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결전 [13]
[67]
소년은 선택을 내렸다.
스스로의 의지로 복수를 포기하고 대의를 택했다.
그리고 레아가 소년에게서 제국의 인장을 받아들였다.
소년에게 주어졌던 권한이 레아에게 인계되어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파울라가 검을 쥐고 있던 손에 천천히 힘을 뺐다.
"..."
마침내 마지막 의무를 다했다.
그것이 허울뿐인 자유의지라도, 제국의 주인은 자신의 의지로 제국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것으로 제국의 긍지는 지켜지었다.
제국의 역사는 최후까지 명예롭고 고결하였다.
파울라는 필사적으로 의무를 다하였고, 이제 그녀의 가슴엔 허망함이 깃들어 너울지기 시작했다.
억지로 억누르고 고개를 돌렸던 수많은 감정들이 탈진한 그녀의 마음을 쿡쿡 짓눌렀다.
츠즉-!
얼마 안 가 푸른 빛무리가 광장을 감쌌다.
빛무리가 가라앉았을 때, 광장에 서 있던 모두가 막혀있는 벽 앞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일었다.
레아 또한 긴장이 잠깐 풀려 정신을 바로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두 눈의 초점을 다시 맞춘 레아가 입을 열려는 찰나, 티르피츠가 무기와 갑주를 내려놓았다.
툭!
티르피츠는 무장을 해제하고서 소년을 향해 군신의 예를 갖춘 후 뒤로 물러났다.
충분히 멀리 물러선 티르피츠는 겸허하게 앉아 품속의 단도를 꺼내 자결했다.
그는 마지막 의무를 다했고 소년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의 충의는 최후까지 올곧았다.
하지만 그는 소년의 선택 이후의 세상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자결을 택했다.
"..."
파울라가 티르피츠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파울라는 티르피츠의 선택을 충분히 이해했고, 티르피츠의 선택을 따르고 싶다는 욕구 또한 가지고 있었다.
대륙의 멸절이 눈앞에 다가왔다.
소년이 어떤 선택을 하였든 대륙은 얼마 안 가 어둠에 뒤덮였을 것이다.
설령 대륙이 몇 년을 더 연명한다 해도...
제국은 소년을 처형할 것이다.
그게 이치였다.
이건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파울라는 대륙의 멸절이나 소년의 처형을 살아서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파울라는 가능하다면 전장에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이 세상에 기사가 죽을 자리는 넘쳐났다.
파울라가 레아를 향해 담담하게 예를 갖추었다.
"하명하십시오. 따르겠습니다."
"..."
죽을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
자결이나 처형보다는 그나마 뜻 깊게 최후를 장식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달라.
파울라가 무엇을 위해 하명을 바라는지 레아 또한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파울라의 곁에 선 다른 로얄가드 또한 파울라와 함께 예를 갖추었다.
레아가 명을 기다리는 로얄가드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어둡게 빛나는 물결의 환영 속에서.
제국의 기사인 스페라와 악신의 사도인 요하나의 격전이 결착이 났다.
필사의 격전 끝에 승자와 패자가 분명히 나뉘었다.
허나 그 격전의 결과는 대륙의 운명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지는 못 하였다.
스페라와 요하나의 결착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선 마왕의 척살이 성공해야만 했다.
제국은 분명 총력을 기울여 마왕을 척살하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왕의 척살에 실패한 이상 대륙은 멸절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다.
대륙이 할 수 있는 건 무기력한 발버둥뿐이었다.
마왕의 척살에 실패한 이후 마경은 끊임없이 번져나갔고, 얼마 못 가 세계수의 영역을 침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세계수의 축복이 약화되며 결국 지상에 내린 세계수의 뿌리가 불길에 휩싸였고 세계수의 영역은 붕괴했다.
지상을 정화해주는 세계수의 축복이 사라지자 마침내 대륙 전역이 마경의 침식에 물들기 시작했다.
모든 조직적인 저항이 와해되고 소수의 인원만이 의미 없이 항전하다 짓밟혔다.
그렇게 대륙은 완전히 멸절하여 어둠에 뒤덮였을 것이다.
분명 그게 본래의 운명이었을 텐데.
그 모든 비극을, 레이가 뒤바꾸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운명을 레이가 구원하였다.
레이가 이루어낸 위업은 그토록 위대한 것이다.
그리고 레이는,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스스로 짓밟았다.
레이의 그 선택을 스페라는 용납할 수 없었다.
레이로 인해 잃어버린 영광을 곱씹으며 추락해야만 했던 스페라는, 마음에 깃든 악의를 밀어낼 수 없었다.
"죽어."
스페라는 요하나를 죽일 것이다.
이건 레이를 향한 복수였다.
레이의 선택으로 인해 추락한 이들의 원념이 결국 요하나를 죽이는 것이었다.
촤악!
이미 요하나는 대부분의 힘을 상실했다.
어둡게 빛나는 물결에 휩쓸려 끊임없이 침식당했기에, 영혼도 육신도 정신도 균열을 일으키며 붕괴하려 하고 있었다.
완전히 한계에 달한 요하나는 어둡게 빛나는 물결을 밀어낸 그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 했다.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힘도 어두운 광휘를 상쇄하는 건 불가능하다.
스페라가 품은 것은 별빛 너머 초월적인 존재들이 협력하여 제련해낸 권능의 극치였다.
그 위대한 힘을 응축시켜 성검에 둘러낸 스페라는 성검을 요하나의 머리 위로 떨어뜨렸다.
이게 우리의 결말이라고 스페라는 확신했다.
그 찰나.
요하나의 심장을 둘러싼 서클이 박동했다.
그와 동시에...
"검을."
리실로테의 원념이 요하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들거라."
쩍!!!
요하나가 간신히 힘을 쥐어 짜내 검을 휘둘렀다.
요하나의 발악은 머리 위로 떨어지던 성검을 간신히 빗겨냈지만, 요하나가 쥐었던 검은 어두운 광휘와 맞닿은 반발력을 이겨내지 못 하고 부서져 나갔다.
스페라는 약간의 짜증과 함께 이번에야말로 결말을 내기 위해 힘을 더욱 집약시켰다.
그리고 요하나는,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서클과 코어의 공명을 이루기 시작했다.
특-
요하나는 레이에게 처음 검을 배웠다.
공간검의 기반이 되는 코어의 파장을 어린시절부터 레이의 곁에서 경험해볼 수 있었다.
그것이 공간검을 향한 막연한 실마리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요하나는 리실로테의 조력 하에, 그 막연한 실마리를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구체화시켰다.
물론 실마리를 쥐었다고 해도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 한다.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허나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요하나는 과거의 신화를 재현해내야 했다.
특!
트득-!
요하나는 불세출의 재능을 타고났다.
그럼에도 공간검의 코어는 요하나에게도 너무나 난해하고 위협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요하나라 해도 결코 공간검의 코어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완전하지 못 한 공간검의 코어는, 영과 육을 무자비하게 바스러뜨린다.
요하나는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공간검의 코어를 재현해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불완전한 공간검의 코어로부터 막대한 반동이 터져나왔다.
그 모든 반동을 리실로테의 서클이 대신 받아들였다.
트드드득-!!
리실로테의 서클이 급격히 깨져나간다.
그럼에도 리실로테의 원념은 기꺼이 웃음을 머금었다.
서클을 바스러뜨리는 힘의 격류가 리실로테의 원념에게 익숙했다.
불완전하다 해도, 요하나는 결국 공간검의 코어를 성공적으로 재현해내고 있었다.
리실로테가 몸을 일으키는 요하나를 향해 속삭였다.
"부디..."
요하나로부터 푸른 빛이 스며나오기 시작한다.
그건, 하르시아의 비원으로 빚어진 빛이었다.
세상을 유린하는 모든 악의를 찢어내기 위한 힘이었다.
"그가 이루지 못 한 비원을..."
하르시아는 이 대지와 인류를 사랑하고 존중했다.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했기에 하르시아는 필멸자들의 해방을 꿈꾸었다.
자유로운 의지로 필멸자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택하기 바랐기에, 하르시아는 결국 홀로 씁쓸히 숨을 거두어야 했다.
그리고, 대륙이 멸절의 위기에 처하고 최후에 기대는 건...
결국 그 미련하고 멍청한 몽상가의 유산이었다.
쯔즈즉!
공간검의 마나가 요하나가 구축한 절대권역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상을 감지한 어둡게 빛나는 물결은 요하나의 마지막 발버둥을 침식해 짓밟으려 했다.
하지만 어둡게 빛나는 물결이 공간검의 마나와 맞닿은 순간.
요하나의 절대권역을 침식했던 스페라의 권능이 바스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해 못 할 현상에 스페라가 일순 몸을 굳혔다.
쯔즈즈즉!!
공간검은, 그저 파괴적인 검술이 아니다.
도약검기 같은 것은 검술의 창안 과정에서 우연찮게 얻어진 부산물일 뿐이었다.
공간검의 진정한 가치는 그런 것에 있지 않았다.
공간검은...
필멸자를 억압하는 불합리한 권능에 맞서기 위한 하르시아의 해답이었다.
쯔즈즈즈즉!!!
요하나가 부러진 검을 버리고 허공에 손아귀를 말아쥐었다.
요하나의 부름에 제국의 신검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인류를 수호한다는 제국 시조룡의 염원이 담긴 모로스가 요하나의 손에 쥐어져 공간검의 마나를 증폭시켰다.
푸른 광휘가 더욱 강렬하게 요하나로부터 너울지기 시작했다.
"..."
스페라는 제자리에 선 채 요하나를 지켜보았다.
요하나로부터 번져 나온 푸른 섬광이 스페라가 만들어낸 감옥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더는 어둡게 빛나는 물결은 요하나의 절대권역을 침식하지 못 했다.
이제는 스페라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어두운 광휘를 상쇄할 수 있는 유일한 기적.
신화 속 하르시아가 다루었던 공간검.
요하나에게서 재현되기 시작한 그 힘의 정체를 깨닫고서 스페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침내.
스페라가 구축한 감옥이 완전히 부숴진다.
!!!!!!!
감옥이 바스러지며 막대한 힘의 반발이 터져나왔다.
요하나와 스페라가 동시에 균형을 잃고 뒤로 밀려났다.
지면을 긁어낸 끝에, 두 사람은 붉은 하늘 아래서 자세를 다시 잡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찰나, 요하나가 등지고 있던 황실마탑의 오벨리스크로부터 거대한 힘의 파장이 발생하며 일대를 진동시켰다.
쿠웅!!!!!
조금 전.
황성에 구축된 시스템의 모든 권한이 온전히 레아에게 집중되었다.
황성의 남은 기능을 전부 개방한 레아는 그 기능을 전부 오벨리스크의 방위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집중시켰다.
무리하게 황성의 기능을 폭주시켜 이루어낸 레아의 지원은 오래가지 못 한다.
요하나의 심장을 감싼 리실로테의 서클 또한 길게 버티지 못 한다.
지금 이 찰나의 순간이 요하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승리의 틈새였다.
그 틈새 속에서, 스페라와 마주선 요하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해."
요하나가 사과했다.
요하나는 뒤틀려버린 운명에 휩쓸린 스페라의 분노와 악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충분히 스페라의 선택을 공감하고 긍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요하나는...
"너를 막을 거야."
스페라의 악의를 방관할 수 없었다.
스페라는 의미를 알기 힘든 웃음을 머금은 채 요하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 할 수 있다면, 부탁할게."
쩍!!!!!!!
소드마스터의 절대권역이 충돌한다.
그와 함께.
허공을 찢어내고 떨어지는 도약검기와 어두운 광휘가 응집된 침식의 사슬이 거칠게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