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결전 [9]
[63]
비껴가버린 역사 속에서.
제국은 1황자와 루비하 왕국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역량을 투자해야 했다.
단순히 루비하 왕국을 쓸어버리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사태의 조기 종결에 실패한 탓에 루비하 왕국 내 혼란이 커졌고, 한 국가의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화하는 것은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 탓에 제국은 루비하 왕국 내 핵심적인 적대 세력과 1황자를 제거한 이후에도 루비하 왕국을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악신의 추종자들은 전쟁에서 패한 이후에도 산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 해악을 끼쳤고, 제국은 그 타락한 존재들을 루비하 왕국에서 확실하게 박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헌데 제국이 루비하 왕국, 황위 계승, 그리고 남부와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사이.
제국 동쪽에 위치한 국가인 알리모에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재난이 덮쳤다.
알리모의 금지된 숲에서부터.
먼 과거에 존재했던 강대한 존재들의 사체를 뒤섞어 만든 키메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체를 기워 만든 누더기에 불과했던 키메라는 악신의 축복 아래 과거의 막대한 힘과 권능을 재현해내기 시작했다.
불완전한 힘과 권능이었으나 알리모를 무너뜨리기는 충분했다.
제대로 대처할 틈도 없이 알리모의 국토 반절이 초토화되었으며, 금지된 숲에서 번져 나온 마경의 침식이 급격히 확장되었다.
제국이 알리모의 사태를 대처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알리모의 국토 절반 이상이 수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리 키메라를 비롯해 악신의 축복을 이끄는 '매개'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토록 빠르게 마경의 침식이 번진 것은 결국 과거부터 대륙을 지켜주던 초월적인 존재의 축복이 제 역할을 못 한 탓이 컸다.
알리모에 재앙이 찾아옴과 동시에 제국 남부와 인접한 마경에서도 불순한 전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결국 제국의 소드마스터까지 황제의 곁을 떠나 전선에 나선 상황에서, 세계수의 영석에서 침묵하던 엘프들이 제국을 찾아왔다.
엘프들은 마경의 침식을 막아내던 엘-람의 축복이 부분적으로 무력화, 혹은 중화되고 있음을 경고했다.
허나 대체 무엇 때문에 엘-람의 축복이 중화되고 있는지 제국은 알아낼 수 없었다.
알리모의 재앙을 기점으로 대륙 전역이 전화에 휩싸였다.
제국은 수백 혹은 수천 년을 주기로 찾아온다는 '재앙의 시기'가 다가왔음을 확신했다.
당혹감과 두려움을 느낀 제국 수뇌부 내에선 썩 진지하게 '신화'를 재현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공간검을 재현하자는 의견이었는데, 기실 겁에 질려 내뱉는 헛소리에 가까웠다.
600년 전에도 공간검을 재현하려다 무수한 인재를 갈아버렸다.
신화라는 허상에 매여 전쟁 중에 뛰어난 인재들을 의미 없이 갈아버릴 수는 없었다.
그나마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재 중 공간검의 계승 가능성이 높은 건 드래곤하트로 심장이 강화된 황족이었다.
그러나 황족을 실험체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아무리 황족이라 해도 막대한 천재성을 타고나야 공간검의 계승을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다.
[...]
앞으로 사태가 얼마나 더 악화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포이보스는 활용할 수 있는 건 되도록 활용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겠다는 목적으로, 포이보스는 레아에게 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허락했다.
기실 강압이나 다를 바 없는 그 허가 아래 레아는 검을 처음 손에 쥐었다.쩍!!
"커윽...!"
요하나가 이제는 복구되는 속도까지 느려지기 시작한 육신을 질질 끌며 토악질을 했다.
정체 모를 몇 가지 환영이 스쳐 지난 후, 모든 게 얼어붙어 있는 기이한 풍경의 환영이 나타났다.
그 환영 속에서, 리실로테의 원념과 레아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이런 비루한 희생양을 봤나.]
리실로테의 원념이 레아를 내려다보며 입가를 뒤틀었다.
[참 마음에 안 들어. 짜증나게 정말.]
리실로테의 원념이 내뱉는 목소리엔 한탄이 서려 있었다.
리실로테는 하르시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엘-람을 증오했다.
그렇기에 결코 엘-람의 유열을 바라지 않았다.
허나 리실로테는 엘-람만을 증오한 것이 아니었다.
리실로테는 하르시아의 죽음에 관계된 저 별빛 너머의 모든 존재들을 증오했다.
그렇기에 리실로테는 악신들이 이 세계를 손아귀에 쥐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진실로 리실로테가 원한 것은 복수였으나, 그건 생전의 리실로테가 지닌 역량으론 이루지 못 할 갈망이었다.
결국 리실로테의 원념은 긴 시간 제국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제국을 무너뜨리지도, 제국을 돕지도 않고 말이다.
[꼴이 우습네.]
마경이란 무적의 요새를 지닌 악신의 추종자들에 반해 대륙은 항상 불안정했다.
제국이 흔들리면 대륙이 무너진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그 때문에 리실로테의 원념은 제국에 해악을 가하지 못 했고, 이제는 악신들이 대륙을 차지하는 걸 막아서기 위해 제국을 도와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래... 추가 기울었으면 맞추어야지. 싫어도 어쩔 수 있겠어? 도와는 줄게. 과연 네가 공간검을 계승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만, 한번 발악해봐. 불쌍한 꼬마 아가씨.]
리실로테의 원념은 조소와 함께 레아에게 제국의 신검, 모로스를 던져주었다.
그건 다분히 제국 황실을 엿먹이기 위한 의도가 깃든 행위였다.
천박한 태생의 반쪽 짜리 황족이 제국의 신검을 되찾아 왔으니, 황제로선 꽤나 거슬리지 않겠는가.
리실로테의 원념은 그리 어깃장을 놓으면서도 레아가 공간검을 계승하기 위한 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끝내.
레아는 하르시아의 공간검을 일부나마 계승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불완전한데다 수명이 뭉텅이로 깎여나갔지만, 레아는 공간검의 코어를 완성했다.
스페라가 레아를 본격적으로 보좌하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인사드립니다, 황녀 전하.]
그 시점에서도 레아는 여전히 반쪽 짜리 황녀였다.
허나 스페라에게 레아의 출신 성분 정도는 사소한 문제였다.
스페라는 레아가 충분히 '존중받아야 될 인물'이라 생각했고, 그렇기에 거리낌 없이 무릎을 꿇고 레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 어두운 시기를 전하와 함께 이겨낼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부디.
[제국에게 영광을.]
레아는 스페라의 보좌 아래 성장했다.
삶을 소모하며 신화 속의 힘을 다루었고, 점점 더 완성되어 갔다.
불완전한 공간검이라 해도 전술적인 가치는 로드 급에 비견될만했다.
[아... 피곤하네요.]
어느날 스페라는 웃음을 머금은 채 앓는 소리를 했다.
대륙을 덮친 혼란과 전쟁은 쉽사리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륙민들은 이 어두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타락한 존재들과 맞섰다.
그게 가능했던 건 대륙 각지의 전황이 나름대로 긍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락한 드래곤 프레체스가 충분한 기다림 끝에 완벽한 혼종으로 부활하며 상황이 급변했다.
대륙 절반이 마경에 집어삼켜 졌다.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전선이 붕괴하고 필수적인 물자의 생산량이 급감했다.
이미 그 시점에서 대륙은 멸절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악의 사도가 대륙에 출현했다.
*
제국 황성.
황도를 지키는 병력들은 날을 세운 채 경계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로필렌은 자리를 비운 루나를 대신해 황도 인근에서 불순한 움직임은 없는지 감시했다.
로필렌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나가 자리를 비운 이상 모든 습격에 완벽히 대응할 수는 없었다.
"..."
현 제국의 수뇌부는 여전히 황성의 시스템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없었다.
거기에 황도 아래의 영맥까지 손상되었으니, 루나 없이는 완벽한 방위 체계를 구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로필렌은 언제든지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던 중.
모습을 은폐한 채 이동하는 수상한 존재의 움직임이 황도 인근의 결계에 의해 감지되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대기하던 제국의 병력이 곧장 수상한 존재를 막아서기 위해 움직였다.
로필렌은 수상한 존재의 정체가 악신의 추종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완전한 오판이었다.
"...!!"
멀리 떨어진 거리의 상황을 마법을 활용해 지켜보던 로필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저 멀리서, 화려하고 상징적인 문양이 새겨진 갑주를 갖춘 기사가 황도의 방위 병력을 도륙 내고 있었다.
로필렌은 기사의 갑주에 새겨진 문양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로얄가드?!"
황도 인근의 방위 병력은 악신의 추종자들과 수많은 전투를 치른 정예병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정예병들은 마족들이 활용하는 괴이한 능력에 대처하는데 이골이 난 자들이었다.
허나 로얄가드는 괴이한 힘을 다루지 않았다.
로얄가드가 지닌 힘은 단지 우직하며 예리했다.
그 정직하게 쌓아올린 압도적인 무위에 제국의 방위 병력이 도륙 나고 있었다.
로필렌이 표정을 굳혔다.
"빌어먹을, 최악이군."
로얄가드가 황성을 노리고 움직였다.
상정했던 것 중 최악의 상황이었다.
단지 로얄가드가 지닌 무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현 제국의 수뇌부보다도 부분적으로 황성의 구조를 더 잘 파악하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황성에 진입을 허용하게 되면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몰랐다.
"저 멍청한 것들이 이 중대한 시점에 훼방질을...!!"
로얄가드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고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로필렌이 급히 자리를 떠났다.
제국의 방위 병력과 맞붙은 로얄가드는 단지 시선을 끌 미끼일 확률이 높았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로필렌은 이번 급습에 참가한 로얄가드가 얼마나 되는지, 또한 그들의 정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대비를 더욱 확실하게 해야 했다.
이내 황성의 모두가 로필렌의 경고를 전달받았다.
직후 보호를 받아야 할 자와 그들을 지켜야 할 자가 나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리아는 엘리와 카니아의 뒷덜미를 붙잡고 움직였다.
카렌과 알레시아가 세리아의 뒤를 따랐다.
지미는 가장 먼저 레아를 찾아가 입을 열었다.
"레아, 위험하다니까 잠시 몸 좀 숨기고 있어."
지미는 평소와 같이 레아를 딸아이로 대하며 피신시키려 했다.
황성에는 짧은 시간이나마 외부의 공세로부터 확실하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구역이 몇 군데 존재했다.
지미는 레아를 그리로 안내하려 했으나, 레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레아, 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괜찮아 아빠. 나, 아빠가 걱정하는 것처럼 약하지는 않아."
레아는 이제 체내에 흐르는 용혈을 어느 정도 다뤄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레아는 어쭙잖은 공격에서 자기 몸을 방어할 수 있었다.
레아가 자신감을 드러내며 지미를 향해 방긋 웃었다.
"나 황제잖아."
"레아... 정말 위험해서 그래."
"응, 나도 알아. 그러니까 피하면 안 될 것 같아."
평생을 보호만 받고 살아왔다.
타인의 희생만을 먹고 자랐다.
그러니 이제는 책무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레아가 담담하게 자기 의견을 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