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이별 [4]
[73]
가슴이 울렁인다.
금방이라도 제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요하나는 울먹임을 참기 위해 턱에 힘을 주었다가, 뭉개진 발음으로 간신히 욕설 한 마디를 내뱉었다.
"개새끼야."
레이를 바라보며 요하나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레이가 황좌에 앉아 침묵하고 있던 10년 동안.
요하나는 레이 곁에 앉아 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속삭여야 했다.
레이와 대화를 나누듯 혼잣말을 하며 홀로 웃고 울어야 했다.
레이는 긴 시간 눈을 뜨지 않았다.
심장은 터져나가고 온몸이 헤집어진 채 얼어붙어 있었다.
레이의 모습을 직접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이가 이미 죽었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요하나는 레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믿어야만 했다.
좌절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요하나는 레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으리라 믿어야만 했다.
10여 년 전 루나는 요하나에게 레이의 온기를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요하나는 루나와의 그 약속을 믿었지만...
때로는 참을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레이는 이미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더는 우리의 곁에 돌아올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루나도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런 의심과 좌절이 불쑥불쑥 솟아올라 마음을 엉망으로 헤집고는 했다.그 마음을 헤집는 절망을 외면하기 위해 요하나는 발악하듯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레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서지 못 하리란 걸 알고 있었기에...
요하나는 그토록 처절하게 자신을 학대해가며 절망에서 눈을 돌리려 애썼다.
10년 동안 요하나는 자주 악몽을 꾸었다.
얼어붙은 레이가 온기를 되찾지 못 한 채 그대로 바스러지는, 그런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그 악몽이 현실이 될까 요하나는 두려웠다.
무수한 피가 흐르는 전장보다 레이를 되찾지 못 한 악몽이 요하나에겐 더 끔찍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온기를 되찾은 레이가 요하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요하나가 눈물을 떨어뜨리며 피식 웃었다.
외면하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던 두려움으로부터 요하나는 이제야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두려움이 떠나가자, 긴 시간 쌓아만 왔던 수많은 감정들이 번져 나오며 요하나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였다.
"개새끼야..."
할 말이 많았다.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만큼이나 하고 싶었던 말도 준비해둔 말도 많았다.
아마 몇 시간은 제자리에서 쏟아낼 수 있을 만큼 많았을 터다.
허나 결국 목소리가 되어 나오는 건 욕설 한 마디였다.
투정을 부리는 아이처럼, 요하나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억한 마음을 내비쳤다.
"진짜... 개 같은 새끼... 진짜로..."
"..."
그런 요하나를 바라보며 레이는 침묵했다.
레이의 두 눈에 담긴 요하나의 모습은 세월이 비껴간 것처럼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10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요하나는 여전히 레이가 잘 알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레이는 요하나의 변화를 느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전전하며 죽음과 맞닿은 채 쌓아올린 그녀의 고단한 위업을...
레이는 흐릿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요하나의 목소리에 서려 있는 수많은 감정이 레이의 가슴을 울렸다.
레이는 차마 요하나를 향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
요하나와 마주보고 나서야, 레이는 뒤늦게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를 뚜렷하게 상기할 수 있었다.
자신이 요하나에게 준 상처가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자각할 수 있었다.
레이는 제자리에 멈춰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러자 요하나가 레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퍽, 요하나가 레이를 강하게 밀쳤고, 레이는 요하나가 밀치는 대로 뒷걸음질을 쳤다.
신경질적으로 레이를 벽까지 밀어붙인 요하나가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걱정 안 해도 된다며...!"
그날 레이는 그렇게 장담했었다.
"잠깐 떨어지는 거라고...! 안 위험하다며...!"
모두가 무사할 거라 장담하며, 웃으면서 요하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었다.
"그렇게 거짓말만...!"
이별의 순간, 레이는 그토록 허황된 거짓말을 떠들며 요하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죽었다.
당시 레이에게는 그게 최선이었다.
거짓말이라도 해서 요하나를 안심시키고 떨어뜨려 놓아야 했다.
미적거리다간 모두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게 요하나를 위한 최선은 아니었음을, 레이 또한 알고 있었다.
레이가 요하나에게 한 거짓말은 죽음을 앞둔 자기만족을 위한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 힐난 받아도 변명할 수 없었다.
레이의 거짓말은 요하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평생토록 악몽이 되어 떠오를 만큼 깊고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게 진실이었다.
레이는 너무나 뒤늦었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힘겹게 사과를 입에 담았다.
"미안..."
레이는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레이가 세계수와 접촉하였을 때, 레이는 지금과 다른 미래를 보았다.
그 미래에서 요하나는 전장을 전전하며 마모되고 망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고통밖에 없는 삶을 이어가면서도 요하나는 끝끝내 검을 놓지 못 하고, 레이를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했다.
레이는 요하나가 그런 삶을 살아가길 바라지 않았다.
레이가 강경하게 마경 원정을 강행한 것은, 요하나가 그런 삶을 살아가는 미래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건 분명 레이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레이가 죽음을 맞이한 뒤 요하나가 감당해야 했던 것은...
레이가 보았던 미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끔찍한 혈전의 소용돌이였다.
결국 레이는 요하나를 구원해주지 못 했다.
도리어 요하나를 그 잔인한 미래와 다를 것 없는 현실로 몰아넣었다.
죽음 직전 레이는, 자신의 선택이 요하나에게 많은 아픔과 고난을 가져다주리라는 걸 분명 직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벨라의 소망을 외면하지 못 했다.
"미안..."
과거의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레이는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요하나가 받았을 상처와 요하나가 견뎌야 했을 좌절을 이해할수록 레이는 고개를 숙이며 눈가를 붉혔다.
"미안..."
미안하다는 사죄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밀쳐진 레이는 벽에 등을 기대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요하나가 레이를 노려보았고, 다른 이들은 두 사람을 남기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요하나가 그 누구보다 레이에게 원망과 울분을 토해낼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단둘이 남게 되어서도 레이는 하염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요하나가 듣기 싫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미안하면 다야...!"
"..."
"미안하면 다냐고...!"
퍽!
퍽!
요하나가 감정을 담아 레이의 어깨와 팔을 내려쳤다.
요하나의 울분이 깃든 주먹질을 레이는 말없이 감당했다.
고작 투정 섞인 주먹질 몇 번으로 털어내기엔, 레이는 요하나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요하나의 울분이 깃든 주먹질을 견뎠다.
레이가 지은 죄에 비하면 그건 너무나 가벼운 형벌에 지나지 않았다.
퍽!
퍽!
헌데...
퍽!
퍽!
생각보다...
퍽!
퍽!!
좀 많이 아팠다.
퍼억!!
"끅..."
명치 바로 옆을 주먹으로 찍힌 레이가 반사적으로 낮은 신음을 흘렸다.
요하나의 주먹을 맞을 때마다 온몸의 뼈가 둔중하게 울리며 관절이 삐거덕댔다.
이러다 진짜 어디 한 곳은 제대로 부러져 나갈 것 같았다.
일단 견뎌보려 했던 레이가 뒤늦게 체내에서 마나를 찾았다.
더럽게 추한 짓거리긴 했지만 일단 살아남아야한다는 생존 본능이 이성을 이겨냈다.
허나 체내에 흐르는 마나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
레이가 뒤늦게 자기 몸 상태를 깨달았다.
죽음 직전 레이는 자기 선택으로 코어는 물론이고 심장을 감싼 서클까지 박살냈다.
물론 코어와 서클이 박살났다고 해도 레이가 이제껏 쌓아 올린 경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 경험은 물론이고, 하르시아의 편린으로부터 얻은 감각 또한 여전히 레이에게 남아 있었다.
만약 레이가 공간검의 코어를 복구하고자 한다면, 매우 위험하긴 했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굳이 공간검의 코어가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코어를 심장에 복구하기만 한다면 한번 발을 디뎠던 소드마스터의 경지 또한 어렵지 않게 다시 이루어낼 수 있을 터다.
허나 어쨌든 레이는 지금 무력했다.
소드마스터는커녕 마나 한 톨 없는 쭉정이였다.
무력한 쭉정이가 견뎌내기엔 요하나의 주먹질은 매우 매우 많이 아팠다.매우 아프다는 정도를 넘어서 정말 뼈가 통째로 으스러지지는 않을까 걱정될 수준이었다.
오랜 시간 잠들어있었던 탓인지 근육도 말라비틀어져 제대로 충격을 흡수해주지 못 했다.
결국 얌전하게 처맞으리라 각오했었던 레이가 끝내 비굴한 소리를 냈다."자, 잠깐...!"
"잠깐?"
물론 요하나는 발작했다.
"잠깐? 잠깐 뭐? 잠깐 멈추라고?"
퍼억!!
요하나가 주먹에 더욱 힘을 실으며 두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안 멈추면 어쩔 건데?"
퍼억!!
"잠깐 안 멈추면 네가 어쩔 거냐고?"
퍼억!!
"응?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퍼억!!
"이제 내가 너보다 세거든?"
퍼억!!
요하나가 이제껏 쌓아왔던 울분을 풀어내며 레이를 아주 구겨버릴 것처럼 패기 시작했다.
레이는 어차피 자기는 곧 뒈진다고 원 없이 쌓아두었던 업보를 뒤늦게 돌려받기 시작했다.
그리 계속해서 처맞은 끝에, 레이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가드를 올리자 요하나가 신경질적으로 가드를 쳐내며 소리쳤다.
"나한테 미안해? 미안하다고? 미안하면 뭐 어쩔 거야? 어? 또 목걸이 하나 던져주고 생색낼 생각이지? 이 개새끼야!!"
"아니...! 진짜...! 미안하다고...!"
마나 한 톨 없이 무력하게 처맞는 건 환생 이후 처음이다 보니 레이도 이제 정신이 없었다.
결국 구석까지 밀려난 레이가 반쯤 구겨진 채 주저앉자 그제야 주먹질을 멈춘 요하나가 씩씩거리며 눈물을 닦아냈다.
"씨이..."
여전히 눈물은 계속해서 요하나의 눈가를 적셨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레이가 울먹이는 요하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세를 고쳐앉았다.
"..."
실컷 처맞아보니 되살아났다는 실감이 강해졌다.
욱씬거리는 고통이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레이에게 일깨워주었다.
레이는 죽었다.
육신과 영혼이 소멸하여 결코 되살아날 수 없었다는 걸, 레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온기를 되찾아 소중한 사람들과 다시 마주 볼 수 있었다.
잘못을 빌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이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는지 레이는 알 수 없었다.
허나 누가 이러한 기적을 선물해주었는지는, 다른 이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루나.
오직 그녀뿐이었다.
이런 기적을 이루어줄 수 있는 건 오직 루나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
레이가 천천히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버겁다.
루나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레이는 죄악감에 짓눌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외면해서는 안 됐다.
억지로 고개를 들고 마주 보아야만 했다.
마주보고, 뒤늦게 잘못이라도 빌어야 했다.
잠시 뒤에 요하나가 조금 진정하고 나자 레이는 죄책이 만연한 기색으로 자신의 잘못을 재차 사죄한 후, 조심스레 요하나에게 물었다.
"루나도... 이곳에 있어...?"
"..."
요하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