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결전 [10]
[64]
"레아."
지미는 끝까지 레아를 만류하려 했다.
레아의 의기는 칭찬하고 존중할만했으나 지금은 상황이 너무 나빴다.
레아가 나선다고 도움이 얼마나 되겠는가.
용혈을 지녔으니 나름 전력은 되겠지만, 레아를 지키기 위해 들여야할 노력을 고려하면 현실적으론 방해만 될 확률이 더 높았다.
허나 레아는 철이 없고 어리석어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느껴져, 아빠."
"...?"
"나와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져."
"...!"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품은 심장.
그런 심장을 가진 존재는 이 세상에 황족밖에 없었다.
지미가 당황한 사이 레아가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가져다 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단지 나를 미워해서 이곳에 몸을 던진 게 아니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부탁할게, 아빠."
"..."
레아는 그 어느 때보다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어느새 성장하여 아이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딸아이를 마주하며, 지미는 웃지도 울지도 못 하고 천천히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전히 지미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선택하는 게 참 어려웠다.
무엇이 레아를 위한 길인지, 또한 그 길을 걷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 지 지미는 여전히 알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지미는 어린 나이에 씩씩함을 겸비한 딸아이를 보며 약간의 보람을 느끼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았다."
*
제국의 소드마스터.
에른스트 프리슬란을 향한 모든 찬사는 그 하나의 칭호로 축약됐다.
대륙의 모두가 에른스트 프리슬란이야 말로 현존하는 인류의 정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지어 리실로테의 원념은 '제국의 소드마스터'라는 뻔하디뻔한 칭호가 도리어 그의 진정한 저력을 깎아내리고 있다고 평가했었다.
하르시아 이후 가장 수준 높게 완성된 소드마스터.
그러한 리실로테의 평가가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다는 걸, 에른스트는 전장에서 증명해냈다.
에른스트는 대전쟁이 시작된 후 가장 먼저 알리모 방면에 형성된 동부 전선에 집중했다.
당시 동부 전선엔 '고대의 파멸'이라 칭해지는 재앙이 날뛰어대고 있었다.
악신의 축복 속에 부활한 그 키메라는 차마 '마법'이라 정의하기도 어려운 괴이한 힘을 사용해 알리모를 집어삼키고 제국에 큰 피해를 입혔다.
대륙의 이름 높은 마법사와 학자들은 키메라의 괴이한 힘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했으나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 했다.
헌데 그 키메라를, 에른스트가 다른 누구의 협조도 받지 않고 단독으로 척살하였다.
먼 과거 검의 극의를 이룬 존재에게 패했던 고대의 파멸은, 흉측한 키메라가 되어 부활하고도 그렇게 또다시 검의 극의를 이룬 존재에게 패해 육신이 찢어발겨졌다.
에른스트가 압도적으로 고대의 파멸을 찢어발길 수 있었던 건 두 번째 개안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에른스트는 언젠가는 그 힘이 제국과 대륙을 구원할 열쇠가 되리라 믿었다.
대전쟁을 치르며 결국 자기 손으로 그 믿음을 증명해낸 에른스트는, 기쁨보다는 씁쓸함을 품고서 다른 전장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에른스트 프리슬란을 비롯한 소수의 절대적인 강자가 활약하는 가운데.
대륙은 제국을 중심으로 집결하여 재앙과 맞섰다.
전쟁은 모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전쟁 초기에는 대륙민들은 희망을 품었었다.
헌데 프레체스가 완전한 혼종으로 개화하여 대륙의 반절 가까이가 마경에 침식되며, 대륙은 크게 휘청이게 되었다.
그리고 남부가 마경화되고 얼마 안 가.
한 명의 여자가 폐허가 된 남부를 찾아왔다.
남부를 찾아온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탐욕에 휩쓸렸다.
너무도 뛰어난 재능이 탐욕을 불렀고, 또한 너무나 뛰어난 재능 덕분에 그녀는 다른 이의 가르침 없이도 그 비참한 삶을 연명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망각을 알지 못 했다.
망각을 알지 못 했기에 그녀의 뇌리에는 세상의 악의가 하나하나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녀는 세상의 악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부정한 악의를 가슴에 품었다.
이미 살아남기 위해 악신의 유물 몇 개를 육신에 심어 넣었던 그녀는, 한때 교황청이 세워져 있던 장소로 발을 들였다.
남부가 마경에 침식되기 시작했을 당시, 교황청은 미흡했던 대비 탓에 보관 중이었던 악신의 유물 일부를 처분하는 데 실패했다.
제대로 처분되지 못 한 악신의 유물은 무너진 교황청 지하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녀가 다가가자, 지하에 묻혀 침묵하고 있던 악신의 유물들이 동시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교황청이 처분에 실패한 유물까지 육신에 받아들였다.
악신의 유물을 받아들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한 악의가 그녀로부터 너울졌다.
살아남기 위해 악의를 품었을 뿐인데, 어느새부터 악의가 그녀의 전부가 되어갔다.
얼마 안 가.
그녀는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유례없이 끔찍한 힘을 지닌 악신의 사도가 되어, 마왕이라 칭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륙을 위협하는 재앙이었으며, 반드시 신속하게 제거되어야 하는 종양이었다.
제국은 마왕을 제거하기 위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제국의 최고 전력을 전장에 투입했다.
그리고 제국의 소드마스터 에른스트 프리슬란이, 마왕에 의해 전사했다.
[...뭐라고?]
증조부의 전사 소식을 스페라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 했다.
차라리 증조부가 함정에 빠져 안타깝게 전사했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과 에른스트 프리슬란은 결코 안이하지 않았다.
제국과 에른스트 프리슬란은 마왕이란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움직였고, 실제로 에른스트는 제국 군단의 지원 아래 마왕과 충돌하였다.
작전의 과정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제국의 군단은 계획대로 에른스트를 지원하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왕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으며,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전사했다.
[...]
스페라가 그 믿기 힘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번민하는 사이.
대륙은 어떻게든 '마왕'을 죽일 수 있는 새로운 계획안을 만들어내야 했다.
아직 마왕은 대륙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일정 영역 안을 맴돌고 있었다.
이는 불행 중 다행이었으나, 그렇기에 더욱 마왕이 아직 한정된 지역을 배회하고 있을 때 죽여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 마왕이 완전히 악신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움직일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리실로테.]
레아는 리실로테를 찾아갔다.
대륙이 총력을 기울여도 대적하기 어려운 강대한 적이 출현했고, 레아는 그 강대한 적과 맞서야 했다.
지금의 역량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던 레아는 리실로테를 찾아가 승리를 위해 도박을 감행했다.
체내에 하나의 코어를 추가로 생성한다.
그게 레아의 도박이었다.
드래곤하트로 강화된 심장이 있었기에 이론상 가능하긴 했다.
그리고 레아는 결국, 심장에 이어 자궁 내부에 코어를 생성하는 데 성공했다.
레아가 만들어낸 두 개의 코어는 서로 공명하며 코어의 출력을 극한으로 증폭시켰다.
그 결과 레아는 과거에 비해서도 압도적으로 파괴적인 힘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두 개의 코어를 운용하기 위해선 극단적인 수명의 단축 또한 감수해야만 했지만, 레아는 기꺼이 희생을 자처했다.
타의에 의해 주어지고 자의에 의해 두터워진 용사라는 정체성이 그런 희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얼마 안 가.
제국은 핵심적인 요충지의 방위도 일시적으로 포기해가며 생존해 있는 대륙의 최상위 전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허나 스페라는 그들과의 합류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1황자 죽음 이후 소실되었다던 사령검의 진정한 주인이 나타나 대륙 북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페라는 빠르게 북부의 전투를 마무리하고 마왕과의 결전에 합류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저 천한 것이 감히...]
최초의 격돌 때, 승리를 거두지 못 하고 물러서게 된 스페라는 인상을 구기며 적을 노려보았다.
사령검의 주인, 탐욕의 사도가 지닌 강함은 스페라의 예상을 월등히 상회했다.
마왕이 최우선 제거 대상이라 해도 네크로맨서라고도 칭해지는 탐욕의 사도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결국 스페라는 마왕과의 결전에 합류하지 못 하고 북부 전선에서 목숨을 걸어야 했다.
탐욕의 사도가 지닌 악신의 권능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허나 진정 스페라를 경악하게 한 것은, 탐욕의 사도가 검의 극의에 근접해 있다는 점이었다.
스페라는 짧은 기간 수도 없이 탐욕의 사도와 충돌했다.
전장에서 부딪칠 때마다 탐욕의 사도는 항상 죽은 자를 모욕하며 일그러진 웃음을 토해냈다.
세상을 향한 악의에 절여진 그 빌어먹을 변절자를 마주하며, 스페라는 어울리지 않는 거친 욕설을 토해내곤 했다.
[저 개 같은 년이.]
요하나.
한때 그런 이름을 지녔던 탐욕의 사도를 향해 스페라가 검을 휘둘렀다.
쩌억!!!
검을 맞대는 스페라와 요하나의 환영 위로 두 사람의 모습이 다시 한 번 겹쳤다.
성검을 든 스페라가 요하나를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며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래, 이 개 같은 년."
"..."
자세가 무너진 요하나가 힘겹게 스페라를 올려보았다.
고개를 들자, 요하나는 스페라와 환영 속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게 되었다.
세상을 향한 악의에 절여진 채...
일그러진 증오를 내비치는 자신의 환영을, 요하나는 마주할 수 있었다.
"..."
과거 스페라가 입에 담았던 우리는 동류라는 중얼거림을, 요하나는 이제서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요하나도 스페라도 같은 가능성을 타고났다.
스페라 또한 제국을 위해, 전우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투쟁하는 숭고한 운명을 걸어갈 수 있었다.
요하나 또한 세상을 향한 일그러진 증오를 내비치며 그저 힘겨웠던 삶의 화풀이를 위해 사람을 찢어 죽이는 잔혹한 운명을 걸어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근본은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어쩌면 두 사람은 밝고 아름다운 운명을 함께 걸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스페라와 요하나는, 환영 속에서처럼 서로의 맞은편에 선 채 살의를 품고 검을 맞부딪쳤다.
"하..."
스페라가 웃었다.
프리슬란 가문의 주인이자 제국의 영광스러운 기사이며 대륙의 위대한 영웅으로서 악의와 맞서려는 자신의 환영을 보며...
스페라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이게 무슨 꼴이야?"
꾸득!!
스페라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요하나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새끼."
"..."
그 욕설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요하나는 의식이 흐려지는 중에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스페라는 더는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 하는 요하나의 육신을 완전히 무너뜨리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자기 역할에나 충실할 것이지. 고작, 고작 그 피붙이 하나 때문에..."
그건 레이를 향한 원망이었다.
그토록 거대한 위업을 이루고 이 세상을 구했음에도, 결국 그 모든 것을 구렁텅이에 처박은 빌어먹을 새끼를 향한 스페라의 원망이었다.
레이가 자신의 위업을 구렁텅이에 처박았을 때, 스페라의 운명 또한 구렁텅이에 처박혔다.
그 새끼의 멱살이라도 움켜쥐며 울분을 토했다면 조금이라도 편했을 텐데, 그는 이제 없었다.
그 빌어먹을 현실에 스페라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성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제 와서 망설임은 없었다.
성검이 요하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요하나의 심장을 감싼 서클이 박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