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결전 [12]
[66]
윤허하마.
레아의 그 한 마디에 모두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 했다.
지미와 디디에 또한 레아를 흘깃 바라보며 의아함을 드러냈다.
대체 무엇을 윤허한다는 의미인가.
그 의문에 레아가 친히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너희의 의무를 행할 수 있도록, 윤허하마."
레아가 로얄가드를 돌아보았다.
로얄가드는 레아를 향해 함부로 검을 겨누지 못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을 내리는 건 그들의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레아는 그들의 바람과 목적을 이해했다.
그와 함께 자신의 존재와 맞닿아 있는 업보를 직시하리라고 결심하였다.
'내가... 감당해야 할 것...'
너무나 많은 희생 위에 허락된 삶이었기에 레아는 이제 더는 뒤에 숨어 희생을 외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전장에서 스러진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필요하다면 자신의 죽음까지 감내하리라고 레아는 각오했다.
그게 레아의 선택이고 의지였다.
"윤허할 테니, 무가치한 투쟁을 멈추어라."
"..."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어서 가자꾸나. 그대들이 바란 곳으로 안내해주겠다."
"...그곳의 위치를 알고 있는가?"
파울라가 불안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레아가 담담하게 답해주었다.
"어찌 모르겠느냐. 다만 개방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 하였을 뿐."
"...!"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억지로 개방하지도 부수지도 않았으니, 무사히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
레아가 거기까지 설명을 해주었음에도, 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 했다.
그 누구도 예기치 못 했던 상황이었기에 반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헌데.
로얄가드에게 보호받던 소년이 가장 먼저 레아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티르피츠가 일순 기함하며 소년의 앞을 막아섰다.
"전하...!"
티르피츠는 소년을 만류하려 했다.
레아의 제안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아무것도 없었기에 이대로 레아의 제안을 수락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허나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티르피츠에게 반문했다.
"이게 저들의 함정이라 해도 우리에게 대안이 있는가."
"..."
"위험을 감수하겠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모든 것이 끝을 맞이하기 전 목적을 이루어야 했다.
티르피츠가 열기가 어린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다 결국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소년이 티르피츠에게 짧게 감사를 표하고는 다시 레아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전투를 중단하라.
그런 명령이 갑자기 떨어진다 한들 전장의 광기가 곧바로 잦아들긴 어려웠다.
바로 직전까지 서로를 살육하던 이들에게 검을 거두라 한다 해도 과연 쉽사리 검을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허나 명령을 우선하도록 철저하게 숙련된 정예병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통신기를 통해 전투를 중단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흑색 요원 출신의 로얄가드가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다가 천천히 몸을 멈춰 세웠다.
"..."
갑주가 부서져 나간 그의 반신은 검붉게 타들어 가 불쾌한 냄새를 풍겼다.
그럼에도 흑색 요원 출신의 로얄가드는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맞은편에서 세리아 또한 전투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듣고 검기가 서려 있던 검을 멈춰 세웠다.
세리아의 왼쪽 어깻죽지 아래는 완전히 잘려나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세리아는 최소한의 지혈만 행한 채 일말의 동요 없이 로얄가드의 움직임을 경계했다.
얼어붙은 것처럼 정지한 전장 위로, 디오리카의 숨 헐떡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한편.
황성의 다른 곳에서 전투를 치르던 쥬세핀 또한 휘두르던 검을 멈춰 세웠다.
그녀의 맞은편에 선 로얄가드 또한 사체가 나뒹구는 끈적한 바닥 위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
"..."
여전히 적의 어린 시선이 상대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멋대로 날뛰지 않고 명령을 중시했다.
황성을 계속해서 울리던 전투의 진동이 점차 줄어들었다.
마침내 고요가 찾아오자, 레아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레아는 황성의 심부를 향해 나아갔고, 남은 이들이 조용히 레아의 뒤를 따랐다.
계속해서 나아간 끝에 레아는 황성의 심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레아가 도착한 황성의 심부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막혀있는 벽면이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허나 티르피츠는 막힌 벽면을 바라보며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한탄을 길게 내쉬었다.
소년이 티르피츠의 반응을 확인하고선 레아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의심과 두려움이 서려 있는 소년의 시선을 받은 레아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윤허한다고 하였다."
"..."
소년이 티르피츠를 향해 돌아서자, 티르피츠가 말없이 제국의 인장을 품속에서 꺼내 무릎을 꿇고 소년에게 헌상했다.
제국의 인장을 손에 쥔 소년이 반대 손의 손가락을 강하게 씹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부터 흘러내리는 타액과 혈액을 제국의 인장에 묻힌 후, 그 인장을 막혀있는 벽면에 가져갔다.
쿠웅-!
벽면과 제국의 인장이 맞닿는 순간 변화가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잠시 막혀있던 벽면에 집중되었다.
선황, 포이보스가 행하였던 봉인이 서서히 풀려나고 있었다.
이윽고 알 수 없는 기계음이 들리며, 본래 벽이었던 공간이 푸른 빛으로 뒤덮였다.
눈을 뜨고 있기 힘들 만큼 밝은 빛이었다.
눈부심을 견디지 못 한 소년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소년은 사방이 전부 크리스탈 유리처럼 보이는 물질로 이루어진 광장 위에 서 있었다.
레아, 지미, 디디에, 그리고 로얄가드들 또한 소년과 함께 광장으로 인도되었다.
이곳이 로얄가드와 소년이 닿고자 했던 곳이었다.
일천년의 제국 역사가 고스란히 안배되어 있는, 제국의 가장 비밀스럽고 위대한 장소였다.
"..."
이곳에 들어서기에 소년은 아직 너무 어렸다.
강인하고 뚜렷한 자아가 확립되기 전에 이곳의 '축복'을 받아들였다간 정신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본래는 성인이 된 후계자가 찾는 장소였으나, 그럼에도 로얄가드는 소년을 이곳으로 인도하려 하였다.
소년만이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유일한 적격자였으며, 또한 소년이 로얄가드의 청을 수락하였기에 로얄가드는 소년을 이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었다.
"..."
광장 위에 선 소년은 긴장감 탓에 떨리는 손을 제대로 감추지 못 했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잔혹할 만큼 힘겨운 상황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소년은, 망설임을 이겨내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뚜렷한 의지를 눈동자에서 드러내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소년은 분수대를 지나쳐 결국 자신의 의지로 광장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그러자 소년의 부친이자 제국의 선황이, 언젠가 찾아올 자신의 아이를 위해 보존한 제국의 축복이 소년에게 깃들기 시작했다.
"...!"
천년의 역사가 소년에게 흘러든다.
제국이 이룩되었던 그 최초의 순간을, 소년은 환영 속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소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국이 이루었던 영광스러운 역사를 계속해서 걸었다.
제국의 역사와 함께할수록 소년은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린 나이였기에 일천할 수밖에 없었던 식견과 좁은 시야가 차근차근 확장되어 나갔다.
세상을 이루는 사회의 구조들...
권력, 계층, 재화와 같은 개념들의 본질과 속성을 소년은 점차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소년은 끊임없이 걸었다.
두통이 찾아오고 정신이 어지러워졌음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소년은, 자신의 부친이자 선황의 역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
소년은 비극을 보았다.
찬란한 비약만을 남겨둔 채 허망히 무너지는 제국을 보았다.
제국과 영웅의 공멸을 지켜보며 소년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분노가 일었다.
허나 분노보다도 괴로움과 안타까움이 소년의 가슴을 거칠게 두드렸다.
"..."
소년은 비극의 끝자락에서 포이보스를 마주 보았다.
소년은 많은 감정이 어려 있는 부친의 얼굴을 충분히 눈에 담고서, 포이보스가 내린 최후의 선택들을 곱씹으며 두 눈을 감았다.
이내 제국의 축복이 잦아들며 소년의 길었던 여행이 끝이 났다.
긴 꿈을 마무리한 소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또각
"..."
소년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레아가 소년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준비가 되었다면, 선택하여라."
"..."
소년이 이곳에 몸을 들임으로써 포이보스가 황성에 행했던 봉인이 풀리게 되었다.
십년 가까이 침묵하고 있던 황성의 시스템 일부가 재활성화되기 시작한다.
재활성화된 황성의 시스템을 다룰 수 있는 권한은, 레아가 아닌 소년에게 있었다.
허나 그 권한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소년이 다룰 수 있는 황성의 시스템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레아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서 소년을 마주 보았다.
"지금의 네가 발악하여 취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짐의 목 정도일 것이다."
소년이 봉인을 풀고 얻어낸 권한을 활용한다면, 레아의 목숨 정도는 앗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소년이 이곳에서 머무는 사이 이미 제국은 황성의 침입자들을 섬멸할 준비를 마쳤다.
소년이 레아를 해치겠다고 결정한 순간 제국은 막대한 물량과 화력을 일시에 쏟아부어 침입자들을 섬멸할 터다.
결국 소년이 복수를 택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건 오직 레아의 목뿐이었다.
레아는 자기 목숨을 내놓은 채 담담하게 소년을 재촉했다.
"바라는 걸 택하라."
"..."
소년은 레아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무엇이 제국을 제국으로 있게 하는가."
제국은 일천 년의 세월 동안 대륙을 수호했다.
그것이 제국의 의무였고, 제국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희생하였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선황의 선택은 본인의 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포이보스는 레아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 했고, 그건 대의를 위해 필요한 결정이었다.
포이보스의 실책이 있다면 불필요한 연민을 가져 충분히 잔혹하지 못 했다는 것뿐일 터다.
"나는 제국을 계승한 이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선황의 선택이 본인의 이기 때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제국의 고결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소년이 레아에게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제국의 인장을 들어 올렸다.
"내게 남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양도하겠소."
복수를 포기한다.
연명을 포기한다.
제국의 인장도, 선황이 안배한 권한도, 소년을 따르던 이들의 충의도, 그리고 소년의 목숨 또한.
오직 대의를 위해 찬탈자에게 양도한다.
일천 년의 역사를 품고 진정 제국의 대의를 계승한 소년이,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결정하였다.
그렇기에.
"이제 당신이 진실로 제국을 계승하여 황제의 책무를 다하십시오."
소년이 레아에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