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결전 [11]
[65]
대륙은 길고 끔찍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전황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전황이 악화될수록 고급 전력의 소모는 극심해져 갔다.
수십 년을 수련한 기사와 마법사가 죽어나가는 데 충원은 따라가지 못 한다.
필연적으로 평균적인 병력의 질이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현 시점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정예 전력 대다수는 요하나를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거나, 대륙의 주요 거점을 방위하기 위해 분산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황도 인근에는 로얄가드 수준의 최정예 전력을 홀로 저지 가능한 이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만약 로얄가드 수준의 강자들에게 황도를 공격받는다면, 제국은 병력의 질이 아닌 물량과 화력으로 적의 공세를 압도해야만 했다.
로얄가드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은폐에 심혈을 기울여 황도에 침입하고자 했다.
허나 아무리 몸을 은폐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해도 황도 가까이 접근한 이상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 어리석은...!"
황성에서 대기하던 로필렌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로얄가드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미리부터 이런 습격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기에 로얄가드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로얄가드가 황도라는 장소를 그 누구보다 깊이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과거에 비해선 많은 것이 변한 황도였으나, 모든 것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로얄가드 내에서도 정보가 제한되어 소수의 흑색 요원만이 활용했던 지하 우회로 같은 것은 현 제국의 수뇌부조차 확실히 파악하지 못 하고 있던 허점이었다.
꾸득!
로필렌이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로얄가드가 주축이 된 습격자들은 황도에 접근한 후 현 제국의 수뇌부가 미처 파악하지 못 한 시설 등을 활용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황도를 급습한 습격자들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은 가능했으나, 습격자들의 진로를 예측해 미리 병력을 움직여 포위하거나 정밀한 폭격을 가하는 건 매우 어려워졌다.
이대로는 황성 안으로 습격자들의 진입을 허용할 확률이 높았다.
"..."
설령 황성에 진입을 허용한다고 해도.
결국 습격자들은 황성에서 고립되어 전멸할 것이다.
하지만 황성 내에서 전투를 벌인다는 것 자체가 현 제국 입장에서도 막대한 부담이었다.
습격자들을 제때 처단하지 못 하면 제국 또한 극심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지도 몰랐다.
애초에, 대륙이 멸절의 기로에 서 투쟁하고 있는데 이런 내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여야한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손실이었다.
"어찌 이리 역겹고 우둔할 수가."
로필렌이 본심을 중얼거리며 분노를 드러냈다.
'위대한 대의'를 보지 못 하고 훼방을 놓는 우둔한 방해꾼들을, 로필렌은 진실로 역겹다고 느꼈다.
'네놈들의 목적이 뭐냐.'
황성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 습격자들은 한 곳으로 집결하지 않고 도리어 소수의 병력을 더욱 쪼개 산개했다.
황좌, 영맥 제어를 위한 중계기, 방위 시설의 통제실 등, 습격자들은 황성의 주요한 설비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습격자들이 표적에 닿기 전에 요격해야만 했다.
마침 산개한 습격자들이 움직이는 길목 중 하나와 가까운 곳에 세리아가 위치해 있었다.
로필렌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세리아에게 습격자들을 막아설 것을 지시했다.
[죽여. 불가능하면 시간이라도 끌어.]
"..."
통신을 들은 세리아가 말없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장창 형태의 푸른 색 아티펙트가 떠올라 가까운 바닥을 향해 빛살처럼 가속했다.
쩌엉!!!
아티펙트가 바닥을 무너뜨렸고, 그 아래 지하 통로를 지나가던 습격자들이 무너지는 바닥의 잔해를 얻어맞았다.
습격자들이 잡병이었다면 그대로 머리가 깨져 죽었을 것이다.
허나 지하 통로를 지나던 습격자 셋 전부, 과거엔 로얄가드로 불리었던 최정예 기사들이었다.
트득!
과거 흑색 요원으로 활동했던 로얄가드가 바닥의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른 습격자 둘 또한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모습으로 지하 통로에서 도약해 착지했다.
모습을 드러낸 습격자 셋을 세리아가 차가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
세리아는 아직 손상된 코어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 했다.
현재로선 검강을 발현할 수도 없었고 과거처럼 민첩하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코어가 손상되었다고 해도 아티펙트를 다루는 실력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과거 웨펀마스터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신기에 가까운 수준으로 아티펙트를 다루던 그녀다.
자체 동력을 지닌 아티펙트를 활용한다면 충분히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리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도와줘."
"하아... 알겠습니다."
세리아의 곁에 있던 디오리카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디오리카가 협력에 동의하자 세리아는 만족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츠즉-!
세리아가 검기를 발현했다.
손상된 코어를 무리하게 운용하자 육체가 안에서부터 손상되기 시작했다.
송곳 수십 개가 살가죽 안을 헤집어 대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으나 세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목숨보다 소중한 지켜야 할 존재들이 있었기에, 세리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쿠웅-!
세리아를 중심으로 수십의 아티펙트가 활성화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위압적인 광경을 마주하며 흑색 요원 출신의 로얄가드가 검강을 발현했다.
로얄가드 또한 황성에서 살아나갈 수 있으리라고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습격을 감행한 것은, 목숨보다 중요한 지켜야 할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리아와 로얄가드는 대화 같은 건 나누지 않았다.
분노와 같은 감정조차 상대에게 투사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담담하게 상대를 죽이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세리아를 둘러싼 아티펙트가 먼저 섬광을 토해냈다.
콰아앙!!!
전투로 인한 굉음이 황성을 진동시켰다.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하는 황성 안에서.
수하들과 함께 움직이던 쥬세핀이 황성의 반대편에서 또다른 습격자의 공격을 막아섰다가 뒤로 미끄러졌다.
"큭...!"
쥬세핀이 육신의 충격을 해소하는 사이 황성의 방위 병력이 습격자를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습격자 하나를 제압하기 위해 수십의 병력이 무기를 휘둘렀다.
허나 습격자는 황성을 지키는 정예병들을 쉽사리 도륙하며 사방으로 피를 뿌렸다.
쥬세핀은 피비린내가 자욱한 공간에서 한때 로얄가드였던 습격자를 상대하다 뜻하지 않게 조소를 터뜨렸다.
"하..."
지금 이 순간 대륙은 멸절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리 중요한 순간에, 이곳에선 타락하지도 않은 인간끼리 피를 뿌리고 있었다.
그게 새삼스레 어처구니가 없어 뜻하지 않게 조소가 나왔다.
"바보 같은 일이야."
쩍!!!
습격자의 검격을 간신히 받아낸 쥬세핀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때마침 지원 병력이 도착해 쥬세핀을 지나쳐 습격자를 향해 돌진했다.
그렇게 물량으로라도 습격자를 압도하기 위한 시도들이 황성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본래도 소수였던 습격자들이 굳이 인원을 산개한 것은 당연히 '양동'을 위해서였다.
산개한 이들이 시선을 끌어주는 사이, 다섯 명의 로얄가드가 황성의 복도를 질주했다.
"...!"
가장 앞서 달리던 로얄가드, 티르피츠가 갑자기 소리 없이 멈춰 섰다.
방해꾼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였다.
모두가 전투를 준비했다.
어차피 황성에 침입한 이상 움직임을 추적당하리란 건 예측하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방해를 뚫어내고 전진하여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하지만.
복도 너머에서 방해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다섯의 로얄가드는 일순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방해꾼의 정체가 예상을 너무나 빗겨가 있었기 때문이다.
"..."
모두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춘 가운데.
아름다운 은발과 선명한 적안을 지닌 한 소녀가, 황제의 관을 머리 위에 쓴 채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레아였다.
환영 같은 게 아닌, 레아 본인이었다.
물론 레아가 혼자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지미와 디디에가 레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으며, 오로지 황제의 안위를 위해 안배된 정상급 아티펙트와 결계들이 언제든 활성화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로얄가드란 위협적인 존재였지만, 그들을 앞에 두고 레아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선황의 혈육이구나."
"..."
잠깐의 침묵 후.
로얄가드 사이에서 한 소년이 모습을 은폐해주던 망토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아직 어린 소년은 의젓함을 유지하려 하면서도 떨리는 눈동자를 완전히 숨기지 못 하고 레아를 바라보았다.
그 소년 또한 레아와 같이, 찬란한 은발과 선명한 적안을 지니고 있었다.
레아와 소년은 서로의 심장 박동을 들을 수 있었다.
멀리서도 선명하게 말이다.
"..."
레아가 로얄가드를 향해 눈을 돌렸다.
레아가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로얄가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함정 따위를 경계하며 신중하게 움직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로얄가드의 최우선 표적이 레아였다면, 처음 레아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미약한 반응이라도 있어야만 했다.
짧게 눈짓이라도 해서 의견을 맞추는, 그런 모습이라도 보였어야 했다.
허나 그들은 찰나 간 당혹스러움을 드러내고는 오직 소년을 지키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가 바라는 것이 알량한 분풀이가 아니라면, 무엇을 얻고자 이곳을 찾았느냐?"
"이 천한 핏줄이 감히 신성한 황성의 주인 행세를...!"
티르피츠가 일순 감정을 이겨내지 못 하고 격분을 드러냈으나 파울라가 막아 세웠다.
티르피츠보다 한 걸음 더 레아에게 다가선 파울라가 레아의 질문에 답했다.
"우리는 의무를 이행해야만 한다."
"이해할 수 없구나. 선황의 혈육을 지키는 것이 너희의 의무라면, 어찌하여 그 아이를 사지로 데려왔느냐?"
"..."
"고개를 돌려 전장을 보아라. 우리는 멸절의 기로에 서 있다. 너희는 정녕 과거에 붙잡혀 미래를 버리고자 하느냐?"
"...너는 명예가 무엇인지 모른다. 너는 고결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 한다."힐난에 가까운 말을 입에 담은 파울라가, 자신의 투구를 벗어내며 남은 말을 이었다.
"자유의지가 결여된 명예는 지배자의 치욕이며, 강제된 고결함은 수치스러운 위선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제국의 운명을 강제할 수는 없다. 설령 종말이 다가왔더라도, 제국은 스스로 그 운명을 택해야만 한다. 그것이 제국에 남은 마지막 긍지이다."
주체가 되어야 한다.
주체가 되어, 누군가의 강압이 아닌 자유의지를 지니고 운명을 결정지어야 한다.
그것이 제국에 남은 마지막 긍지이자, 파울라의 마지막 의무였다.
제국의 황제인 레아는, 파울라의 의무를 이해할 수 있었다.
"..."
레아는 파울라에게서 자신의 오빠를 잠시 겹쳐보았다.
그녀의 오빠인 레이는 항상 벨라의 '선택권'을 지켜주려 했다.
벨라가 자유의지를 지니고 자신의 의지를 행할 수 있도록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
설령 벨라가 위험하고 그릇된 선택을 한다고 해도 되도록 그녀의 의지를 우선해주었다.
왜냐하면...
벨라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레이는 벨라를 존중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삶, 풍부한 재화, 혹은 일차원적인 쾌락들보다 벨라의 자유의지를 지키고 우선해주었다.
레이는 벨라를 존중했기에, 세상에서 가장 명예롭고 고결한 것을 벨라에게 베풀었다.
그리고 이제 파울라가, 레아의 앞에서 같은 것을 입에 담았다.
제국을 존중했기에 내려놓지 못 한 최후의 의무를 위해, 파울라는 목숨을 걸었다.
레아는 조용히 파울라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윤허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