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이별 [1]
[70]
레이는 벨라의 소망을 위해 죽음을 택했다.
이루지 못 할 벨라의 소망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삶을 등지고 엘-람이 안배한 최초의 계약에 응했다.
엘-람과의 계약은 레이의 영혼과 육신을 파멸로 이끌었다.
그건 무슨 수를 써도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한 파멸이었다.
계약에 응한 이상 레이도 엘-람도 예정된 파멸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루나가 공간을 얼어붙게 하여 잠시 레이의 죽음을 늦추었다고 해도, 그것이 한계였다.
이제 레이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레이를 되살리기 위해선, 별빛 너머의 세계로 발을 들여야 했다.
별빛을 넘어서 그 저주스러운 계약의 주체인 엘-람에게 소멸에 준하는 타격을 가해야 했다.
그건 필멸자가 감히 꿈꿀 수 없는 과업이었다.
과거 리실로테는 하르시아와의 이별을 앞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 했다.
그의 죽음을 늦추지도 못 하였고, 설령 그의 죽음을 늦추었다 해도 감히 별빛 너머로 눈을 돌릴 역량을 지니고 있지 못 했다.
리실로테가 할 수 있었던 건 하르시아의 마지막을 눈에 담는 것뿐이었다.
그날의 무력함을 잊지 못 한 리실로테의 원념은 수백 년의 시간을 고독 속에서 지새웠다.
고독과 함께 짙어져만 갔던 그녀의 분노와 광기는 결국 대륙을 멸절에 이르게 할 참사를 초래했다.
온전히 그녀의 탓은 아니었다고 해도, 결국 리실로테의 원념이 저지른 농간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재앙이 대륙을 집어삼켰고 수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그건 어쩌면 분풀이에 지나지 않는 농간이었다.
허나 수많은 우연이 겹친 끝에...
피로 물든 대륙 위에서 한 필멸자가 별빛 너머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이루지 못 했던 것..."
리실로테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파편이 하늘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한때 그녀는 세상을 구한 영웅이었으며, 또한 세상을 멸절의 위기에 처하게 한 광인이었다.
그녀가 이룬 위업도 그녀가 저지른 죄악도 하늘을 뒤덮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허나 이제 그녀에겐 자긍심도 죄책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것을 느끼기엔 그녀는 너무 오랜 시간을 고독 속에서 그리움을 곱씹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리실로테의 원념은 자신이 이루지 못 한 소망을 이룬 루나를 선망하며 바스러져갔다.
"별의 힘을 쥐고... 나아가렴..."
경멸스러울만큼 이기적이다.
리실로테 또한 자신의 추함을 모르지 않았다.
리실로테는 자신이 얼마나 일그러진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른 운명을 택하지 못 했다.
스페라가 그랬던 것처럼 가슴을 메운 감정의 응어리가 너무나 거대해서, 누군가 멈춰 세워줄 때까지 한없이 일그러져만 갔다.
그렇게 일그러지고 일그러진 끝에 다가온 최후의 순간.
리실로테는 하르시아와 마지막 대화를 떠올려보며, 돌아오지 않을 추억의 한 켠에 잠겨 눈을 감았다.
"..."
심장을 감쌌던 서클이 소멸한다.
요하나는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세상을 붉게 칠한 핏빛 하늘 너머로 푸른 섬광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
오벨리스크가 완전히 붕괴하였다.
대륙 각지의 화이트타워는 오벨리스크가 건재해야만 완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짧은 기간 급히 구축한 방어시설이었기에 오벨리스크의 보조 없이는 제 기능의 반도 발휘 못 했다.
결국 오벨리스크의 붕괴 직후 화이트타워는 주요 기능이 급격히 저하되며 문제를 일으켰다.
대륙 각지의 전장에서 분투하던 이들은 그 변화를 곧바로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필립스 백작령 인근에서 전투를 치르던 이들 또한 화이트타워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즉시 알아챘다.
"...!"
시그니 산맥 인근에도 화이트타워가 건설되어 있었다.
화이트타워는 시그니 산맥 지하에 존재하는 영맥의 마나를 효과적으로 제어하여 일대의 방위를 보조했다.
필립스 백작은 화이트타워의 감지 결계가 있었기에 마족의 기습을 방비할 수 있었고, 또한 화이트타워의 중계 기능 덕분에 효과적으로 병력을 통솔하여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대륙의 절멸을 앞두고 군단의 사기가 땅을 기었음에도 병력의 연계와 통솔이 가능했던 것은 화이트타워의 영향력이 지대했다.
헌데 그 화이트타워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더는 마족의 기습에 제대로 대비할 수 없었다.
실시간으로 통신을 이어가며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고 연계를 이어갈 수도 없었다.
유기적으로 움직였던 군단의 움직임이 경직됐고, 기이한 외관과 능력을 지닌 마족이 모습을 한 번 드러낼 때마다 이미 투기를 잃은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총전력 자체는 우세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이미 정신력의 한계에 몰린 이들을 억지로 규합해놓은 군단은 고삐가 풀리자마자 급격히 와해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 필립스 백작은 마족이 날뛰는 곳으로 직접 움직여 검을 휘둘렀다.
가장 위험한 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모범을 보이는 것이 필립스 백작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헌데 그로부터 얼마 못 가.
붉었던 하늘이 더욱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붉은 번개가 떨어져 내려 삭막해진 지상을 헤집었다.
악신의 추종자들은 악신의 권능이 벼락이 되어 떨어져 내리는 대지 위에서 광기를 머금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필립스 백작은 더는 군단의 규율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필립스 백작이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
온 시야가 붉었다.
진정 지옥 같은 풍경이었다.
발악하듯 투쟁하던 이들도 그 지옥 같은 풍경 앞에서 검을 떨어뜨렸다.
필립스 백작은 진정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음울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본 필립스 백작은 투구를 벗으며 다시 전장을 보았다.
"명예롭게..."
필립스 백작이 중얼거렸다.
공허한 중얼거림이었으나, 필립스 백작을 호위하던 모하메드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까지 명예롭게 투쟁에 임하리라 맹세했다.
얼마 못 가...
악신의 저주가 가득 어린 너울짐이 필립스 백작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의기 있는 자들이 전장 위에서 목숨을 다하려는 찰나.
전조 없이 풍경이 잘려나갔다.
"...?!"
악신의 추종자들이 발을 들이고 있던 일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잘려나갔다.
종이를 뜯어내듯 잘려나간 풍경을 앞에 두고, 모두가 멍하니 선 채 두 눈을 깜박였다.
마법사들조차 상황을 제대로 이해 못 하고 혼란에 휩쓸린 채 주춤거렸다.
"무슨...?"
몇몇 기사는 혹시 악신의 추종자가 준비한 괴이한 술수에 빠져 환영을 보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뒤늦게 사방을 경계했다.
허나 아무리 주변을 탐색하고 경계하여도 잘려나간 풍경은 돌아오지 않았다.
같은 시간.
마티아스 후작은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 머저리 새끼들!!!!!"
화이트타워의 기능이 급격히 저하됐다.
군단의 연계가 약화되고 화이트타워가 요격 기능을 상실하여 전장에 투사할 수 있는 화력이 급감했다.
그 와중 점액질의 괴물이 더욱 드넓은 범위를 뒤덮은 채 마티아스 후작이 서 있는 지역까지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이토록 무능하다니!!!!!"
시야는 검붉었고 사방엔 피비린내만 자욱했다.
마티아스 후작이 확신했던 지원은 오지 않았다.
마티아스 후작은 핏발이 어린 눈동자로 전장을 노려보며 분노했다.
"제국을 찬탈했으면 그 의무 또한 다하란 말이다!!!!!"
이런 결말을 마티아스 후작은 용인할 수 없었다.
정당한 계승자든 찬탈자든 제국을 계승했으면 대륙을 수호해야만 했다.
그게 의무였다.
대륙이 멸절을 맞이하는 순간을 지켜보며 마티아스 후작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검을 뽑고 사지로 나아가려 했다.
어차피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할 곳 따위 대륙에 존재치 않는다는 걸 마티아스 후작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헌데 마티아스 후작이 수하를 뿌리치고 전장에 몸을 던지기 직전.
눈앞의 풍경이 잘려나갔다.
"...?"
이해 못 할 기적이 찾아오자 한순간 전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티아스 후작도 마티아스 후작을 뜯어말리던 수하도 얼을 타며 두 눈을 크게 뜬 채 제자리서 굳어버렸다.
동일한 기적이 대륙 각지에서 연이어 목도되었다.
길란트는 동부에 구축된 최후의 전선이 붕괴되기 직전에 눈앞의 풍경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았다.
남부가 무너지고 이제는 서부 전선이라 불리어야 할 전장에서 혈전을 치르던 수많은 전사들이 눈앞의 풍경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았다.
직전까지 공포가 스며든 울부짖음이 가득했던 대륙에, 서서히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적막 속에서.
하나의 파열음이 대지를 타고 번져갔다.
쩌적!!!
마왕이 해방되었다.
*
마왕을 봉인한 주축은 라멘타였다.
세계수의 수호자인 라멘타는 본래의 의무를 뒤로 미루면서까지 마왕의 봉인을 이루었다.
하지만 마왕의 봉인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오벨리스크가 무너진다면, 더는 봉인을 유지할 수 없었다.
쩌적!!!
오벨리스크가 무너지고, 라멘타가 마왕과 함께 침묵하고 있던 중첩된 공간이 괴리되기 시작한다.
중첩된 공간이 괴리되며 얼어붙어 있던 시간 또한 다시 본래의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마왕은 대륙으로, 라멘타의 세계수의 품으로 갈라져 나갔다.
쩌엉!!!!!
중첩된 공간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며 발생한 거대한 후폭풍이 세계수의 영역을 뒤흔들었다.
라멘타는 수분이 전부 증발한 것처럼 바싹 말라버린 육신으로 지면에 주저앉았다.
마왕의 봉인을 위해 무리하게 세계수의 권능을 받아들여 운용한 탓에 라멘타는 오랜 잠에 빠져야 할 만큼 육신이 훼손되어 있었다.
라멘타는 모든 힘을 다했지만, 마왕은 건재했다.
단지 건재할 뿐만 아니라, 잠시 사도와 이별해야 했던 악신들의 권능이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너울지며 마왕의 귀환을 반기고 있었다.
"..."
더 이상 대륙은 세상에 너울지는 악의에 대항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세계수의 수호자인 라멘타조차 빈사에 가까운 상태에 놓여있었다.
세상의 끝이 다가온다.
대륙은 한계에 달했다.
하늘엔 악신들의 악의가 너울진다.
그런데, 하늘에 너울지는 악신들의 악의가 라멘타의 눈엔 흡사 발악처럼 보였다.
라멘타가 미약하게 웃음을 내비치며 중얼거렸다.
"무엇이 너희를 두렵게 하는가."
굳이 악신들이 무리하게 힘을 쏟아내지 않아도 얼마 못 가 대륙은 무너질 터다.
그럼에도 악신들은 이해 못 할 출혈을 감수하며 세상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트드드드드득!!
하늘을 뒤덮은 악신들의 악의가 마왕에게 집중되어 갔다.
봉인에서 풀려난 마왕으로부터, 라멘타조차 헤아리기 힘든 거대한 악의의 너울짐이 번져 나와 대륙 전역을 뒤흔들었다.
헌데 그와 동시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륙 각지의 풍경들이 갈라져 나가더니, 갈라져 나간 풍경들이 마왕이 서 있던 공간에 중첩되기 시작했다.
세상을 헤집던 악의가 한 곳에 응축되어 간다.
그리고 한 여인이 하늘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