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결전 [14]
[68]
두 번째 개안.
공간의 일그러짐을 읽어낼 수 있게 만드는 신기.
두 번째 개안을 이룬 스페라 앞에서 공간검의 도약검기가 지니는 기습의 이점은 무의미한 수준이었다.
스페라는 도약검기가 허공을 찢어내고 떨어지기도 전 이미 도약검기의 궤적을 읽어내고 완벽히 요격할 수 있었다.
스페라는 도약검기를 막아내며 침식의 사슬을 움직였다.
응축된 어두운 광휘가 육각형의 벌집 형태로 미세 가공되어 구축된 침식의 사슬은 경이로운 수준의 강도를 자랑했다.
어지간한 고위 기사가 발현한 검강조차도 침식의 사슬에 제대로 흠집조차 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공간검의 코어를 재현한 요하나가 발현한 검강은 침식의 사슬을 도리어 찍어눌렀다.
수십에 달하는 침식의 사슬이 요하나를 향해 몰아쳤음에도 요하나가 발현한 검강은 그 모든 침식의 사슬을 뒤틀고, 부수고, 찢어버렸다.
스페라는 바스러진 침식의 사슬에서 번져나가는 기운을 활용해 요하나의 절대권역을 침식하려 했다.
허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트드드득!!!
요하나에게서 너울지는 냉기가 어두운 광휘와 맞닿아 반발하여 침식을 밀어낸다.
요하나의 절대권역을 침범했던 모든 부정한 기운이 휘몰아치는 냉기에 의해 벗겨져 나갔다.
스페라는 어두운 광휘에 내재된 절대성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눈앞의 광경이 얼마나 이치를 벗어난 기적인지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경이를 품은 스페라가 체내를 흐르는 축복 중 악신의 권능만을 분할하여 병장기의 형태로 응집시켰다.
단절, 왜곡, 부식, 분열...
이제껏 대륙을 기만하였던 부정한 권능의 집약체가 요하나를 향했다.
그리고 부정한 권능의 집약체가 요하나가 발하는 냉기와 맞닿은 순간.
부정한 권능의 집약체는 본래의 괴이함을 급격히 상실하며 바스러져 나갔다.
확인차 행한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스페라가 검을 다시 잡았다.
공간검의 마나가 흐르는 요하나의 절대권역은 이제 침해할 수 없다.
서로가 지닌 힘과 권능이 서로에게 정직한 역량의 투쟁을 강요하고 있었다.
요하나와 스페라가 서로를 향해 나아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두 소드마스터의 절대권역이 막대한 반발을 일으켰다.
이윽고 서로의 거리가 다섯 걸음 안쪽으로 좁혀진 찰나.
검이 휘둘러졌다.
!!!!!
두 소드마스터의 충돌이 만들어낸 후폭풍에 의해 일대의 대기가 시야 끝으로 밀려났다.
두꺼운 강철조차 우습게 찌그러질 압력 속에서.
요하나와 스페라가 본격적으로 육신을 가속시켰다.
!!!!!
섬광이 번쩍인다.
한순간 맞부딪친 수십 번의 검격이 눈부신 섬광을 토해냈다.
요하나와 스페라가 만들어낸 검의 궤적이 겹칠 때마다 지면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요하나는 스페라와 검을 맞대면서도 모로스를 한 바퀴 빙글 돌려 잡았다.
도약검기가 지닌 '기습'의 이점은 스페라 앞에서 무의미하다.
허나 도약검기의 궤적이 적에게 읽힌다고 해도, 본인이 원하는 시점과 장소에 검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이점이었다.
요하나는 수십 수백의 도약검기를 허공에 새겨넣었다.
궤적을 읽어낸다 해도 수십 수백의 도약검기를 모조리 회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쩌저저적!!!!!
떨어져 내리는 도약검기가 스페라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의 도약검기가 스페라의 움직임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고 불리한 자세를 강요했다.
과거에 레이는 도약검기를 요하나처럼 활용하지 못 했다.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수십 수백의 도약검기를 허공에 새겨넣고 전투를 이끈다는 것은 레이의 센스로는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허나 요하나는 천재적인 직감과 판단력으로 두 번째 개안을 이룬 스페라를 압박했다.
스페라는 허공을 가득 덮은 실선을 돌아보았다.
요하나의 검은 언제나 변화무쌍하고 화려했다.
그 화려함에 맞서기 위한 스페라의 선택은 언제나 우직한 정면 돌파였다.
흐드러지는 요하나의 검격이 공간을 수놓으며 목을 조여오는 찰나.
스페라의 일검이 불어닥치는 폭풍을 뚫고 요하나를 향해 정직하게 나아갔다.
폭풍이 밀려나며 일순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요하나가 다가오는 스페라의 일검을 향해 두 자루의 검을 교차시켰다.
!!!!!!!
두 소드마스터의 중심에서 발생한 충격파에 의해 지면이 파도처럼 너울지며 뒤집어졌다.
그 거대한 충돌 속에서 자세가 무너진 쪽은, 요하나였다.
"...!"
요하나가 본래 그려내고자 했던 검의 궤적이 뒤틀린다.
요하나는 교차시킨 검의 궤적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턱에 힘을 주었다.
어두운 광휘도 공간검도 상리를 벗어난 절대성을 지닌 힘인 것은 동일했다.
하지만 요하나가 재현해낸 공간검은 불완전했다.
하르시아가 이루었던 것에 비해 명백히 완성도가 떨어졌다.
그에 반해 스페라의 어두운 광휘는 극도로 완벽하게 제련되어 완성된 권능의 극치였다.
그 완성도의 차이가 정면의 충돌에서 균열을 일으켰다.
요하나는 결국 자세를 무너뜨리며 뒤로 몸을 던졌다.
그와 함께 양손에 쥔 검을 허공에서 교차시켰다.
쩌엉!!!!!
공간검의 마나가 반발하여 터져나간 힘의 격류가 스페라가 서 있던 공간을 난잡하게 헤집어댔다.
무차별적인 폭격이 머리 위를 뒤덮었으나, 스페라는 우아하게 폭격의 틈새를 찢어내고 가속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너나 나나 이런 난잡한 공격에 당황할 경지는 지났잖아?"
쩍!!!!!
스페라가 전력을 다해 요하나를 찍어눌렀고, 요하나 또한 전력을 다해 스페라의 일격을 상쇄했다.
충돌 직후 요하나는 뒤로 밀려나며 흔들린 자세를 다시 잡았다.
서로의 검술은 호각이다.
힘의 특수성은 양쪽 모두 상쇄된다.
충분히 비등한 조건이 갖추어졌지만, 그렇기에 요하나는 작은 차이를 메우는 게 버겁게 느껴졌다.
"흐읍...!"
호흡을 고른 요하나는 다시 한 번 도약검기를 허공에 새겨넣으며 스페라와 맞부딪쳤다.
도약검기를 활용해 원치 않는 경우의 수를 차단해내며 스페라를 한정된 공간에 가두어낸다.
전투에 있어 천재적인 직감과 판단력을 지닌 요하나였기에 시도할 수 있는 묘기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으직!!!
스페라의 전력을 다한 일검을 상쇄하지 못 하고 지면을 긁어내야 했다.
무리하게 스페라를 제자리에 묶어두려던 시도가 요하나에게 허점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스페라는 뒤로 밀려나는 요하나를 곧바로 따라잡아 승부를 결정지으려 했다.
그러나 스페라가 미처 요하나를 따라잡기 전에 오벨리스크에서 섬광이 피어올랐다.
"?!"
스페라는 순간 당혹감을 느꼈다.
분명 십여 미터밖에 되지 않았던 요하나와의 거리가 갑자기 매우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오벨리스크에서 타오르는 빛줄기가 스페라를 향해 쏟아졌다.
스페라는 오벨리스크의 포격을 무시하고 움직이려 했지만, 분명 거리가 꽤 떨어져 있던 오벨리스크의 폭격이 다음 순간 스페라의 코앞에 맞닿아 있었다.
"!"
콰아아아앙!!!
폭격에 적중당한 스페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리가 왜곡된다.
오벨리스크는 그런 괴이한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드래곤하트의 권능인가."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제국의 황성과 오벨리스크에 드래곤하트가 여럿 존재한다는 건 스페라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오벨리스크가 우주지도를 완성할 수 있게 해준 핵심적인 자산 중 하나가, 바로 거리의 왜곡을 일으키는 드래곤하트인 듯싶었다.
"참..."
드래곤이 강한 갈망을 품은 채 숨을 거두면 그 갈망 일부가 권능의 형태로 드래곤하트에 남는다.
그리고 드래곤이 가치 있는 유산을 제국에 남길 수 있도록 드래곤을 이끈 존재는, 제국을 건설한 시조룡, '프리무스'였다.
프리무스는 엘-람에 의해 강제된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충실히 따랐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인류와 대륙의 수호를 바라며 숨을 거두었다.
프리무스의 비원은 제국을 일천 년간 지켜준 방패가 되었으며, 종국에 이르러 또다른 엘-람의 대행자를 가로막고 있었다.
"웃긴 꼴이네."
스페라가 조소하며 지면을 찍어 밟았다.
드래곤이 남긴 권능이라 해봐야 세월 속에 희석된 반쪽짜리 권능이다.
어두운 광휘를 두른 스페라에게 더는 제대로 된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그래도 오벨리스크가 잠깐의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요하나가 자세를 다시 잡았다.
쩍!!!!!
스페라는 요하나와 검을 맞대며 계속해서 요하나를 뒤로 밀어붙였다.
요하나는 발악하며 스페라를 멈춰 세우려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조급해진 요하나가 무리하게 간격을 좁힌 찰나.
스페라가 이제껏 축적하고 있던 침식의 사슬을 일시에 중첩시켜 요하나를 후려쳤다.
쩌억!!!!!
침식의 사슬을 막아낸 요하나가 막대한 반발력을 이겨내지 못 하고 뒤로 날아가 건물 안에 틀어박혔다.
요하나가 틀어박힌 건물은 다름 아닌, 오벨리스크였다.
오벨리스크를 보호해야 하는 요하나 입장에서, 스페라가 오벨리스크에 도달하는 걸 반드시 저지해야 했다.
그렇기에 무리하게 스페라를 막아서려 했는데, 그게 요하나를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
결국 요하나는 스페라를 저지하지도 못 하고 자신이 오벨리스크에 틀어박혔다.
스페라는 요하나를 쫓아 몸을 움직이려다, 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촥!!
로얄가드, 파울라의 급습이었다.
스페라는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고 침식의 사슬을 움직여 파울라의 기습을 막았다.
파울라를 알아본 스페라가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황자의 선택이라고..."
예상밖의 상황이었다.
스페라는 로얄가드와 황자가 황성의 심부에 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설령 닿더라도 이런 선택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어린 황자는 복수를 포기하고 삶을 포기하고 대의를 택했다.
스페라와는 다르게 말이다.
"..."
스페라는 죽을 자리를 찾아온 파울라를 잠시 가만히 바라보다가, 짧게 혀를 찼다.
"욕심이 지나치네, 로얄가드. 여기까지 와서 명예로운 죽음 같은 걸 바라다니."
쩍!!!
스페라가 파울라의 안면을 지면에 박아넣었다.
*
"강해. 최초의 혼종을 상회하겠어."
리실로테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요하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최초의 혼종이라 해봐야 별빛 너머의 초월자가 겁에 질려 급조한 괴물이었다.
그에 반해 스페라는 자신의 재능을 만개하여 진정 극의에 이른 무력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혼자야. 여기는 마경도 아니지."
스페라는 루나를 견제하고 발을 묶기 위해서 자신이 통제 가능한 대부분의 전력을 대륙 각지의 요충지로 분산시키고 홀로 오벨리스크를 공략하려 했다.
리실로테가 그 점을 지적하며 말을 이었다.
"오벨리스크는 포기하렴. 그런 걸 생각하며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잡생각 하지 말고 전력을 다해."
"...지금도 그러고 있어."
"아... 물론 알고 있단다. 이대로면 네가 죽겠지."
공간검도 오벨리스크의 지원도, 전부 한시적이다.
이대로는 한시적으로 비등한 싸움이 가능하다고 해도 결국 무릎 꿇는 건 요하나가 될 터다.
그러니까.
"재현해내렴, 아이야."
리실로테가 반파된 오벨리스크의 모든 기능을 활성화시켜 요하나를 보조할 준비를 하며 속삭였다.
"내가 보여준 환영 속 하르시아가 그려낸 궤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