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이별 [2]
[71]
과거를 되돌아본다.
어린 날의 기억은 삭막하기만 했다.
그때는 사람과의 정이라는 걸 제대로 알지 못 했다.
잊어도 좋았을 기억 같은데...
어린 피부에 맞닿았던 냉기는 여전히 뚜렷하게 떠올랐다.
그 냉기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평생을 함께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다 한 소년과 만났다.
소년은 그녀의 삶에 색채를 불어넣어주었다.
소년은 그녀에게 온기를 가르쳐 주었다.
소년이 가르쳐준 온기는 참 따뜻했지만...
온기를 알게 되었기에 그녀는 아픔 또한 깨닫게 되었다.
"..."
아픔을 알게 된 루나는 작은 소망을 품었다.
레이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그저 나와 가까운 곳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있어주기를 바랐다.
루나의 소망은 고작 그뿐이었다.
그 하찮고 소박한 소망을 들어주기를 바라며...
루나는 한결같이 레이의 곁을 지켜주었다.
레이에게도 작은 소망이 있었다.
레이는 벨라가 존중받기를 바랐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루나가 그러했듯, 레이 또한 대단한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멸망이 예정된 세상 속에서.
레이는 그 작은 소망 하나를 이루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태워가며 발악해야 했다.
긴 시간 서로의 소망은 엇갈리기만 했다.
레이는 이 세상이 어떻게 멸망에 치닿게 되었는지 알지 못 했다.
그렇기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못 하고, 항상 불안을 품은 채 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박적으로 삶을 소모했다.
답을 알지 못 하는 미로 속을 헤매며 상처 입고 괴로워하는 레이를 루나는 계속해서 바라보아야 했다.
레이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똑똑하고 박학다식하고 현명했으며 재주도 많았다.
허나 그는 불세출의 재능 같은 것을 지닌 초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작은 도시 하나에서 출세하여 목에 힘을 주고 다닐 정도의 재능을 지닌 범인이었다.
세상 모두가 레이를 불세출의 영웅이라 생각하였을 때, 루나만큼은 레이가 따뜻하고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하염없이 레이에게 의지할 때 루나만은 레이가 걸어야 했던 길의 고뇌와 고통을 이해하고 있었다.
세상을 속이며 감정 없는 초인을 어설프게 흉내냈던 레이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다행히도 레이의 발악은 가치 있었고, 마침내 레이는 기적적으로 진정 초인과 같은 위업을 이루고 삶의 막바지에 섰다.
루나는 거기서 레이가 그만 멈추어주기를 애원했다.
당신이 떠나고 나서도 우리의 따듯한 나날들을 조금이라도 길게 추억할 수 있도록...
이제는 내 곁에 머물며 평화롭고 행복한 추억들을 남겨달라고 애원했었다.
허나 레이는 끝끝내 루나의 소박한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참 잔혹하고 이기적이게도, 레이는 아집을 버리지 못 하고 남은 삶을 불태웠다.
삶을 다하기 전 마지막으로 레이는 루나에게 맹세했었다.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으리라고, 루나와 약속했다.
허나 레이는 그조차도 지켜주지 못 했다.
루나는 항상 레이를 우선했지만, 레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루나를 우선해주지 못 했다.
레이는 마지막까지 참 지독하게 이기적이었다.
레이는 가장 끔찍한 형태로 루나를 배신했고, 그랬음에도 마지막까지 루나에게 기댔다.
그런 레이를 루나는 원망했다.
어쩌면 증오했다.
레이가 남겨준 온기가 이젠 루나에게 고통스럽기만 했다.
때로는 구역질이 났다.
그럼에도...
"당신을..."
황좌에 앉은 레이를 향해 루나가 속삭였다.
"사랑해요."
영원히 망각 못 할 쓰라린 감정을 품고서.
일곱 번째 서클이 루나의 심장을 중심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루나가 원치 않았음에도 일곱 번째 서클은 점점 더 뚜렷한 형태를 갖추어 갔다.
이 순간이 찾아왔을 때 레이에게 건넬 인사를 루나는 오래도록 고민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엇 하나 결정하지 못 했던 루나는, 길었던 고민 끝에 긴 잠에 빠져있는 레이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나를 그리워하며 울어줘요."
루나는 끝끝내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았던 사랑하는 이에게 마지막 심술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는 레이에게서 등을 돌렸다가...
차마 몇 걸음 나아가지 못 하고 다시 레이를 돌아보았다.
레이는 여전히 조용히 황좌를 지키고 있었다.
루나는 이곳에서 레이가 건넸던 마지막 후회를 되돌아보며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서는 참 힘겹게나마 웃음을 머금고서 레이에게 물었다.
"레이... 여전히 나는 착한 마법사인가요?"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남기고서.
루나가 등을 돌렸다.
루나는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더는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일곱 번째 서클이 완성되었다.
일곱 개의 서클이 공명을 시작하자 세상에 너울지는 악의가 루나에게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루나가 황성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그 악의는 더욱 거대하게 부풀어 세상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그건 별빛 너머 존재들이 내뱉는 절규이자 발악이었다.
루나는 서클의 공명을 키워가며 권능을 발했다.
레이가 살아갈 세상이 더는 더럽혀지지 않도록, 루나는 세상에 너울지는 모든 악의를 공간을 단절시키고 왜곡하여 한 곳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루나가 권능을 드러낼수록 별빛 너머의 존재들이 행하는 발악은 더더욱 거세졌다.
세상을 뒤덮는 붉은 낙뢰는 그들이 쏟아내는 혈흔과 다르지 않았다.
루나는 잘라낸 풍경들을 한 곳에 중첩시키며 담담하게 허공을 밟았다.
어느새 루나는 마왕이 봉인되었던 대지의 상공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쯔즈즈즈즈즉!!!!!!!!
악의의 폭풍이 몰아친다.
마왕의 봉인지에 악의를 밀어넣은 건 다름 아닌 루나 본인이었다.
루나가 몰아넣은 그 모든 악의가 마왕을 중심으로 집약되어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처럼 물결치기 시작했다.
소드마스터고 대마법사고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다.
그곳은 더는 인간이 침해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쩌저저적!!!!!
차원의 경계가 무너지며 별빛 너머의 존재들이 발하는 권능이 붉은 번개와 함께 몰아쳤다.
뒤늦게나마 루나를 이 세상에서 지워내기 위한 악신들의 발악이 손아귀를 뻗어왔다.
"..."
오벨리스크는 무너졌다.
메테오는 사용할 수 없다.
허나 루나는 한없이 부풀어오르는 악의의 덩어리를 내려보다가 하늘 위에 워프게이트를 구축했다.
워프게이트는 그 규모와 왜곡한 거리에 비례해 막대한 마나를 소모하며, 또한 불안정해진다.
규모가 거대하고 길게 떨어진 거리를 연결한 워프게이트일수록 외부의 간섭에 취약해진다.
그렇기에...
아무리 좌표가 정확하다고 해도, 막대한 열기를 품은 '별'과 같은 천체 인근엔 워프게이트의 구축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루나는 시간을 왜곡시켜 워프게이트의 붕괴 시점을 늦춘 뒤...
저 하늘 너머에 빛나고 있는 성계의 항성을 지상에 불러들였다.
태양과 맞닿은 워프게이트가 지상에 열린다.
직후.
쯔윽-!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지표의 지각이 찢어져나가는 소리였다.
별의 표면에서 방출된 플레어가 뒤틀리는 대지를 할퀴고 지나갔다.
지상을 짐어삼켰던 악의의 덩어리가 불타오른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중력의 영향으로 인해 지면이 찢어져나가며 하늘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만물이 녹아내리고 증발한다.
항성의 빛은 지상을 침식한 악의를 평등하게 정화했다.
"..."
루나가 구축한 워프게이트가 유지되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항성이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워프게이트의 규모도 그리 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항성의 빛이 지상을 휩쓴 후.
그 일대는 형체 없이 증발하여 녹아흐르고 있었다.
쩌억!!!!!!!
워프게이트가 닫히자, 항성의 중력에 이끌렸던 만물이 뜨겁게 녹아내린 채 지면에 떨어져 내렸다.
태초의 행성을 닮은 풍경이 루나의 발밑에 드러났다.
그 기괴한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마왕 하나였다.
쩌엉!!!
마왕은 항성의 열기를 견뎌내고서 루나를 향해 솟구쳤다.
허나 마왕은 루나에게 도달하지조차 못 하였다.
루나가 입술을 한 번 달싹이자 마왕은 허공에 얼어붙어버린 듯 속박된 채 더는 나아가지 못 했다.
발버둥치는 마왕을 향해 루나가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뜨드드득!!!
공간이 뒤틀리며, 마왕을 감싸고 있던 악신의 유물들이 하나하나 뜯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무수한 악신의 유물들을 일그러뜨리며 루나가 마왕에게 다가섰다.
마침내 마지막 유물이 마왕에게서 뜯겨져 나갔을 때.
마왕은 루나를 마주볼 수 있었다.
루나를 마주본 안소니우스가, 목울대를 움직였다.
"나는..."
악신의 유물이 전부 뜯겨져 나갔다고 해도 안소니우스는 여전히 악신들의 속박에 묶여 있었다.
그럼에도 안소니우스는 과거에 무너졌던 이지를 최후의 순간 움켜쥐고서, 타들어가 눌어붙은 목을 깔딱이며 힘겹게 속삭였다.
"계약을... 지켰다... 레이와... 계약을..."
"..."
"레이와... 계약을... 지켰다... 너의... 이제... 너의... 차례다..."
안소니우스는 온 육신이 불타고도 꺼지지 않은 눈빛으로 루나를 응시하며 붉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네가... 신화를... 완성해라..."
"..."
"네가... 복수를..."
복수.
그게 안소니우스의 갈망이었다.
안소니우스는 결코 고결하지 않았다.
그는 삶을 살아가며 단 한 번도 고결함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단지 누이를 지키고자 고결함을 가장하곤 했을 뿐이었다.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누이를, 안소니우스는 자기 손으로 베었다.
"내가... 누나를... 지켜..."
그날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게 손아귀를 타고 흐른다.
그 영원토록 퇴색되지 않을 순수한 증오가 그를 마지막까지 움직였다.
"미안해... 누나..."
츠즈즉-
복수를 위한 의무를 다한 안소니우스가 재가 되어 흩어진다.
안소니우스의 최후를 지켜본 루나가, 강제로 분단시켜놓았던 일곱 개의 서클을 완전히 해방시켰다.
해방된 일곱 개의 서클은 서로 이끌리듯 겹쳐지며 융합을 이루기 시작했다.
"..."
돌아오지 못 할 길을 걷는다.
초월을 앞둔 루나는, 자신을 닮은 환영들이 잠시 곁에 나타났다가 지워져 가는 것을 보았다.
그 하나하나의 환영이 루나가 품고 있던 또다른 가능성이었다.
운명의 변곡점은 바꿀 수 없다.
루나의 초월은 정해진 결과였다.
허나 정해진 결과로 향하는 과정은 무수했다.
때로는 초월을 이루기까지 30년의 시간이 걸렸다.
때로는 초월을 이루기까지 70년의 시간이 걸렸다.
때로는 초월을 이루기까지 수백 년의 시간이 걸렸다.
때로는 함께 했던 모든 이를 잃었고, 때로는 대륙이 멸망하고 대지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
하나의 결과로 수렴했으나, 무수하게 존재했던 그 '줄기'이자 '가능성'이...
바로 이 순간 하나로 확정되었다.
"..."
[...]
모든 환영이 사라진 후.
루나는 자기를 이끌어준 미래의 자신을 마주보았다.
초월을 이룬 미래의 루나는 레이의 해피엔딩을 이루어낸 과거의 자신을 마주보았다.
마침내.
하나의 과정과 하나의 결과가 합일을 이룬다.
일곱 개의 서클이 융합되었다.
그리고 루나는 더는 그곳에 없었다.
*
목이 마르다.
눈꺼풀이 무겁다.
처음의 감상은 그 정도였다.
머리가 멍하고 어지러워 제대로 된 사고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
레이가 눈을 떴다.
아직 침침한 시야 너머에서.
레이에게 친숙하고도 낯설게 느껴지는 소녀 두 명이 화들짝 놀라며 동시에 소리쳤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