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39화 (439/446)

외전 - 이별 [3]

[72]

아빠?

아빠라고?

흩어져 있는 사고는 쉽사리 정리되지 않는다.

혼란을 바로잡지 못 한 채 두 눈을 깜박이던 레이는 '아빠'라는 생소한 호칭을 듣고 멍하니 엘리와 카니아를 바라봤다.

잠결에 빠진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지만, 그럼에도 레이는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레이에게 눈앞의 소녀들처럼 훌쩍 자란 딸아이들은 없었다.

얘들이 내 딸은 아니라고 확신을 가지게 된 레이는 향후 수십 년은 바가지를 긁힐 망언을 눈을 뜨자마자 입에 담았다.

"나... 니들 아빠 아닌데...?"

"...!"

충격적인 레이의 선언에 엘리가 입을 떡 벌렸다.

레이는 엘리의 그 표정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자주 본 표정인데, 어디서 봤었는지 바로 떠오르지가 않았다.

한편 엘리는 입을 떡 벌린 채 뒤에 서 있던 알레시아를 돌아보았다.

아빠 보게 해준다더니 이 사람 아닌 것 같은데?

대략 그런 의미가 담긴 얼굴로 엘리가 쳐다보자, 알레시아가 레이를 향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나의 기사여!"

애아빠가 눈을 뜨자마자 처음 보는 딸아이들한테 헛소리를 하니 목소리가 안 높아질 수가 없었다.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레이가 뻐근한 고개를 움직여 힘겹게 알레시아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멍한 얼굴로 두 눈을 깜박이던 레이가, 알레시아에게 의아함을 내비치며 물었다.

"너... 왜... 좀 나이가 들어 보이냐...?"

"으극...!"

레이가 혈압 오르는 소리만 골라서 지껄이자 뒷목을 잡은 알레시아가 결국 참지 못 하고 레이의 등을 한 대 후려치려고 달려들었다.

다행히 디디에가 뜯어말려 준 덕분에 알레시아는 제자리에 멈춰서 씩씩댔고, 그 모습을 레이는 계속해서 멍하니 쳐다봤다.

알레시아는 씩씩거리면서도 충혈된 눈동자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레이는 알레시아가 그렇게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알레시아가 왜 그리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레이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뿌연 안갯속을 헤매는 기분으로 레이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관절을 꿈틀거렸다.

그때, 생소하고도 그리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렸다.

"오랜만이에요, 오빠."

"..."

레이는 억지로 고개를 더 움직인 끝에 간신히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볼 수 있었다.

찬란한 은발, 그리고 선명한 적색 눈동자가 보인다.

품위있고 아름다운 복식을 입고 우아한 관을 머리 위에 올린 소녀였다.

레이가 소녀를 바라보며 미약하게 의아함을 드러냈다.

낯선 소녀였다.

적어도 레이는 그렇게 느꼈다.

"누구...?"

"레아."

레아가 단아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오빠의 동생, 레아예요."

"..."

멍하니 레아를 바라보던 레이의 두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 레이는 레아와 잠시 단둘이 남게 되었다.

아직 혼란스러운 레이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 다른 이들은 잠깐 자리를 비켜주었다.

레이는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손아귀를 말아쥔 채 힘겹게 정신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레아가 레이의 곁에 선 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오빠가 잠에 든 후 10년이 조금 더 지났어요."

"..."

"많은 것이 변했어요. 오빠가 알던 많은 것들이, 과거와 같지 않을 거예요. "

"..."

레이는 침묵 속에서 레아가 입에 담은 '그날'의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 갔다.

그날, 레이는 벨라의 소망을 외면하지 못 했다.

벨라의 소망을 위해, 레아를 지켜주기 위해 레이는 삶을 포기했다.

하지만 레이가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고 해도 벨라가 바란 레아의 장기적인 생존은 요원한 바람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레이는 '선택'을 내렸다.

선택을 내린 레이는 자신의 이기를 위해 외면했던 진실을 안소니우스에게 고백하였다.

레이는 안소니우스를 끌어들임으로써, 대륙을 진정 파멸에 이르게 할 단초를 제공했다.

"..."

성녀.

레이가 외면했던 진실이었다.

성녀라는 건 그 이름처럼 신성한 존재가 아닌 단지 끔찍한 희생양이었다.

그 누구도 악의를 품고 성녀라는 희생양을 필요로 한 것은 아니었다.

성녀는 누군가의 사익을 위한 희생양이 아닌, 대륙을 수호하기 위해 용인해야만 했던 희생양이었다.

대의를 위해 말이다.

레이는 성녀의 진실을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그 진실을 외면했다.

마경 원정 당시 안소니우스에게 감히 성녀의 안전을 명분으로 삼아 그의 조력을 요구하기도 했다.

레이는 그토록 안소니우스를 기만했다.

역겹고 뻔뻔하게 말이다.

그건 레이에게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레이는 마지막 순간 안소니우스에게 진실을 고백하고 구체제의 붕괴를 종용했다.

Great Reset.

그 조잡한 변명을 대의로 내세우며 말이다.

혁명...

하나의 체제를 붕괴시킨다는 것은 언제나 무고한 이들의 막대한 희생을 대가로 한다.

더군다나 레이가 유도한 것은 정말로 대륙 전체를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도박이었다.

그럼에도 레이가 그런 도박을 행하리라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녀의 존재 덕분이었다.

루나.

레이가 끝끝내 배신했던 사람.

"오빠를."

"...!"

생각을 이어가던 레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레아가, 어쩌면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는 레이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원망하기도 했어요."

"..."

"너무 무거웠으니까요."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레아의 머리 위에 씌워진 관은 잔인할 만큼 무거웠다.

레이의 삶을 녹여내서 주조한 것과 다를 게 없는 그 황제의 관이, 레아에겐 참 버거운 짐이 되었다.

"외롭고 괴로웠어요. 나의 삶이 저주받았다고 느껴지고는 할 때... 오빠를 원망하기도 했어요."

"..."

"하지만... 그 무엇보다... 오빠가 그리웠어요."

레아가 아직 잘 움직이지 않는 레이의 손아귀를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며,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오빠가 다시 깨어나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어요."

레아가 단아한 웃음을 머금은 채 레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고마워요, 오빠."

"..."

"정말 많이... 고마워요."

"..."

레이는 레아의 고백에 그 무엇도 답해주지 못 하고 입술만 의미 없이 달싹였다.

어느새 레이의 눈가에도 눈물이 가득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맺히게 만드는, 지금 가슴에 요동치는 감정이 무엇인지 레이 자신조차 잘 알 수가 없었다.

말 없이 눈물을 떨어뜨리는 오빠를 레아가 천천히 안아주었다.

이내 레이 또한 훌쩍 자란 자신의 동생을 마주 안으며 어깨를 떨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흐느낌이 레아의 귓가를 흘렀다.

레아는 잠시 심장이 뛰는 오빠의 온기를 느끼고는 뒤로 물러섰다.

오빠의 시간을 너무 빼앗기에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잠시만요."

레아가 직접 걸어가 닫혀 있던 문을 열자, 레이는 벨라의 얼굴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었다.

무엇보다 많이 수척했다.

벨라가 10년의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겪었는지 그녀의 마른 육신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벨라는 레이를 향해 주춤거리며 다가가려다 주저앉으려 했다.

힘이 빠진 벨라를 지미와 레아가 부축하여 레이에게 데려다 주었다.

마침내 레이 앞에 서게 된 벨라는, 레이에게 너무나 죄스러워 차마 먼저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그런 벨라를 가만히 바라보던 레이가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짰다.

"엄마..."

레이의 목소리를 듣고 벨라가 결국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벨라는 그 자리에서 레이의 손을 붙잡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미안... 미안해 우리 아들..."

벨라는 하염 없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레이는 벨라의 손아귀를 움켜쥐고 벨라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여위었으나, 그럼에도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벨라의 온기가 레이에겐 많은 위안이 되었다.

벨라는 눈물을 멈추지 못 하면서도 옆으로 비켜서주었다.

그러자 문 너머에서 엘리와 카니아가 눈치를 보며 레이에게 다가왔다.

카니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빠... 맞아요...?"

"...그래."

이제는 그냥 눈물이 나왔다.

레이는 생전 처음 얼굴을 마주 보게 된 딸아이들을 와락 껴안으며 눈물을 계속해서 흘렸다.

엘리와 카니아는 모두가 우니까 괜히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초면부터 와락 껴안아오는 레이가 어색해서 서로 눈치를 봤다.

엘리와 카니아가 물기 어린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사이.

레이가 두 사람 뒤에 서 있는 여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카...렌... 알레시아..."

레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카레도 알레시아도, 레이의 기억보다 나이가 들어 있었다.

여전히 두 사람 다 아름다웠지만, 알게 모르게 수척해진 모습에서 그녀들이 감당해야 했을 마음의 상처가 떠올라 레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알레시아가 먼저 레이의 뺨을 잡아오며 충혈된 눈으로 투덜댔다.

"늙어서 미안하구나."

"아, 아니... 아까 그건 실수..."

"되었다. 나의 기사는 여전히 젊어 보여 다행이구나."

알레시아가 딸아이와 함께 레이의 품에 안겼고, 카렌 또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레이에게 안겼다.

"레이..."

"..."

"이제 우리 곁을 떠나지 마..."

"...그래, 미안해. 내가... 미안해..."

레이가 네 사람을 꽉 끌어안았다.

알레시아와 카렌이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엉엉 울기 시작했고, 엘리와 카니아는 슬슬 숨이 막혀서 틈새를 비집고 레이의 품을 슬그머니 벗어났다.

잠시 후 알레시아와 카렌이 눈물을 닦으며 비켜서자, 레이는 맞은편에서 세리아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리아는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얼굴도 표정도 레이의 기억 속 세리아였다.

허나 단 한 가지, 뚜렷하게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레이의 시선이 세리아의 허전한 왼쪽 어깨로 옮겨갔다.

레이의 시선을 느낀 세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잃어버렸어."

"아니..."

팔이 물건인가.

잃어버리게.

레이가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려 하는데 세리아가 레이를 향해 성큼 다가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팔이 하나면...

레이의 어깨 아래를 잡고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세리아는 레이를 들어올릴 방법을 고민해보다, 일단 레이의 멱살을 잡아보았다.

"..."

이건 별로 보기 좋지 않았다.

멱살을 포기한 세리아가 레이의 목 조금 뒤를 잡고 위로 들어 올려 보았다.

세리아에 의해 레이가 팔다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허공에 떠올랐다.

동물이 새끼를 물어 옮길 때처럼 레이를 들어 올려 본 세리아가 나름 만족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조카."

"...네, 고모."

"그러지 마. 앞으로."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부탁에, 레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리아가 보기 드물게 활짝 웃음을 머금었다.

그 웃음을 레이는 차마 정면에서 마주 보지 못 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모든 게 미안했다.

정말로 모든 게, 미안했다.

그때, 삐딱한 목소리가 레이의 귓가를 울렸다.

"개새끼야."

요하나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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