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29화 (429/446)

외전 - 결전 [8]

[62]

이제는 비껴가버린 미래.

스페라가 엘-람에게서 훔쳐 본 그 사라진 역사 속에서, 세리아에게 남은 것은 울트와의 약조 정도였다.

세리아는 울트가 부탁한 레시나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흑마법사들을 추적했다.

같은 시간 로커스트는 홀로 루나의 존재를 취하기 위해 수하를 방치하고 단독으로 움직였다.

세리아는 흑마법사 몇을 베어낸 후 로커스트의 흔적을 발견해 쫓았으며, 로커스트는 갑작스레 나타난 추적자를 굳이 회피하기보다는 확실히 제거하려 했다.

로커스트는 어렵지 않게 세리아를 제거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나, 결국 로커스트는 세리아의 검에 목이 잘렸다.

결국 루나는 홀로 남게 되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생존에 위협만 될 거대한 재능을 품은 채, 홀로 남게 되었다.

"..."

눈앞의 환영이 뜻하는 바를 요하나는 쉽사리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직 표정에 당혹감이 서려 있는 요하나에게 다가서며 스페라가 조소를 머금었다.

"위화감을 느낀 적 없어? 레이가 단순히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서... 단지 그 덕분에 밑바닥 시궁창 속에서 아무 배움도 없이 그토록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 같아?"

그건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낸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도 배움을 내리는 현명한 후견인 없이는 환경에 침식되는 법이었다.

허나, 레이는 남들이 세상 물정 모르고 일차원적인 욕구에 충실할 나이에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환경을 직접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사회에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하고, 심지어 그 시스템을 지속해서 개선해 큰 저항 없이 원활히 작동하게까지 만들었다.

그건 레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에, 또한 전생에서도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에 속하는 존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레이... 그는 엘-람의 계시를 받은 사도이자, 이 세상의 불순물이었어."

쫘악!!!!!

스페라가 어둡게 빛나는 물결을 휘감고 성검을 휘둘렀다.

요하나는 속절없이 스페라의 검격에 휘말려 더욱 깊은 물결 속으로 침전했다.

침식이 심화되며 요하나는 물결 속으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스페라가 엘-람에게서 훔쳐보았던 '본래의 역사'의 조각들을 산발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

환영 속에서 피골이 상접한 더러운 아이가 보였다.

그게 어린 시절의 자신이란 걸, 요하나는 바로 알아보지 못 했다.

피골이 상접한 아이는 끈질긴 생존력 덕분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위기를 견뎌냈다.

하지만 죽을 위기를 견뎌내도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요하나는 본능에 따라 생존을 위해 도둑질이나 하는, 그야말로 비렁뱅이가 되어 연명했다.

필립스 백작령에는 선한 성품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낙향한 지미와 매튜는 손이 닿는 한도 내에서 굶어 죽으려는 고아들을 도왔다.

필립스 백작은 귀족 계층 중에서는 비교적 열린 마음을 지닌 자비로운 귀족이었다.

허나 필립스 백작령의 선인들은 비약적인 사회의 변화 같은 것을 이끌지 못 했고, 애초에 추구하지도 않았다.

자비를 베푸는 것과 사회를 이루는 오점 많은 시스템을 갈아엎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지미든 필립스 백작이든 다른 누구든 굳이 엄청난 위험과 손실을 감수하며 개혁을 추진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요하나는 나날이 궁핍, 모욕, 그리고 폭력에 익숙해져 갔다.

요하나에게 삶이란 비참한 것이었고, 기실 대부분의 버림받은 고아에게 삶이란 끔찍하고 비참한 것이었다.

"..."

요하나는 스페라의 공세에 일방적으로 무너지며 비껴간 역사의 편린을 계속해서 마주했다.

환영 속의 요하나는 지금의 요하나와 머리카락과 눈의 색채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달랐다.

녹색 눈동자에 반짝이는 생기나 희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환영 속의 요하나는 살아 있되 그냥 목숨만 붙어 있었다.

그러던 중 제국의 1황자, 카리우스의 망명 사건이 벌어졌다.

황실마탑의 로필렌과 엮였던 실제 역사와는 조금 차이가 있었으나, 1황자를 쳐내야겠다고 결정했던 황제는 다른 명분을 만들어 1황자의 황태자 직위를 박탈했다.

1황자의 망명 사건으로 인해 제국과 루비하 왕국 간의 극심한 갈등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은 필립스 백작령이었다.

제국과 루비하 왕국 간의 극심한 갈등으로 인해 필립스 백작령은 매우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견뎌야 했다.

비렁뱅이였던 요하나에게는 너무나 잔혹한 시간이었다.

죽지 못 해 사는 삶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가.

레이에게 구원받지 못 한 삶이 얼마나 끔찍한 지옥이었는가.

그 단편을 요하나는 환영 속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

카리우스는 악신의 축복을 받아들이고 치명상을 회복해서 부활했다.

카리우스는 악신의 추종자가 되었으나 사도로 선택받지는 못 했다.

사도로 간택 받기에는 카리우스가 타고난 재능이 일천했다.

카리우스로 인해 촉발된 제국과 루비하 왕국 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제국은 카리우스의 생존을 확인했으며, 카리우스가 부정한 존재의 축복을 취하였다는 의혹을 품게 되었다.

제국은 1황자가 제국의 오점으로 남아 제국의 이름을 더럽히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국가 간 갈등이 전면전 수준으로 악화되었으며, 그 혼란 속에서 요하나는 빵 몇 조각에 혹해 납치되었다.

사실 수상하다는 걸 알았지만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그릇된 선택을 한 요하나는, 악신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납치되어 의식의 제물로 사용되게 되었다.

"..."

요하나는 기껏해야 수백의 제물 중 하나였다.

거기서 제물로써 삶을 마쳐야만 했다.

하지만 요하나는 죽지 않았다.

악신의 추종자들이 펼친 의식에서 오직 요하나만이 살아남았다.

악신의 추종자들조차 자신들이 펼친 의식에 휩쓸려 소멸했다.

요하나는 악신에게 선택받았다.

요하나의 잠재력을 인지한 악신은 요하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악신의 축복을 받아들인 요하나는 더 이상 무력한 비렁뱅이가 아니었다.항상 타인에게 폭력으로 짓밟히기만 했던 소녀는 다른 이를 폭력으로 짓밟으며 마음속에 쌓여있던 악의 어린 욕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하나는, 결국 카리우스가 소유하고 있던 사령검에 닿을 기회를 얻었다.

요하나는 비껴간 역사 속에서 잘못된 선택을 내리려는 자신에게 무심코 손을 뻗어보려다 검을 고쳐잡았다.

이미 자세가 거의 무너진 요하나를 스페라가 짓밟았다.

쩌억!!!

스페라에게 압도당하며, 요하나는 찰나 간 이해하지 못 할 몇 가지 환영을 지나쳤다.

그리고 나서.

요하나는 아직 나이 어린 스페라의 환영과 마주칠 수 있었다.

환영 속의 스페라는 구속되어 끌려가고 있었다.

"..."

1황자의 문제가 심화된 탓에, 빗겨간 역사 속의 황제는 실제 역사보다 일찍 후계자의 문제를 마무리하기로 결단내렸다.

제국의 소드마스터인 에른스트는 2황자의 죽음에 관여했다.

에른스트가 직접 2황자의 목을 벤 것은 아니지만, 그가 2황자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정황은 어렵지 않게 파악 가능했다.

황제는 대의를 위해 에른스트의 죄를 덮어주고 포이보스를 후계자로 결정했다.

그러자 교황청과 알렉산데르가 주축이 된 제국 남부의 세력이 움직였다.그들은 황족을 확보하고 스페라를 납치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계획은 성공했다.

헌데 그 이후에 변수가 발생했다.

당시 스페라는 이미 두 번째 개안을 이룬 후였다.

두 번째 개안 덕분에, 스페라는 황족의 확보와 자신의 납치 사태를 주도한 존재 중 하나인 고위 마족, '에리다누스'의 정체를 간파했다.

스페라는 제국의 변경백이자 신성 교단의 추기경이며 위대한 소드마스터인 알렉산데르에게 당당하게 협조를 요청했다.

스페라가 분노하며 알렉산데르에게 일갈을 내질렀고, 알렉산데르는 어린 소녀의 건방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알렉산데르는 에리다누스의 육신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마족에게 놀아났다.

그건 알렉산데르와 남부의 치명적인 치부였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본래 사태의 은폐를 고려해야 맞았다.

허나 알렉산데르는 그렇게까지 사태의 경중을 판단 못 할 위인이 아니었다.

알렉산데르는 고위 마족의 출현을 황실에 알린 후 스페라의 신병을 프리슬란 가문에 반환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치적 거래 또한 존재했다.

알렉산데르와 남부 측이 1황자의 변절을 대외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 대신, 제국 중앙 또한 남부가 벌인 모반에 가까운 행위를 덮고 넘어간다.

그게 거래의 핵심이었다.

이런 거래가 가능했던 것은 제국의 수뇌부 중 다수가 최근 연달아 발생하고 있는 '부정한 사태'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은 충분히 현명했다.

한편, 그쯤에 '레아'의 존재가 발각됐다.

실제 역사보다 한참 이른 시점이었다.

벨라와 레아를 보호해줄 강력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일개 평민이 황족의 존재를 장기간 은폐하는 건 불가능했다.

쩌억!!

내동댕이쳐진 요하나가 엉망이 된 몸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환영 속을 굴렀다.

요하나가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었다.

황성의 알현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환영 속에서 에른스트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 채 포이보스의 의중을 물었다.

황제의 자리를 실제 역사보다 일찍 양위 받은 포이보스는 잠시 고민에 잠긴 채 침묵했다.

1황자의 혈육이 발견되었다.

이미 그 시점에서, 벨라를 비롯해 해당 사건의 관계자 중 평민 이하의 신분을 지닌 자들은 전부 은밀히 처형됐다.

레아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이들도 다수 '실종'되었다.

입막음을 위해서였다.

제국에 있어, 천박한 창녀가 황족을 품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용납 못 할 모욕이자 용서 못 할 대역죄였다.

이건 자비를 베풀고 말고를 고민할 수 있는 사안이 결코 아니었다.

레아의 뒷배경은 깔끔하게 처리되었다.

벨라도, 그녀가 기르던 다른 아이도, 그녀를 도왔던 이들도 전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아직 어미의 죽음도 제대로 이해 못 할 어린아이의 처분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황족이다.

황제를 제외한 그 누구도 함부로 레아의 처분을 지시할 수 없었다.

포이보스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자비를, 베풀고자 하네.]

레아는 그 어떤 정통성도 가질 수 없는 존재다.

사태의 조기 종결에 실패한 탓에 1황자의 추문은 이미 대륙 전역에 자자했다.

1황자의 혈육이라는 것은 더는 제대로 된 정통성이 될 수 없었다.

하다 못 해 어미라도 제대로 된 신분인가 하면 창녀의 태생이다.

어떤 정신 나간 귀족도 레아에게서 정통성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정말 만약에라도.

그녀의 혈육 중 제국 역사에 다시는 없을 위대한 영웅이 출현해 수많을 위업을 세우고 그녀의 뒤를 봐주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문제가 심각해지겠지만.

그런 사태는 아예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망상이었다.

레아를 살려두어도 포이보스가 감수해야 할 위험은 없다.

그 덕분에 포이보스는 황제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알량한 연민과 자비를 레아에게 베풀어줄 수 있었다.

포이보스가 그런 선택을 내린 것은 선황 때문이기도 했다.

근 몇 년간 후계 문제로 인해 선황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고,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선황이 죽은 자식의 딸아이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음을 포이보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포이보스는 레아를 제거하지 않았다.

에른스트 또한 레아가 황권에 위협이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최소한의 반대 의사도 내비치지 않고 포이보스의 명을 따랐다.

목숨을 건진 레아는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 한 채 성장해 나갔다.

그녀에게는 최소한의 교양 교육만이 베풀어 졌다.

마법이나 검을 익힐 기회는 없었다.

그럼에도 레아의 스승들은 레아의 재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포이보스는 레아의 재능에 관해 보고를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해도 물과 햇빛을 주지 않으면 개화하지 못 하는 법이었다.

지금처럼만 관리하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포이보스는 다른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제국과 대륙에 멸절의 위기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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