정화되는 중이었다.
제국은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개척 임무를 부여하고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와중에 대륙 전역의 혼란을 억누르며 부족한 물자를 재분배하기 위해 악을 쓰는 중이었다.
"안정화까지 수십 년은 걸릴 거예요. 20년 이상 전후 복구에 매진해도 부족하겠죠."
"...루나."
레이가 망설임 끝에 루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려 했다.
허나 레이가 용기를 내기 전 루나가 레이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
"..."
"많은 것이 변할 거예요."
"..."
"당신의 선택이 이 세계에 가져온 변화들을... 천천히 돌아보세요. 당신이 이루어낸 쇠퇴와 진보를, 당신이 가져다준 좌절과 희망을 당신의 두 눈으로 돌아보기를 바라요."
"..."
"남은 이야기는 그다음에 해요."
루나가 그리 요구하자 레이는 더는 다른 것을 묻지 못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레이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루나가 뒷말을 덧붙였다.
"충분히 인사를 나눈 후 헤이든을 찾아가 보기를 권할게요."
"...헤이든?"
"레이의 조언이 필요할 거예요."
*
황성 인근에서.
레이의 곁에 선 카니아가 레이를 흘깃거리며 눈치를 살살 보았다.
10살이 되어서야 만나게 된 아빠란 존재는 카니아에게 아직 어색하기만 했다.
딸아이가 내비치는 어색함이 레이에겐 죄악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레이가 일부러 웃음을 머금으며 조심스레 카니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첫딸은 아빠를 닮는다는데, 다행히도 카니아는 카렌을 똑 닮아 있었다.
이 예쁜 아이가 자신의 딸아이라는 것이 레이에게도 참 어색했다.
사실 육신이 얼어붙어 있던 기간을 생각하면 레이와 카니아의 신체 나이 차이는 10년이 조금 더 되는 수준이었다.
레이가 어여쁜 딸아이의 살결을 쓰다듬으며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자 긴장이 살짝 풀린 카니아가 헤헤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 오늘 하늘이 엄청엄청 파랗고 예뻐요!"
"하늘...?"
레이는 새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카니아의 말 대로 하늘이 참 파랗고 예뻤다.
레이에게 하늘이란 원래 파랗게 물든 공간이었다.
허나 카니아에겐 그렇지 않았다.
카니아에겐 하늘이란 원래 붉게 물들어 있는 공간이었다.
과거 루나가 결계를 활용해 푸른 하늘을 황성 위에 재현해놓기는 했었지만, 황도 밖으로 나가면 펼쳐졌던 붉은 하늘을 카니아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레이는 자신이 잠들어 있던 10년의 세월을 상상해보며 입가를 매만졌다.
10년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레이는 하나하나 찾아볼 생각이었다.
허나 그 전에 먼저 레이는 헤이든과 대면 약속을 잡았다.
루나가 권한 사안인 만큼 심적으로 미룰 수가 없었다.
카니아와 황성 인근을 산책한 레이는 헤이든이 황성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몸을 돌렸다.
잠시 뒤.
레이는 헤이든과 첫 만남을 가질 수가 있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헤이든은 레이에게 깍듯하게 예를 갖추었다.
"현재 황실 마탑 최고위원과 대륙의료보건국 국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대륙의료보건국...?"
대륙의료보건국.
레이는 처음 듣는 기관이었다.
레이가 아예 들어본 적도 없다는 건 10년 사이 새롭게 신설된 기관일 확률이 높았다.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이지?"
대충 이름만 들어도 감이 잡히긴 했지만 레이는 확인 차 헤이든에게 물었다.
그러자 잠시 침묵한 헤이든이, 한숨을 짧게 내쉬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우리는 '신성'을 잃었습니다."
"..."
레이는 헤이든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 했다.
정확히는, 자신이 이해한 것이 옳다고 확신하지 못 했다.
그런 레이를 향해 헤이든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독립하였습니다.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과거에 루나는 헤이든에게 경고했었다.
족쇄가 되어버린 기적 없이, 홀로 서야 할 것이라고.
그게 너희가 감수해야 할 자유의 대가라고.
"우리 필멸자는... '신성'이란 기적을 잃었습니다."
"...!"
레이는 그제야 헤이든이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
대륙에 더는 신성력이란 축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전쟁 이후 대륙에 이는 혼란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인간의 역사가 기록되었을 때부터 함께하여 이제는 당연히 존재해야 할 기적이 되어버린 신성력이 완전히 소멸했다.
그 충격이 얼마나 거대할지 레이는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았다.
잠시 멍하니 있던 레이가 당혹감을 드러내며 물었다.
"교... 교단은... 어떻게..."
"상황이 복잡하여 짧게 설명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현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신성 교단 내에서도 계속해서 충돌이 이어지고 있었다.
세상을 파멸로 이끌던 모든 악의가 정화된 후 신성력 또한 소멸했다.
엘-람께서 지상에 기적을 이루고 잠시 잠에 드셨다... 그런 식의 해석을 내놓는 성직자들도 있었다.
신성력이 사라진다고 해도 종교는 소멸하지 않을 것이며, 소멸되지도 않아야 한다.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윤리나 도덕과 같은 개념의 근간이 결국 종교였다.
지금은 혼란스럽더라도, 언젠가 신성 교단은 어려운 시기를 넘어서 다시 인간 사회에 녹아들 것이다.
허나 그것 외에 중대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모든 의료 체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대륙은 더 이상 신성력이란 기적을 활용할 수 없다.
신성력이 소멸한 이상, 병의 진료와 진단 체계는 물론이고 위생, 오염, 예방 등 보건 체계부터 처음부터 모조리 다시 정립해야 했다.
제대로 된 외과 수술?
그건 아직 꿈도 못 꿀 단계였다.
관련 정책을 수립하고 의료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루나의 언질이 있어 미리 준비를 해왔다고는 하나 신성력이 사라진 사회를 하루아침에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헤이든은 대륙의료보건국 국장으로서 자기 앞에 놓인 무수한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
레이가 자기 손으로 두 눈을 덮으며 입술을 꾹 씹었다.
레이는 전생에 의료인이 아니었기에 전문적인 의료 지식이 매우 부족했다.
헤이든에게 새로운 의료 체계에 관한 조언을 해줄 수는 있어도 그 이상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마법'이란 학문이 지니는 잠재성을 고려하면 의료 목적으로 마법을 발전시켜 새로운 의료 체계와 결합해 시너지를 이루게 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 역시 레이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
레이는 머리가 복잡하여 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헤이든이 가져온 극히 난해한 과제도 레이의 머리를 복잡하게 했지만...
사실 레이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
레이는 루나와 헤어지기 전 답을 듣기 두려워 차마 묻지 못 한 하나의 질문을 재차 곱씹었다.
그때 레이는 루나에게 묻고자 했다.
너는...
대체 누구냐고.
그녀는 루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