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36화 (436/446)

외전 - 결전 [15]

[69]

자신 없다.

요하나는 지금보다 더 나아갈 자신이 없었다.

공간검의 코어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역량의 한계였다.

기술의 실패가 자멸을 초래하리란 걸 알기에 요하나는 결심을 세우지 못 하고 몸을 일으켰다.

어떤 길을 택하든 오벨리스크 내부에서 검을 맞대는 건 안 됐다.

요하나가 몸을 가속시켜 오벨리스크 밖으로 벗어나자, 로얄가드를 너무나도 쉽게 찍어누르고 있던 스페라가 짜증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요하나를 응대해주었다.

쾅!!!

재능을 만개한 두 소드마스터의 격돌은 더 이상 외부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섬광을 잘라낸 듯한 예리한 일격이 서로의 살결을 스쳐 간다.

틈새가 보이지 않는, 검의 궤적이 만들어낸 감옥 속에서.

스페라가 재차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내디뎠다.

끄득!!!

완성도에 의한 미약한 힘의 우위가 정면 대결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요하나가 그려낸 검의 궤적을 억세게 뒤틀어버린 스페라가,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그었다.

쩌억!!!!!

"...!!"

스페라의 검격을 막아낸 요하나가 반발력을 해소하지 못 하고 공중으로 쳐올려졌다.

삽시간에 지면과 멀어진 요하나를 스페라가 곧바로 따라잡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날 막겠다며?"

도발을 중얼거린 스페라가 이번엔 위에서 아래로 요하나를 찍어눌렀다.

요하나의 등 뒤에는 오벨리스크 최상부의 첨탑이 뾰족하게 치솟아 있었다.

요하나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틈이 없어...!'

스페라는 질투가 날 만큼 모든 게 완벽했다.

미세한 결점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품위 있었다.

요하나는 도저히 스페라를 맞상대하며 무언가를 지킬 만큼 건방을 떨 수 없었다.

끄드드드드득!!!!!!

요하나의 육신이 오벨리스크의 첨탑에 처박혔다.

스페라는 요하나 위에 떨어져 내려 오벨리스크의 첨탑에서부터 요하나를 지상을 향해 밀어붙였다.

두 소드마스터의 격돌에 오벨리스크가 정상에서부터 무너져내리며 추락하듯 주저앉기 시작했다.

요하나는 추락하는 오벨리스크의 잔해 속에서 스페라와 두 눈을 마주쳤다.

"..."

요하나의 대적자는 끔찍하게 강했다.

그럼에도 요하나는 물러서지 못 했다.

요하나는 레이를 위해 레이가 남긴 업보와 악의를 마주 보았고, 또한 그 누구도 아닌 스페라를 저주스러운 강박에서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콰가가강!!!!!

오벨리스크의 지상층이 통째로 붕괴하며 오벨리스크의 핵심 시설이 외부로 노출되어 갔다.

요하나는 지상과 맞닿기 전에 왼손의 검을 버리고 모로스를 두 손으로 말아쥐었다.

"..."

현재의 불리한 형세를 뒤집기 위해선 결정적인 한 수가 필요했다.

리실로테가 재현을 요구한... '그 기술'이 필요했다.

요하나는 그 기술의 대략적인 원리밖에 알지 못 했다.

애초에 진정으로 그 기술의 본질을 이해한 것은 공간검의 창안자인 하르시아와 그의 편린을 이어받은 레이 정도였다.

결국 요하나는 본질조차 제대로 이해 못 한 채 자신의 천재성에 의지해 신화 속 기적을 재현해내야 했다.

"..."

무수한 우연이 겹쳐도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하다는 걸 요하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요하나는 모로스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일순.

기이한 고요함이 전장에 찾아왔다.

요하나가 승부를 걸었고, 리실로테의 원념은 핵이 드러난 오벨리스크의 모든 기능을 요하나의 영육을 보호하기 위해 집중시켰다.

"...!"

스페라 또한 변화를 감지했다.

요하나는 불리한 판세를 뒤집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자멸조차 감수한 무리한 승부수 탓에 요하나에게 잠깐의 틈이 드러났다.

스페라는 그 틈을 파고들려다가 성검을 다시 쥐었다.

틈을 파고드는 대신 정면에서 부순다.

그게 스페라의 결정이었다.

굳이 요하나의 틈을 파고들어 승부수 자체를 저지시키고 난전을 이어가는 것보다 그게 훨씬 빠르고 깔끔했다.

으득-!

스페라의 절대권역이 좁은 범위에 압축된다.

그와 동시에 무한히 너울지던 어두운 광휘가 성검의 검신에 집약되기 시작하며 일대의 시야를 어둡게 물들였다.

절대권역 내에서 미세 공정을 거쳐 극한까지 응축된 어두운 광휘가 하나의 칼날을 이룬다.

본래의 세상과 괴리되어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이룬 궁극의 칼날이 스페라에게 주어졌다.

자기 힘조차 주체 못 하는 요하나와는 다르게, 스페라가 제련해낸 칼날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쯔윽-!

스페라가 성검을 움직였다.

성검의 궤적에 따라 세상에 흐르던 만물의 기운이 사그라졌다.

그 불가해한 일격을 맞이하며, 요하나 또한 모로스를 움직였다.

연쇄적인 차원 붕괴가 시작된다.

뜨드드드드득!!!

요하나의 검 끝이 흔들린다.

휘몰아치는 차원의 파편들을 요하나는 온전히 제어해낼 수가 없었다.

검끝이 흔들리자 하나의 궤적에 담겼어야 할 차원의 뒤틀림이 난잡하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허나 이제 와서 검을 멈춰 세울 수는 없었기에, 요하나는 소리 없는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떨어뜨렸다.

스페라는 요하나가 그려낸 검의 궤적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을 보았다.

기적을 바라며 무리한 기술을 시도했지만, 결국 요하나는 하르시아가 그려냈던 궤적을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 했다.

스페라는 잠시 잠깐 실망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성검을 뻗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페라는 미약한 실금이 성검의 검신을 파고드는 것을 보았다.

스페라가 서서히 눈가를 좁혔다.

직후, 거대한 섬광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

무너져내리던 오벨리스크가 섬광에 삼켜져 한순간에 그림자를 잃고 증발하였다.

섬광의 경계면과 맞닿은 물질이 흡사 잘려나가듯이 분쇄되어 반절만 남아 지면을 굴렀다.

그 공포스러운 파멸의 중심에서부터.

두 인영이 섬광을 찢어내고 지면 위로 추락했다.

끄드드드득!!!!!

스페라가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거대한 구덩이 위를 미끄러지다가 억지로 몸을 멈춰 세웠다.

"..."

금이 간 성검의 검신에서부터 기분 나쁜 진동이 손아귀를 타고 전해졌다.

잠시 호흡을 몰아쉰 스페라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손톱에라도 할퀴어진듯, 붉은 하늘에 푸른 갈퀴가 새겨져 반짝이고 있었다.

"하..."

빌어먹게도.

신화를 제대로 재현해내지도 못 한 요하나의 검격이, 너무나 완벽했던 스페라의 일검을 짓이겼다.

상반신 우측이 거의 떨어져 나간 스페라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구덩이의 반대편에 추락한 요하나도 겉모습은 만신창이었다.

정말 간신히 자멸을 면한 요하나가 헛구역질을 했다.

"흐윽, 흡..."

요하나는 전신이 으스러질 만큼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스페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미미한 피해를 입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으로 우세한 조건을 지니게 된 요하나가 상처 입은 영육을 이끌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스페라가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

성검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가 전해진다.

스페라에게 전해진 건 별빛 너머 초월적인 존재가 제의하는 계약이자, 축복이며, 저주였다.

스페라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레이에게 주어졌던 계약과 같은 종류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잠시 침묵한 스페라는...

이내 환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지랄."

스페라는 금이 간 성검을 지면에 꽂아넣고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가슴에 구멍을 뚫으라고? 그딴 몰골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아름답지 못하잖아. 우아하거나 고상하지도 못해."

심장이 터지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발악하는 꼴이라니.

아무리 대단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그딴 추잡스러운 겉모습은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

"널 위해 죽지는 않을 거야. 내가 왜 그래야 해?"

스페라가 원했던 건 추한 몰골로 도망치다 짓밟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게 모든 걸 잃은 스페라에게 남은 유일한 긍지이자 자존심이었다.

그렇기에 스페라는 엘-람이나 악신 따위를 위해 추잡한 몰골이 되어 자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우웅-!

"하...!"

계약을 거절하자 성검을 타고 전해지는 엘-람의 격정을 느끼고는, 스페라가 조소를 내비치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와 분개하면 어쩔건데?"

엘-람이 스페라를 완전히 잠식하지 않은 것은 스페라가 엘-람의 뜻을 충실히 이행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페라의 재능을 온전히 활용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안소니우스의 경우처럼 사도의 인격을 완전히 말살하여 인형으로 만들면 사도가 지닌 본래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활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행했던 타협을, 이제 와 스페라가 계약 하나 거절했다고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페라가 즐거운 웃음을 머금고서 요하나를 향해 마주 나아갔다.

"거기 하늘 위의 멍청이들. 어지간히 똥줄 타는 모양인데, 인간처럼 무릎 꿇고 기도라도 올려 봐. 내가 승리하기를."

멍청이니 똥줄이니 빗겨간 운명 속에서 배웠던 단어를 입에 담은 스페라가 요하나와 검을 맞댔다.

!!!

극의에 이른 검술이 행해지며 잡념이 벗겨져 나간다.

두 소드마스터가 이룬 검술의 경지는 대등했다.

그렇기에 승부를 가르는 건 미세한 요소들이었다.

요하나에 비해 확연히 심각한 타격을 입은 스페라는 점점 더 균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공방이 이어진 끝에 이젠 스페라가 수세에 몰려 시간을 끌기 위해 집중해야만 했다.

요하나가 재현한 공간검의 코어는 한시적이었고, 아마도 얼마 안 가 한계에 달할 터다.

스페라는 요하나가 그 종말점에 달하기를 기다리며 끈질기게 버텼다.

헌데 검을 휘두르던 요하나의 움직임이...

전조 없이 뚝뚝 끊겨나가기 시작했다.

"...!!"

상위차원에서 이루어진 자세의 치환이 과정을 찢어내고 결과만을 이 세상에 투영한다.

두 번째 개안을 이룬 스페라는 요하나가 상위차원에서 그려내는 검의 궤적을 인지할 수 있었다.

스페라는 분명 요하나의 검에 대응할 수 있는 대부분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라는 요하나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 했다.

심각한 타격을 받은 육신은 스페라가 바라는 만큼 빠르고 날카롭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몇 번의 공방 끝에.

결국 요하나가 그려낸 궤적을 따라잡지 못 한 스페라는, 자신의 가슴을 뚫어내는 제국의 신검을 느꼈다.

"..."

"..."

대기가 미친듯이 휘몰아친다.

허나 두 소드마스터가 이루어낸 절대권역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적막 속에서, 스페라가 금이 간 성검을 떨어뜨리며 담담하게 요하나에게 속삭였다.

"촌년 주제에 꽤 하네."

자기 가슴을 뚫고 지나간 모로스를 매만져본 스페라가 볼멘소리를 흘렸다.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

"...!"

일순 요하나가 긴장한 기색을 내비치자, 스페라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도 봤잖아? 본래 운명에선 내가 이겼거든. 그러니까 아직 일대일이야. 동점이라고. 알겠어?"

"..."

억지를 부리는 스페라를 멍하니 바라보던 요하나가, 이내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며 피식 웃었다.

"...그래, 알겠어."

"동점이니까... 다음 기회가 있다면 승부를 가리자고. 뭐... 친구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운명은 항상 이 꼴인 모양이니."

천천히 숨을 몰아쉰 스페라가 애증어린 시선으로 요하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잘 있어, 요하나. 그리고... 고마웠어."

잘려나간 가슴으로부터 응어리진 악의가 흘러넘친다.

마침내 가슴을 가득 메운 악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스페라는, 추잡한 저항을 이어가지 않고 담담하게 숨을 거두었다.

비록 수많은 상흔을 입었으나, 그렇게 스페라는 우아하고 고상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

조용히 스페라의 마지막을 지켜준 요하나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두운 광휘의 침식과 공간검의 반동으로 인해 요하나 또한 소모가 극심했다.

영혼도 육신도 정신력도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

오벨리스크가 완전히 붕괴했다.

핵심 시설이 통째로 증발해 재건도 불가능했다.

요하나는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에선 패했다.

오벨리스크의 붕괴는 제국이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전선의 붕괴를 뜻한다.

또한 마왕이 봉인에서 해방되리란 걸 의미했다.

"..."

요하나는 저 멀리서 마왕의 악의가 다시 세상에 번져 나오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마왕을 매개로 삼는 악신들의 권능이 세상에 짙게 내려앉으며 붉은 번개가 지상에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요하나가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제 전부... 끝나는 건가...?"

티딕!

요하나를 지켜주었던 리실로테의 서클 또한 한계에 달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리실로테의 환영이 요하나의 곁에 함께 주저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끝이지..."

리실로테의 환영은 최후의 순간 저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신화시대의 종말이 다가오는구나."

사랑했던 이가 그토록 바랐던 기점에 선 리실로테는, 모든 증오를 내려놓고 그리움만을 머금은 채 요하나에게 속삭였다.

"고개를 들어보아라."

"..."

리실로테의 인도에 따라 요하나가 고개를 들어 황성이 존재하는 방향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요하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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